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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서-사부-전기류
· 내용분류 개인-생활-일기
· 작성주체 편저자 : 김영찬(金永粲)
· 간사년
· 간사지
· 형태사항
· 소장처 현소장처 : 미상 / 원소장처 : 미상
정의

김영찬이 53세 때인 1912년 1월 1일부터 72세 때인 1930년 6월 15일까지 기록한 일기.

해제
·일기의 구성과 내용
서암일기는 김영찬이 53세 때인 1912년 1월 1일부터 72세 때인 1930년 6월 15일까지 기록한 것이다. 중간에 몇 년 빈 곳도 있는데, 일기가 도중에 유실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후반기에 가서는 일기 기록이 많이 빠지는 것으로 보아 더 이상의 일기 기록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1912년은 첫 기록이니만큼 생활세계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날짜도 빠짐없이 기록하였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도 많이 적고 있어서 저자의 일상생활을 알려면 1912년의 기록을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 1913년과 1914년의 일기도 날짜는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지만 날씨만 적은 날이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1915년은 3월 25일부터 시작한다. 1916년과 1917년은 그래도 착실하게 일기를 적기 위해 노력한 것이 보인다.
그러나 1918년부터는 일기 쓰기 형태가 달라진다. 거의 날짜와 날씨만 적다가 3월 1일에 멈추고, 이후부터는 작품이 있을 때나 공부한 내용을 적을 때만 일기가 사용된 것이다. 즉 4월 8일, 4월 20일, 5월 5일, 7월 2일, 9월 30일, 10월 1일, 12월(날짜 없음)의 기록만 있다. 1919년도 역시 2월 29일, 2월 30일, 3월 2일, 4월 8일, 5월 20일, 다시 5월 1일과 2일, 7월 13일, 7월 26일, 9월 17일, 9월 그믐, 10월 11일, 11월 2일, 11월 7일, 12월 4일, 12월 17일의 기록만 있다. 1920년에는 2월 3일, 4월 11일, 10월 21일의 기록만 있고, 1921년은 4월 7일과 8월 16일의 기록만 있다. 1922년은 2월 일, 3월 14일, 3월 19일, 4월 1일, 5월 11일, 5월 20일, 5월 21일과 22일, 윤5월 27일, 8월 18일, 8월 9일의 기록까지 있고, 이후는 공백이다. 이때의 일기는 일기장이라기보다는 문집 대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27년 11월 30일부터 다시 일기 쓰기 방식을 되찾아서 그 후 일기가 끝나는 1930년 6월 15일까지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후반에 가서는 거의 날짜와 날씨만 기록한 날이 많다. 특이한 점은 일기 쓰는 도중인 1928년 9월 28일에는 삼강행실도를 대략 기록했는데, 굉장히 많은 양이라서 하루 이틀에 다 베끼지 못했을 것인데도 삼강행실도의 기록이 끝나고 일기가 다시 9월 29일로 이어지고 있는 점이다.
일기 속에는 자신의 작품과 다른 사람이 써준 작품, 그리고 선인의 문집에서 베낀 글 등이 많이 들어있다. 베낀 글 중에서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삼강행실도의 기록이 있고, 다음으로 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의 하서연보, 율곡선생전서(栗谷先生全書)의 율곡선생세계도, 퇴계선생언행록과 퇴계고봉왕복서, 최상중의 대책문, 성학십도 등이 많은 양을 차지한다.
이밖에도 고두강(高斗綱)의 회과당유고(悔過堂遺稿), 강응환(姜膺煥)의 물기재집(勿欺齊集), 김시관(金時觀)의 절곡집(節谷集),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선생유고(眉巖先生遺稿), 양팽손(梁彭孫)의 학포선생문집(學圃先生文集), 박정휴(朴鼎休)의 둔고집(芚皐集), 김시습(金時習)의 매월당집(梅月堂集), 정여해(鄭汝諧)의 둔재선생문집(遯齋先生文集) 등에서 일부를 뽑은 기록이 더 있다.
일기의 내용은 저자의 일상생활을 알 수 있는 내용과 사상세계와 문학세계를 알 수 있는 내용, 그리고 사회상을 알 수 있는 내용, 민속을 알 수 있는 내용 등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내용 중에서 서암일기에는 특히 사상과 문학세계를 알 수 있는 내용이 많은 편이다. 이 일기만을 가지고 문집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이다.

