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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17년(정사) / 4월(四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6.0007.TXT.0015
15일(정축)
흐리고 비. ≪논노어(論魯語)≫주 72)의 '기체지설(記禘之說)'을 보았다. 체(禘)란 왕자(王者)의 대제(大祭)로, 왕이 이미 시조(始祖)의 사당을 세우고, 또 그 시조가 나온 제[所自出之帝]를 추존하여, 시조 사당에서 제사를 모시며 시조에 배향하는 것이다.

'사호지기장(斯乎指其掌)'주 73)의 소주(小註)에서 황씨(黃氏, 황간)가 이르길, "천리의 자연에 근거한 것을 인(仁)이라 하고, 인심의 지극한 사랑에 형상화된 것을 효(孝)라고 하며, 진실무망(眞實無妄)한 것을 성(誠)이라고 하고, 주일무적(主一無敵)한 것을 경(敬)이라 하니, 인・효・성・경과 무릇 제사가 모두 그러하다. 신명과 사귀는 자는 통달할수록 그 마음이 더욱 돈독해지고 보본추원(報本追遠)주 74)이 깊어지니, 인효(仁孝)와 성경(誠敬)의 지극함이 아니라면 알거나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말이 정미하고 심원하니 어찌 사람들이 알 수 있겠는가? 하물며 또 노나라에서 마땅히 숨겨야 할 것임에랴.주 75) 보본추원의 깊은 것으로 인효와 성경의 지극함을 다하고, 이 마음에 나아가서 사물의 이치를 보충하면, 어떤 것이 내 마음의 성을 밝히지 못할 것이며, 어떤 것이 바르게 하지 못할 것인가?"라고 했다.

〈≪예의속집(禮疑續輯)≫주 76)의 부제주 77)설(祔祭說)〉
미호(渼湖)주 78)가 말하길, "졸곡(卒哭)주 79)한 다음날 부(祔)를 하는 것은 차마 하루라도 돌아갈 곳이 없게 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만약 연상(練祥, 소상)을 기다린 후에 부를 하고자 한다면, 그 차마 하루라도 돌아갈 곳이 없게 하지 못하는 뜻에서 이미 크게 늘어지는 일은 없겠는가? 우옹(尤翁)도 또한 '다음날 부(祔)할 수 없다면 또 다음날일지라도 무방하다'는 말을 하였다."라고 했다. 노주(老洲)주 80)는 말하길, "졸곡하고 부를 하는 것은 주나라 예이다. 연(練)을 하고 부하는 것은 은나라 예이다. 그러나 상(祥, 대상)을 하고 부하는 것은 예에 근거할 것이 없다."라고 했다.
주석 72)논노어(論魯語)
≪노논어(魯論語)≫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 때에는 ≪노논어(魯論語)≫, ≪제논어(齊論語)≫, ≪고문논어(古文論語)≫ 등 3가(家)의 논어가 있었는데, 현재 전해지는 ≪논어≫는 ≪노논어≫에 기초한 것이다. 줄여서 ≪노론(魯論)≫이라고도 한다.
주석 73)사호지기장(斯乎指其掌)
≪논어≫ 〈팔일편(八佾篇)〉에 나온 말로 "혹자가 체 제사의 내용을 묻자, 공자가 '알지 못하겠다. 그 내용을 아는 자는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여기에다 올려놓고 보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그 손바닥을 가리켰다.[或問禘之說, 子曰不知也. 知其說者之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 指其掌.]"라고 하였다.
주석 74)보본추원(報本追遠)
조상의 덕을 추모하여 자기의 근본을 잊지 않고 제사를 지내며 은혜를 갚는 것을 이른다.
주석 75)하물며 …… 될 것임에랴
≪논어≫ 〈팔일편〉 집주(集註)에 "先王報本追遠之意, 莫深於褅, 非仁孝誠敬之至, 不足而與此, 非或人之所及也, 而不王, 不褅之法, 又魯之所當諱者, 故以不知, 答之."라고 하였다.
주석 76)예의속집(禮疑續輯)
1890년경에 이응진(李應辰)이 여러 학자들의 예설을 정리하여 편찬한 놓은 책이다.
주석 77)부제(祔祭)
삼년상을 마친 뒤에 신주를 그 조상의 신주 곁에 모실 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주석 78)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의 호이다. 김원행의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 본관은 안동이다. 아버지는 승지 제겸(濟謙)이며, 어머니는 밀양 박씨로 이조판서 권(權)의 딸로, 이재(李縡)의 문인이다.
주석 79)졸곡(卒哭)
삼우(三虞)가 지난 뒤에 지내는 제사. 사람이 죽은 지 석 달 만에 오는 첫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가려서 지낸다.
주석 80)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 1763~1833)을 말함. 자는 사경(士敬), 호는 노주(老洲),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아버지는 대제학 재순(載純)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이천보(李天輔)의 딸로, 예조판서 재소(載紹)에게 입양되었다.
十五日 丁丑
陰雨。看 ≪論魯語≫記禘之說。禘者王者之大祭也。 王者旣立始祖之廟。 又推始祖所自出之帝。 祀之於始祖之廟。 而以始祖配之也。
'斯乎指其掌' 小註。 黃氏曰。 "根於天理之自然。 謂之仁。 形於人心之至愛。 謂之孝。眞實無妄。 謂之誠。 主一無敵。 謂之敬。 仁孝誠敬。 凡祭皆然。交於神明者。 愈達則其心愈篤。 報本追遠之深。 則非仁孝誠敬之至。 莫能知之行之也。其爲說精微深遠。 豈或人所能知? 況又魯所當諱乎。以報本追遠之深。 而盡仁孝誠敬之至。 卽此心而充事物之理。 何所不明吾心之誠。 何所不格哉?"
禮疑續輯祔祭說。
渼湖曰。 "卒哭明日祔。 爲不忍一日無所歸也。若欲待練而後祔。 則其於不忍一日無所歸之義。 無已太緩乎? 尤翁亦有明日不能祔。 則又明日無妨之語矣。" 老洲曰。 "卒哭而祔。 周禮也。練而祔。 殷禮也。祥而祔。 禮無所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