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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암일기(棲巖日記)
  • 1928년(무진)
  • 9월(九月)
  • 28일(경인)(二十八日 庚寅)

서암일기(棲巖日記) / 1928년(무진) / 9월(九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13.0010.TXT.0028
28일(경인)
-상장섭제(上章攝提)-. 맑음. 《삼강행실도》를 보고 간략히 기록하였다.

서(序)
천하의 공통된 도(道)가 다섯인데, 삼강(三綱)이 맨 위에 있으니, 실지로 경륜의 큰 법이요, 모든 교화의 근원이다. 예전 일을 상고해 보면 제순(帝舜)주 142)은 오전(五典)을 지었고, 성탕(成湯)주 143)은 비로소 인기(人紀)를 만들었으며, 주(周) 나라에서는 백성으로 하여금 오교(五敎)를 존중히 여기게 하고 삼물(三物)주 144)로 빈흥(賓興)하였으니, 제왕 정치의 급선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덕(宣德) 신해년(1431) 여름에, 우리 주상 전하께서 근신(近臣)에게 명하기를, "삼대의 정치는 모두 인륜을 밝혔는데 후세에는 교화가 차츰 해이해져서 백성이 서로 화목하지 못하니, 군신ㆍ부자ㆍ부부의 큰 인륜이 모두 본연의 성품과 위배되어 항상 박(薄)한 데에 흘렀다. 그러나 간혹 탁월한 행실과 높은 절개가 습속에 휩쓸리지 아니하여 보고 듣는 사람을 깨우쳐 일으키는 자도 많았다. 내가 그 특이한 것을 뽑아서 그림을 그리고 찬을 지어서 안팎에 반포하려고 한다. 거의 어리석은 남자나 무식한 여자들도 모두 보고 느껴 흥기할 것이니, 또한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룩하는 한 가지 방도이다."라고 하시고, 곧이어 집현전 부제학 신(臣) 설순(偰循)에게 명령하여 편찬하는 일을 맡게 하셨습니다.
이에 중국으로부터 우리 동방에 이르기까지 고금의 서적에 있는 것을 찾아보지 않은 것이 없이 하여 효자ㆍ충신ㆍ열녀로 뚜렷이 기술할 만한 사람 각각 (1백) 10명을 뽑아서 전면에는 그림을 그리고 후면에는 그 사실을 기록했으며, 아울러 시(詩)까지 써 놓았습니다.
효자에 있어서는 삼가 태종황제(太宗皇帝)가 하사한 효순사실(孝順事實)의 시를 기록하고, 겸하여 신의 고조(高祖) 신 권부(權溥)주 145)가 지은 《효행록(孝行錄)》주 146) 가운데 있는 명현(名賢) 이제현(李齊賢)의 찬(贊)을 가져왔고, 그 나머지는 보신(輔臣)으로 하여금 나누어 짓도록 하였으며, 충신과 열녀의 시도 문신들로 하여금 나누어 짓게 하였습니다. 편찬이 끝나자 《삼강행실도》란 이름을 내리고 주자소(鑄字所)로 하여금 발간해서 영구히 전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신 권채(權採)주 147)에게 명하여 책머리에 서문(序文)을 쓰라고 하셨습니다. 신 권채는 삼가 생각하건대, 임금과 어버이와 부부의 인륜에 대한 충ㆍ효ㆍ절의(節義)의 도리는 바로 하늘이 품부한 천성으로 사람마다 같은 것이니, 천지가 처음 생길 때부터 같이 생겼고 천지가 끝날 때까지 없어지지 않아서, 요순(堯舜)이 어질다고 더 있는 게 아니고 걸주(桀紂)가 사납다고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왕(先王) 때에는 오전(五典)을 잘 따라 백성들이 화목해서 집집마다 표창을 할 만하였는데, 삼대 이후에는 안정된 날이 항상 적어서 난신(亂臣)과 적자(賊子)의 무리가 세상에 발을 붙이게 된 것은 진실로 임금이 그 백성을 잘 인도하느냐에 달렸습니다. 지금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성스럽고 신묘한 자질로 군사(君師)의 도리를 다해서 공덕을 이룩하고 정치가 안정되어 온갖 일이 다 확장함과 동시에 강상(綱常)을 붙들어 일으키고 세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습니다.
무릇 명교(名敎)에 관계되는 것은 강구하고 자세히 따져서 이전(彝典)주 148)으로 만들지 않은 것이 없으니,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한 나머지에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이 아주 극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도 흥기시키는 방법이 미진한 데가 있을까 염려하여 여기서 이 책을 만들어 민간에 배포하여,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아이거나 부녀자이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즐겨 보고 익히 들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림을 구경하여 그 모습을 생각하며 그 시를 읊고 그 성정(性情)을 체득하면 흠모하며 권면하고 격려하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다 같이 착한 마음을 감발시키고 그 직분에 마땅히 할 일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대개 제왕이 오전(五典)을 돈독히 하고 교화를 펴는 뜻과 더불어 동일한 법인데, 조리는 더 정밀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의 풍속이 아름답게 변하고 다스리는 방도가 더욱 융성하며 집에는 다 효도하는 자식이 되고 나라에는 모두 충성하는 신하가 되면, 남해(南陔)와 백화(白華)149)149) 남해(南陔)와 백화(白華) : 《시경》 〈소아(小雅)〉의 편명으로, 〈백화〉는 효자가 서로 경계하여 어버이를 봉양할 것을 읊은 시이고, 〈남해〉는 효자의 결백을 읊은 시이다. 모두 가사는 없어지고 그 뜻만 전해지고 있다.
의 편(篇)과 광한(廣漢)과 여분(汝墳)주 150)의 시(詩)를 장차 위항(委巷)에서 계속해 지을 것입니다. 왕화(王化)의 아름다운 것은 마땅히 이남(二南)주 151)에 양보하지 않을 것이요, 왕업의 견고한 것은 실제로 길이 만세에 전할 것이다. 후세의 군자는 더욱 성상의 마음을 본받아서 무궁한 장래에까지 경건하게 지키는 것은 어찌 옳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세종 14년(1432)봉렬대부(奉列大夫) 집현전응교(集賢殿應敎) 예문관응교(藝文館應敎) 지제교(知製敎)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권채(權採)가 임금의 뜻을 받들어 서를 씁니다.

삼강행실효자도

민손이 홑옷을 입다[閔損單衣]〉 -노나라-
민손(閔損)은 공자의 제자이다. 일찍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후처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계모가 민손을 미워하여, 낳은 아들의 옷에는 솜을 두어서 입히고, 민손에게는 갈꽃을 두어 입혔다. 아버지가 알고 후처를 내치고자 하므로, 민손이 아버지에게 말하길, "어머니가 있으면 한 아들이 춥고, 어머니가 없으면 세 아들이 홑옷으로 지낼 것입니다."라고 하니, 아버지가 그 말을 어질게 여겨 그쳤다. 계모가 또한 감동하고 뉘우쳐, 드디어 자애로운 어머니가 되었다.

시(詩)
갈대꽃 둔 옷으로 추위를 막을 수 없으나,(身衣蘆花不禦寒)
엄동설한을 차라리 나 혼자 홑옷으로 지내려네.(隆冬寧使一身單)
이에 좋은 말로 아비 마음 돌이키니,(因將好語回嚴父)
아들들은 화합하고 어미는 평안함을 얻게 되었네.(子得團圝母得安)

효성스러워라 민손, 세상에서는 어짊을 칭송하고,(孝哉閔損世稱賢)
덕행은 이로부터 만고(萬古)에 전해지네.(德行由來萬古傳)
계모는 하루아침에 감동을 하고 깨달았나니,(繼母一朝能感悟)
이로부터 자애로운 마음은 치우침이 없어라.(從玆慈愛意無偏)

찬(贊)
의붓어미 자애롭지 않아,(後母不慈)
오직 자기의 아들만 깊이 사랑했네.(獨厚己兒)
아우는 따뜻하고 형은 추우니,(弟溫兄凍)
갈대꽃을 두고 솜을 두지 않았네.(蘆絮非綿)
아비는 이에 어미를 내쫓으려고 하니,(父將逐母)
무릎 꿇고 앞에서 아뢰기를,(跪白于前)
어미가 지금 여기에 있어서,(母今在此)
한 아들만 홀로 추우면 되는데,(一子獨寒)
만약 어미를 쫓아버리면,(若令母去)
세 아들 모두 홑옷으로 지내야 하리.(三子俱單)
아비는 이에 감동하여 그만두었으니,(父感而止)
효성스럽구나, 민자(閔子)여!(孝乎閔子)

〈자로가 쌀을 져오다[子路負米]〉 -노나라-
자로의 성은 중(仲)이고, 이름은 유(由)로 공자의 제자이다.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한 효도로 할 때에 집이 가난하여 나물국주 152) 먹으며, 어버이를 위해 백 리 밖에서 쌀을 져왔다. 어버이가 죽은 뒤에 남쪽으로 초나라에서 벼슬하여 뒤따르는 수레가 100승이고, 쌓아 놓은 곡식이 만종(萬鍾)이나 되며, 자리를 겹쳐서 앉고, 솥을 늘어놓고 먹었다. 이에 탄식하여 말하기를, "비록 나물국 먹으며 어버이를 위하여 쌀을 져 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공자가 그것을 듣고 말하길, "는 살아서는 섬김에 힘을 다하고, 죽어서는 섬김에 사모함을 다한다라고 할만 하구나" 하였다.

시(詩)
집이 가난하여 나물국으로 겨우 배를 채우며,(家貧藜藿僅能充)
곤궁한 가운데 쌀가마 져 어버이를 공양하였네.(負米供親困苦中)
당시 공자 문하에서는 그의 극진한 효를 칭송했으니,(當日孔門稱盡孝)
중유(仲由)의 높은 풍격 천고에 전하여지네.(仲由千古播高風)

아침엔 솥 늘어놓고 저녁엔 두터운 요 깔며,(一朝列鼎累重裀)
부하고 귀하여도 끝내 천하고 가난했을 때를 생각하네.(富貴終能念賤貧)
살아서 섬기고 죽어서 생각하며 오직 효도를 다함에,(生事死思惟盡孝)
공자의 문하에서 그를 찬미하니 현인에 속하네.(聖門嘉譽屬賢人)

양향이 범의 목을 조르다.[楊香搤虎]〉-노(魯)나라-
양향남향현(南鄕縣) 양풍(楊豐)의 딸이다. 아버지를 따라서 밭에 있을 때, 풍(豐)이 범에게 물리게 되니, 이때 (양향의) 나이 겨우 14세였다. 손에 한 치의 칼도 없어 범의 목을 조르니, 풍(豐)이 범에게서 풀려났다. 태수(太守) 맹조지(孟肇之)가 재물과 곡식을 주고, 정문을 세웠다.

시(詩)
아버지 호랑이에게 물려 마음이 화급한데,(父遭虎噬愴心顔)
목숨은 당시 경각(頃刻) 사이에 달렸어라.(命在當時頃刻間)
호랑이 목을 끌어 앉고 죽길 무릅써,(虎頸搤持寧顧死)
아버지의 목숨 구하여 살아오도록 하였네.(致命嚴父得生還)

어려서 몸은 약하여도 기개는 높아,(幼齡體弱氣軒昂)
아버지 목숨 호랑이가 해치지 못하도록 했네.(父命能令虎不傷)
청사(靑史)에 지금도 그 명성이 전해져 오니,(靑史尙留名聲在)
지금까지 누군들 양향(楊香)을 말하지 않으랴.(至今誰不道楊香)

고어가 길에서 통곡하다[皐魚道哭]〉 -초(楚)나라-
공자가 출행(出行)할 때 매우 슬픈 울음소리가 있음을 듣고 이르니 고어(皐魚)였다. 베옷을 입고, 칼을 가지고 길가에서 울거늘,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서 그 연고를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제가 젊었을 때 학문을 좋아하여 천하를 두루 다녔는데, 어버이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무릇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여도 어버이 기다리지 아니합니다. 가고 돌아오지 아니하는 것은 해[年]요, 가버려서 따라갈 수 없는 것은 어버이이니, 내가 여기서 하직하고자 합니다."라고 하고, 서서 울다가 죽으니, 이에 공자의 문인으로서 돌아가서 어버이 봉양하는 자가 열세 사람이었다.