• 저자의 생애 및 일상생활
김영찬(金永粲, 1859~1945)의 자는 명숙(明淑), 호는 서암(棲岩),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아버지 김진현(金珍鉉)과 어머니 여양인 진달성(陳達成)의 딸 사이에서 태어나 김낙현(金洛鉉)의 양자로 입계하였다. 태어난 곳은 담양의 문암리(현재 전남 담양군 금성면 금성리 문암 마을)이고, 살았던 집은 대산리(현재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대산마을)이었던 것 같으며, 종가는 장동(현재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장동마을)에 있었다. 김영찬은 단양인 허징(許澄)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인수(寅洙)와 딸 이대수(李大洙)·나기주(羅碁柱)를 두었다.
저자가 일기를 쓴 시기는 일제시기에 해당되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의 활동 영역은 대단히 협소했고, 생활도 매우 단조로웠던 것 같다.
저자의 한 해는 대개 새해를 맞이하여 세배객을 접대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연초에는 해마다 일 년의 신수를 점치는데 이때는 주역 계사전을 이용하였다. 한편 부모님을 비롯한 조상의 묘소에 성묘를 다녔다. 양부모의 묘소는 담양군 무면 오현리 삿갓봉에 있었고, 생모의 묘소는 옥과 화면 가지봉 아래에 있었으며, 생부의 묘소는 금성면 덕진동 안산에 있었다.
우리의 전통시대에는 상가에 조문을 가는 일이 공통사였다. 저자 역시 조문이나 위문을 다녀왔다는 기록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밖에도 이 지역의 대학자인 미암선생의 제사(5월 15일)나 하서선생의 제사(1월 15일)도 참석하고 있다. 또한 녹실이나 송사 같은 지역의 어른이 돌아가실 때에는 제문을 쓰기도 하였다. 사산부자묘나 무후사 등의 석채례에 참석하기도 하고, 봉산정사 강학에 참여하기도 하며 용진정사에도 들르고, 1930년 4월 16일에는 고산사에 가서 봉심을 하기도 한다. 이때 다른 사람 집을 방문하여 점심을 먹거나 잠을 자고 오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저자에게는 부모가 두 분씩이나 계셨기 때문에 제사를 1년에 4차례씩 참석해야 했고, 할아버지 제사에도 참석하였다. 양부는 9월 17일, 양모는 12월 10일, 생부는 8월 3일, 생모는 12월 14일, 할아버지는 1월 17일이 제삿날이다.
1928년 3월 1일에는 56년 동안 함께 지내던 아내가 죽었는데, 3월 2일에 소렴, 3일에 대렴을 하고 바로 후원에 장사를 지냈고, 1929년 1월 12일에 소상을 지냈으며, 3월 1일은 기일이라 제사를 지냈다. 1930년 2월 30일은 정제(正祭)일이라고 했다.
민속을 알 수 있는 내용도 조금 보이는데, 1912년 1월 30일에는 마을 토신제를 지내야 하기 때문에 재계를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마을의 토신제를 유학자가 주관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영천산의 기우단에 범장을 해서 비가 오지 않는다고 믿고 마을 사람들이 그 무덤을 파내는 일이 있었는데, 이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일제시기의 정책으로 눈에 띄게 변화된 것이 있으니, 바로 공동묘지 정책과 담배의 전매 정책이다. 공동묘지 정책은 우리나라 전통 방식에 합치되지 않아 몇 년 시행하다가 만 것으로 보이며, 담배의 전매는 백성들로 하여금 공분을 일으키게 하였다. 이 일로 많은 사람이 연행되기도 하였기에 저자도 결단코 담배를 끊으리라고 다짐하기도 하였다.
저자는 농촌에 살기 때문에 농사일을 도외시할 수 없는 까닭에 농사를 감독하거나 대신 손자를 봐주기도 하고, 울타리를 엮기도 하였다. 여름에는 모내기의 진행 상황을 적고 비가 오지 않아서 걱정한다는 내용도 거의 해마다 기록하고 있다.
저자의 활동 중 가장 꾸준히 나타난 것은 서당에서 학동들을 교육하는 일이다. 저자의 주업은 교육이었던 것이다. 일기에 의하면 1912년 9월 22일부터는 장성 하만에 머물면서 학도들을 모아 교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성 하만에는 벗 용산(龍山) 김낙주(金洛柱)가 살았는데, 아마도 그의 사랑에서 기거한 것이 아닌가 한다. 1913년 1월부터는 장동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장동은 종가가 있는 마을이기도 하지만, 미암 유희춘의 후손 유희적 등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상당히 오랫동안 강학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즉 1913년부터 1916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916년 3월에는 병에 걸려 겨우 나았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1917년에는 옥과의 옥전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이곳에 가게 된 것은 창평에서 우거하던 김참봉이 이곳으로 옮겨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역시 장동을 자주 다녔다. 1918년과 1919년은 특별한 기록이 없고, 1920년~1922년도 역시 계속해서 강학을 한 것으로 추정되나 일기에는 언급이 없다. 그리고 1922년 8월 9일에서 1927년 11월 30일 사이는 일기 기록이 없으니, 5년 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1928년 2월 4일에는 월산면 월산리에 있는 동오재(東吾齋)에 들어가서 학당을 설치하고 동몽을 가르쳤다. 그리고 윤2월 16일에는 다음과 같이 동오재 시를 완성했다.

