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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13년(계축) / 12월(十二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2.0012.TXT.0024
24일 을사
흐림. 석헌(石軒)주 104)의 비문을 봉심했다.

〈석헌 유선생 신도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행 통훈대부 홍문관 전한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정간공(靖簡公) 석헌(石軒) 유선생(柳先生)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
순창의 서쪽 20리에 있는 강천산(剛泉山)주 105)의 남쪽에 이른바 '삼인대(三印臺)'라는 것이 있는데, 곧 참판인 석헌 유옥(柳沃)공과 충암(沖菴) 문간공(文簡公) 김정(金淨) 및 눌재(訥齋) 문간공(文簡公) 박상(朴祥)이 인끈을 걸어놓고 상소문을 봉한 곳이다. 지금까지 수백 년에 이르도록 지나는 사람들은 반드시 법식으로 삼았다.
정종이 기미년(1799)에 박공에게 사제문(賜祭文)을 내렸는데 이르길, "경이 담양(潭陽) 고을을 맡아, 같은 덕을 가진 이와 이웃이 되었네. 삼인대(三印臺)야말로 만고에 닳아지지 않으리라."라고 했다. 이에 앞서 군의 인사들이 삼인대 아래에 비석을 세우고, 도암(陶菴) 이재(李縡) 선생이 이에 명(銘)을 썼는데 이르길, "삼선생의 기풍은 늠름하여 영원하리."라고 하였고, 또 "선생의 의론은 비록 한때는 좌절되었다 할지라도 마침내 백 년의 뒤에는 펴지게 되었네."라고 하였다.
오호라! 성조(聖朝)의 포가(褒嘉)와 선정(先正)의 명송(銘頌)이 이처럼 지극하니, 공이 김정・박상 두 현인과 더불어 이름을 나란히 하고 영원토록 명성이 수립될 것은 백 대를 기다린 후에도 의혹이 없을 것이다.
행장을 살피건대, 공의 자는 계언(啓彦)이고, 본관은 문화(文化)로, 고려의 대승(大承) 차달(車達)주 106)이 그 선조이다. 고조부는 부사(府使) 운(沄)이고, 증조부는 훈련부사(訓練副使) 면(沔)이며, 조부는 생원(生員) 인흡(仁洽)이다. 부는 훈도(訓導) 문표(文豹)이고, 모는 성주(星州) 현씨(玄氏) 이호(以浩)의 딸이다. 생원공(生員公)은 단종(端宗) 6신(六臣)주 107)인 충경공(忠景公) 유성원(柳誠源)과 6촌 형제간이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호남(湖南)으로 내려왔다.
공은 성화(成化)주 108) 정미년(1487)에 태어나, 15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21세에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내직(內職)으로는 홍문관(弘文館) 전한(典翰), 응교(應敎)를 역임하고, 외직(外職)으로는 무안현감(務安縣監), 종성부사(鍾城府使)를 역임한 것이 그 이력이다. 무안(務安)은 부모님 봉양을 위해 청한 것이고, 종성(鍾城)은 남곤(南袞)주 109)을 거슬려서이다.
공이 관적(官籍)이 이름이 오른 것은 실로 중종(中宗) 연간에 있었다. 충암(冲菴)주 110)이 일찍이 헌납(獻納)으로써 합계(合啓)주 111)를 올려 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주 112)를 없애고 기신재(忌辰齋)주 113)를 혁파(革罷)할 것을 청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고 수개월이나 미뤄졌다. 이에 성균관 유생들과 육조(六曹)의 관원들이 연달아 소장(疏章)을 올려 대간(臺諫)의 논의에 따를 것을 청하였고, 승정원(承政院) 또한 계(啓)를 올리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유옥(柳沃)이 오기를 기다려 시비(是非)를 명백히 가린 다음에 하자."라고 했다. 공을 임금이 중(重)하게 의지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붓과 먹이 얼어서 다 기록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주석 104)석헌(石軒)
유옥(柳沃, 1487~1519)의 호이다. 자는 계언(啓彦), 본관은 문화(文化)로, 유인흡(柳仁洽)의 손자이다. 그 아버지가 영암의 월출산(月出山)에 기도한 후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다. 1507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1509년 홍문관수찬을 거쳐 이듬해 무안현감이 되었다. 이때 담양부사 박상(朴祥),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과 연명으로 단경왕후(端敬王后, 중종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고, 아울러 신씨를 폐위시킨 훈신(勳臣)들의 죄를 규탄하는 소를 올렸다.
주석 105)강천산(剛泉山)
전북 순창군 팔덕면에 있는 산으로, 높이 584m이며, '호남의 소금강'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강천사와 삼인대가 있다. 삼인대의 비는 1744년 4월에 세운 것으로, 홍여통(洪汝通), 윤행겸(尹行謙), 유춘항(遊春恒) 등 군의 선비들이 발기하여 이재(李縡)가 비문을 짓고, 민우수(閔遇洙)가 비문의 글씨를 썼으며 유척기(兪拓基)가 전서(篆書)를 썼다.
주석 106)차달(車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태조 때 군량(軍糧) 수송에 공을 세워 대승(大丞)에 제수되고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호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파평윤씨족보(坡平尹氏族譜)≫와 ≪문화유씨족보(文化柳氏族譜)≫에 의하면, 고려 태조 때의 개국 2등 공신 12인 중의 한 사람으로 태조로부터 사명(賜名)을 받아 문화유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주석 107)단종(端宗) 6신(六臣)
조선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던 날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여섯 명의 신하.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浮) 6신(六臣)을 가리킨다.
주석 108)성화(成化)
중국 명나라의 제8대 황제(1464~1487)의 연호이다.
주석 109)남곤(南袞)
1519년 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김정 등 신진 사림파를 숙청한 뒤, 좌의정을 거쳐 1523년 영의정이 되었다. 죽은 뒤 문경(文景)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나 이후 세력이 커진 사림파의 탄핵을 받아 1558년(명종 13) 관작과 함께 삭탈 당했다. 문장(文章)에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으나, 사화를 일으킨 것이 문제가 되어 후대 사림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저서로는 ≪유자광전(柳子光傳)≫, ≪지정집(止亭集)≫이 있다.
주석 110)김정(金淨)
1514년에 순창군수 재직시 왕의 구언(求言)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 후에 복권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사(賜死)되었다.
주석 111)합계(合啓)
조선시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이 서로 연명하여 논죄에 관해 임금에게 글을 올리는 것을 말한다.
주석 112)내수사(內需司)의 장리(長利)
내수사(內需司)는 궁중에서 쓰는 쌀・베 및 잡물(雜物) 등과 노비(奴婢)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곳. 장리(長利)는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받을 때 5할의 이식을 가산해서 받는 것. 왕실의 사사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가 있었다.
주석 113)기신재(忌辰齋)
기일 忌日)에 불공을 드려 그 명복을 비는 일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일 忌日)이 되면 절에서 재를 열었기 때문에 시속에서는 휘일 諱日)을 승재(僧齋)라고 한다. 국가에서도 선왕후(先王后)의 기일이 되면 역시 시속에 따라 승재를 행했는데, 중종(中宗) 병자년(1516)에 이르러 비로소 기신재를 혁파했으니, 기묘명현이 건의한 데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二十四日 乙巳
陰。奉審石軒碑。

