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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14년(갑인) / 8월(八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3.0009.TXT.0007
7일(을묘)
맑음. 〈퇴고서(退高書)〉를 보았다.

〈사단칠정후설(四端七情後說)〉
사단・칠정의 설에 대하여 전에는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사단과 다를 것이 없다'고 알았기 때문에 이와 기에 분속하는 것에 의심을 가져 "정이 발하는 데는 이기를 겸하고 선악이 있는 것인데, 사단에 대해서는 오로지 이(理)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는 것만을 가리켜 말하고, 칠정에 대해서는 진실로 이기를 겸하고 선악이 있는 것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만약 사단을 이에 분속하고 칠정을 기에 분속한다면, 이것은 칠정에 포함된 이(理)의 한 측면도 도리어 사단이 점유하게 되어, 선악이 있다는 것만 기에서 나오는 것 같으니, 이것은 말하는 사이에 의심이 없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자(朱子)가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라고 한 말을 반복하여 참고해 보고서야 끝내 부합하지 않음이 있음을 깨달았고,주 109) 이어 다시 생각해 보고서야 곧 저의 전일의 설에 상고한 것이 자세하지 못하고 살핀 것이 극진하지 못함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맹자가 사단을 논하면서 '나에게 있는 사단을 모두 확충할 줄을 알면'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사단이 있어 확충하고자 한다면 사단을 이가 발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참으로 당연합니다. 정자가 칠정을 논하면서 '정이 치성한 뒤에 더욱 방탕해지면 성이 깎이게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깨달은 자는 정을 단속하여 중도에 합당하도록 한다.'라고 하였는데, 칠정이 치성하고 더욱 방탕하기 때문에 단속하여 중도에 합당하도록 하고자 한다면, 칠정을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으로 살펴보건대 사단과 칠정을 이와 기에 분속하는 것은 본래 의심할 필요가 없으며, 사단과 칠정의 명칭과 뜻도 참으로 각기 그러한 이유가 있음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칠정이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사단과 애초 다르지 않습니다. 대개 칠정이 비록 기에 속하지만 이가 본래 그 안에 있습니다.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이 천명(天命)의 성(性)이고 본연의 체(體)이니, 어찌 기가 발한 것이므로 사단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보내 주신 편지에 "맹자의 희(喜), 순(舜)의 노(怒), 공자(孔子)의 애(哀)와 낙(樂)은 바로 기가 이를 따라 발한 것이어서 조금도 구애됨이 없다."는 말과 "각각 소종래(所從來)가 있다."는 등의 말은 모두 타당치 못한 줄로 압니다. 대체로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고 하였으니, 화는 바로 이른바 '달도(達道)'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보내오신 말씀대로라면 '달도'도 역시 기가 발한 것이라 하겠습니까?- 이것 또한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자(朱子)가 일찍이 말하기를 "천지의 성[天地之性]을 논할 때는 오로지 이(理)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기질의 성[氣質之性]을 논할 때는 이와 기를 섞어서 말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이발(理發), 기발(氣發)의 논이다."라고 하셨는데, 제[기대승(奇大升)]가 일찍이 이 말을 인용하여 "이가 발했다는 것은 오로지 이만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기가 발했다는 것은 이와 기를 섞어서 말한 것이다."라고 한 말이 이치에 대단히 어긋나지 않는데도 선생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말을 만든 것이 꼭 들어맞지 않아서 그런 것이 아닌지요?