사문의 일맥이 우리 동방에 미치니, 斯文一脉曁吾東
밝음은 태양이 바다에서 붉게 솟는 듯. 明似太陽出海紅
철인(哲人)의 간절한 마음 삼강(三綱) 위에 있고, 哲人心切三綱上
지사(志士)의 깊은 정성 오교(五敎) 안에 있네. 志士誠深五敎中
경전과 제자백가의 말 비록 다를지라도, 經傳諸子言雖異
고성(古聖)과 후현(後賢)의 성정은 같다네. 古聖後賢性則同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때때로 익히는 곳인 까닭에, 所以發蒙時習所
이름을 돌아보고 의리 생각하니 그 편액의 뜻 웅대하구나.顧名思義扁其雄

삼강오륜을 내세워 우리의 전통사상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동오재가 훈몽을 하는 곳임을 천명한 시이다. 저자가 원운시를 지은 것으로 보아 동오재는 서암을 위해서 지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이밖에도 그는 누정시를 지은 것이 많은데, 사산재, 정이암, 면앙정, 연계정, 남파재, 가은재, 석호재, 월계재, 망야정, 금소정, 야정, 안분재, 조대, 신암재 등이 더 있다.
저자는 후학을 교육하면서 동시에 경전을 살피고 성리학을 공부하였으며, 우리 선현들의 글을 살피는 것으로 유학자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일기의 많은 내용이 경전이나 성리서적에서 어느 부분을 보았다는 말을 하고,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적었다. 그 한 예를 들자면 1916년 2월 9일의 일기에 "성리서(性理書)를 보았는데, '이(理)는 보기 어렵고, 기(氣)는 보기 쉽다. 성(性)은 형체가 없고, 정(情)은 징험할 수 있다. 원형이정(元亨利貞)은 보기 어렵고, 춘하추동(春夏秋冬)은 보기 쉽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성(誠)과 충(忠)을 어떻게 구분합니까?'라고 묻기에, 대답하기를 '성자는 심(心)의 전체로써 말하였고, 충자는 사물을 응접하는 것으로써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라는 내용 등이 있다.
저자의 교유인물로는 장성 하만에 사는 용산(龍山) 김낙주(金洛柱)와 농아(聾啞) 유원효(柳遠斅), 창평 지곡에 사는 참봉 김용순(金容珣), 정해만(鄭海晩) 어른과 지실정씨들, 담양 장동에 사는 유희적(柳羲迪), 장성 사산재의 공학원(孔學源), 신안동의 인재(忍齋) 김인식(金璘植), 주영묵(朱永黙), 옥과의 정봉현(鄭鳳鉉)과 제갈하백(諸葛夏帛), 문암리의 죽사 조기섭(趙驥爕) 등이 있다.
저자의 교유 인물은 많다고 할 수 없지만, 그중에 유희적과 공학원, 정봉현, 제갈하백은 노사(蘆沙)를 이은 송사 기우만(奇宇萬)의 고제자들이다. 이들을 통해 노사 학문에 접할 기회가 많았을 것인데, 저자의 경우는 노사설을 비판하고 있고, 간재설에 귀기울였던 것 같다. 참봉 김용순은 하서 김인후의 후손으로 원래 장성 사람이지만 창평 지곡이나 옥과 옥전에 우거하고 있었다. 녹실 정해만은 창평 지곡에 사는 송강 정철의 후손으로, 서암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 저자의 학문과 작품세계
앞서 말했듯이 서암일기는 문집과 같은 역할을 했다. 여기에는 저자의 많은 작품이 들어있는데, 우선 시와 문장으로 나누어보면 다음과 같다.

