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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암일기(棲巖日記)
  • 1914년(갑인)
  • 4월(四月)
  • 17일(정유)(十七日 丁酉)

서암일기(棲巖日記) / 1914년(갑인) / 4월(四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3.0004.TXT.0017
17일(정유)
맑음. ≪하서선생집(河西先生集)≫을 봉심(奉審)하였다.

대명(大明) 무종황제(武宗皇帝) 정덕(正德) 5년, 즉 국조 중종대왕(中宗大王) 5년 경오(庚午, 1510) 가을 7월 임인(壬寅) 19일 신시(申時)에 의릉참봉(義陵參奉)인 김녕(金齡)-자 인노(仁老)- 와 부인 옥천 조씨(玉川趙氏) -안음(安陰)주 30)훈도(訓導) 적(勣)의 여식- 가 장성현(長城縣) 대맥동리(大麥洞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처음 태어났을 때부터 형용(形容)이 단정하고 기우(氣宇)가 굉후하였다. 이름을 인후(麟厚), 자를 후지(厚之), 호를 하서(河西)라고 한다. 관학 유생 홍준원(洪準源) 등이 문묘에 배향할 것을 소청하니 윤허하였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 영경연(領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를 가증(加贈)하도록 명하고 또 부조(不祧)주 31)를 명하였다. 겨울 10월에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고쳐 내렸다. -'도덕이 높고 학문이 깊다[道德博聞]'는 뜻으로 '문(文)'이라 하고 '정도로 남을 승복시켰다[以正服人]'는 의미로 '정(正)'이라 한다.-

선생 5세. '넓고 아득한 우주에 큰 사람이 산다[宇宙洪荒大人居]'라는 시구를 지었다.


6세. 천자(天字)로 시를 지었다.
모양은 둥글어 지극히 크고 또 현묘한데,(形圓至大又窮玄)
까마득히 아득하게 주위를 둘렀도다.(活活空空繞地邊)
덮여 있는 그 가운데 만물을 용납하니,(覆幬中間容萬物)
기나라 사람은 어인 일로 무너질까 걱정했던가.(杞人何爲恐頽連)

8세. 관찰사 조원기(趙元紀)와 더불어 연구(聯句)를 지었다. 조공이 글귀를 먼저 불렀다. "완산에 이틀 밤을 묵으니, 이원(梨園)주 32) 풍경을 만끽 하도다."라고 하자, 선생이 응하기를 "풍패(豊沛)주 33) 땅에 머물러, 매정의 달빛을 한껏 보네."라고 하였다. 조공이 또 말하기를 "이 아이의 시와 글씨는 두보 백락천 왕희지의 무리요" 하니, 선생이 화답하기를 "선생의 처사는 소신신(召信臣), 한연수(韓延壽)주 34)와 같은 분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오백년의 기간이 이미 지났으니, 하늘이 반드시 성인의 일어남을 기다릴 것이요, 수천 년만에 황하가 맑아졌으니, 땅에서도 응당 세상에 뛰어난 호걸이 나올 것이로다'라는 구절이 있다.

9세주 35). 복재(服齋) 기준(奇遵)이 내사필 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는데, 항상 잘 보관하여 상자속의 보배로 삼았다.

10세.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선생을 찾아가 뵙고 소학(小學)을 배웠다.

11세. 소학을 배우면서부터 한 마음으로 학문에 뜻을 두어 과거공부에 급급하지 않았고, 항상 단정히 앉아 있기를 좋아하며 말도 경솔히 하지 않았다. 강송을 하다가 뜻에 맞는 곳을 만나면 문득 흔연히 만족하게 여겼다.

13세. '시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 없다'[不學詩, 無以立]주 36)는 말은 곧 성인의 교훈임을 생각하고, 드디어 ≪시경≫을 가져다가 침잠하여 익히고 읽어서 극히 정숙하게 되도록 힘썼다. 국풍 같은 것은 대주(大註), 소주(小註)까지 천 번이나 읽었다. 필법 또한 심히 힘을 쏟지는 않았지만, 엄밀하고 부윤하여 진초(眞草)와 전예(篆隷)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도달했다.

14세. 여흥윤씨(驪興尹氏)에게 장가들었는데, 현감 임형(任衡)의 따님이다.

15세. 아들 종룡을 낳았다.

18세. 신재 최공 –이름은 산두- 을 찾아가 뵙고 학문을 논하자 최공이 깊이 탄복하여 '추수빙호[秋水氷壺]'라고 칭찬하였다.

19세. 칠석시에서 장원을 하였다.


22세. 성균관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23세. 조부 훈도공(訓導公)의 상을 당했다.

24세. 반궁(泮宮, 성균관)에서 노닐며 퇴계 이선생과 더불어 강학하였다. 당시 기묘사화를 겪은 뒤라 사기(士氣)가 저상하여 도학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꺼렸는데, 선생이 퇴계를 한번 보고 서로 깊이 뜻이 맞아 끊임없이 강론하고 탁마해서 매우 이택(麗澤, 여택)주 37)의 유익함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선생은 시로서 송별했는데, '부자는 영남의 빼어난 분이시라', '이두(李杜)주 38)의 문장에 왕조(王趙)주 39)의 글씨로세'라는 구절이 있다.

27세. 여름에 반궁(성균관)에서 노닐적에 신재 최공의 부음을 듣고 가마(加麻)주 40)했으며, 기일을 만나면 반드시 치재(致齋)주 41)하였다.

28세. 아들 종호가 태어나다.

29세. 글을 지어 최신재에게 제를 올렸다.

31세.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 제4명(第四名)으로 합격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로 분속되었다.


32세. 여름 4월에 호당(湖堂)주 42)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주 43)하였다. 선생이 함께 뽑힌 열두 사람과 더불어 수계(修禊)하고, 그 이름을〈호당수계록(湖堂修禊錄)〉이라 하였다. 겨울 10월에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에 임명되었다.

33세. 7월에 홍문관 저작으로 승배(陞拜)되었다.