보내 주신 변론에서 이른바 "정(情)에 사단과 칠정의 구분이 있는 것이 마치 성(性)에 본성(本性)과 기품(氣稟)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하신 말씀이 저의 의견과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어찌하여 살펴 주시지 않고 "근본은 같으나 추향(趨向)이 다르다."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기질의 성은 이와 기를 섞어서 말한 것이다."라는 것은 대개 본연의 성이 기질 속에 떨어져 있기 때문에 '섞어서 말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질의 성 가운데 선한 것은 바로 본연의 성이고, 따로 하나의 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저의 설에서 "칠정 중에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사단과 실상은 같으면서 이름만 다르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이치에 해가 되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사단 칠정 및 이기의 변론에 대하여 분명히 결단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논설이 자못 한편으로 치우쳤고, 말하는 사이에 실수가 없지 않았습니다. 이제 감히 요점만을 추려 논하여서 올리니, 비평해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타 온당치 못했던 문구에 대해서는 지금 일일이 분석할 수 없습니다. 쪼고 깎아내주길 바라는 것 또한 큰 것이 이미 같다면 작은 것은 굳이 힐난(詰難)하지 않아도 끝내 반드시 의견이 같아질 것입니다. 바라건대 분명한 회답을 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사단 칠정 총론(四端七情總論)〉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사람이 천지의 중(中)을 받아 태어남에 감응되기 이전에는 순수하고 지선하여 모든 이치가 갖추어 있으니, 이른바 성(性)란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이 성이 있으면 곧 이 형(形)이 있고 이 형이 있으면 곧 이 심(心)이 있어서 물(物)에 감응이 없을 수 없고, (물에 감응하여)주 110) 움직이면 성(性)의 욕(欲)이 나와서 선과 악이 이에 나누어지는데, 성의 욕이 곧 이른바 정(情)이라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몇 마디 말씀은 실은 〈악기(樂記)〉의 동(動)・정(靜)의 뜻을 해석한 것으로, 말은 비록 간략하나 이치는 구비되어 있으니, 성정(性情)의 설에 대하여 극진하여 남김이 없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러나 이른바 정(情)이란 희(喜)・노(怒)・애(哀)・구(懼)・애(愛)・오(惡)・욕(欲)의 정으로 ≪중용≫이 말한 희・로・애・락과 동일한 정입니다. 대개 이미 이 심(心)이 있어 물에 감응되지 않을 수 없다면, 정이 이기를 겸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물에 감응하여 움직임에 선악이 이에 나누어진다면, 정에 선악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희로애락이 발하여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은 곧 이른바 이(理)이고 선이며, 발하여 절도에 맞지 않는 것은 바로 기품(氣稟)의 치우침으로 말미암아 불선(不善)이 있게 된 것입니다.
맹자의 이른바 사단이란 것은 정이 이기를 겸하고 선악이 있는 데서 이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는 것을 떼어 내어 말한 것이다. 대개 맹자는 성선(性善)의 이치를 드러내어 밝히면서 사단을 가지고 말하였으니, 사단이 이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습니다.
주자가 또 말한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진실로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칠정은 이기를 겸하고 선악이 있으니, 그 발하는 바가 비록 오로지 기만은 아니지만, 기질(氣質)의 섞임이 없지 않으므로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한 것이니, 이는 바로 기질지성(氣質之性)이란 설과 같습니다.
대개 성이 비록 본래 선하지만 기질 속에 떨어지게 되면 편벽되고 지나침이 없지 않기 때문에 '기질의 성'이라 하고, 칠정이 비록 이기를 겸하였지만, 이는 약하고 기는 강하여 이가 기를 통섭할 수 없어 악에 흐르기 쉬우므로 '기가 발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하여 절도에 맞는 것은 곧 이에서 발하여 선하지 않음이 없으니, 사단과 애초부터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사단은 이가 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맹자의 뜻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확충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니, 학자가 사단의 발함에 대해 깊이 체인하여 확충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칠정은 이기의 발함을 겸하였으나 이의 발함이 혹 기를 주재할 수 없거나 기의 유행이 도리어 이를 가릴 수도 있으니, 학자가 칠정의 발함에 대해 성찰하여 잘 다스리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이것은 또 사단과 칠정의 명의(名義)에 각각 소이연(所以然)한 것이 있는 것이니, 학자가 진실로 이로 말미암아 구하게 되면 거의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혹문(或問)≫을 보건대, 희・노・애・오・욕이 도리어 인의(仁義)에 가깝다는 것에 대해 주자는 '진실로 서로 비슷한 곳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서로 비슷한 곳이 있다고만 하고, 서로 비슷한 것을 정확히 말하지 않은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논자(論者)들은 대부분 희・로・애・락을 인・의・예・지에 짝지으니, 주자의 뜻에 과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대개 칠정과 사단의 설은 각각 하나의 뜻을 발명하는 것이니, 혼합하여 한 가지 설로 만들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이것 또한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석 109)
원문의 '終各有未合者'는 '終覺有未合者'를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주석 110)
일기원문에 '感於物'이 빠져있기에 보충하여 번역하였다.