* 시
정저암의 육십 회갑 잔치시에 차운하다[次鄭樗菴六十華甲晬宴韻]
절매시(折梅詩)
농아(聾啞)시
삼가 사산재 원운시에 차운하다[謹次泗山齋元韻]
남산잠두시(南山蠶頭詩)
관광일본지행(觀光日本之行)시
진실이여[眞實兮] 작가(作歌)
삼가 정이암 시를 차운하다[謹次鄭李菴原韻]
하서 선정의 유고를 읽고 읊조리다[讀河西先正遺稿吟]
학아습구운 시홍주(學兒習句韻示鴻柱)
우연히 지음[偶成]
의심처를 읊조리다[疑吟]
동지시(冬至詩)
정규 윤문을 만나서[逢正奎允文]
우성일율(偶成一律)
하서선생이 문인에게 준 싯구로 인해 지음[河西先生示門人句韻而成之]
아이들을 가르치는 운으로 회포를 읊다[敎兒韻咏懷]
하남의 시에 삼가 차운함[謹次河南]
종유운을 써서 일절을 지음[用從遊韻成一絶]
황동의 봄[題黃洞春]
송선비가 희우시를 찾기에 답함[答宋大雅索喜雨詩]
송환준의 행로음 시에 답함[答宋雅行路吟煥俊]
산놀이를 읊다[遊山吟]
생일시[咏生日] 2수
면앙정(俛仰亭) 차운시
영대시(靈坮詩) 10수
용호참봉이 방문했다는 것을 듣고 특별히 시 한편을 지음[聞龍湖參奉訪問 特題一律]
연계정 시[漣溪亭韻]
지재의 영대시에 차운함[賡止齋靈臺詩] 7수
또 영대시를 지음[又題靈臺詩] 3수
삼가 지재의 원운에 차운하다[謹次止齋元韻]
자호서암원운(自號棲巖元韻)
신암의 회갑 시에 차운하다[次新庵壽韻]
또 원운시에 차운하다[又次原韻]
유병하에게 주는 시[贈柳炳夏]
회포를 펴다[述懷]
생일(生日)시
송남파재에 짓다[題宋南坡齋]
종형수 허씨의 뇌문[誄從兄嫂許氏]
망각노장지(罔覺老將至)
유광록의 소시에 화운함[和柳光綠小詩]
다섯 그루의 버들[가사]
아이들 가르치는 운을 써서 한가로이 읊조림[用敎兒韻閑吟]
사문 한학노에게 이별하며 주다[贈別韓斯文學魯]
우연히 흥을 느껴서[偶然感興]
아이들을 가르친 운자로 하늘을 읊다[因敎兒韻咏天]
죽당 화갑연차운시(竹堂花甲宴次韻)
가잠의 권병귀가 고향에 돌아간다고 하기에 주다[示佳岑權炳貴還鄕]
목포 현기봉의 백전운을 써서 짓다[用木浦玄起鳳白戰韻]
주광가(酒狂歌)
세이가(洗耳歌)
광록의 시에 차운해서 주다[示光祿韻]
삼가 연계정에 차운하여 짓다[謹題漣溪亭韻]
회포를 읊다[述懷]
또 읊다[又]
이기를 읊어서 제익에게 보여주다[理氣詠示諸益]
유윤문에게 주다[贈柳允文]
우연히 읊다[偶吟]
느낌이 있어서[有感]
김세규가 아프다는 듣고 노래를 지어 꾀다[悶金世奎身恙 作歌而誘之](국한문)
지은시를 외움 2수
조대(釣臺) 시를 읊다[詠釣臺韻]
간노의 시에 차운하여 짓다[用艮老韻]
간노의 시에 차운하여 짓다[用艮老韻和吟]
중하의 문명을 쓰다[用夏]
측량원인 제주도 양치호에게 주다[贈測量員古耽羅濟州島濟州面禾北里梁致祜]
경상도 박용진의 시에 화답하다[和慶尙道善山玉城面玉冠洞 密陽后人朴鏞振韻]
이희채의 보호록에 쓰다[題李熙采保護錄] 2수
목우망목우(牧牛忘牧牛)
가은재(可隱齋)시 2수
삼가 석호재에 차운하다[謹次石湖齋]
동지음(冬至吟)
해가 뜰 때 지음[日出而作]
물을 대다[灌漑]
송자언행록 전도지탁 인음(宋子言行錄傳道之托因吟)
마당가의 꿀벌을 보고 느낌이 있어서 읊다[觀庭邊蜂感吟]
출유작(出遊作) 2수
금산 반남박씨 3세 충의재의 시를 짓다[錦山潘南朴氏三世忠義齋韻]
삼가 모효정 시에 차운하다[敬次慕孝亭原韻]
시정차운(詩亭次韻)
나주 종인 동수가 시를 청하기에 답함[羅州宗人東洙請韻聊以答之]
취후 평담(醉後平談)
3월 그믐에 봄을 전별하는 시[三月晦日餞春韻]
월계재 시[月溪齋韻]
망야정 소작 차운시[次望野亭小酌]
아이 가르치는 시운으로 인해 우연히 짓다[因學兒韻偶成]
청화의 작은 술자리[淸和小酌]
다음날 또 읊다[翌日又吟]
양성재의 곡왕치 시를 보고 느낌이 있어[感養性齋哭王峙韻]
또 이어서 찬하기를[又縱而贊曰]
금소정 원운시에 차운하다[次琴嘯亭原韻]
동지음(冬至吟)
제석(除夕)시
야정시(野亭詩)
동오재운(東吾齋韻)
삼가 안분재 시에 차운하다[謹次安分齋韻]
우성(偶成)
괴화을 줍다[拾槐花]
박재연 부친상 만사에 차운하다[次朴在演親喪挽]
만이승학청고(輓李承鶴靑皐)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짓다[代人作]
차종손(次宗孫)의 죽음에 삼가 만사(挽詞)를 차운하다
삼가 행원 임문규시에 차운하다[謹次杏園林文奎]
심재 원운에 차운하다[謹次心齋元韻]
세원산인을 곡하다[哭世遠山人]
들은 것을 기록하다[記所聞]
삼가 오후석 선생이 이별할 때 준 시에 차운하다[謹次吳後石先生贈別韻]
김도병에게 지포시를 지어주다[贈金道炳芝圃原韻]
감횡거시(感橫渠詩)
학정 정씨의 원운시에 차운하다[次鶴亭鄭某元韻]
평장동의 시조를 단향 하는 원운시 뒤에 짓다[題平章洞壇享始祖元韻後
증신암재운(贈新菴齋韻)
종유습구 시에 차운하다[次從遊習句韻]