石軒柳先生神道碑。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知經筵。 義禁府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摠府都摠管。 行通訓大夫。 弘文館典翰。 知製敎。 兼經筵侍講官。 春秋館。 編修官。 靖簡公。 石軒柳先生。 神道碑銘。 幷序。
淳昌之西二十里。 剛泉南有所謂三印臺。 卽故贈參判石軒柳公沃。 與沖菴金文簡淨。 訥齋朴文簡公祥。 掛印封疏處也。至今數百年。 過者必式。正宗己未賜祭朴公。 有曰。 "卿任潭州。 聞德爲隣。三印其坮。 萬古不磷。" 先是郡之人士。 立碑坮下。 而陶菴李先生。 實銘之曰。 "三先生之風。 凜乎其不死。" 又曰。 "先生之議。 雖屈於一時。 而終伸於百載之下。" 嗚呼! 聖朝之褒嘉。 先正之銘頌。 如此其至。 則公之與金朴兩賢。 齊名永樹風聲者。 可以俟百世而不惑矣。按狀。 公字啓彦。 籍文化。 高麗大承車達。 其鼻祖也。高祖府使沄。 曾祖訓練副使沔。 祖生員仁洽。考訓導文豹。 妣星州玄氏以浩女。生員公。 與端宗六臣忠景公誠源爲再從。 丙子禍流落湖南。公生于成化丁未。 十五中司馬。 二十一魁文科。內則弘文館典翰應敎。 外則務安縣監鍾城府使。 其履也。務安則爲養而乞也。 鍾城以忤南袞也。公之通籍。 實在於中廟盛際。冲菴嘗以獻納合啓。 請罷內需司長利革忌辰齋。 而未蒙允。 拖至數月。館儒與六曹連章。 請從坮言。 政院又爲陳啓。 上曰。 "待柳沃之來。 明辯是非。 然後爲之。" 公之爲上所倚重如此。

筆凍墨氷。 不得盡記而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