34세. 봄에 모재선생의 부음을 듣고 가마하고 기일에는 역시 치재하였다. 여름 4월에 홍문관박사 세자시강원설서에 승배(陞拜)되었다. 춘궁(春宮, 동궁으로 뒤에 인종을 이름)이 몸소 그려서 보낸 묵죽도(墨竹圖)를 받았다. 춘궁은 본래 기예가 많았으나, 일찍이 남에게 나타내 보인 적이 없었다. 오직 선생에게 직접 그린 묵죽도 1점을 하사하고 뜻을 보이며 선생에게 화축(畫軸)에 제시(題詩)를 명하였다. 이에 선생이 시를 지었다.

뿌리와 가지, 마디와 잎새가 모두 다 정미하니,(根枝節葉盡精微)
바위를 친구 삼은 뜻 여기에 들어있네.(石友精神在範圍)
비로소 성신(聖神)주 44)이 조화에 짝함을 깨닫노니,(始覺聖神侔造化)
천지와 한 덩어리여서 어김이 없으시네.(一團天地不能違)

그 뒤에 또 ≪주자대전≫1질을 하사하셨다. 6월, 홍문관부수찬에 승배(陞拜)되었다. 차자(劄子)를 올려 일을 말하였는데, 기묘제현의 신원(伸寃)을 극론(極論)한 것이다. 가을 8월, 말미를 청해 귀근(歸覲)하였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경세(經世)의 뜻이 있어 처음 관직에 나아갔을 때[釋褐之時]주 45) 김안로(金安老)를 척퇴(斥退)시키고, 김문경(金文敬)과 이문원(李文元) 제현(諸賢)을 점차 휘정(彙征, 등용)주 46)하여 양이 회복되는 조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척리(戚里)주 47)가 서로 알력을 일으켜 시사(時事)가 도리어 우려됨이 있자, 선생은 홀로 깊이 염려하고 그것을 분명히 알아 부모님의 연세가 높음을 들어 간절히 귀양(歸養)주 48)을 청하여 물러났다. 퇴계 이선생이 시를 지어 송별했다. 겨울 12월,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임명되고, 춘추관(春秋官) 직함은 그대로 겸하였다. 23년 갑진 중종대왕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36세. 여름, 제술관(製述官)으로 부름을 받고 나아갔으나, 곧바로 임소(任所)로 돌아왔다. 가을 7월, 인종대왕의 승하소식을 들었다. 마침내 병으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37세. 여름 6월, ≪효경간오발(孝經刊誤跋)≫을 저술하였다. 가을 7월, 인조대왕의 초기일(初朞日)에 산에 들어가 곡(哭)하였다. 초하루는 효릉(孝陵)주 49)의 휘신(諱辰)인데 매번 이때마다 술을 가지고 난산(卵山)주 50)에 들어가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며 밤새 통곡하였다. 또 일찍이 〈유소사(有所思)〉를 지었다. 시에 이르길

임금 나이 바야흐로 삼십이요(君年方向立)
내 나이는 삼기주 51)가 되려 하였네.(我年欲三紀)
새 즐거움 반도 다 못 누렸는데,(新歡未渠央)
한 번 이별함이 시위 떠난 화살같네.(一別如弦矢)
내 마음 변할 줄 모르는데,(我心不可轉)
세상일은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이네.(世事東流水)
젊은나이에 해로할 짝 잃었으니,(盛年失偕老)
눈 어둡고 머리털과 이빨도 쇠했네.(目昏衰髮齒)
덧없이 살기 무릇 몇해였던가,(泯泯幾春秋)
지금까지 아직도 죽지 않았네.(至今猶未死)
백주(柏舟)주 52)는 황하의 가운데에 있고,(柏舟在中河)
남산엔 고사리가 또 나왔을 것이네.주 53)(南山薇作止)
도리어 부럽도다. 주나라 왕비는(却羨周王妃)
살아 이별하여 권이(卷耳)주 54)를 노래하였네.(生離歌卷耳)

그 처완(悽惋)하고 격렬한 정을 각 사구(詞句)간에 나타냄이 이와 같다.

38세. 봄에 성균관 전적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가을에도 공조정랑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시를 지어 문인들에게 보여주었다.

천지 사이에 두 사람이 있으니,(天地中間有二人)
공자가 원기주 55)라면 주자는 진수일세.(仲尼元氣紫陽眞)
아무쪼록 잠심하여 딴 길에 현혹 말고,(潛心勿向他岐惑)
쇠잔한 이 늙은이 병든 몸을 달래다오.(慰此摧頹一病身)

39세. 순창 점암촌(鮎巖村)주 56)에 우거하였다. 연구(聯句)에 이르길,

매화꽃핀 등불 아래 술 마시니,(梅花燈下飮)
취한 자 같고 또 배우 같네.(如醉又如俳)

라는 구(句)에서 선생이 시와 술에 마음을 의탁한 은미한 뜻을 알 수 있다.

40세. 봄 2월에 ≪대학강의발≫을 저술하였다. 여름에 성균관 전적으로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가을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겨울 10월에 참봉공(參奉公, 아버지)주 57)의 상을 당해 집 서쪽 원당동에 장사지냈다. 이때부터 호를 담재(湛齋)라 하였다.

42세. 조부인(趙夫人, 어머니)주 58)의 상을 당했다.

44세. 가을 9월에 홍문관 교리를 제수받았으나 전(箋)을 올려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고, 끝내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가을 9월에주 59)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제수되었는데 전(箋)을 올려 극력 사양했다. 겨울 10월에 임금이 특별히 본도에 명하여 양식을 지급하도록 하였으나, 전을 올려 사양했다.

47세.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주역을 읽고(讀周易)〉시에 차운하였다. 이때 화담은 심학(心學)으로써 당대의 으뜸으로 여겨졌는데, 일찍이 〈주역을 읽고(讀周易)〉시를 지은 바 있다.