진씨가 시어머니를 봉양하다[陳氏養姑]〉 -한(漢)나라-
효부라 부르고 《소학》에 보인다.

강혁이 크게 효도하다[江革巨孝]〉-한(漢)나라-


시(詩)
지극한 효도로 말미암아 귀신을 감동케 하여,(至孝由來動鬼神)
비록 강도를 만난다 해도 몸은 온전히 했네.(雖逢强暴亦全身)
결국 모자는 무사하였으니,(到頭母子俱無恙)
하늘과 땅은 마침내 착한 사람에게 복을 내린 것이네.(天地終應福善人)

설포가 집안을 청소하다[薛包洒掃]〉 -한(漢)나라-
《소학》에 보인다.

시(詩)
어버이의 마음을 얻지 못하여 눈물 흘리며,(不得親心涕泗濡)
혼정신성주 153)하고 쇄소(洒掃)하며 집을 지키네.(晨昏洒掃守門閭)
정성을 쌓고 감동을 얻어 어버이 기뻐하니,(積誠感得親(顔悅))
부자 화합하여 궐초(厥初)주 154)를 이루었네.(父子和諧遂厥初)

〈효녀 조아가 시체를 안다[孝抱屍]〉 -한(漢)나라-
효녀 조아(曺娥)회계(會稽) 사람이다. 아버지 우(盱)가 강물에 빠져 죽으니, 아(娥)의 나이가 24세였다. 강가에서 부르짖어 울더니, 마침내 강에 몸을 던져 열이레 만에 아버지의 주검을 안고 물에 뜨니, 아전과 백성들이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웠다.

황향이 베개에 부채질 하다[黃香扇枕]〉-한(漢)나라-
《소학》에 보인다.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홀로 그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시(詩)
황향(黃香)의 효행은 어릴 때부터 비롯해,(黃香行孝自髫年)
선침(扇枕)과 온금(溫衾) 세상에 함께 전하네.(扇枕溫衾世共傳)
추위와 더위를 아비로 하여 몸소 겪지 않도록 하니,(寒署不令親體受)
효성스런 한결같은 마음은 천연에서 나온 것이네.(誠心一念出天然)

강하(江夏)황향은 어려서도 뜻이 남달라서,(江夏童志異常)
당시에 이미 세상에는 둘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네.(當時已道世無雙)
누관(累官)하여 곧바로 상서령(尙書令)에 이르니,(累官直至尙書令)
효성에 감복함이 자손으로 하여금 창성하게 했네.(孝感能令後嗣昌)

정란이 나무를 새기다[丁蘭刻木]〉-한(漢)나라-
이십사효를 그림에 새긴 것으로, 정란이 나무를 새겨 어머니상을 만들고 섬겼다.

동영이 돈빚을 얻다[董永貸錢]〉-한(漢)나라-


시(詩)
일만 냥의 돈을 빌려 어버이 장례를 모시고,(得錢一萬葬其親)
스스로 종이 되어 주인의 빚을 갚으려고 했네.(身擬爲傭報主人)
어찌 생각하였으랴 효심이 끝내 감격시킬 것을,(豈料孝心終感格)
하늘은 직녀로 하여금 자신의 가난을 돕게 했네.(天敎織女助身貧)

효심은 마침내 하늘을 감동시켜,(孝念終能感上天)
직녀로 하여금 빌린 돈을 갚도록 돕게 했네.(爲敎織女助還錢)
한 달 동안에 비단 삼백 필을 족히 짜내고,(一月足縑三百匹)
홀연히 작별하고 구름 타고 올라가네.(飄然分手上雲煙)

맹희가 금을 얻다[孟熙得金]〉-촉(蜀)나라-
곽거(郭巨)주 155)가 땅을 파서 금을 얻어서 관청에서도 빼앗지 말고, 다른 사람도 취하지 말라는 것과는 같지 않다.
맹희(孟熙)는 과실을 팔아 어버이를 봉양하며, 안색을 살펴 뜻을 따르고 신고(辛苦, 어려운 일을 하며 고생함)함을 꺼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항상 말하기를, "내가 비록 가난하나, 한 명의 증삼(曾參)주 156)을 길렀노라."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슬피 울부짖어 거의 멸성(滅性)에 이르렀으며, 거적자리를 땅에 펴고, 그 위에서 자면서 3년 동안 소금과 유장을 먹지 아니하였다. 인하여 쥐구멍을 파다가 황금 수천 냥을 얻게 되어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


시(詩)
집안이 가난하여 등짐장사로 어버이 봉양하고,(家貧負販養嚴親)
받들어 순종하며 어찌 일찍이 고생을 꺼렸으리.(承順何嘗憚苦辛)
돌아가신 후 상을 치를 땐 예도를 다하고,(歿後居喪能盡禮)
행동은 증자(曾子)와 같아 보통사람과 달랐다네.(行同曾子異常人)
쥐구멍을 파다가 무슨 연유로 갑자기 금을 얻었나.(掘鼠何由遽得金)
어버이께 효도하니 이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네.(孝親於此感天心)
일시에 집이 부유해진 것뿐만이 아니라,(一時不但家能富)
향기로운 이름 얻어 지금까지 말해지네.(羸得香名說到今)

왕부가 시를 폐하다[王裒廢詩]〉주 157) -위나라-
《소학》에 보인다.

맹종이 대나무를 향해 울다[孟宗泣竹]〉
맹종은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는데 어머니가 늙고 병이 깊어 겨울에 죽순을 먹고자 하시자, 맹종이 대숲에 가서 슬피 우니 죽순 두어 줄기가 솟아났다. 그것을 가져다가 국을 만들어 드리니, 어머니가 먹고 병이 나았다.

시(詩)

효행으로는 당년의 맹종을 말하노니,(孝行當年說孟宗)
어머니가 죽순을 생각할 땐 추운 겨울 무렵이었네.(慈親思筍逼寒冬)
대숲에서 눈물 뿌리며 슬피 울부짖은 곳에서,(竹林洒淚哀號處)
몇 줄기 죽순이 깜짝할 새 솟아 나왔네.(數筍須臾出地中)

어머니가 죽순을 먹은 것으로 인해 병이 다 나으니,(母因食筍病全蘇)
하늘의 이치가 밝고 밝아 속이지 않음을 믿겠네.(天理昭昭信不誣)
오직 이 마음으로 효도 생각 보존하면,(惟以此心存孝念)
저승이나 이승에서 저절로 귀신의 도움 있으리.(幽明自有鬼神扶)

왕상이 얼음을 깨다[王祥剖氷]〉 -진나라-.
《소학》에 보인다.

시(詩)
왕상의 성효는 참으로 부럽구나.(王祥誠孝眞堪羨)
부모님을 받들어 뜻을 돌이키지 않았네.(承順親顔志不回)
얼음이 갈라져 쌍 잉어가 나왔을 뿐만 아니라,(不獨剖氷雙鯉出)
돌아와 보니 참새들이 스스로 날아들었네.(還看黃雀自飛來)

마을에선 그 효성에 깊이 감동하고,(鄕里驚嗟孝感深)
하늘이 보응하여 참마음을 표창했네.(皇天報應表純心)
늙어서는 삼공의 자리로 귀하게 되니,(白頭重作三公貴)
행의는 더욱 세상에서 공경한바 되었네.(行誼尤爲世所欽)

왕연을 위해 물고기가 뛰어나오다[王延躍魚]〉 -진나라-
왕상(王祥)이 얼음을 두드린 것과 대략 비슷하다.

반종이 아비를 구하다[潘綜救父]〉 -진나라-
반종(潘綜)오흥(吳興) 사람이다. 손은(孫恩)주 158)의 난리 때 요당(祅黨)이 촌읍(村邑)을 공격하자, 반종이 그 아버지 표(驃)와 함께 적을 피해 달아나는데, 는 늙어서 행동이 더디었다. 적이 점점 에게 다가오자 에게 이르길, "나는 더 갈 수가 없다. 너는 달아나면 벗어날 수 있으니, 함께 죽지 말길 바란다."라고 하고, 가 피곤하여 땅에 주저앉았다. 반종이 적을 맞이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이르되, "아버지는 늙었으니 목숨을 살려주시오."라고 하였고, 도 또 청하되, "아들이 나를 위해서 가지 않고 있으니, 이 아들을 살려주시오."라고 했다. 적이 를 찌르려 하자, 반종이 배 아래에 아버지를 안으니, 적이 반종의 얼굴 부분을 치길 무릇 네 번이나 하였다. 반종이 이미 기절하였는데, 한 적군이 와서 무리들에게 말하길, "아들이 죽음으로써 아비를 구하니, 효자를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적군이 이내 그쳤고,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죽음을 면하였다. 원가(元嘉, 송문제의 연호, 424~453) 4년에 유사(有司)가 상주(上奏)하여 그 마을 이름을 '순효'라고 고치고, 조포(租布, 세금)를 삼 대 동안 면제해주었다.

시(詩)
난을 피하지만 어찌 상란의 나머지 감당할 수 있으리,(避難何堪喪亂餘)
무기의 어지러움이 마을에 가득하였네.(干戈擾擾遍村墟)
가까이에서 도적 만나 풀려날 수 없었으니,(不逢傍寇能開釋)
부자가 도적의 구역에서 죽음을 당할 때였네.(父子當時死盜區)

난을 벗어나 거듭 태평 연간을 만나니,(亂離重遇太平年)
3대가 세금이 이미 모두 면제되었네.(三世公租已盡蠲)
듣자니 오흥 땅에 옛집이 남았다는데,(聞道吳興存舊業)
마을 이름이 순효리로 지금까지 전한다네.(里名純孝至今傳)

검루가 똥을 맛보다[黔婁嘗糞]〉 -제나라-
신야(新野)사람이다.


시(詩)
잔릉 이 되어 있다가 문득 마음이 놀라,(孱陵忽心驚)
관직을 버리고 집에 돌아오니 아비가 병에 걸렸네.(棄職還家父疾嬰)
소식을 어찌 알아서 먼 길을 왔는가.(消息何曾來遠道)
감응하여 통한 것은 참된 정성에 있었네.(感通應是在純誠)

자신의 몸이 아비 대신 죽고자 하여,(願將身殞代嚴親)
하늘에 머리 조아리고 북두칠성에 기도하였네.(稽顙中天禱北辰)
문득 소리 있어 보응할 것을 전하였으니,(便覺有聲傳報應)
예로부터 효성은 신과 인간을 감동시키네.(從來孝念感神人)

숙겸이 약을 구하러 다니다[叔謙訪藥]〉 -제나라-.
해숙겸(解叔謙)안문(鴈門) 사람이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숙겸이 밤에 뜰 가운데에서 머리 조아리고 빌 때 허공에서 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 병은 정공등(丁公藤)으로 술을 빚어 먹으면 곧 나으리라."라고 하였다. 곧바로 의원한테 병과 본초(本草)를 물으니, 모두 알지 못하는 것인지라 이내 두루 구하러 다니다가 의도군(宜都郡)주 159)에 이르렀다. 멀리에서 산중에 한 늙은 사람이 나무를 베고 있는 것을 보고, 어디에 쓸 것인지를 물으니, 대답하되, "이것은 정공등으로, 풍병을 치료하는 데 더욱 효험이 있소,"라고 하였다. 숙겸이 문득 절하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이곳에 오게 된 뜻을 모두 말하였다. 이 늙은 사람도 마음 아파하며 네 가닥을 주고 아울러 술 담그는 법을 알려주었다. 숙겸이 그것을 받고 이 사람을 돌아보니 이미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법대로 술을 만들어 드리니, 어머니의 병이 곧바로 나았다.

