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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일(무인)(二十二日 戊寅)

서암일기(棲巖日記) / 1913년(계축) / 1월(正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2.0001.TXT.0036
22일(무인)
약간 맑음. 주인 책상 위에 새 책자 한권이 있기에 내가 물어보니 주인이 말하길, "이것은 무장(茂長)주 13) 암치(巖峙)주 14)에 사는 강대직(姜大直)주 15)의 선조(先祖)인 수사(水使)의 ≪물기재집(勿欺齋集)≫주 16)이다."라고 하면서 보여주었다. 내 생각에 그 수사는 곧 수륙대장(水陸大將)인데, '물기(勿欺)'로써 호를 삼은 것은 반드시 '임금을 섬김에 있어 속이지 않고, 범(犯)하지 않는다'는 뜻을 위주로 하여 칭한 것이리라.
책을 열어 봉심(奉審)하였는데, 곧 심석장(心石丈) 송병순(宋秉珣)주 17)씨가 책머리에 서문을 한 것이다. 여기에 증전(曾傳, 대학)에서 말한 '무자기(無自欺)'주 18)라는 것으로 학문을 하는 관건(關鍵)의 첫머리로 삼았으니, 내가 속으로 그것을 의심하였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하니 비로소 나의 견해가 천박함을 알았다. 나는 항상 '무자기(毋自欺)' 세 글자를 성의(誠意)의 공부로 여기면서 '물기야(勿欺也)'주 19)라는 것이 성의 공부에서 나온 것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때문에 이러한 의심이 있었던 것인데, 의심이 풀리게 된 나머지에 공경히 전편을 읽어보니, 강수사는 참으로 수사 중에 도를 아는 자로다. 수사의 휘는 응환(膺煥)주 20)이다.
주석 13)무장(茂長)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이다. 무장(茂長)은 무송(茂松)과 장사(長沙)가 합쳐진 지명으로, 고창현과 흥덕현을 합쳐서 고창군을 이루고 있다.
주석 14)암치(巖峙)
전라북도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를 말한다.
주석 15)강대직(姜大直, 1886~1930)
호는 이온재(而溫齋)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강희맹(姜希孟)의 후손으로, 경상좌수사를 역임한 물기재(勿欺齋) 강응환(姜膺煥)의 후손이다. 고창군 성송면 암치리에서 태어났으며, 1914년 독립의군부 종사관의 칙지(勅旨)를 받고, 이때부터 비밀 결사 독립운동 활동을 시작하여 주로 상해임시정부에 보내는 군자금 모금 운동을 하였고, 1919년 사종형 강대식(姜大湜)과 함께 암치 보통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고창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할 때는 평의원으로 참여하여 재단 형성에 큰 공을 세웠다.
주석 16)물기재집(勿欺齊集)
1912년에 강응환의 후손 강대직(姜大直)이 편집・간행하였다. 권두에 송병순(宋秉珣)의 서문, 권말에 기우만(奇宇萬)・강천수(姜天秀) 등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61수, 가(歌) 2편, 권2에 전문(箋文) 10편, 장계(狀啓) 4편, 서(書) 5편, 기(記) 3편, 잡저 15편, 부록에 장계 7편, 유서(諭書) 2편 및 잡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주석 17)송병순(宋秉珣, 1839~1912)
자는 동옥(東玉), 호는 심석재(心石齋)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이다.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로 종형인 송병선(宋秉璿)과 함께 큰아버지 송달수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공부하였다. 1865년(고종 2) 서원철폐령이 내려 만동묘가 헐리게 되자 반대 상소를 올렸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투신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15권의 문집과 ≪독서만집(讀書漫錄)≫, ≪학문삼요(學問三要)≫ 등이 있다.
주석 18)무자기(無自欺)
≪대학장구≫ 〈성의장(誠意章)〉에 "그 뜻을 참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 속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所謂誠其意者, 毋自欺也]"라는 구절이 나온다.
주석 19)물기(勿欺)
자기의 속마음을 속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자로(子路)가 임금님 섬기는 도리를 묻자, 공자가 "자기를 속이지 말고 임금님 앞에서도 바른말을 하라.[勿欺也而犯之]"라고 충고한 말이 ≪논어≫ 〈헌문(憲問)〉에 나온다.
주석 20)강응환(姜膺煥, 1735~1795)
자는 명서(命瑞), 호는 물기재(勿欺齋),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강희맹(姜希孟)의 9세손으로 전라도 무송(茂松, 지금의 고창(高敞))에서 태어났다. 문과에 합격하여, 창성부사(昌城府使)・동래부사 등을 지냈다. ≪물기재집≫ 2권 1책이 전한다.
二十二日 戊寅
陽微。主人案上有新冊子一卷。余問則主曰。 "此乃茂長巖峙姜大直先祖水使 ≪勿欺齋集≫。" 因出示之。余意。 其水使卽水陸大將。 而以勿欺爲號。 則必以事君勿欺也。 以犯之意。 爲主而称之矣。開卷奉審。 則心石丈宋秉珣氏序以弁卷。 以曾傳所云'無自欺'者。 爲學之關鍵爲首。 則余竊疑之。反而思之。 始覺余之所見。 淺也。余常以'毋自欺'三字。 爲誠意之工夫。 而不知'勿欺也'者。 自誠意上得來也。故有此疑。 而疑釋之餘。 敬讀全篇。 則姜水使。 眞水使中知道乎。水使諱膺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