감(坎)과 이(離)가 작용 속에 숨어 형체에 앞서 존재하고,(坎离藏用有形先)
유행하는 데 이르러야 도가 비로소 전해지네.(到得流行道始傳)
복희의 괘는 대략 참된 상을 본뜬 것이고,(羲畫略摸眞㡳象)
문왕의 주역은 또 그림자 속의 하늘을 말한 것이네.(周經且說影中天)
물(物)로부터 연구해서 바야흐로 조화를 알고,(硏從物上方知化)
근원에서부터 더듬어 비로소 현묘를 깨닫는다.(搜自源頭始破玄)
글로는 말 밖의 뜻을 다 말하진 못하나니,(書不盡言言外意)
공자가 다만 위편을 끊은 것만이 아니라네.주 60)(仲尼非獨絶韋編)

선생은 이 시를 보고서 "성인의 말씀은 곧 천지의 도(道)이니 영(影)이라고 할 수 없다."라고 하고 드디어 이 시에 차운하였다.

혼연한 전체는 생보다 먼저 있어,(渾然全體有生先)
대화주 61)가 유행하여 물과 함께 받았느니.(大化流行物共傳)
복희의 괘를 미루어 변화를 밝히었고,(羲畫推移明變化)
문왕의 역을 분석하여 인천을 증험했네.(周經剖析驗人天)
공부가 극진한 곳에서 바야흐로 묘함을 알고,(工夫盡處方知妙)
체인이 깊을 때 다시 현묘함을 깨닫는다.()體認深時更覺玄
상(象)과 계사(繫辭)를 세워서 언의를 다했으니,(立象繫辭言意盡)
일찍이 장성주 62)께서 위편을 끊은 뜻을 생각하노라.(憶曾將聖絶韋編)

또 한 수(首)를 지었다.

차례로 공부함은 선후가 있나니,(次第工夫有後先)
공문(孔門)에서도 일찍이 무얼 먼저 전하냐 하였네.주 63)(孔門曾說孰先傳)
참된 앎은 보통 행하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니,(眞知不外常行地)
아래로 배워 위로 하늘에 도달하지 않음이 없네.주 64)(下學無非上達天)
성인의 말씀 분명한데도 믿지 않으니,(未信聖人言的的)
학자들 현현(玄玄)주 65)에 미혹될까 근심스럽네.(飜愁學者惑玄玄)
본원의 정미처로 곧바로 나아간다고 하면,(本源徑造精微處)
서책을 폐하는 말폐(末弊)를 그 어찌하리요.(末弊其如廢簡編)

대개 화담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계도(啓導)하는 방식이 아래에서부터 배워가는 것을 소홀히 하고 돈오(頓悟)의 지름길로 이끌 우려가 있으므로, 선생이 이를 깊이 걱정하여 마침내 운(韻)을 따라 바로잡은 것이다.

48세.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저술했다.

49세. 겨울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과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강론했다. 이때 고봉이 일재(一齋) 이항(李恒)을 찾아가서 ≪태극도설≫을 강론했는데, 일재는 태극과 음양을 일물(一物)로 여겼고 고봉은 그르다고 하여 종일토록 논란하였으나 귀일(歸一)할 수 없었다. 이때 고봉이 와서 선생을 뵙고 변란(卞難)의 득실을 가지고 질문하였는데, 선생이 고봉이 옳다고 하고서, 온종일 강론하고 파하였다.

50세. (선생이) 〈일재에게 보내는 편지(與李一齋書)〉에서 태극과 음양이 일물(一物)이라는 잘못을 논하였다. 일재는 고봉에게 편지를 보내서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는 뜻을 극론하고 (이 극론한 뜻을) 선생에게 보내서, 고봉에게 전해주기를 요구했다. 선생은 그 편지를 보고 일재에게 소간(小柬, 짧은 편지)을 보냈는데, 그 대략에 "기군에게 보낸 간찰은 감히 의논할 것은 아니나 대개 이(理)와 기(氣)는 혼합(混合)되어 천지의 사이에 가득 찬 것으로, 모두 그 속으로부터 나와서 각기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태극이 음양을 떠났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도기(道器)주 66)의 구분은 한계가 없을 수 없으니, 태극과 음양을 일물(一物)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태극이 음양을 탄 것은 사람이 말을 탄 것과 같다.'고 했으니, 결코 사람을 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겨울에 기고봉(奇高峯)주 67)과 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주 68)을 강론하였다. 당시에 고봉이 물러나 고향에 머물고 있었는데, 매번 선생에게 나아가 의리를 토론하였다. 퇴계(退溪)의 사단칠정(四端七情),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주 69)을 깊게 의심하고는 선생에게 와서 질정하였다. 선생이 그를 위해 분석해서 논변하였는데 그것이 매우 통투(通透)하고 정밀(精密)하였다. 고봉이 선생에게 얻은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선생이 죽은 후에 고봉이 퇴계와 사단칠정, 이기호발의 잘못을 강론하였는데, 대부분 선생의 뜻을 서술하여 거의 수만 마디의 말에 달했다. 세상에 전하는 〈퇴고사칠왕복서(退高四七往復書)〉가 이것이다.

나정암(羅整庵)주 70)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주 71)을 논하였다. 나정암의 이름은 흠순(欽順)이다. 그가 지은 ≪곤지기(困知記)≫에서 말하기를 "도심(道心)은 성(性)이요 인심(人心)은 정(情)이다. 지극히 정밀한 체(體)는 볼 수 없기 때문에 '미(微)'라고 하고, 지극한 변화의 용(用)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위(危)'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소재(穌齋) 노수신(盧守愼)이 그 설을 힘써 주장하여 "도심은 적연부동(寂然不動)하고, 인심은 감이수통(感而遂通)한다."주 72)라고 하였다. 선생께서는 그것을 매우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서 말하기를 "성인께서 말씀하신 인심, 도심이라고 하는 것은 대개 동처(動處)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죽은 뒤에 퇴계와 고봉이 모두 선생의 설을 종주로 삼아 노수신(盧守愼)의 설을 힘껏 공격했지만, 선생이 논한 모든 것들이 산일되어 전하지 않는다.