시(詩)
어미의 병에 약을 구하여 밤낮으로 근심하며,(母疾求醫(日夜憂))
하늘을 우러르고 머리 조아리며 힘써 빌었네.(仰天稽顙苦祈求)
신명께서 간절한 정성에 특별히 감동하여,(神明特感誠心切)
좋은 처방법을 말해주어 병을 고쳤네.(說與良方治病由)

숙겸의 효성에 감응함이 어찌 공연한 뜻이겠나.(叔謙孝感豈徒然)
정성이 응당 하늘에 도달해서이네.(應有精誠達上天)
홀연히 정공득을 얻어 술을 담그니,(忽得丁公藤漬酒)
곧바로 어미의 병이 편안하게 낫게 하였네.(卽令母病頓安痊)

길분이 아버지를 대신하다[吉翂代父]〉 -양나라-
길분(吉翂)풍익(馮翊) 사람이다. 아버지가 향령(鄕令)이 되었는데, 아전의 무고로 인해 정위(廷尉)주 160)에게 붙잡혀갔다. 길분의 나이 15세로, 울면서 그를 따라가니, 보는 자들이 모두 눈물을 떨구었다. 그 아버지가 다스린 것은 비록 청백하였을지라도 무고를 입은 것은 대벽(大辟, 사형)에 해당되었다. 길분이 북을 쳐서 알리며 대신 죽기를 빌었는데 무제(武帝)가 가상히 여기고, 그가 어리다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의 가르침을 받은 것인가 의심하여 정위 채법도(蔡法度)에게 신칙하길 '으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여 말을 받아내라'고 하였다. 채법도가 무겁게 가두고서 엄한 얼굴로 묻길, "네가 아비를 대신해 죽으러 온 것은 칙명으로 이미 허락하셨다. 그러나 형벌이 매우 매서우니, 견디기 힘들 것이다. 만약 뉘우침이 있다면 또한 죽지 않도록 들어주겠다."라고 하자, 대답하되, "죄인이 비록 어리석을지라도 어찌 죽음이 두려운 것을 모르겠습니까? 아비의 극형을 차마 볼 수 없어서입니다."라고 했다. 몸을 바치길 측량할 수 없는 까닭에 길분이 처음에는 감옥에 갇혔다가 법에 의해 차꼬와 수갑을 차게 되었는데, 법도가 '두 칼을 벗기라'고 명령했다. 길분이 듣지 않고 이르되, "사형 죄수를 어찌 감형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법도가 군주에게 알리니 군주가 곧 그 아버지를 사면해주었다. 양주(楊州)중정(中正) 장측(張仄)길분을 효행(孝行)으로 천거하고, 태상(太常)에 칙명하여 정려를 내리게 했다.

시(詩)
아비가 무고를 당해 극형에 떨어지니,(父爲遭誣陷極刑)
맹세코 자신이 대신하길 마음 깊이 하소연하였네.(誓將身代愬中情)
누가 알랴, 하늘의 거울이 아득한 것이 아님을,(誰知天鑒非玄遠,)
부자가 모두 온전하고 효성으로 표창되었네.(父子俱全表孝誠)

부럽게도 아동으로서 지극한 정이 있어서,(堪羨兒童有至情)
아비를 대신해주길 슬피 울부짖어 조정을 감동시켰네.(哀號代父感朝廷)
당년의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지고,(當年孝行蒙旌擧)
마침내 천추에 좋은 이름 남기게 하였네.(遂使千秋有令名)

불해가 시신을 찾아내다[不害捧屍]〉 -양나라-
은불해(殷不害)진군(陳郡) 사람이다. 아버지의 초상 치루길 예를 넘게 하고, 아우 다섯이 있되 다 어린지라, 은불해가 노모를 섬기며 어린 아우들을 양육하길 매우 힘써 이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간문제(簡文帝)주 161)가 그의 어머니인 채씨(蔡氏)에게 의복과 자리와 이불을 하사하였다. 위평강릉(魏平江陵)에서 어머니를 잃었는데, 때는 매우 추워서 눈이 얼어붙는 때로, 죽은 자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은불해가 몸을 던져 시신 사이를 찾아다니면서 7일 만에 찾아냈는데, 몸이 얼어붙어도 물 한 모금 입에 넣지 않으니, 길에 다니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시(詩)
백행의 유래는 효를 가장 우선으로 치니,(百行由來孝最先)
인심에 효를 다하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것이네.(人心盡孝理當然)
어머니의 시신이 불행히도 구덩이에 메워져 있어서,(慈親不幸塡溝壑)
칠일 동안 슬피 찾았으니 거듭 가련하구나.(七日哀求重可憐)

부모가 자식 낳아 기른 수고에 끝내 보답 못하니,(父母劬勞竟莫酬)
가없는 하늘은 망극하여 생각만 유유하구나.(昊天罔極思悠悠)
은가의 형제들은 능히 효도 할 수 있어서,(殷家兄弟能行孝)
만고토록 이름 날리길 영원히 멈추지 않으리.(萬古揚名永不休)

효숙이 아비 모습을 그려 모시다[孝肅圖像]〉 -수나라-
서효숙(徐孝肅)급군(汲郡) 사람이다.

시(詩)
어릴 때 고아 되어 아비 모습 몰랐는데,(早孤不識父容儀)
그림 그려 사모하니 어머니에게 물은 것이네.(圖像依依問母慈)
사당을 지으니 혼정신성할 수 있어,(構廟晨昏能定省)
정성스레 제향하길 살아계실 때처럼 하네.(殷勤祭享似存時)

노조가 어머니께 순종하다[盧操順母]〉
노조(盧操)하동(河東) 사람이다. 아홉 살에 《효경》과 《논어》에 통달했는데, 계모 장씨(張氏)를 섬기길 지극한 효로써 하였다. 장씨가 세 아들을 낳아 편애를 하고, 노조에게만 명하여 밥을 짓게 하였는데, 노조는 복종하여 열심히 하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장씨가 그 아들을 독서하러 보내면서 노조에게 명령하여 나귀를 끌게 하였는데, 노조는 공손하길 하인처럼 하였다. 세 아우가 술을 좋아하고 방종하여 남과 다툼이 있었는데, 남이 문에 와서 그 어머니를 꾸짖었다. 노조가 즉시 울면서 절하고 말리니, 사나운 소년들이 이르기를, "세 도둑놈에게 이런 어진 형이 있을 줄 몰랐다."라고 하고, 서로 노조에게 절하고 돌아갔다. 계모가 죽으니, 노조가 세 아우를 가르치고 사랑하기를 평상시보다 더했고, 어머니의 상을 입으며 슬퍼하여 뼈만 남았다. 나중에 임환현(臨渙縣)현위(縣尉)에 뽑혀 정사를 돕기를 관대하고 너그럽게 하였다. 관사에 궤연(几筵)을 설치하고 부모를 제사하며 나갈 적에 아뢰고 들어오면서 뵈었으며, 뜰을 지날 적이면 몸을 굽히었다. 아침마다 《효경》을 세 번 읽었는데, 〈상친장(喪親章)〉에 이르면 목이 메임을 이기지 못했으며, 그런 연후에야 정사를 보았다.

시(詩)
정성스런 효행으로 어버이 마음에 순종했고,(殷勤行孝順親心)
자세한 곡절 응당 알아 경애심이 깊었네.(委曲應知敬愛深)
밥짓고 나귀 몰면서 능히 아우에게 우애하니,(執爨驅驢能友弟)
마을의 악동들도 또한 공경함을 더했네.(里中惡少亦加欽)

서적이 독실히 효를 행하다[徐積篤行]〉 -송나라-
서적(徐積)초주(楚州) 사람이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죽으니, 아침마다 아버지를 찾길 매우 슬프게 하였고, 어머니를 섬기면서 아침저녁으로 관대를 갖추고서 문안했다. 과거시험을 보러 도성에 들어갈 때는 차마 그 어머니를 버려두지 못해서 수레에 싣고서 서쪽으로 갔다. 거수(擧首, 장원급제자)로 합격을 하니, 허안국(許安國)이 동년들을 거느리고 들어와서 절하고 또 백금을 주어 오래 봉양하도록 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름이 '석(石)'이라는 것으로서 죽도록 돌 그릇을 쓰지 아니하였으며, 다니다가 돌을 만나면 피하고 밟지 않았다. 어머니가 죽자 비통하여 피를 토했으며, 시묘살이 3년을 하는데 눈 오는 밤에도 무덤에 엎드려 곡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한림학사 여진(呂溱)이 지나가다가 그 일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단 이슬이 해마다 무덤에 내렸으며, 살구나무의 두 가지가 하나로 합쳐졌다. 이미 상을 마쳤는데도 궤연을 거두지 않고 문안하고 음식 바치기를 평소처럼 하였다. 고을에서 행(行)으로서 나라에 알리니, 조칙으로 속백(粟帛, 곡물과 포백)을 하사하게 하였다. 황우(皇祐)주 162) 연간에 초주교수(楚州敎授)가 되었고, 또 이어서 화주(和州)방어추관(防禦推官)을 지냈다. 휘종(徽宗)이 시호를 내리고 '절효처사(節孝處士)'라고 하였다.

시(詩)
갓난아이 때 아비 잃고 날마다 슬피 찾으니,(嬰孩亡父日哀求)
가음 속으로 감동되어 눈물을 흘리게 되네.(感切中情涕泗流)
어미를 섬기면서 더욱 효도로서 봉양하니,(事母更能躬孝養)
당시의 명사들도 다시 누구와 짝하리오.(當時名士復誰儔)

봉양할 때나 치상할 때 모두 온 정을 다하니,(致養居喪總盡情)
신명께서 묵묵히 도와 길상을 드러냈네.(神明默贊顯祥禎)
거듭 조정의 명령 받고 영광된 포상 내리니,(重膺朝命榮褒寵)
고금의 사람들이 절효라는 이름으로 전하네.(今古人傳節孝名)

오이가 재앙을 면하다[吳二免禍]〉 -송나라-
임천(臨川)의 백성이다.

왕천이 아버지의 수명을 더하다[王薦益壽]〉 -원나라-

유씨가 시어머니께 효도하다[劉氏孝姑]〉 -우리나라-

누백이 호랑이를 잡다[婁伯捕虎]〉 -고려-
수원호장(戶長)으로 성은 최씨이다.

자강이 무덤에 엎드리다[自强伏塚]〉 -우리나라-
성주 사람으로, 성은 김씨이다.

석진이 손가락을 자르다[石珎斷指]〉 -우리나라-
고산(高山)의 현리(縣吏)로, 성은 유씨(兪氏)이다.

은보가 까마귀를 감동시키다[殷保感烏]〉 -우리나라-


열녀
백희가 불에 타죽다[伯姬逮火]〉 -송나라-
백희(伯姬)는 노(魯)나라 선공(宣公)의 딸로, 송(宋)나라 공공(恭公)에게 시집갔다. 공공이 죽고 일찍이 밤에 불이 났는데, 좌우의 사람들이 말하길, "부인(夫人)께서는 잠깐 불을 피하소서."라고 하자, 백희는 "아녀자의 의리는 보모와 부모가 함께하지 않고는 밤에 당(堂)에서 내려가지 않는 것이니, 보모와 부모를 기다리라."라고 하였다. 보모는 왔지만 부모는 오지 않았는데, 좌우 사람들이 또 말하길, "부인(夫人)께서는 잠깐 불을 피하소서."라고 하였고, 백희는 "아녀자의 지극한 의리로는 부모가 오지 않았으면 밤에 당을 내려갈 수 없다. 의리를 어기고 사는 것이 의리를 지키다가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고, 마침내 불에 타서 죽었다.

