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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29년(기사) / 2월(二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14.0002.TXT.0022
22일(을해)
-전몽대연헌(旃蒙大淵獻)-.주 17) 맑음. 광주(光州) 매월리(梅月里)주 18)에 위문(慰問)하러 가다가 그 길을 잃어버려 이산동(泥山洞)주 19)에 이르렀다. 돌아서 매월리로 가는데, 길 앞에 날아갈 듯 한 모양의 기와집이 있어 들어가 보니 고(高) 제봉(霽峰)선생의 포충사(褒忠祠)주 20)였다. 원지기[院直]를 불러 장의(掌議)주 21)와 색장(色掌)주 22)이 있는지 없는지 물었다. 원지기가 답하기를, "오시지 않아서 원문(院門)을 닫아놓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원지기에게 명해서 문을 열어 봉심(奉審)하고 물러나와 압산(鴨山)주 23)에 이르렀다. 개동촌(開東村)주 24) 고창석(高昌錫) 집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현와(弦窩)주 25) 봉산정사(鳳山精舍)주 26)에 이르러 머물러 잤다.
주석 17)을해 -전몽대연헌-
순서로 보아 '병자 –유조곤돈-'이라야 한다. 착오는 이후 25일까지 계속된다.
주석 18)광주(光州) 매월리(梅月里)
현재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관할 하의 매월동을 가리킨다.
주석 19)니산동(泥山洞)
현재 광주광역시 서구 대촌동 관할 하의 이장동으로 추정된다.
주석 20)포충사(褒忠祠)
임진왜란 초기 호남 지방에서 의병 7천명을 모집하여 금산성 전투 및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 · 고종후 · 고인후 3부자와 유팽로 · 안영 등 5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액 사당이다.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 장성의 필암서원과 함께 훼손되지 않은 전라도 지방의 2개 서원 중 하나이다.
주석 21)장의(掌議)
성균관(成均館)이나 향교(鄕校) 재임(齋任)의 으뜸자리를 부르는 말이다.
주석 22)색장(色掌)
성균관(成均館), 향교(鄕校), 사학(四學) 등에 거처하던 역원(役員)을 가리킨다.
주석 23)압산(鴨山)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압촌마을을 가리킨다.
주석 24)개동촌(開東村)
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관할 하의 이장동으로 추정된다.
주석 25)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 1855~1934)의 호(號)이다. 고광선은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후손으로 광주(光州)에서 태어나 나도규(羅燾圭, 1826~1885),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광주 서창 봉산(鳳山)에 은거하였고, 1906년 엄이재(掩耳齋)를 세우고 후진교육에 정진하였다. 1919년 봉산정사를 건립하였다.
주석 26)봉산정사(鳳山精舍)
고광선(高光善)이 세운 정자로, 광주광역시 서구 용두동 봉황산 중턱에 있다.
二十二日 乙亥
【旃蒙大淵獻】。陽。作光州梅月里。 慰問之行。 迷其途。 至於泥山洞。回行梅月里。 前路有翼然之瓦家。 入見。 乃霽峰先生褒忠祠也。呼院直。 問掌議色掌之存否。 院直答。 "不來。 固閉院門." 命直啓門。 奉審以退。 至鴨山。到開東村高昌錫家點心。 至弦窩鳳山精舍留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