51세. 봄 정월 경오(庚午) 16일에 집 안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3일전 무진(戊辰) 일에 선생께서 기가 평안치 않아서 약물을 올렸더니 집안 식구들에게 말하기를 "내일 상원(上元)주 73)에 공경히 제수를 갖추라." 하고는 자녀들에게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기사(己巳)일에 선생께서 병든 몸으로 새벽에 일어나 관을 정돈하고 꼿꼿하게 앉아서 제사 지낼 시간을 기다렸다. 인하여 "내가 죽은 후에 을사(乙巳)년 이후의 관작(官爵)을 쓰지 말라."고 명했다. 다음날 경오(庚午)일에 병이 위독하자 자리를 바르게 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였다.
선생께서 어렸을 때에 눌재(訥齋) 박상(朴祥)주 74)이 일찍이 보고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예로부터 기인은 끝이 좋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이 아이는 마땅히 끝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그 말을 징험했다고 한다. 3월 계유(癸酉)일에 장성현(長城縣) 대맥동(大麥洞) 원당산(願堂山)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대명 무종 43년(1564) 갑자에 옥과의 유생들이 영귀정사(詠歸亭祠)를 세웠다.
목종황제 융경 4년, 선조대왕 3년 경오년(1570)에 순창의 유생들이 화산사(華山祠)주 75)를 세웠다.
신종황제 만력 18년, 경인년(1590)에 장성의 기산(岐山)주 76)에 서원을 세웠는데, 문인 변성온(卞成溫)주 77) 등이 창건한 것이다.
의종황제 숭정 갑신 후 15년, 효종대왕 9년 무술년(1658)에 전라도 유생들이 상소하여 서원에 사액해주길 청하였고 윤허를 받았다.
19년, 현종대왕 3년 임인년(1662)에 '필암서원'이라고 사액을 하고 예관을 보내어 사제(賜祭)주 78)하였다.
25년, 무신년(1668) 봄에 특별히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 의금부사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세자좌빈객'을 증직하였다.
26년, 기유년(1669) 가을에 '문정(文靖)'이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도덕이 있고 널리 아는 것을 일러 문(文)이라 하고, 관후하고 화락하여 천수를 마치는 것을 일러 정(靖)이라 함.-
29년, 임자년(1672)에 신도비명이 이루어졌는데,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찬술하였다.
32년, 숙종대왕 원년 을묘년(1675)에 묘표(墓表)가 이루어졌는데, 문곡 김수항(金壽恒)이 찬술하였다.
128년, 영종대왕 47년 신묘년(1771)에 전라도 유생 양학연(梁學淵)주 79) 등이 상소를 올려 선생을 문묘에 종향해주길 청하였으나 관철되지 못했다.
134년, 정종대왕 원년 정유년(1777)에 묘지명이 이루어졌는데, 본암 김종후(金鍾厚)가 찬술한 것이다.
143년, 병오년(1786) 3월에 예관을 보내 사제(賜祭)할 때, 왕[정조]께서 희릉(禧陵)주 80)과 효릉(孝陵)주 81)에 전배(展拜, 참배)를 하면서 하교하길 "옛 유신(儒臣) 김인후의 계우(契遇)주 82)는 천고에 드문 것이라고 할 만하다. 본릉을 배알한 후에 어찌 표명하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해조(該曹)에 명하여 날을 잡고 치제(致祭)하게 했다.
같은 해 8월에 팔도의 유생인 박영원(朴盈源) 등이 상소를 올려 문묘에 종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153년, 병진년(1796) 여름에 방외유생 김무순(金懋淳) 등이 상소를 올려 문묘에 종향해주길 청하였다. 7월에는 팔도 유생 채홍신(蔡弘臣) 등이 상소를 올려 선생과 조문열(趙文烈, 趙憲), 김문경(金文敬, 金安國)을 문묘에 종향해주길 청하였다. 8월에는 경외 유생 이규남(李奎南) 등이 상소를 올려 선생과 조문열을 문묘에 종향해주길 청하였고, 9월에는 관학 유생 심래영(沈來永) 등이 상소를 올려 선생을 문묘에 종향해주길 청하였으며, 관학 유생 이광헌(李光憲) 등도 상소를 올려 문묘에 종향해주길 청하였다.
주석 30)안음(安陰)
조선시대 경상도에 속한 현으로, 현재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 일대이다.
주석 31)부조(不祧)
천조(遷祧)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묘제(廟制)에 있어서 일정한 대수(代數)가 지나면 조(祧)라고 하여 그 신주(神主)를 옮기는데, 공덕이 특출한 인물의 신주는 이를 특별히 취급하여 대수가 지나도 천조하지 않는다. 이를 부조 또는 불천(不遷)이라 한다.
주석 32)이원(梨園)
당명황(唐明皇)이 악공을 양성하던 곳이다.
주석 33)풍패(豊沛)
한 고조의 고향이 풍패인데, 여기서는 이조 왕실의 선대 본관이 전주이므로 전주를 풍패라 한 것이다.
주석 34)소신신(召信臣)・한연수(韓延壽)
소신신・한연수 두 사람은 모두 한 나라 시대의 지방 수령으로서 백성에게 은혜스러운 정치를 하여 이름이 있었다.
주석 35)9세
본문에는 십세(十歲)로 되어 있으나, 뒤에 또 십세가 있기 때문에 9세로 정정하였다.
주석 36)시를 …… 없다
≪논어≫ 〈계씨편(季氏篇)〉에 나오는 말이다.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가 공자로부터 특별한 가르침은 받지 않았으나, 백어가 뜰을 지나갈 때 공자께서 "시를 배우지 많으면 남과 말을 할 수 없다[不學詩 無以立]"라고 하시므로 물러나서 시(詩)를 배웠다고 한다.
주석 37)여택(麗澤)
이택. 붕우(朋友)가 함께 학문을 강습하여 서로 이익을 줌을 뜻한다. ≪주역(周易)≫ 태괘(兌卦)에 "두 못이 연결되어 있는 형상이 태(兌)이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붕우 간에 강습한다."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주석 38)이두(李杜)
이백과 두보를 가리킨다.
주석 39)왕조(王曺)
왕희지와 조맹부를 가리킨다.
주석 40)가마(加麻)
문인(門人)이 스승의 상(喪)에 심상(心喪)을 입는 표시로 겉옷에 삼베 조각을 붙이는 것이다.
주석 41)치재(致齋)
제관이 된 사람이 사흘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한 일을 멀리하는 것을 이른다.
주석 42)호당(湖堂)
연소한 문관들 중에 특히 문학에 뛰어난 사람을 선출하여 휴가를 주어 특별히 학업을 연마하게 한 서재로서, 세종 8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제도를 만들고, 성종 때에는 구용산(舊龍山)에 있던 폐사(廢寺)를 수리하여 독서당으로 하고, 이를 또 호당(湖堂)이라고도 하였다.