시(詩)
궁중에 불이 나서 사방이 밝게 불타니,(宮中失火□熺熺)
연기와 화염이 한밤중에 하늘까지 이어졌네.(煙燄連天半夜時)
좌우 사람들 말하길 피하는 것 마땅하다고 하는데,(左右縱言宜出避)
부인이 어찌 아녀자의 예의를 어그러뜨리랴.(夫人豈肯婦儀虧)

공희[백희]가 예를 지켜 몸 버리길 마음대로 하였으니,(共姬守禮任捐軀)
부도의 굳고 바름을 짝할 자 누구인가.(婦道堅貞孰與儔)
성인의 글로 특서하니 현명함과 절의로다.(聖筆特書賢節義)
명성은 밝게 빛나 지금까지 남아있네.(聲名煥赫至今留)

여종이 예절을 알다[女宗知禮]〉 -송나라-
여종(女宗)포소(鮑蘇)의 아내이다. 포소가 위나라에서 벼슬살이 한지 3년 만에 다른 여자를 얻었다. 여종(女宗)은 시어머니를 봉양하길 더욱 공경히 하고, 왕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남편에게 안부하였으며, 첩에게 물건을 매우 많이 보냈다. 남편의 누이가 이르기를, "이 집을 떠나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자, 여종이 "무슨 까닭인가요?"라고 물었다. 시누이가 말하길, "남편이란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대가 무엇 하러 머물러 있느냐?"라고 하자, 여종이 이르기를, "아녀자가 한 번 초례(醮禮, 혼인식)를 하면 바꾸지 않는 법이라, 남편이 죽어도 시집가지 않는 것이니, 길쌈질을 하고 누에쳐서 고치를 뽑으며, 베를 짜서 옷을 만들고 술을 빚고 음식을 만들어서 시부모를 섬기며 한결같음으로 곧은 도리를 삼고, 착하게 따름으로 순리를 삼는 법인데, 어찌 오로지 부부간에 사랑하는 것만을 좋은 일로 삼으리오? 예[周禮]에서 천자는 부인이 열 둘이고, 제후는 아홉이며, 공경대부는 셋이며, 선비는 둘이니, 내 남편은 선비니 두 여자 두는 것이 옳지 않은가요? 또 여자는 일곱 가지 내칠 일이 있고 남자는 하나도 내칠 일이 없습니다. 일곱 가지 내칠 일에 질투가 제일이고, 음란하고, 도둑질하고, 말 많고, 교만하며 업신여기고, 자식 없고, 모진 병 앓는 것이 모두 그 뒤에 있습니다. 내 시누이가 예절은 가르치지 않고 도리어 내쫓길 행동을 하게 하려 하니, 장차 무엇에 쓰리오?" 라고 하고, 시어미를 더욱 조심해서 섬기었다. 송공(宋公)이 이를 듣고 마을 문에 표를 세우고, 호를 '여종(女宗, 여자의 으뜸)'이라 하였다.

시(詩)
남편은 당년에 딴 여자에게 장가드니,(君子當年娶外妻)
아하 정은 벌어져도 어찌 슬퍼만 하랴.(恩情雖隔豈含悽)
시어머니 모시길 게을리 않고 정성 다하니,(養姑不懈誠彌切)
천고의 꽃다운 이름 누가 나란히 할 수 있으랴.(千古芳名孰(與)齊)

아녀자의 시기질투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인데,(閨門嫉妬是常情)
재물을 보내주다니 지극정성에서 나온 것이라.(賂遺還能出至誠)
여종(女宗)이라고 부르는 것은 과분한 칭찬 아니니,(稱號女宗非溢美)
부인의 의례를 펼침이 매우 분명하구나.(開陳婦禮甚分明)

의 아내가 남편 주검에 통곡하다[妻哭夫]〉 -제(齊)나라 -
제나라 장공(莊公)이 거(莒)나라를 칠 때 기량식(杞梁殖)이 싸움에 나가 죽었다. 장공이 돌아오다가 기량식의 아내를 보고 사람을 시켜 길에서 문상하게 하였다. 기량의 처가 말하기를, "지금 이 유죄인데, 임금의 사명을 어찌 욕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의 죄를 면해주신다면, 저는 남편과 살던 낡은 집에 돌아가 있겠습니다. 저는 교외에서 조문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장공이 수레를 돌이켜 집에 가서 예의를 갖춘 뒤에야 갔다. 기량의 아내는 자식이 없었고, 시가와 친정에 모두 5가지 상복을 입을 친척이 없었다. 이미 돌아갈 곳이 없어 이내 성 밑에서 그 남편의 주검을 베고 울고 있었는데, 안에서 우러난 진실한 정성이 사람을 감동시켜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눈물을 훔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장례를 마치고 이르기를, "내 어디로 가리오? 대저 아녀자는 반드시 의지할 곳이 있는 것이니, 아비가 있으면 아비에게 의지하고, 남편이 있으면 남편에게 의지하고, 아들이 있으면 아들에게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 나는 위로 부모가 없고, 가운데로 남편이 없으며, 아래로 자식이 없다. 안으로는 의지해서 나의 정성을 드러낼 곳이 없고, 밖으로는 의지해서 나의 절개를 나타낼 데가 없다. 내가 어찌 개가(改嫁)를 하겠는가? 죽을 따름이다." 라고 하고, 치수(淄水)에 빠져 죽었다.

시(詩)
남편이 돌아오지 못함에 슬픔을 못 견디나,(良人不返最堪哀)
교외에서 어찌 조문을 받을 수 있으리오.(郊弔焉能偶受廻)
성 아래에서 시신을 베고 종일토록 곡을 함에,(城下枕屍終善哭)
나라 사람들 눈물 훔치니 어찌 그러했겠는가.(國人揮涕豈徒哉)

어느 곳에 의지하여 나의 정성을 드러내랴,(依歸何所見吾誠)
개가(改嫁)할 마음 없고 이생에 애정도 없어라.(更二無心愛此生)
마침내는 치수의 물에 가벼이 몸을 던지니,(遂赴流輕一死)
지금까지도 오열하는 강물소리 들리네.(至今鳴咽帶愁聲)

〈송나라 여인이 개가하지 않다[宋女不改]〉 -채(蔡)나라-
《소학(小學)》에 보인다.

〈절녀가 대신 죽다[節女代死]〉 -한(漢)나라-

고행이 코를 베다[高行割鼻]〉 -한(漢)나라주 163)-

〈목강(穆姜)이 (전처의) 아들을 사랑하다[穆姜撫子]〉 -한(漢)나라-
정문구(程文矩) 아내의 자는 목강(穆姜)인데, 두 아들을 두었고, 전처는 네 아들을 두었다. 문구안동주 164)수령이 되었다가 임소(任所, 옛 관원이 머물던 곳)에서 죽으니, 전처의 네 아들은 목강이 저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하여 헐뜯으며 미워하기가 날로 심하였다. 그러나 목강이 사랑하기를 더욱 극진이 하여 의복과 식량을 대주는 것이 낳은 자식보다 더하였다. 전처의 맏아들 흥(興)이 병이 들어 심해지자 목강이 친히 약과 음식으로 보살펴 은정이 더욱 깊었다. 이 병이 나아 세 아우들에게 말하기를, "계모가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거늘, 우리 형제는 은혜를 알지 못했다. 비록 어머니의 도리라고 하지만, 우리의 허물과 죄악이 크다."라고 하고, 세 아우를 데리고 고을 옥(獄)으로 나아가 스스로 형벌 받기를 청하니, 현에서 상급 관청인 군에 보고하여 그 어미를 표창하고 집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였다. 그리고 네 아들을 보내며 행실을 고치라 하니, 그 후로 훈도를 더욱 밝게 하여 모두 어진 사람이 되었다.

시(詩)
하늘을 옮겨 이미 죽으니 항상 근심하여,(移天已喪在惸惸)
전처의 고아들 양육 친아들보다 더하였네.(撫育諸孤倍所生)
훈도를 더욱 밝게 하고 어미 도리 높이니,(訓導愈明隆母道)
마침내는 뉘우치고 깨달아 어진 선비가 되었네.(終敎悔悟有賢名)

전처의 아들들 어리석어 원수처럼 보니,(義子頑愚視若讎)
어찌 어머니 사랑이 뻐꾸기 같음을 알까.주 165)(那知慈母似鳴鳩)
마침내는 저들 잘못 뉘우치고 다투어 옥으로 가니,(終然悔過爭歸獄)
비로소 인심은 근본이 변하지 않음을 믿겠네.주 166)(始信人心本不偸)

정의가 목을 찔러 죽다[貞義刎死]〉 -한(漢)나라-
악양자(樂羊子)의 처(妻)는 누구의 딸인지 알지 못한다. 태수(太守)가 비단을 하사하고 예로써 장례를 지내주었다. '정의(貞義)'라는 이름을 내렸다.

예종동탁을 꾸짖다[禮宗]〉 -한(漢)나라-
황보규(黃甫規)의 아내이며, 누구의 딸인지는 알지 못한다. 황보규가 죽었으나 예종(禮宗)은 젊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동탁(董卓)상국(相國)이 되어 그 이름을 듣고 수레 일백 승과 말 이십 필로 청빙하니, 노비와 재물이 길에 가득하였다. 예종이 간소한 차림새로 동탁의 집 문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청원하는데, 그 말이 매우 슬펐다. 동탁이 시자(侍者)들로 하여금 칼을 뽑아들어 에워싸게 하고 말하기를, "내 위엄이 사해를 풍미하는데, 어찌 일개 부녀자에게 무엇을 못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예종이 욕을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일어서서 동탁을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오랑캐의 종자로 천하에 지독한 해를 끼치고도 아직도 만족하지 못하는가? 나의 조상들은 대대로 맑은 덕을 지녔으며, 황보씨(皇甫氏)는 문무(文武)의 뛰어난 재주로 한나라의 충신이 되었다. 그대는 시킨 일이나 쫓아다니며 하던 사환이 아닌가? 감히 네 어른의 부인에게 무례한 일을 하려 하는가?"라고 말하였다. 동탁이 수레를 뜰 가운데로 끌고 가 예종의 머리를 수레의 멍에에 매고 채찍으로 어지럽게 내리쳤다. 예종이 치는 사람에게, "어찌 맵게 치지 않느냐? 빨리 죽게 하는 것이야말로 은혜이다."라고 말하였다. 수레 밑에서 죽으니 후세의 사람들이 그녀의 얼굴을 그리고 이름을 지어 '예종(禮宗)'이라고 하였다.

시(詩)

맑은 덕 집안에 전해져 절개도 순결하니,(淸德傳家節自純)
흉하고 비루한 것들 따라가 이 몸 더럽힐까.(肯從兇豎浼(吾)身)
아무리 사해를 모두 휩쓰는 힘일지라도,(縱然四海皆風靡)
그 위엄으로 한 부인을 따르게 하지 못했네.(威令難行一婦人)

뜰 앞에 도열한 칼날에도 두려워하지 않고,(不畏庭前列劒鋒)
일어서서 차분하게 꾸짖기를 다했네.(陳辭立罵儘從容)
한번 죽음을 달게 여겨 청절을 온전히 하니,(甘心一死全淸節)
후세에 그의 모습 그려 예종이라 불렀네.(後世圖形號禮宗)

〈원강이 남편의 칼을 벗겨주다[媛姜解梏]〉 -한나라-
성도(盛道)의 아내 조씨(趙氏)는 자(字)가 원강(媛姜)이었다. 건안 5년(200) 익부(益部)의 난(亂) 때 성도가 무리를 모아 병사를 일으켰으나 일이 실패하여 부부가 잡혀 죽게 되었다. 원강이 밤중에 성도에게 말하기를, "법에 일정한 형벌이 있어서 살아날 가망이 없으니, 당신은 빨리 도망하여 가문[門戶]을 보전하도록 하십시오. 제가 당신을 대신하여 옥에 머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성도가 법대로 하겠다며 따르지 않으려고 하자, 원강이 성도의 칼을 벗기고 양식과 재물을 싸주며 3살 된 아들을 데리고 달아나게 하였다. 원강이 성도를 대신하여 빠짐없이 응대하다가, 성도가 이미 멀리 갔을 것으로 짐작하고, 이에 사실로써 말하니 관리가 바로 죽였다. 후에 성도 부자(父子)가 사면을 받고 돌아왔는데, 성도가 그 의로움에 감동하여, 몸이 다하도록 다른 아내를 얻지 아니하였다.

시(詩)

숙인(淑人) 조씨의 자는 원강(媛姜)이었는데,(淑人趙氏字媛姜)
죄를 대신하여 목숨을 버리니 슬프기 그지없어라.(塞咎捐(生)最可傷)
부자가 모두 온전하여 가문을 세울 수 있었으니,(父子俱全門戶立)
종신도록 장가들지 않음은 의로움을 잊지 못해서이네.(終身不娶義難忘)

성도는 어찌하여 무리를 모아 군사를 일으켰나,(盛道胡爲欲弄兵)
온 집안이 옥에 연루되어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웠네.(渾家繫獄勢難生)
현명한 원강은 대신하여 죽어 종사를 보존하니,(賢媛代戮存宗祀)
천추 역사에 그의 의로운 이름 우뚝 빛나네.(竹帛千秋有令名)

충신

용방이 임금에게 간하다가 죽다〉
하나라 걸(桀)임금이 못을 파서 야궁(夜宮)을 만들고, 남녀를 뒤섞어 거처하게 하면서 한 달 동안 조회를 받지 아니하였다. 용방(龍逄)이 간하여 말하기를, "임금이 겸공(謙恭)하고 경신(敬信)하며, 재물을 절용(節用)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까닭에 천하가 평안하고, 사직 종묘를 보전하는 것입니다. 지금 임금은 재물 쓰기를 다함이 없을 듯이 하고, 사람 죽임을 미쳐 못할 듯이 하니, 백성이 오직 임금이 더디 망할까 두려워합니다. 인심이 이미 배반하고, 천명(天命)이 돕지 아니하거늘, 어찌 조금도 고치지 아니합니까?"라고 하였다. 용방이 서서 가지 아니하니, 걸임금이 용방을 죽였다.