* 문장
사산부자묘서(泗山夫子廟序)
녹실선생을 곡하는 글[哭綠室先生文]
종형수 허씨의 뇌문[誄從兄嫂許氏]
속원성(續原性)
기송사 제문(奇松沙祭文)
동지에게 보이다[示同志]
이단에 대해 변론하다[辨異端]
추천사적(秋川事蹟)
망제 희중을 제사하는 글[祭亡弟希中文]
지선주(止善酒)
계자첩을 짓다[作戒子帖]
이기설(理氣說)
사물선후설(事物先後說)
죽천재기(竹泉齋記)
우기 시아(偶記示兒)
속원도(續原道)
효부 엄씨 명설(孝婦嚴氏銘說)
성왕(聖王)이 만이(蠻夷)를 제어하는 상도(常道)
양성재 행장 발(養性齋行狀跋)
인론(人論)
도기(道器)의 구분
지송욱이 저술한 척독대방의 난진설에 변론한다[辨池松旭所著尺牘大方亂眞之說]
또 이른바 유학가는 벗을 보내며를 변론한다[又辨所謂送友遊學]
명분설(名分說)
서암기(棲岩記)
재거우감(齋居偶感)
물이 이르면 도랑이 이루어진다는 설[水到渠成說]
심(心)성(性)정(情)의(意)의 명목(名目)