주석 43)사가독서(賜暇讀書)
조선시대에 국가의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고 문운(文運)을 진작시키기 위해서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주석 44)성신(聖神)
≪맹자≫ 〈진심 하(盡心下)〉에 나온 '성(聖)'과 '신(神)'의 의미로 보인다. "대인으로서 자취 없는 화의 경지에 들면 성인이라고 하고, 성인으로서 헤아려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르면 신인이라고 한다.[大而化之之謂聖。聖而不可知之之謂神.]"라는 맹자의 말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서 정자(程子)가 "성인의 위에 다시 한 등급의 신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非聖人之上, 又有一等神人也.]"라고 해설하였다.
주석 45)석갈(釋褐)
석갈은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을 하는 일을 이르던 말로 천민이 입는 갈의를 벗는다는 뜻에서 유래한다.
주석 46)휘정(彙征)
휘(彙)는 유(類)라는 뜻으로 ≪주역≫ 태(泰)괘에, "모여를 뽑아서 그 유로써 함께 가니 길하다." 하였는데, 이는 군자가 등용되면 혼자만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유까지 다 데리고 간다는 뜻이다.
주석 47)척리(戚里)
척리는 옛날 중국 장안에 있던 동리 이름으로, 한대(漢代) 임금의 내척(內戚)・외척(外戚)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리하여 차츰 임금 외척의 대명사가 되었다.
주석 48)귀양(歸養)
고향에 돌아가거나 돌아와서 어버이를 봉양하는 것을 뜻한다.
주석 49)효릉(孝陵)
효릉은 제12대 인종(1515~1545)과 인성왕후(1514~1577) 박씨의 능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주석 50)난산(卵山)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에 있는 산이다. 현재 이곳에는 하서 선생의 충절을 기념하기 1843년에 세운 난산비(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1호)가 세워져 있다.
주석 51)삼기(三紀)
36년. 1기(紀)는 12년이다.
주석 52)백주(柏舟)
≪시경≫ 〈용풍(邶風)·백주(柏舟)〉를 말한다. 위나라 태자 공백이 일찍 죽자, 그의 처 공강이 재가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므로 친정어머니가 개가시키려 하니, 공강이 백주라는 시를 지어 맹세하고 지조를 지켰다 한다.
주석 53)남산엔 …… 것이네
세월이 흘러 해가 바뀐 것을 의미한다. ≪시경≫ 〈소아(小雅)·채미(采薇)〉에 "고사리를 뜯고 고사리를 뜯음이여. 고사리가 또한 나왔을 것이다. 돌아가고 돌아감이여. 해가 또한 저물 것이다.[采薇采薇, 薇亦作止. 曰歸曰歸, 歲亦莫止.]"라고 하였다.
주석 54)권이(卷耳)
≪시경(詩經)≫ 〈주남(周南)·권이(卷耳)〉편을 말한다. 후비(后妃)가 권이, 곧 도꼬마리를 캐면서 집을 떠나 있는 남편을 그리는 마음을 표현한 시이다.
주석 55)
서암일기 원문에는 '원기(元氣)' 두 글자가 빠져 있어 넣었다.
주석 56)순창 점암촌
현재 전북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마을을 이른다.
주석 57)참봉공(參奉公)
김인후의 아버지로, 참봉 김령(金齡)이다.
주석 58)조부인(趙夫人)
김인후의 어머니로, 옥천 조씨이다.
주석 59)가을 9월에
연보에는 '45세'로 나온다.
주석 60)공자 …… 아니라네
공자가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워낙 많이 읽은 탓에 책을 맨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하는 고사가 전한다.(≪사기≫ 〈공자세가(孔子世家)〉)
주석 61)대화(大化)
천지조화를 말한다.
주석 62)장성(將聖)
공자를 가리킨다.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의 "우리 선생님은 실로 하늘이 이 세상에 내려 성인이 되게끔 하신 분이다.[固天縱之將聖]"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논어≫ 〈자한(子罕)〉)
주석 63)공문 …… 하였네
자유(子游)가 "자하(子夏)의 제자 아이들은 쇄소(灑掃), 응대(應對), 진퇴(進退)는 제법이지만 그런 것은 말단인 일이다. 근본이 되는 일을 시켜 보면 보잘것없을 것이다."라고 하자, 자하가 이 말을 듣고, "아, 자유는 잘못이다. 군자의 도에 관해서 무엇을 먼저 전하고 무엇을 뒤로 미루어 게을리하겠는가? 제자를 가르치는 데는 초목의 경우와 같이 종류에 따라서 분별되는 것이다.[噫, 言游過矣. 君子之道, 孰先傳焉, 孰後倦焉. 譬諸草木, 區以別矣.]"라고 하였다.(≪논어≫ 〈자장(子張)〉)
주석 64)아래로 …… 없네
사람의 일을 배우고 나아가 자연의 법칙을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의 "나는 하늘을 원망하지도 않고 사람을 탓하지도 않는다. 아래로는 인간의 일을 배우고 위로는 하늘의 이치를 터득하려고 노력할 따름인데, 나를 알아주는 분은 아마도 하늘일 것이다.[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라는 공자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근사록≫ 〈존양(存養)〉에 "성현의 수많은 말씀도 그 요점을 살펴보면 단지 사람으로 하여금 놓친 마음을 단속해서 다시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그 마음을 찾아서 위를 향해 나아간다면 그것이 곧 공자가 말씀하신 대로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하늘의 이치를 체득하는 일이 될 것이다.[聖賢千言萬語, 只是欲人將已放之心, 約之, 使反復入身來, 自能尋向上去, 下學而上達.]"라는 정명도의 말이 나온다.
주석 65)현현(玄玄)
도가에서 말하는 지극히 심원한 경지를 말한다. ≪도덕경(道德經)≫에 "현묘하고 현묘하여 모든 묘한 현상이 나오는 문이 된다.[玄之又玄, 衆妙之門]"라고 하였다.
주석 66)도기(道器)
도는 무형(無形)의 추상적인 도리를 뜻하고, 기는 유형(有形)의 구체적인 사물을 뜻하는 중국 철학 용어이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형이상의 것을 도라 하고, 형이하의 것을 기라고 한다.[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라고 하였다.