시(詩)
하나라 걸왕은 음탕하고 백성에게 혹독해,(夏桀荒淫毒下民)
친히 정사를 돌보지 않은 지 한 달이 되었네.(弗親朝政至三旬)
생명을 가벼이 극간하니 언사가 간절해라,(輕生極諫言辭切)
용방과 같은 사람 몇이나 있으리오.(得似龍逄有幾人)

악비가 등에 글자를 새기다[岳飛涅背]〉 -송나라-
처음에 추밀부사(樞密副使) 악비(岳飛)가 말하길, '화의(和議)는 계책이 아니다'고 하니, 진회(秦禬)가 미워하였다. 악비는 천성이 충성되고 효성스러웠고, 병사를 사랑하고 아꼈다. 군사를 통솔하는 데는 기율(紀律)이 있어서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을 물리치고 적군을 평정하였다. 국토를 회복할 계책을 세우고 개연히 나라의 치욕 씻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 금나라 사람이 두려워하여 '아비'라 부르기에 이르렀으며, 악비의 군기를 보면 가까이 가지 못했다. 악비가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네 자를 등에 새겨 두었더니, 고종 임금이 '정충(精忠)의 기(旗)'를 하사하여, 그의 탁이한 행적을 가상히 여겼다. 악비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니 천하가 원통해하였다.

시(詩)
간흉이 나라를 망치고 화친하려 하니,(奸兇誤國欲和親)
중원 찾자고 맹서하는 사람 몇 명이나 있나.(誓取中原有幾人)
거의하여 복수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으니,(擧義復讎爲已任)
악비의 충성과 효성은 하늘의 진성이 내었구나.(王忠孝出天眞)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함은 단심에서 나와,(盡忠報國出丹誠)
등에 먹으로 새기니 글자마다 분명하네.(涅背還應字字明)
사랑으로 군사를 양성하나 기율은 엄격히 하니,(愛養軍兵嚴紀律)
고금에 누가 그와 이름을 나란히 할 수 있으랴.(古今誰得更齊名)

천상이 굴복하지 않다[天祥不屈]〉 -송나라-
상흥(祥興) 무인년(1278)에 원나라 장홍범(張弘範)조양(潮陽)에 이르러, 승상 문천상(文天祥)주 167)이 그에게 잡혀 독약을 삼켰으나 죽지 못하였다. 이듬해에 장홍범애산(崖山)에 이르러, 천상을 핍박하여 글을 써서 장세걸(張世傑)을 부르라고 하였다. 문천상이 말하기를, "내가 부모를 보필할 수 없다 해서, 이내 남을 시켜 부모를 배반하라 할 것인가?"라고 하니, 장홍범이 "네 나라가 망하였으니, 네가 몸을 죽여서 충신이 되고자 하나, 누가 기록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문천상이 "상나라가 패망했지만 백이와 숙제가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아니하였다. 신하가 각각 그 마음을 다하는 것이지 기록하고 안 하고를 따지겠는가?"라고 하였다. 장홍범이 낯빛을 바꾸고 연나라로 보냈는데, 여드레나 밥을 안 먹고도 죽지 않았다. 발라(孛羅) 승상이 "네가 두 왕을 세워 무슨 일을 이루었는가?"라고 물으니, 문천상이 "임금을 세움으로써 종묘가 보전되니, 하루라도 보존할 수 있다면 신하된 사람은 하루라도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으니, 부모의 병이 심해져서 비록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어찌 약을 쓰지 않겠는가? 죽음이 있을 뿐이니 어찌 많은 말을 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옥에 갇힌 지 한 달이 넘어 다시 물어도 굴복하지 아니하였다. 지원(至元) 임오년(1282)에 사사(賜死)되니, 남향하고 무릎을 꿇은 채 죽었다. 옷의 허리띠 속에 찬하는 글이 있었는데, "공자는 인(仁)을 이룬다 말씀하시고 맹자는 의(義)로 나아가라 말씀하시니, 오직 그 의를 다함이 인에 이르는 까닭이다. 성현의 글을 읽어 배우는 것이 무슨 일인가? 오늘 이후에는 부끄러움이 없게 되겠구나."라고 쓰여 있었다.

시(詩)
나라 망하고 집 망했는데 충신이 나타나,(國亡家破見忠臣)
독약을 먹고 의연하게 살신성인하고자 했네.(仰藥從容欲殺身)
의리는 무겁고 목숨은 가벼워 끝내 굽히지 않으니,(重義輕生終不屈)
높은 이름 천년토록 홀로 무리에서 떠났네.(高名千歲獨離倫)

옥에 갇혀 고생함이 한 달 넘기에 이르러도,(繫獄艱辛至月餘)
한 몸의 충절은 처음처럼 변함이 없어라.(一身忠節不渝初)
옷 가운데 찬한 글 있어 내용 깊고 간절하니,(衣中有贊辭深切)
평생토록 배운 글에 부끄럼이 없게 되었네.(無愧平生所學書)

박제상이 충렬을 다하다[提上忠烈]〉 -신라-
신라 실성왕이 내물왕의 아들 말사흔(末斯欣)주 168)을 왜나라에 보내어 볼모로 삼고, 또 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다. 눌지왕이 즉위해서 변사(辨士)를 보내어 맞아 오고자 하므로 박제상이 가기를 청하였다. 고구려에 가서 임금을 설득하여 데리고 오니, 임금이 기뻐하면서 이르기를, "두 아우를 두 쪽 팔같이 여겼는데, 이제 한 팔만 얻으니, 어찌하리오?" 제상이 배사(拜辭)하고, 집에도 들리지 않고 왜나라에 이르러, "임금이 우리 아버지와 형을 죽이므로 도망해 왔습니다."라고 속여 말하니, 왜나라 임금이 이를 믿었다. 제상사흔과 함께 배 타고 노니는 듯이 하니 왜인들이 의심하지 않았다. 제상사흔에게 몰래 돌아갈 것을 권하니, 사흔이 함께 돌아가자고 하였다. 제상이 "함께 가면 뜻을 못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흔이 이미 멀리 갔을 때 왜나라 임금이 제상을 가두고, "어찌 왕자를 몰래 보냈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계림의 신하이므로 내가 임금 뜻을 이루려 했다."라고 대답하니, 왜나라 임금이 노해서 이르기를, "계림 신하라 하면 반드시 오형(五刑)을 다 내리겠다."라고 하였다. 명하여 발바닥 가죽을 벗기고 썰어 놓은 갈대 위를 달리라 하고, "어느 나라 신하인가?"라고 물으니, "계림의 신하이다."라고 답하였다. 또 달구어진 쇠 위에 세우고 묻기를 "어느 나라 신하인가?" 하니, "계림의 신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왜나라 임금이 굴복하지 않을 줄 알고 불에 태워서 죽였다. 그 아내가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주 169)에 올라 왜국을 바라보며 울다가 죽었다.

정몽주가 운명을 하다[夢周殞]〉 -고려-
처음에 최영(崔瑩)신우(辛禑)에게 권하여 병력을 일으켜 요동(遼東)을 치니, 우리 태조(이성계)가 거의(擧義)하였다가 회군하고 왕씨를 도로 세웠다. 좌사(左使) 조준(趙浚)정당(政堂) 정도전(鄭道傳), 밀직사(密直使) 남은(南誾) 등이 천명과 인심의 소재를 알아 태조를 추대하고자 하였다. 홍무(洪武) 임신년(1392, 공양왕 4년) 3월에 태조가 말에서 떨어졌는데, 수시중(守侍中) 정몽주조준정도전남은 등이 (태조를) 한 마음으로 보익(輔翼)하는 것을 보고, 대간(大諫)을 시켜 탄핵하여 귀양 보내게 하고, 김귀련(金龜聯)이반(李蟠)을 폄소(貶所)에 보내어 죽이려 하였다. 의안대군(義安大君) 화(和)와 흥안군(興安君) 이제(李濟) 등이 태조에게 말하길 "형세가 이미 급하니, 장차 어찌해야 하오?"라고 하니, 태조가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니 오직 순순히 받을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가 휘하인 조영규에게 이르기를, "이씨가 왕실에 공로 있는 것을 사람들이 모두 아는데, 지금 모함에 빠지게 되었으니 후세에 누가 알겠는가? 휘하의 병사 가운데 힘쓸 이가 없는가?"라고 하였다. 영규가 "감히 명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고, 영규 등이 요로에서 잠복하고 있다가 몽주를 격살(擊殺)하였다. 태조가 병이 심해져 말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공정대왕(恭定大王, 태종)이 즉위하여 '섬기는 바에 전심하여 그 지조를 바꾸지 않음[專心所事, 不貳其操]'이란 것으로서 시호를 문충(文忠)으로 주었다.

시(詩)
고려 말 쇠미해지고 태운이 성하자,(麗季衰微泰運(升))
뭇 현인들 거기 붙어 모두 날아올랐네.(羣賢攀附摠飛騰)
조용히 죽음에 나아간 오천자(烏川子)주 170),(從容就死烏川子)
우리 조선 절의가 흥성함을 열었네.(啓我朝鮮節義興)

충의는 본디부터 민멸할 수 없는 건데,(忠義由來不可堙)
평상시에 이를 힘써 갈고 닦는 사람 없네.(平時砥礪且無人)
질풍 속에 꼿꼿한 풀 보기 더욱 어려워도,(疾風勁草尤難見)
고려조의 충신 한 분은 반드시 알아야만 하리.(須識高麗一个臣)

길재가 절의로 항거하다[吉再抗節]〉 -고려-
홍무(洪武) 기사년(1389) 겨울에 주서(注書) 길재(吉再)가 관직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경진년(1400)에 공정대왕(恭定大王, 태종)이 동궁에 있을 때 그를 부르니 다시 이르렀다. 공정대왕(恭靖大王, 정종)께 아뢰어 봉상박사(奉常博士)를 제수하였으나 길재가 동궁께 사직하고자 아뢰었다. 공정대왕(후에 태종)이 이르길 "그대가 말한 것은 실로 강상과 관계된 것이다. 다만 부른 사람은 나요, 벼슬을 준 사람은 전하이니, 전하께 사직함이 옳다."라고 하였다. 길재가 곧 상서하기를 "제가 신조(辛朝)주 171)에 급제하여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이르렀습니다. 신하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으니 시골로 놓아 보내시면 늙은 어미 봉양하고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뜻을 이루고 싶습니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공정대왕이 경연에 나아가 지경연사(知經筵事) 권근(權近)에게 묻기를 "길재가 절의를 들어 벼슬을 하지 않으니, 옛사람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조처했는가?"라고 하니, 권근이 대답하기를, "엄광(嚴光)주 172)이 굽히지 않자, 광무제가 이를 따랐습니다. 길재가 떠나기를 원하면, 자신의 뜻대로 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였으므로, 공정대왕이 이에 허락하여 돌려보내고, 그 집을 복호(復戶)주 173)하였다. 영락 무술년(1418)에 전하께서 즉위함에 공정대왕(태종)의 명을 이어받아 그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선덕 병오년(1426)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에 추증하였다.