七日 乙卯
陽。看〈退高書〉。

四端七情後說。
四端七情之說。 前此認得'七情之發而中節者。 與四端不異'。 故有疑於理氣之分屬。 以爲"情之發也。 兼理氣有善惡。 而四端則專指其發於理。 而無不善者言之。七情則固指其兼理氣。 有善惡者 言之焉。若以四端屬之理。 七情屬之氣。 則是七情理一邊。 反爲四端所占。 而有善惡云者。 似但出於氣。 此於言語之間。 不能無可疑者也。" 然以朱子。 "所謂四端是理之發。 七情是氣之發者。" 參究反覆。 終各有未合者。因復思之。 乃知前日之說。 考之有未詳。 而察之有未盡也。孟子論四端。 以爲'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 夫有是四端。 而欲其擴而充之。 則四端是理之發者。 是固然矣。程子論七情。 以爲'情旣熾。 而益蕩。 其性鑿矣。 故覺者。 約其情。 使合於中。' 夫以七情之熾而益蕩。 而欲其約之以合於中。 則七情是氣之發者。 不亦然乎? 以是而觀之。 四端七情之分屬理氣。 自不須疑。 而四端七情之名義。 固各有所以然。 不可不察也。然而七情之發而中節者。 則與四端初不異也。盖七情雖屬於氣。 而理固自在其中。 其發而中節者。 乃天命之性。 本然之體。 則豈可謂是氣之發而異於四端耶?【來書謂。 孟子之喜。 舜之怒。 孔子之哀與樂。 是氣之順理而發。 無一毫有碍。 及各有所從來等語。 皆覺未安。夫發皆中節謂之和。 而和卽所謂達道也。若果來說。 則達道亦可謂是氣之發乎?】此又不可不察也。朱子嘗曰。"論天地之性。 則專指理言。 論氣質之性。 則以理與氣雜而言之。 此正理發氣發之論也。" 大升曾引此語。 以爲"是理之發者。 專指理言。 是氣之發者。 以理與氣雜而言之"者。 無甚碍理。 而不蒙察納。 無乃下語不著而然耶? 來辨。 所謂"情之有四端七情之分。 猶性之有本性氣稟之異"者。 與鄙見似不異。 未知其何以不察。 以爲本同趨異耶? 夫所謂氣質之性。 以理與氣雜而言之者。 蓋以本然之性。 墮在氣質之中。 故謂雜而言之。然氣質之性之善者。 乃本然之性。非別有一性也。然則鄙說謂'七情之發而中節者。 與四端同實而異名'云者。 疑亦未害於理也。第於四端七情理氣之辨。 不能斷置分明。 故其說頗倚於一偏。 而辭氣之間。 亦不能無失。今敢撮而論之。 仰稟批誨焉。其他詞句之未當者。 今不可一一剖析。以祈鐫鑿。 亦以大者旣同。 則其小者無俟於强詰。而終歸於必同也。伏乞明賜回諭。幸甚幸甚。

四端七情總論。
朱子曰 "人受天地之中以生。 其未感也。 純粹至善。 萬理具焉。 所謂性也。然人有是性則卽有是形。 有是形則卽有是心。 而不能無感於物。 (感於物)而動。 則性之欲者出焉。 而善惡於是乎分矣。 性之欲。 卽所謂情也。" 此數言者。 實釋樂記動靜之義。 語雖約。 而理則該。 其於性情之說。 可謂竭盡無餘蘊矣。然其所謂情者。 喜怒哀懼愛惡欲之情也。 與中庸所謂喜怒哀樂者同一情也。夫旣有是心而不能無感於物。 則情之兼理氣者。 可知也。感於物而動。 而善惡於是乎分。 則情之有善惡者。 亦可知也。喜怒哀樂發皆中節者。 卽所謂理也善也。而其發不中節者。 則乃由於氣稟之偏而有不善者矣。若孟子之所謂四端者。 則就情之兼理氣有善惡上。 剔出其發於理而無不善者之言也。蓋孟子發明性善之理。 而以四端爲言。 則其發於理而無不善者。 又可知也。朱子又曰 '四端是理之發者'。 固可無疑矣。七情兼理氣有善惡。 則其所發雖不專是氣。 而亦不無氣質之雜。 故謂是氣之發。 此正如氣質之性之說也。蓋性雖本善。 而墮於氣質。 則不無偏勝。 故謂之氣質之性。 七情雖兼理氣。 而理弱氣强。 管攝他不得。 而易流於惡。 故謂之氣之發也。然其發而中節者。 乃發於理而無不善。 則與四端初不異也。但四端只是理之發。 孟子之意。 正欲使人擴而充之。 則學者於四端之發。 可不體認而擴充之乎? 七情兼有理氣之發。 而理之所發。 或不能以宰乎氣。 氣之所流。 亦反有以蔽乎理。 則學者於七情之。 可不省察以克治之乎? 此又四端七情之名義。 各有所以然者。 學者苟能由是以求之。 則亦可以思過半矣。且 ≪或問≫看得來。 喜怒愛惡欲。 卻似近仁義。 朱子曰。 '固有相似處' 其曰。 固有相似處。 而不正言其相似。 則意固有在也。今之論者。多以喜怒哀樂配仁義禮智。 未知於朱子之意。 果何如也。蓋七情四端之說。 各是發明一義。 恐不可滾合爲一說。此亦不可不知者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