주석 67)기고봉(奇高峯)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을 말한다.
주석 68)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이른바 사칠(四七) 논쟁으로서 퇴계가 정지운(鄭之雲)의 천명도(天命圖)를 보고 이를 수정함을 계기로 하여 먼저 기고봉(奇高峰)과 논쟁이 벌어졌고, 이어 우계・율곡 사이의 논쟁으로 확대되었으며, 인심(人心) 도심(道心)설과 같이 명종(明宗) 14년경 이후부터 전개된 조선 중기(中期)에 있어서의 심성 논쟁의 중심 문제였다.
주석 69)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이황(李滉)은 "이(理)와 기(氣)가 때에 따라 발하는데, 사단(四端)은 이가 발하여 기가 따르는 것[理發而氣隨之]이고 칠정(七情)은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氣發而理乘之]이다."라고 하여 이(理)와 기(氣)가 서로 발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주희(朱熹)의 "사단은 이가 발한 것[四端理之發]이요, 칠정은 기가 발한 것[七情氣之發]이다."라는 학설에서 근거한 것이다.
주석 70)나정암(羅整菴)
명나라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나흠순(羅欽順, 1465~1547)으로, 정암은 그의 호이고, 자는 윤승(允升)이다. 효종(孝宗) 홍치(弘治) 6년(1493)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출사하고 세종 때 이부 상서에 발탁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향리에 은거한 채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주자는 만물은 기(氣)로 성립되고, 이(理)가 그 기를 통제하며 이는 기에서 독립된 것으로 보았다. 이에 반해 나정암은 기를 떠난 이는 없다고 하여 이기일체론(理氣一體論)을 제창하였다. 그의 저술인 ≪곤지기(困知記)≫ 권상(上) 3장(章)에 "도심은 적연부동한 것으로, 지극히 정밀한 체(體)를 볼 수 없기 때문에 은미하다. 인심은 감이수통하는 것으로, 지극히 변하는 용(用)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위태하다.[道心寂然不動者也, 至精之體不可見故微, 人心感而遂通者也, 至變之用不可測故危.]"라는 말이 나온다.
주석 71)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순(舜)임금이 우(禹)에게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은미하니 오직 정밀하게 살피고 한결같이 지켜서 진실로 그 중정(中正)을 견지하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고 했다는 16자를 말한다. 송유(宋儒)들은 이를 '16자 심전[十六心傳]'이라 일컬으며, 요(堯), 순, 우 세 성인이 서로 전한 심법(心法)으로서 개인의 도덕적 수양과 국가를 다스리는 원칙으로 생각하였다.(≪서경≫ 〈大禹謨〉; 임계유(任繼愈)의 ≪중국철학사≫)
주석 72)도심은 …… 하다
≪주역≫ 〈계사전 상(繫辭傳上)〉에 나오는 말이다. "역은 생각이 없고 하는 것도 없어 적막하게 움직이지 않다가, 느낌이 있으면 마침내 천하의 일을 통한다.[易无思也无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 天下之故]"라고 하였다.
주석 73)상원(上元)
음력 정월 15일을 말하는데, 7월 15일 백중(百中)의 중원(中元)과 10월 15일의 하원(下元)을 합해서 삼원(三元)이라고 한다.
주석 74)박상(朴祥, 1474~1530)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1515년 담양 부사로 재직할 때에 순창 군수 김정과 함께 상소하여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하고, 또한 임금을 협박하여 국모를 내쫓은 박원종 등 세 훈신에게 죄주기를 청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오림역(烏林驛)에 유배되었다.
주석 75)화산사(華山祠)
전북 순창군 유등면 괴정리에 소재. 지방 유림의 공의로 신말주(申末舟), 김정(金淨), 김인후(金麟厚),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등의 덕행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박상(朴祥), 유옥(柳沃), 신공제(申公濟), 양사형(楊士衡), 김시서(金時瑞) 등을 추가배향 하였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하서 김인후를 모신 곳은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순창의 화산사(華山祠),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이다.
주석 76)기산(岐山)
장성군 황룡면 기산리로, 현재 장성군 장성읍 기산리에 해당. 현재 필암서원은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소재한다.
주석 77)변성온(卞成溫, 1530~1614)
자는 여윤(汝潤), 호는 호암(壺巖),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고창출신으로, 동생이 변성진(卞成振)이다. 김인후의 문인으로, 장성에 필암서원을 건립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주석 78)사제(賜祭)
임금이 신하가 죽었을 때, 칙사를 보내어 죽은 신하에게 제사를 지내 주던 일을 말한다.
주석 79)양학연(梁學淵, 1708~1776)
자는 사우(士愚), 호는 지촌(支村), 본관은 제주이다. 김인후의 사위인 양자징(梁子澂)의 현손으로, 1728년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머물면서 장의를 지냈다. 양자징은 담양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의 아들이다.
주석 80)희릉(禧陵)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1491~1515) 윤씨의 능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주석 81)효릉(孝陵)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인종과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의 능이다.
주석 82)계우(契遇)
현군(賢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나 정의가 돈독함을 이른다.
十七日 丁酉
陽。奉審 ≪河西先生集≫。