시(詩)
송악산의 왕기는 이미 재가 되었고,(崧山王氣已成灰)
참주인인 용이 일어나 큰 운을 열었네.(眞主龍興泰運開)
아직도 옛 임금 그리워하며 절개 지키니,(尙戀舊君全一節)
표연히 돌아가 자릉대(子陵臺)에 눕네.(飄然歸卧子陵坮)

우뚝한 높은 절개 가을서리처럼 늠름하니주 174),(亭亭高節凜秋霜)
곧바로 수양산에서 굶어 죽은 자취를 따르고자 하네.주 175)(直欲追蹤餓首陽)
성대(聖代)에 높이 기려 의열(義烈)을 표창하니,(聖代褒崇彰義烈)
삼한(三韓)에 억만년토록 강상(綱常)이 세워졌네.(三韓億載樹綱常)
주석 142)제순(帝舜)
순(舜)임금을 말하며 우순(虞舜)이라고도 한다. 요(堯)임금의 선위(禪位)로 제위(帝位)에 올라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우(虞)란 순임금이 천하를 차지하여 다스릴 때의 나라이름이다.
주석 143)성탕(成湯)
하남(河南) 상구(商丘) 사람으로 성은 자(子), 이름은 리(履), 묘호는 태조(太祖)이다. 상나라의 개국군주로, BC. 1617년부터 BC. 1588년까지 재위에 있었다. 무탕(武湯), 은탕(殷湯), 천을(天乙), 성탕(成湯), 성당(成唐)으로 불리기도 하고, 갑골문에서는 당(唐), 태을(大乙), 고조을(高祖乙)로 기재되어 있다. 고대 상(商) 부족의 지도자로서, 하(夏)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건립하고 인정(仁政)을 베풀었다. 시호는 무왕(武王)이다.
주석 144)삼물(三物)
육덕(六德)ㆍ육행(六行)ㆍ육예(六藝)를 말함이니, 육덕은 지(知)ㆍ인(仁)ㆍ성(聖)ㆍ의(義)ㆍ충(忠)ㆍ화(和)이고, 육행은 효(孝)ㆍ우(友)ㆍ목(睦)ㆍ인(婣)ㆍ임(任)ㆍ휼(恤)이며, 육예는 예(禮)ㆍ악(樂)ㆍ사(射)ㆍ어(御)ㆍ서(書)ㆍ수(數)이다. 《주례》 〈지관(地官)ㆍ대사도(大司徒)〉에 보인다.
주석 145)권부(權溥, 1262∼1346)
초명은 권영(權永), 자는 제만(齊滿), 호는 국재(菊齋),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279년 18세로 문과에 급제, 첨의사인(僉議舍人)을 거쳐 충선왕 때에 사림원(詞林院)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아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고, 충렬왕이 복위하자 밀직학사(密直學士),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를 지냈다. 주자학이 전래되자 이의 발전을 위해 크게 노력하여 《주자사서집주(朱子四書集註)》의 간행을 상소, 성리학을 보급시키는 데 공헌하고, 《은대집(銀臺集) 20권》을 주서(註書)하였다.
주석 146)효행록(孝行錄)
고려 후기에 중국 역대의 효행 고사를 모아 만든 목판본 책이다. 1346년(충목왕 2년) 권준(權準)이 자신의 아버지 권부(權溥)와 함께 중국의 효행설 62장을 선정하고 이제현(李齊賢)의 찬(贊)을 얻어 엮었다. 1405년(태종 5년) 권준의 현손(玄孫)인 권근(權近)이 주석을 달아 처음 간행했다.
주석 147)권채(權採, 1399~1438)
자는 여서(汝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는 제학(提學) 권우(權遇)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판사(判事) 홍빈(洪贇)의 딸이다. 또한 조선 초기 유학의 대가인 권근(權近)의 조카이다. 1417년(태종 17)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그 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응교ㆍ동부승지ㆍ우부승지 등을 지냈고, 유호통(兪好通) 등과 함께 ≪신증향약집성방(新增鄕藥集成方)≫을 편찬하였다.
주석 148)이전(彝典)
상도(常道)ㆍ상규(常規)를 이른다.
주석 150)광한(廣漢)과 여분(汝墳)
《시경》 〈주남(周南)〉의 편명으로, 문왕(文王)의 교화가 멀리까지 펼쳐짐을 말한 것이다.
주석 151)이남(二南)
이남은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말하는데 〈주남〉은 문왕(文王)의 후비인 태사(太姒)의 덕을, 〈소남〉은 후비의 교화를 입은 제후국 왕비의 덕을 읊은 것이다.
주석 152)나물국
원문의 '여곽(藜藿)'은 명아주 잎과 콩잎으로 끓인 국이라는 뜻으로, 빈궁한 자의 거친 음식을 뜻한다.
주석 153)혼정신성
어버이를 정성껏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자식이 된 자는 어버이에 대해서, 겨울에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는 시원하게 해 드려야 하며, 저녁에는 잠자리를 보살펴 드리고 아침에는 문안 인사를 올려야 한다.[冬溫而夏凊, 昏定而晨省]"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154)궐초(厥初)
본연(本然)이란 뜻이다. (《소학(小學)》 〈제사(題辭)〉)
주석 155)곽거(郭巨)
곽거는 진(晉)나라 융릉(隆陵) 사람으로 아내와 품팔이를 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어머니가 음식을 손자에게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자 어머니 몫이 줄어든다 하여 땅을 파고 아이를 묻어버리려 하였다. 세자쯤 땅을 파니 황금 솥 하나가 나타났는데 그 위에 "하늘이 효자 곽거(郭巨)에게 내리는 것이니, 관청에서도 빼앗지 말고, 다른 사람도 취하지 말라."라는 글이 씌어 있었다고 한다.
주석 156)증삼(曾參)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의 이름이다. 노나라 남무성(南武城) 사람으로 자는 자여(子輿), 지극한 효자로서 효심이 지극하여 멀리 있어도 모친이 전하는 바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십사효》 중에 '교지통심'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주석 157)왕부가 시를 폐하다[王裒廢詩]
진(晉)나라 왕부(王裒)가 《시경(詩經)》 〈소아(小雅)ㆍ육아편(蓼莪篇)〉의 '슬프다 우리 부모, 나를 낳아 얼마나 고생하셨나.[哀哀父母 生我劬勞]'라는 대목을 읽을 때마다, 참형(斬刑)을 당한 부친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으므로, 수업받는 문인들이 아예 〈육아편〉을 폐(廢)하려고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진서(晉書)ㆍ효우(孝友)ㆍ왕부전(王裒傳)》)
주석 158)손은(孫恩, ?~402)
진 안제(晉安帝) 때의 반장(叛將)으로, 자는 영수(靈秀)이다. 안제가 정신박약아라는 점 때문에 동진 안제의 친인척인 사마원현(司馬元顯)이 폭정을 일삼는 것을 이용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정동장군(征東將軍)이라 하였으며, 그의 무리들을 장생인(長生人)이라 하였다. 뒤에 유유(劉裕)ㆍ신경(辛景)에게 패하여 죽었다.(《진서(晉書)ㆍ손은열전(孫恩列傳)》)
주석 159)의도군(宜都郡)
현재 중국의 호북성(湖北省) 의도시(宜都市)로 장강(長江)의 중류 남안(南岸)에 위치해 있다. 춘추전국시기에는 초(楚)에 속해있었으며, 전한무제(前漢 武帝) 때 현을 설치하고 이도현(夷道縣)이라고 했다가 후한말 건안(建安) 14년(209)에 유비(劉備)가 임강군(臨江郡)을 고치고 이어 의도군(宜都郡)으로 삼았다. 역사상 유명한 '이릉지전(夷陵之戰)'이 바로 여기에서 발생하였다. 험난한 산골에 위치한다.
주석 160)정위(廷尉)
관직명. 구경(九卿)의 하나로, 형벌이나 감옥의 일을 관장했다.
주석 161)간문제(簡文帝)
중국 양(梁)나라의 제2대 황제로 재위 기간은 2년(549~551)이다. 성은 소(蕭), 자는 세찬(世讃), 이름은 강(綱)이다. 재위 기간에 대보(大寶)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주석 162)황우(皇祐)
중국 북송(北宋)의 제 4대 황제인 인종(仁宗, 1049~1054)의 재위 기간을 말한다.
주석 163)한(漢)나라
역주 오륜행실도에는 양나라로 되어 있다.
주석 164)안동
원문에는 안동으로 되어 있으나, 《삼강행실도》 원전에는 안중(安重)으로 되어 있다.
주석 165)어찌 …… 알까
원문에는 '那知慈母似鳴鳩'로 되어 있는데 역주 《오륜행실도》에는 '那知慈母似鳲鳩'로 되어 있다. 《시경》 〈조풍(曹風)·시구(鳲鳩)〉에 "뻐꾸기가 뽕나무에 둥지를 틀었나니, 새끼가 일곱 마리로다. 우리 훌륭한 군자님이여, 그 말과 행동이 한결같도다.[鳲鳩在桑, 其子七兮. 淑人君子, 其儀一兮.]"라는 말이 나온다. 뻐꾸기가 새끼를 먹일 때의 순서를 보면 아침에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저녁에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굶는 새끼가 없도록 공평하게 먹이를 나누어 주기 때문에, 공평하고 균등하게 남을 대할 때의 비유로 흔히 쓰인다.
주석 166)비로소 …… 믿겠네
원문에는 '始信人心本不偸'로 되어 있는데 역주 《오륜행실도》에는 '始信人心本不渝'로 되어 있다.
주석 167)문천상(文天祥, 1236~1282)
중국 남송의 충신으로, 자는 송서(宋瑞)ㆍ이선(履善), 호는 문산(文山)이다. 옥중에서 절개를 읊은 노래인 〈정기가(正氣歌)〉가 유명하다. 저서에 ≪문산집≫이 있다.
주석 168)말사흔(末斯欣)
《삼국사기》에는 '미사흔(未斯欣)'으로 되어 있다.
주석 169)치술령(鵄述嶺)
경상북도 경주시의 외동읍 녹동리와 울산광역시 두동면의 경계선에 있는 산이다. 현재 남편을 기다리다가 돌이 되었다는 망부석(望夫石)과 신모사(神母寺), 기우단 등이 남아 있다.
주석 170)오천자(烏川子)
오천은 연일(延日)의 고호(古號)로, 연일 정씨인 정몽주를 가리킨다.
주석 171)신조(辛朝)
신돈(辛旽)의 조정이란 뜻으로 여말(麗末)의 우왕(禑王)ㆍ창왕(昌王)대를 가리킨다.
주석 172)엄광(嚴光)
후한(後漢) 사람으로, 자는 자릉(子陵)이다. 어려서 광무제(光武帝)와 같이 공부하였는데, 광무제가 즉위하자 성명을 고치고 숨어 살았다. 광무제가 찾아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은거하였다.
주석 173)복호(復戶)
국가가 호(戶)에 부과하는 요역(徭役) 부담을 감면하거나 면제해 주던 제도를 말한다.
주석 174)가을서리처럼 늠름하니
《신당서(新唐書)》 권194 〈탁행열전(卓行列傳)〉의 찬(贊)에 "원덕수(元德秀)는 덕으로, 양성(陽城)은 굳셈으로, 사공도(司空圖)는 명을 알아 절의를 지켰다. 그 지조가 늠름하여 가을서리와 삼엄함을 다툴 만하니, 참으로 장부로다.[德秀以德, 城以鯁峭, 圖知命, 其志凜凜與秋霜爭嚴, 眞丈夫哉.]"라고 하였다.
주석 175)수양산 …… 하네
수양산(首陽山)에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고사리만 뜯어 먹다가 죽었다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사를 가리킨다.
二十八日 庚寅
【上章攝提】。陽。看《三綱行實圖》。 略記之。