이상은 일기에서 저자가 지은 시문만을 뽑아본 것인데, 시는 135수, 문장은 28편이 된다. 시 가운데에서 제목이 눈에 많이 띄는 것은 '영대시(靈臺詩)'이다. 영대란 마음을 뜻하는데 이에 대한 시를 21수나 지은 것이다. 그중 한 수를 예로 들겠다.

영대의 본체는 맑은 거울과 같아서,靈坮本體是明鏡
문질러서 때를 벗어야 처음을 회복할 수 있네.磨得垢塵乃復初
분수 밖의 다반사를 말하지 말라,莫言分外多般事
한 점 뜬구름이 태허를 지나가는 것과 같네.一點浮雲過太虛

즉 저자는 마음의 본체를 맑은 거울로 비교하고, 갈고 닦아야만 본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영대시를 네 번에 걸쳐서 지었는데, 이것을 볼 때 마음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한 조각의 구름이 하늘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고 보고 있어서 인생의 달관자라는 느낌도 든다.
그는 '서암'이라는 호를 사용했는데, 서암일기에는 〈서암기〉가 3건이나 실려 있다. 즉 공학원과 유희적이 써 준 것이 있고, 저자 자신이 쓴 것이 있다. 다음은 저자 자신이 지은 〈서암기(棲岩記)〉의 일부이다.

세상에 태어나 이름과 자의 호칭이 없을 수 없지만, 또 스스로 '서암(棲岩)'이라 부른 것은 한갓 세속을 따라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지학의 나이[志學之年, 15세]에 주부자의 〈회암시(晦岩詩)〉 "생각나는구나, 예전 병산옹께서 나에게 주신 한 마디 가르침. 오래도록 그 가르침 자신하지 못했는데, 이제 바위에 깃들어 살며 작은 효험 바라네.[憶昔屛山翁, 示我一言敎。自信久未能, 岩棲冀微效]"라는 구절을 탄식하며 읊조렸다. … '서암(棲岩)' 두 자를 문미 위에 걸어놓고 출입하면서 보고 살피면서 '작은 효험을 바란다[冀微效]'는 뜻을 잊지 않고자 한 것이다.

자신의 호를 '서암'이라고 한 까닭은 15살 때 주희의 〈회암시(晦岩詩)〉를 읽고 감명을 받은 것을 인연으로 해서 지은 것인데, 즉 '암서기미효(岩棲冀微效)'의 구절에서 딴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암의 일상 생활은 교육과 학문으로 귀결지을 수 있을 정도로 일기의 내용은 거의가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다. 때문에 서암은 문학적인 면보다 학문적인 면에서 더 뛰어났던 것 같다. 속원성, 속원도, 태극설, 변이단, 시동지, 이기설, 사물선후설, 인론, 명분설, 심성정의의 명목, 수도거성설 등은 그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음을 드러낸다.
1916년 9월 13일에는 창려집(昌黎集) 속의 〈원성(原性)〉을 한 번 읽고서 〈속원성(續原性)〉을 지었고, 1920년 4월 11일과 10월 21일 사이에는 〈속원도(續原道)〉를 지었다. 다음은 〈속원도(續原道)〉의 일부분이다.