大明武宗皇帝。 正德五年。 卽國朝中宗大王五年庚午。 秋七月壬寅十九日。 申時。 義陵參奉 金齡。 字仁老。 配玉川趙氏。 安陰訓導勣女。 生先生于長城縣大麥洞里第。先生始生。 形容端正。 氣宇宏厚。 名麟厚。 字厚之。 號河西。館學儒生洪準源等。 疏請從享文廟。 蒙允。命加贈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又命不祧。冬十月。 改賜諡文正。【'道德博聞'曰'文'。 '以正服人'曰'正'。】

先生五歲。 有'宇宙洪荒大人居'之句。

六歲。 以天字爲題曰。
形圓至大又窮玄。活活空空繞地邊.覆幬中間容萬物。杞人何爲恐頽連.

八歲。與趙觀察元紀聯句。趙公呼曰。 "信宿完山飽。 梨園之風景" 先生應曰。 "滯留豐沛饜。 梅亭之月光。" 趙公又曰。 "兒郞詩筆杜白王右軰。" 先生曰。 "先生處事召吉延壽群。" 又有'五百年之期已過。 天必待聖人之興。數千載之河方淸。 地應生命世之傑'之句。

九歲。奇服齋遵。 贈以內賜筆一枝。 常葆藏以爲篋笥之珍。

十歲。往拜慕齋金先生。 受小學。

十一歲。自受小學。 一意向學。 不汲汲於擧子業。 常喜穆然凝坐。 不輕言語。講誦到意會處。 輒欣然自得。

十三歲。以爲不學詩。 無以立。 卽聖訓也。遂取詩經。 沈潛玩讀。 務極精熟。如國風之類。 竝大小註。 讀至千遍。筆法亦不甚肆力。 而嚴密敷潤。 眞草篆隷。 各臻其妙。

十四歲。聘驪興尹氏。 縣監任衡之女。

十五歲。生子從龍。

十八歲。往拜新齋崔公【名山斗】論學。 崔公深加嘆服。 稱以秋水氷壺。

十九歲。七夕試居魁。

二十二歲。中成均司馬試。

二十三歲。遭祖考訓導公喪。

二十四歲。遊泮宮。 與退溪李先生講學。時經己卯士禍。 士氣沮喪。 諱言道學。 而先生一見退溪。 深相契合。 源源講劘。 甚有麗澤之益。未幾。 退溪還鄕。 先生以詩贈別。 有'夫子嶺之秀。 李杜文章王趙筆'之句。

二十七歲。夏遊泮宮。 聞新齋崔公訃。 加麻。 値其忌日。 必致齋。

二十八歲。子從虎生。

二十九歲。爲文祭崔新齋。

三十一歲。中別試文科丙科第四名。 分隷權知承文院副正字。

三十二歲。夏四月。 賜暇湖堂。先生與同選十二人修禊。 名之曰〈湖堂修禊錄〉。冬十月。 拜弘文館正字。

三十三歲。陞拜弘文館著作。

三十四歲。春聞慕齋先生之訃。 加麻。 忌日亦致齋。夏四月。 陞拜弘文館博士世子侍講院說書。祇受春宮賜送親寫墨竹圖。春宮素多藝。 未嘗表見於人。獨於先生。 賜手寫墨竹一本。 以示意。 仍命先生題詩於畫軸。 先生題云。

根枝節葉盡精微。石友精神在範圍.始覺聖神侔造化。一團天地不能違.

其後又賜 ≪朱子大全≫一帙。六月。 陞拜弘文館副修撰。上劄言事。 極論己卯諸賢之冤。秋八月。 乞暇歸覲。先生少有經世志。 釋褐之時。 金安老斥退。 而金文敬李文元諸賢。 稍稍彙征。 似有陽復之漸。然戚里相軋。 時事顧有可憂者。 先生獨常深念而明知之。 以親年益高。 懇乞歸養而去。退溪李先生以詩送之。冬十二月。 除玉果縣監。 仍帶春秋兼銜。二十三年。 甲辰。 聞中宗大王昇遐。

三十六歲。夏四月。 以製述赴召。 旋還任所。秋七月。 聞仁宗大王昇遐。遂謝病歸家。

三十七歲。夏六月。 著 ≪孝經刊誤跋≫。秋七月。 入山哭仁廟初朞。初一日。 孝陵諱辰。 每値
此辰。 持酒入卵山中。 一飮一哭。 號慟竟夕。又嘗作〈有所思〉。詩曰。

君年方向立。我年欲三紀.新歡未渠央。一別如弦矢.我心不可轉。世事東流水.盛年失偕老。目昏衰髮齒.泯泯幾春秋。至今猶未死.柏舟在中河。南山薇作止.却羨周王妃。生離歌卷耳.

其悽惋激烈之情。 各於詞句間者。 如此云。

三十八歲。春。 拜成均館典籍。 不就。秋。 拜工曹正郞。 不就。作詩示門人。

天地中間有二人。仲尼元氣紫陽眞.潛心勿向他岐惑。慰此摧頹一病身.

三十九歲。寓居淳昌鮎巖村。有聯曰。

梅花燈下飮。如醉又如俳.