序。
天下之達道五。 而三綱居其首。實經綸之大法。 而萬化之本源也。若稽諸古。 帝舜愼徽五典。 成湯肇修人紀。 周家重民五敎。 而賓興三物。 帝王爲治之先務。 可知也已。宣德辛亥夏。 我主上殿下。 命近臣若曰。 "三代之治。 皆所以明人倫也。 後世敎化陵夷。 百姓不親。 君臣∙父子∙夫婦之大倫。 率皆昧於所性。 而常失於薄。間有卓行高節。 不爲習俗所移。 而聳人觀聽者。 亦多。予欲使取其特異者。 作爲圖贊。 頒諸中外。 庶幾愚夫愚婦。 皆得以易觀感而興起。 則亦化民成俗之一道也。" 乃命集賢殿副提學。臣偰循。 掌編摩。於是。 自中國以至我東方。 古今書傳所載。 靡不蒐閱。 得孝子ㆍ忠臣ㆍ烈女之卓然可述者。 各(百)有十人。 圖形前於。 記實於後。 而幷系以詩。孝子則謹錄太宗文皇帝所賜孝順事實之詩。 兼取臣高祖臣所撰《孝行錄》中名儒李齊賢之贊。 其餘則令輔臣分撰。 忠臣烈女之詩。 亦令文臣(分)製。編訖。 賜名三綱行實圖。 令鑄字所。 鋟榟永傳。爰命臣。 序其卷端。 臣竊惟。 君親夫婦之倫。 忠孝節義之道。 是乃降衷秉彝。 人人所同。 窮天地之始而俱生。 極天地之終而罔墜。 不以堯舜之仁而有餘。 不以桀紂之暴而不足。然先王之時。 五典克從。 民用和睦。 而比屋可封。 三代以後。 治日常少。 而亂賊之徒。 接跡於世者。 良由君上導養之如何耳。今我主上殿下。 以神聖之資。 盡君師之道。 功成治定。 萬目畢張。 而以扶植綱常。 維持世道爲本。凡有關於名敎者。 無不講究商確著爲彝典。 所以化民於躬行心得之餘。 旣極其至。猶慮興起之方。 有所未盡。 乃爲此書。 廣布民間。 使無賢愚貴賤孩童婦女。 皆有以樂觀而習聞。 披翫其圖。 以想形容。 諷詠其詩。 以體性情。 莫不歆羡嘆慕。 勸勉激勵。 以感發同然之善心。 而盡其職分之當爲矣。蓋與帝王敦典敷敎之義。 同一揆而條理有加密焉。由是民風丕變。 治道益隆。 家盡孝順之子。 國皆忠藎之臣。 南陔白華之什。 漢廣汝墳之詩。 將繼作於委巷之間。 王化之美。 當無讓於二南。 而王業之固。 實永傳於萬世。後之君子。 益體宸衷。 服膺敬守於無窮。 豈不韙歟。宣德七年六月日。 奉列大夫集賢殿應敎禮文應敎知製敎經筵檢討官。 臣權採奉敎序。

三綱行實孝子圖。

閔損單衣【魯】。
閔損。 孔子弟子。早喪母。 父娶後妻生二子。母嫉。 所生子衣綿絮。 衣損蘆花。父知之欲遣後妻。 啓父曰。 "母在一子寒。 母去三子單" 父善其言而止。 母亦感悔。 遂成慈母。

詩。
身衣蘆花不禦寒。隆冬寧使一身單.因將好語回嚴父。子得團圝母得安.
孝哉閔損世稱賢。德行由來萬古傳.繼母一朝能感悟。從玆慈愛意無偏.

贊。
後母不慈。獨厚己兒.弟溫兄凍。蘆絮非綿.父將逐母。跪白于前。母今在此.一子獨寒。若令母去。三子俱單.父感而止。孝乎閔子.

子路負米【魯】。
子路。 姓。 名。 孔子弟子。事親至孝。 家貧食藜藿。 爲親負米百里。親歿之後。 南遊於楚。 從車百乘。 積粟萬鍾。 累裀而坐。 列鼎而食。乃歎曰。 "雖欲食藜藿。 負米爲親。 不可得也。" 孔子聞之曰 "也。 可謂生事盡力。 死事盡思者也。"

詩。
家貧藜藿僅能充。負米供親困苦中.當日孔門稱盡孝。仲由千古播高風.
一朝列鼎累重裀。富貴終能念賤貧.生事死思惟盡孝。聖門嘉譽屬賢人.

楊香搤虎【魯】。
楊香南鄕縣楊豐女也。隨父田間。 爲虎所噬。 年十四。手無寸刃。 乃搤虎頸。 因獲免。太守孟肇之。 賜資穀。 旌其門閭。

詩。
父遭虎噬愴心顔。命在當時頃刻間.虎頸搤持寧顧死。致命嚴父得生還.
幼齡體弱氣軒昂。父命能令虎不傷.靑史尙留名聲在。至今誰不道楊香.

皐魚道哭【楚】。
孔子出行。 聞有哭聲甚悲。 至見皐魚也。被褐擁劒。 哭於路左。 孔子下車而問其故。 對曰。 "吾少時好學。 周流天下。 而吾親死矣。夫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往而不可返者年也。 逝而不可追者親也。 吾於是辭矣。" 立哭而死。 於是孔子之門人。 歸養親者。 一十三人。
陳氏養姑【漢】。

號曰孝婦。 見《小學》。
江革巨孝【漢】。


詩。
至孝由來動鬼神。雖逢强暴亦全身.到頭母子俱無恙。天地終應福善人。

薛包洒掃【漢】。
見《小學》。

詩。
不得親心涕泗濡。晨昏洒掃守門閭.積誠感得親(顔悅)。父子和諧遂厥初.

抱屍【漢】。
孝女曺娥會稽人。父溺江而死。 年二十四。沿江號哭。 遂投江 而旬有七日。 抱父屍出。 吏民葬而樹碑。

黃香扇枕【漢】。
見《小學》。九歲失母。 獨養其父。

詩。
黃香行孝自髫年。扇枕溫衾世共傳.寒署不令親體受。誠心一念出天然.

江夏童志異常。當時已道世無雙.累官直至尙書令。孝感能令後嗣昌.

丁蘭刻木【漢】。
二十四孝圖去。 刻木爲母象。

董永貸錢【漢】。

詩。
得錢一萬葬其親。身擬爲傭報主人.豈料孝心終感格。天敎織女助身貧.
孝念終能感上天。爲敎織女助還錢.一月足縑三百匹。飄然分手上雲煙.

孟熙得金【蜀】。
郭巨得金刻土。 官不得奪。 人不得取。 不同。
孟熙。 販果養親。 承顔順志。 不憚苦辛。父常云。 "我雖貧賤。 養得一曾參。" 及父亡哀號。 幾至滅性。 布苫于地。 寢處其上。 三年不食鹽酪。因見鼠掘地。 得黃金數千兩。 遂爲巨富焉。

詩。
家貧負販養嚴親。承順何嘗憚苦辛.歿後居喪能盡禮。行同曾子異常人.掘鼠何由遽得金.孝親於此感天心.一時不但家能富。 羸得香名說到今.

王裒廢詩【魏】。見《小學》。

孟宗泣竹。性至孝。 母年老病篤。 冬思筍食。 入竹林。 哀泣筍出數莖。 持歸作羹。 母食病愈。

詩。
孝行當年說孟宗。慈親思筍逼寒冬.竹林洒淚哀號處。數筍須臾出地中.
母因食筍病全蘇。天理昭昭信不誣.惟以此心存孝念。幽明自有鬼神扶.

王祥剖氷【晉】。見《小學》。

詩。
王祥誠孝眞堪羨.承順親顔志不回.不獨剖氷雙鯉出。還看黃雀自飛來.
鄕里驚嗟孝感深。皇天報應表純心。白頭重作三公貴。行誼尤爲世所欽.

王延躍魚【晉】。與王祥叩氷。 略相似。

潘綜救父【晉】。吳興人。孫恩之亂。 祅黨破村邑。 與父共走避賊。 年老行遲。 賊轉逼曰。 "我不能去。 汝走可脫。 幸勿俱死。" 困乏坐地。 迎賊叩頭曰。 "父年老。 乞賜生命。" 亦請曰。 "兒爲不去。 乞活此兒。" 賊斫抱父於服下。 賊斫頭面。 凡四創。已悶絶。 有一賊來語衆曰。 "此兒以死救父。 殺孝子不祥。" 賊乃止。 父子並得免。元嘉四年。 有司奏改其里爲純孝。 蠲租布三世。

詩。
避難何堪喪亂餘。干戈擾擾遍村墟.不逢傍寇能開釋。父子當時死盜區.亂離重遇太平年。三世公租已盡蠲.聞道吳興存舊業。里名純孝至今傳.

《소학》에 보인다.
黔婁嘗糞【齊】。新野人。見《小學》。

詩。
孱陵忽心驚。棄職還家父疾嬰.消息何曾來遠道.感通應是在純誠.
願將身殞代嚴親。稽顙中天禱北辰.便覺有聲傳報應。從來孝念感神人.

叔謙訪藥【齊】。解叔謙鴈門人。母有疾。 叔謙夜於庭中稽顙祈福。 聞空中語云。 "此病得丁公藤爲酒便差。" 卽訪醫及本草。 皆無識者。 乃求訪至宜都郡。遙見山中一老公伐木。 問其所用。 答曰。 "此丁公藤。 療風尤驗。" 叔謙便拜伏流涕。 具言來意。此公愴然。 以四段與之。 幷示以漬酒法。叔謙受之。 顧視此人。 已忽不見。依法爲酒。 母病卽差。

詩。
母疾求醫(日夜憂)。仰天稽顙苦祈求.神明特感誠心切。說與良方治病由.
叔謙孝感豈徒然.應有精誠達上天.忽得丁公藤漬酒。卽令母病頓安痊.

吉翂代父【梁】。吉翂馮翊人。父爲鄕令。 爲吏所誣。 逮詰廷尉年十五。 號泣隨之。 見者隕涕。其父理雖淸白。 被誣當大辟。檛登聞鼓乞代命。 武帝嘉之。 '以其幼。 疑受敎於人'。 勅廷尉蔡法度脅誘取款。法度盛陳徽纆。 厲色問曰。 "爾來代父(死)。 勅已相許。然刀鉅至劇。 審能死不。若有悔異。 亦相聽許。" 對曰。 "囚雖蒙弱。 豈不知死可畏? 不忍見父極刑。" 所以殉身不測。初見囚獄依法桎梏。 法度命脫二械。不聽曰。 "死囚豈可減乎?" 法度以聞。 帝乃宥其父。楊州中正張仄孝行。 勅太常旌擧。

詩。
父爲遭誣陷極刑。誓將身代愬中情.誰知天鑒非玄遠。父子俱全表孝誠.
堪羨兒童有至情。哀號代父感朝廷.當年孝行蒙旌擧。遂使千秋有令名.

不害捧屍【梁】。殷不害陳郡人。居父憂過禮。 有弟五人皆幼。 不害養老母養小弟。 勤劇無所不至。簡文帝。 賜其母蔡氏。 錦裙襦氈席被褥。魏平江陵。 失母。 時甚寒雪凍。 死者塡滿溝壑。不害投身推屍。 捧出七日。 體凍。 水漿不入口。 行路流涕。

詩。
百行由來孝最先。人心盡孝理當然.慈親不幸塡溝壑。七日哀求重可憐.
父母劬勞竟莫酬。昊天罔極思悠悠.殷家兄弟能行孝。萬古揚名永不休.

孝肅圖像【隋】。徐孝肅汲郡人。

詩。
早孤不識父容儀。圖像依依問母慈.構廟晨昏能定省。殷勤祭享似存時.

盧操順母。
盧操河東人。九歲通《孝經》《論語》。 事繼母張氏至孝。生三子溺愛之。 命常執勤主炊。 服勤不倦。遣其子讀書。 命策驢。 恭勤如僮僕。三弟嗜酒縱佚。 抵忤於人。 致人踵門詬及其母。卽涕泣拜而解之。 惡少年曰。 "不謂三賊有此令兄。" 相與拜而去。繼母亡。 訓養三弟。 恩愛過於平日。 服母喪。 哀毁骨立。後調臨渙縣尉。 佐政寬仁。官舍設几筵以祀父母。 出告反面。 鞠躬如也。每朝讀《孝經》三遍。 至喪親章。 號咽不勝。 然後視事。

詩。
殷勤行孝順親心。委曲應知敬愛深.執爨驅驢能友弟。里中惡少亦加欽.

徐積篤行【宋】。徐積楚州人。三歲父死。 旦旦求之甚哀。 事母朝夕冠帶定省。從胡瑗學。 瑗饋以食弗受。應擧入都。 不忍捨其親。 徒載而西。登第擧首。 許安國率同年入拜。 且致百金爲壽。 謝而却之。以父名。 終身不用石器。 行遇石。 則避而不踐. 母亡。 悲痛嘔血。 廬墓三年。 雪夜伏墓。 哭不絶音。翰林學士呂溱。 聞之泣下。 甘露歲降兆域。 杏兩枝合榦。旣終喪。 不徹几筵。 起居饋獻如平生。州以行聞。 詔賜粟帛。皇祐爲楚州敎授。 又轉和州防禦推官。徽宗賜諡。 節孝處士。

詩。
嬰孩亡父日哀求。感切中情涕泗流.事母更能躬孝養。當時名士復誰儔.
致養居喪總盡情。神明默贊顯祥禎.重膺朝命榮褒寵。今古人傳節孝名.

