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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15년(을묘) / 9월(九日)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4.0007.TXT.0029
29일(신축)
맑음. 목포(木浦) 현기봉(玄起鳳)주 63)의 백전(白戰)주 64) 운(韻)을 사용하여 지었다.

야사를 국화 이슬 내리는 가을에 짓자니,(野史欲修菊露秋)
심양의 옛일에 다시 근심이 더해지네.(潯陽古事更添愁)
혼은 노악(露岳)에 노닐며 남쪽 가지[南枝] 가리키고,주 65)(魂遊露岳指南枝)
마음은 문산(文山)주 66)에 간절하여 누대를 내려오지 않네.(心切文山不下樓)
옛 도읍의 강물 끌어다 씻어내기 어려우니,(難挽舊都河以洗)
만백성 눈물 공연히 흐르는 모습 차마 볼까.(忍看萬姓淚空流)
임금 섬길 길 없으니 살아도 산 것 아니라,(事君無路生非活)
어느 날에나 상유(桑楡)주 67)의 만절을 거둘려나.(何日桑楡晩見收)
주석 63)현기봉(玄基奉, 1855~1924)
자는 치도(致道), 호는 학파(鶴坡), 본관은 연주이다. 영암 출신으로, 아버지는 인묵(麟默)이고, 어머니는 인천인 이필전(李弼銓)의 딸이다. 1891년에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영암 향교 장의와 영암군 사립구림학교장 등을 역임했다. 1935년에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아들 현준호와 함께 수록되었다. 에는 목포에서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주석 64)백전(白戰)
무기(武器)가 없이 맨손으로 싸우는 싸움. 시인(詩人)들이 글재주를 다투는 싸움. 백전(白戰)은 송나라 구양수(歐陽脩)가 처음 시도했던 것으로서, 예컨대 눈[雪]에 대한 시를 지을 경우 눈과 관련이 있는 학(鶴)・호(皓)・소(素)・은(銀)・이(梨)・매(梅)・로(鷺)・염(鹽)・동곽(東郭) 등 어휘의 사용을 금하는 것이다. 그 뒤에 다시 소식(蘇軾)이 빈객들과 함께 이를 회상하며 시도해 본 적이 있는데, 그때의 시 가운데 "당시의 규칙을 그대들 준수하라. 손으로만 싸워야지 무기를 잡으면 안 될지니.[當時號令君聽取, 白戰不許持寸鐵]"라는 구절이 있다.(≪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 권34 〈취성당설(聚星堂雪)〉)
주석 65)남쪽 가지[南枝]
남쪽의 매화가지라는 뜻으로, 중국 남송(南宋) 육개(陸凱)가 강남의 매화가지 하나를 꺾어 장안(長安)에 있는 친구 범엽(范曄)에게 보낸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육개(陸凱)는 강남의 매화가지와 함께 시 한 수도 보냈는데, 그 시에 "역참의 사자 만나 꽃을 꺾어서, 북쪽 장안 내 임께 보내볼거나. 강남 땅 둘러봐도 있는 게 없어, 봄소식 한 가지만 부쳐보내오.[折花逢驛使, 寄與隴頭人. 江南無所有, 聊寄一枝春.]"라고 하였다.(≪태평어람(太平御覽)≫ 권970 〈형주기(荊州記)〉)
주석 66)문산(文山)
중국 남송 말의 충신 문천상(文天祥 1236~1283)의 호(號)이다. 문산의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수도 임안(臨安)이 원(元)에 함락된 뒤에도 단종(端宗)을 받들고 근왕군(勤王軍)을 일으켜 원군(元軍)과 싸우다가 상흥(祥興) 원년(1278) 원나라 군대에 사로잡혔다. 투옥 3년 만에 원 나라의 회유를 거부하고 살해된 그는 옥중에서 '정기가(正氣歌)'를 지어 자신의 굳은 의지를 드러냈다.
주석 67)상유(桑楡)
해가 지는 저녁, 또는 노년에 만회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後漢) 때의 장수인 풍이(馮異)가 적미(赤眉)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나섰다가 처음 싸움에서 대패하고, 얼마 뒤에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적미의 군대를 격파하였는데, 황제가 친히 글을 내려 위로하기를, "처음에는 회계(會稽)에서 깃을 접었으나 나중에는 민지(澠池)에서 떨쳐 비상하니, 참으로 '동우에 잃었다가 상유에 수습하였다.[失之東偶, 收之桑楡]'라고 할 만하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 동우는 해가 뜨는 새벽을, 상유는 해가 지는 저녁을 뜻한다.(≪후한서(後漢書)≫ 권17 〈풍이열전(馮異列傳)〉)
二十九日 辛丑
陽。用木浦玄起鳳白戰韻。

野史欲修菊露秋。潯陽古事更添愁.魂遊露岳指南枝。心切文山不下樓.難挽舊都河以洗。忍看萬姓淚空流.事君無路生非活。何日桑楡晩見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