句。 先生寓情詩酒。 其微意可見。

四十歲。春二月。 著 ≪大學講義跋≫。夏。 拜成均館典籍。 不就。秋。 又拜不就。冬十月。 丁參奉公憂。 葬家西願堂洞。是時號湛齋。

四十二歲。丁趙夫人憂。

四十四歲。秋九月。 拜弘文館校理。 上箋辭病。 終不膺命。秋九月。 拜成均館直講。 上箋力辭。冬十月。 上特命本道題給食物。 上箋辭之。

四十七歲。次徐花潭敬德〈讀周易〉詩。時花潭以心學。 爲一時所宗。 嘗有〈讀周易〉詩曰。

坎离藏用有形先。到得流行道始傳.羲畫略摸眞㡳象。周經且說影中天.硏從物上方知化。搜自源頭始破玄.書不盡言言外意。仲尼非獨絶韋編.

先生見其詩曰。 "聖人言。 卽天地之道也。 不可謂之影"。 遂次其韻曰。

渾然全體有生先。大化流行物共傳.羲畫推移明變化。周經剖析驗人天.工夫盡處方知妙。立象繫辭言意盡。憶曾將聖絶韋編.

又有一詩曰。

次第工夫有後先。孔門曾說孰先傳.眞知不外常行地。下學無非上達天.未信聖人言的的。飜愁學者惑玄玄.本源徑造精微處。末弊其如廢簡編.

蓋花潭之啓導學者。 有不屑下學頓悟捷徑之慮。 故深憂之。 乃步其韻以訂之。

四十八歲。著 ≪周易觀象篇≫。 ≪西銘事天圖≫。

四十九歲。冬。 與奇高峯大升。 講論 ≪太極圖說≫。時高峯歷訪李一齋恒。 講論 ≪太極圖說≫。 一齋以太極陰陽爲一物。 高峯非之。 終日卞難。 不能歸一。至是。 高峯來拜先生。 以卞難得失奉質。 先生以高峯爲得。 竟日講論而罷。

五十歲。〈與李一齋書〉。 論太極陰陽一物之非。一齋抵書高峯。 極論太極陰陽一物之意。 送於先生。 要傳於高峯。先生見其書。仍與一齋小柬。 其略曰 "遺奇君之柬。 不敢議爲。 蓋理氣混合。 盈天地之間者。 無不自其中出。 而無不各具。 不可謂太極之離乎陰陽也。然道器之分。 不能無界限。 則太極陰陽。 恐不可謂一物也。朱子曰 '太極之乘陰陽。 如人之乘馬'。 則決不可以人爲馬也'"云云。冬。 與奇高峯講論四端七情之說。時高峯退處于鄕。 每詣先生。 討論義理。 而深疑退溪四端七情理氣互發之說。 來質于先生。先生爲之剖析論辨。 極其通透精密。高峯所得於先生者如此。 故及先生殁後。 高峯與退溪。 講論四七互發之非。 多述先生之意。 殆數萬言。世所傳〈退高四七往復書〉。 是也。

論羅整庵人心道心說。羅整庵名欽順。其所著 ≪困知記≫曰 "道心。 性也。 人心。 情也。至精之體。 不可見。 故曰微。 至變之用。 不可測。 故曰危。" 盧穌齋守愼。 力主其說。 以爲道心寂然不動。 人心感而遂通云云。先生深非之曰。 "聖人所謂人心道心。 蓋皆指動處而言"云云。先生殁後。 退溪高峯。 皆宗先生之說。 力攻盧說。 而先生全論。 逸而不傳。

五十一歲。春正月庚午十六日。 易簀于正寢。前三日戊辰。 先生氣不平。 進藥物。 謂家人曰。 "來日上元。 敬備牲酒。" 令子女奠于祠堂。己巳。 先生扶病夙興。 整冠危坐。 以候祭祀之頃。因命"吾死後。 勿書乙巳以後官爵。" 翌日庚午。 疾革。 正席翛然而殁。先生童時。 朴訥齋祥嘗見之。 謂人曰。 "自古。 奇童無令終者。 惟此人當令終也"。 其言果驗也云。三月癸酉。 葬于長城縣大麥洞願堂山子坐午向原。

大明武宗四十三年甲子。 玉果章甫建詠歸亭祠。
穆宗皇帝隆慶四年。宣祖大王三年。 庚午。 淳昌章甫。 建華山祠。
神宗皇帝萬曆十八年。庚寅。 建書院于長城之岐山。 門人卞成溫等刱建。
毅宗皇帝崇禎甲申後十五年。孝宗大王九年。 戊戌。 全羅道儒生。 上疏請書院賜額。 蒙允。
十九年。顯宗大王三年。 壬寅。 宣額筆巖書院。 遣官賜祭。
二十五年。戊申。 春。 特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兼知經筵。 義禁府。 春秋館成均館事。 弘文館大提學。 藝文館大提學。 五衛都摠府都摠管。 世子左賓客。
二十六年。己酉。 秋。 贈諡文靖。 道德博聞曰文。 寬樂令終曰靖。
二十九年。壬子。 神道碑銘成。 尤庵宋文正公時烈撰。
三十二年。肅宗大王元年。 乙卯。 墓表成。 文谷金文忠公壽恒撰。
一百二十八年。英宗大王四十七年。 辛卯。 全羅道儒生梁學淵等。 疏請從享先生于文廟。 未徹。
一百三十四年。正宗大王元年。 丁酉。 墓誌銘成。 本庵金鍾厚撰。
一百四十三年。丙午。 春三月。 上遣官賜祭時。 上展拜禧陵孝陵。 下敎曰。 "故儒臣金麟厚。 契遇可謂曠絶千古。 本陵展謁。 豈可無示意之擧"。 令該曹卜日致祭。
秋八月。 八道儒生朴盈源等。 疏請從享文廟。 未蒙允。
一百五十三年。丙辰。 夏。 方外儒生金懋淳等。 疏請從享文廟。秋七月。 八道儒生蔡弘臣等。 疏請從享先生及趙文烈金文敬于文廟。八月。 京外儒生李奎南等。 疏請從享先生及趙文烈于文廟。九月。 館學儒生沈來永等。 疏請從享先生于文廟。館學儒生李光憲等。 疏請從(享)文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