吳二免禍【宋】。臨川小民。

王薦益壽【元】。

劉氏孝姑【國朝】。

婁伯捕虎【高麗】。水原戶長。 姓崔氏

自强伏塚【本國】。星州人。 姓金氏

石珎斷指【本國】。高山縣吏。 姓兪氏

殷保感烏【本國】。

烈女。
伯姬逮火【宋】。伯姬魯宣公之女。 嫁於宋恭公。公卒。 嘗遇夜失火。 左右曰。 "夫人少避火。" 曰。 "婦人之義。 保傳不俱。 夜不下堂。 待保傳來。" 保母至矣。 傳母未至也。 左右又曰。 "夫人少避火。" 曰。 "婦人至義。 傳母不至。 夜不可下堂。越義而生。 不如守義而死。" 遂逮於火而死。

詩。
宮中失火□熺熺。煙燄連天半夜時.左右縱言宜出避。夫人豈肯婦儀虧.
共姬守禮任捐軀。婦道堅貞孰與儔.聖筆特書賢節義.聲名煥赫至今留.

女宗知禮【宋】。女宗鮑蘇之妻。仕衛三年娶外妻。 女宗養姑愈敬。 因往來者。 請問其夫。 賂遺外妻甚厚。女宗姒謂曰。 "可以去矣。" 女宗曰。 "何故?" 姒曰。 "夫人旣有所好。 子何留乎?" 女宗曰。 "婦人。 一醮不改。夫死不嫁。 執麻枲絲璽。 織紝組紃。 以供衣服。 澈漠酒醴。 羞饋食。 以事舅姑。 以專一爲貞。 以善從爲順。 豈以專夫室之愛爲善哉?" 禮天子十二。 諸侯九。 卿大夫三。 士二。 吾夫士也。 有二不亦宜乎? 且婦人有七見去。 夫無一去義。 七去之道。 妬正爲首。 淫僻ㆍ竊盜ㆍ長舌ㆍ驕侮ㆍ無子ㆍ惡病皆在其後。 吾姒不敎以居室之禮。 而反欲使吾爲見棄之行。 將安所用?" 事姑愈謹。宋公聞之。 表其閭。 號曰。 "女宗"。

詩。
君子當年娶外妻。恩情雖隔豈含悽。養姑不懈誠彌切。千古芳名孰(與)齊.
閨門嫉妬是常情。賂遺還能出至誠.稱號女宗非溢美。開陳婦禮甚分明.

妻哭夫【齊】。
齊莊公襲莒。 杞梁殖戰而死。莊公歸。 遇其妻。 使使者弔之於路。杞梁妻曰。 "今有罪。 君何辱命焉? 若令免罪。 則賤妾有先人之敝廬在。 下妾不得與郊弔。" 於是莊公乃還車詣其室。 成禮然後去。杞梁之妻無子。 內外無五屬之親。旣無所歸。 乃枕其夫之屍於城下而哭。 內誠動人。 道路過者莫不爲之揮涕。旣葬曰。 "吾何歸矣? 夫婦人必有所依者。 父在則依父。 夫在則依夫。 子在則依子。今吾上則無父。 中則無夫。 下則無子。 內無所倚以見吾誠。 外無所倚以見吾節。吾豈能更二哉? 亦死而己。" 遂赴淄水而死。

詩。
良人不返最堪哀。郊弔焉能偶受廻.城下枕屍終善哭。國人揮涕豈徒哉.依歸何所見吾誠。更二無心愛此生.遂赴流輕一死。至今鳴咽帶愁聲.

宋女不改【蔡】。見《小學》。

節女代死【漢】。

高行割鼻【漢】。

穆姜撫子【漢】。
程文矩妻。 字穆姜。 有二男。 而前妻四子。文矩安東。 喪於官。 四子以母非所生。 憎毁日積。而穆姜撫子益隆。 衣食資供。 皆兼倍所生。前妻子。 遇疾困篤。 母親調藥膳。 恩情篤密。疾瘳。 呼三弟謂曰。 "繼母慈仁。 吾兄弟不識恩養。雖母道。 我曹過惡深矣。" 遂將三弟。 詣南鄭獄。 乞就刑辟。 縣言之郡。 表異其母。 蠲除家徭。遣散四子。 許以修革。自後訓導愈明。 並爲良子。

詩。
移天已喪在惸惸。撫育諸孤倍所生.訓導愈明隆母道。終敎悔悟有賢名.
義子頑愚視若讎。那知慈母似鳴鳩.終然悔過爭歸獄。始信人心本不偸.

貞義刎死【漢】。
樂羊子妻。 不知何氏女。太守賜縑帛。 以禮葬之。號'貞義'。

禮宗【漢】。
皇甫䂓妻。 不知何氏女。卒妻年猶盛而容色美。董卓相國。 承其名。 聘以軿輜百乘馬二十匹。 奴婢錢帛充路。妻乃輕服詣門。 跪自陳請。 辭甚酸愴。使侍者拔刀圍之而謂曰。 "孤之威敎欲令四海風靡。 何有不行於一婦人乎?" 妻知不免。 乃立罵曰。 "君胡羌之種。 毒害天下。 猶未足耶? 妾之先人。 淸德奕世。 皇甫氏文武上才爲漢忠臣。君非其趣使走吏乎? 敢欲行非禮於爾君夫人耶?" 乃引車庭中。 以其頭懸軛。 鞭撲交下。妻謂持杖者曰。 "何不重乎? 速盡爲惠。" 遂死車下。 後人圖畵。 號曰。 '禮宗'。

詩。
淸德傳家節自純。肯從兇豎浼(吾)身.縱然四海皆風靡。威令難行一婦人.
不畏庭前列劒鋒。陳辭立罵儘從容.甘心一死全淸節。後世圖形號禮宗.

媛姜解梏【漢】。
盛道趙氏。 字媛姜。建安五年益部亂。 聚衆起兵。 事敗夫妻執繫當死。媛姜夜中告曰。 "法有常刑必無生望。 君可速潛逃。 建門戶。 妾自留獄代君塞咎。" 依法未從。 媛姜便解桎梏。 爲齎糧貨。 子年三歲。 使道携持而走。媛姜代道。 應對不失。 度道已遠。 乃以實告。 吏應時見殺。道父子會赦得歸。 感其義。 終身不娶。

詩。
淑人趙氏字媛姜。塞咎捐(生)最可傷.父子俱全門戶立。終身不娶義難忘.
盛道胡爲欲弄兵。渾家繫獄勢難生.賢媛代戮存宗祀。竹帛千秋有令名.

忠臣。
龍逄諫死。
桀鑿池爲夜宮。 男女雜處。 三旬不朝。關龍逄諫曰。 "人君謙恭敬信。 節用愛人。 故天下安。 而社稷宗廟固。今君用財若無窮。 殺人若不勝。 民惟恐君之後亡矣。人心已去。 天命不祐。 蓋少悛乎?" 龍逄立不去。 桀殺之。

詩。
夏桀荒淫毒下民。弗親朝政至三旬.輕生極諫言辭切。得似龍逄有幾人.

岳飛涅背【宋】。
樞密副使岳飛言'和議非計'。 秦禬惡之。忠孝出於天性。 愛養士卒。 行師有紀律。 能以少擊衆。 力平羣盜。建議恢復。 慨然以雪(國)恥爲已任。 金人畏之。 (至)呼爲父。 望其旗亦不敢近。嘗涅其背爲'盡忠報國'四字。 高宗賜'精忠旗'。 以嘉異焉。及聞其死。 天下寃之。

詩。
奸兇誤國欲和親。誓取中原有幾人.擧義復讎爲已任。王忠孝出天眞.
盡忠報國出丹誠。涅背還應字字明.愛養軍兵嚴紀律。古今誰得更齊名.

天祥不屈【宋】。
祥興戊寅。元張弘(範)潮陽丞相文天祥被執。 呑腦子不死。明年崖山。 令以書招張世傑曰。 "我不能相(扞)父母。 乃敎人叛父母乎?" 曰。 "國亡矣。 殺身爲忠。 誰復書之?" 曰。 "商非不亡。 夷齊不食周粟。 人臣各盡其心。 何論書不?" 改容。 送燕。 不食八日不死。丞相孛羅問曰。 "汝立二王。 做得甚事?" 曰。 "立君以存宗廟。 存一日則盡臣子一日(之)責。人臣事君。 如子事父母。 父母有疾雖甚不可爲。 豈有不下藥之理? 有死而已。 何必多言?" 繫獄月餘。 再問不屈。至元壬午賜死。 南向跪而死。衣帶中有贊曰. "孔曰成仁。 孟曰就義。 惟其義盡。 所以仁至。 讀聖賢書。 所學何事? 而今(而)後。 庶幾無愧。"

詩。
國亡家破見忠臣。仰藥從容欲殺身.重義輕生終不屈。高名千歲獨離倫.
繫獄艱辛至月餘。一身忠節不渝初.衣中有贊辭深切。無愧平生所學書.

提上忠烈【新羅】。
實聖王遣奈勿王子末斯欣。 質倭。 又遺斯欣卜好。 質高句麗。訥祗王立。 思得辨士往迎。 朴堤上請行。至句麗。 說王同歸。王喜曰。 "念二弟如左右臂。 今只得一臂。 奈何?" 堤上拜辭。 不入家。 至倭國。 紿(言)。 "王殺我父兄故逃來。" 倭王信之。堤上斯欣乘舟。 若游玩者。 倭人不疑。堤上潛還。 欲偕歸。堤上曰。 "俱去則恐謀不成。" 行旣遠。 倭王囚堤上。 問曰。 "何竊遣王子?" 對曰。 "臣是雞林臣。 欲成吾君之志耳。" 倭王怒曰。 "言雞林臣。 必具五刑。" 命剝脚下皮。 刈蒹葭使趨其上。 問曰。 "何國臣?" 曰。 "雞林臣。" 又使立熱鐵上。 問。 "何國臣?" 曰。 "雞林臣。" 倭王知不屈。 燒殺之。妻率三娘。 上鵄述嶺。 望倭國哭死。

夢周殞命【高麗】。
崔瑩辛禑。 興師功。 我太祖擧義回軍。 復立王氏。左使趙浚政堂鄭道傳密(直)使南誾等。 知天命人心所在。 欲推戴太祖。洪武壬申三月。 太祖墯馬。 守侍中鄭夢周。 以道傳等。 同心輔翼。 令臺諫劾流之。 遣金龜聯李蟠。 就貶所將殺之。義安大君․興安君李濟等。 白太祖曰。 "勢已急矣。 將若何?" 太祖曰。 "死生有命。 但當順受而已。" 謂麾下趙英珪曰。 "李氏之有功王室。 人皆知之。 今爲人所陷。 後世誰知? 麾下士其無効力者乎?" 英珪曰。 "敢不從命?" 英珪等要於路。 擊殺夢周。太祖因病篤。 至不能言。恭定大王卽位。 以專心所事。 不貳其操。 贈謚文忠。

詩。
麗季衰微泰運(升)。羣賢攀附摠飛騰.從容就死烏川子。啓我朝鮮節義興.
忠義由來不可堙。平時砥礪且無人.疾風勁草尤難見。須識高麗一个臣.

吉再抗節【高麗】。
洪武己巳冬。 注書吉再棄官歸家。歲在庚辰。 恭定大王在東宮召之。 至。啓于恭靖大王。 授奉常博士啓東宮辭職。恭定大王曰 "子之所言。 實關綱常。但召之者吾。 而官之者殿下也。 宜辭於殿下"。乃上書曰。 "擢第辛朝。 爲門下注書。臣無二主。 乞放歸田里。 終養老母。 以遂不事二君之志。" 明日。 恭靖大王御經筵。 問知經筵事權近曰。 "吉再抗節不仕。 未審古人何以處之乎?" 對曰。 "嚴光不屈。 光武從之。若求去。 則不如使之自盡其志之爲愈也。" 恭靖大王乃許歸。 仍復其家。永樂戊戌。 殿下卽位。 承恭定大王命。 官其子。 宣德丙午。 贈左司諫大夫

詩。
崧山王氣已成灰。眞主龍興泰運開.尙戀舊君全一節。飄然歸卧子陵坮.
亭亭高節凜秋霜。直欲追蹤餓首陽.聖代褒崇彰義烈。三韓億載樹綱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