가만히 생각건대, 이(理)가 있으면 도가 있고, 도가 있으면 이가 있는 것이다. 그 진실한 것을 성(誠)이라고 하고, 지극히 미세한 것을 이(理)라고 하며, 그 만가지 이(理)의 본원을 태극이라고 하고, 그 동정을 음양이라고 하며, 그 운행을 오행이라고 한다. 그 원두가 유행하는 것은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이며 무성무취(無聲無臭)하다.

저자는 이기철학에서 이(理)를 강조했는데 1917년 11월 20일자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태극설〉을 기록하고 있다.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가 바로 이(理)이니, 이(理)라는 것은 문리(文理)와 조리(條理)의 이(理)이다. 하나이면서 만 가지로 다르고, 만 가지로 다르면서 하나이다. 하나라는 것은 바로 태극이다. 크게는 천지, 작게는 만물이 이 이(理)가 아님이 없다. 이(理)가 있으면 기가 있고, 기가 있으면 이가 있어서 선후도 없고, 이합(離合)도 없다. 있으면 모두 있고, 없으면 모두 없어서 혼연히 온전하게 갖추었다. 만약 이기로 경중을 따지면 이가 본래 중하고, 선후를 따지면 이가 본래 먼저이며, 본말을 따지면 이가 본이 된다. 그러나 진실로 경중과 선후, 본말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행함에 이르러서는 다만 경중과 선후, 본말뿐만이 아니라 유무, 허실, 거세(巨細), 정조(精粗), 장단, 광협, 대소, 다과 등 천만 가지 형상이 있어서 천지 사이에 가득한 것은 분명히 드러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그 소이연을 궁구하면 이 이가 관여한 바가 아님이 없으니, 이가 중하고 만화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이를 강조하면서도 노사의 학설에 대해서는 찬성을 하지 않았다. 그와 교유한 인물 중에 공학원이나 유희적, 그리고 고광선이나 오준선 등은 모두 노사학파 사람들인 것을 볼 때 의외의 일이긴 하다. 즉 1916년 10월 27일의 일기에 보면 유희적(柳羲迪)이 "노사선생께서는 율곡선생의 글에서 '양이 동하고 음이 정하는 것은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기기(氣機)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소이연(所以然)한 것이 이(理)이다.[陽動陰靜, 非有使之, 其機自爾. 所以然者理也.]'라는 것에 대해 '만약 그 기기가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면 소이연(所以然) 세 글자는 퇴축(退逐)시키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신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자, "노사선생의 말씀은 아마도 이와 기를 양물(兩物)로 판별하여, 이가 여기에 있으면, 기는 저기에 있고, 이가 갑에 있으면, 기는 을에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이다. '양이 동하고 음이 정하는 것은 시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기기(氣機)가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은 기이고, 소이연지고(所以然之故)는 이(理)인데, 소이연 세 글자를 어찌 퇴축시킬 것인가? 이기는 본래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이다. 이가 있으면 기가 있고, 기가 있으면 이가 있으니, 있으면 함께 있고 없으면 함께 없으며, 선후도 없고 이합(離合)도 없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주장한 것이 나온다.
이미 세상이 바뀌어서 기존의 학문은 구학문으로 치부되고, 신학문을 해야만 세상에서 행세를 할 수가 있는 데도 저자는 이런 변화에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을 되돌아보며 자기 반성을 그치지 않았다. 다음은 1927년 12월 30일에 지은 제석시이다.

〈제석〉 除夕
오늘은 제석인데 홀로 처연하구나, 於今除夕獨悽然
내일 아침이면 칠십 살이 되리라. 切近明朝七十年
송구영신을 사양할 수 없으나, 送舊迎新辭不得
덕업이 없는 것 부끄러워 잠 못 이루네. 愧無德業未成眠

저자가 거의 만년에 지은 시이다. 해가 바뀌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 또 한 해가 지나가고 나이만 먹다보니 덕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 못내 부끄러울 따름이다. 어려운 세상에서도 일생을 치열하게 살다간 저자와 같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이로다.
기사목록
1912년(임자)
1913년(계축)
1914년(갑인)
1915년(을묘)
1916년(병진)
1917년(정사)
1918년(무오)
1919년(기미)
1920년(경신)
1921년(신유)
1922년(임술)
1927년(정묘)
1928년(무진)
1929년(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