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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13년(계축) / 4월(四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2.0004.TXT.0019
19일(을사)
맑음. 광주 흑석면(黑石面) 장자동(長者洞)에 사는 사문(斯文) 이희용(李熙容)씨 -호는 쌍석(雙石)으로 전의인(全義人)이다- 가 종인 영조(永祚)와 함께 와서〈노사선생비역통문(蘆沙先生碑役通文)〉을 보여주기에 기록한다.

〈노사기선생 비역소 통문(蘆沙奇先生碑役所通文)〉
선사(先師)이신 노사선생주 47)의 장지가 영광(靈光)의 황산(凰山)주 48) 기슭에 있는데, 묘지의 나무는 이미 한아름이나 자랐지만 아직 변변한 비석은 세우지 못했습니다. 비록 세상일의 다단함에서 연유한 것이라 할지라도 또한 인사가 고르지 않은 탓이기도 합니다. 당시 선생이 세상에 살아계실 때에는 세상을 주도하는 문장으로 춘추의 현미(顯微)와 천유(闡幽)의 붓을 잡으시고 한 세상을 풍미했습니다. 큰 비석이나 작은 비석이 종고(鐘鼓)의 소리를 품지 않음이 없었고, 산속 서재와 물가의 정자가 강한(江漢)의 물결에 젖지 않음이 없었습니다.주 49) 그런데 마침내 선생의 묘소로 하여금 지금까지 한 조각의 표석과 몇 칸의 제사지낼 집도 없게 하였으니, 어찌 연원있는 여러 집안이나 문하에서 공부한 후생들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3월 26일에 황산 아래에 비역소를 설치하고, 통문으로 아뢰니, 일흡경해(一吸傾海)주 50)라고 말하지 말지니, 또한 티끌모아 태산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밖에 선생의 학풍을 듣고 사숙한 사람이나 덕을 사모하여 의리로 향하는 자들은 반드시 칠십제자들보다 못하지 않을 겁니다. 또한 널리 알려주는 데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삼가 여러분께서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주석 47)노사선생(蘆沙先生)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을 말한다.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본관은 행주(幸州)이다. 성리학에 대한 깊은 궁리와 사색을 통해 이일분수(理一分殊)에 대한 독창적인 이론을 수립하였다. 한말 위정척사파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문도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지금의 경상남도 일원에도 폭넓게 포진해 있었다. 저서로는 ≪노사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주석 48)황산(凰山)
현재는 장성군 동화면 남산리에 해당된다.
주석 49)큰 …… 없었습니다
노사가 지은 기문이나 묘도문자를 말한 것이다. ≪노사집≫에 실린 글을 보면, 기문이 88편, 묘도문이 20편 등이다.
주석 50)일흡경해(一吸傾海)
한 번에 바다를 기울여 마심을 이른다.
十九日 乙巳
陽。光州黑石面長者洞。 斯文李熙容氏。 號雙石全義人。 與宗人永祚同來。 示以蘆沙先生碑役通文。 記之。
〈蘆沙奇先生碑役所通文〉
先師蘆沙先生之葬。 在於靈光凰山之麓。墓木已拱。 石無顯刻。雖緣世故之多端。 亦由人事之不齊也。當先生之世。 以命世之文。 操春秋顯微闡幽之筆。 陶鑄一世也。穹碑短碣。 莫不懷鐘鼓之音。 山齋水亭。 無不沾江漢之波。 而遂使先生之墓。 至今無一片表隧之石。 數椽享祀之屋。 豈非淵源諸家及門後生之責也? 以三月二十六日設役於凰山下。 玆庸文告。 非曰一吸傾海。 亦可以聚塵成山。 而其他聞風私淑。 慕德嚮義者。 必有不下於七十子之人矣。亦在廣告之如何耳。伏惟僉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