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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12년(임자) / 3월(三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1.0003.TXT.0022
22일(갑신)
맑고 바람. 오전에 녹실(綠室)에 들어가 고경(古經)을 토론하고 오후에 돌아왔다. 참봉과 더불어 잠깐 말을 주고받으며, 세속이 어지러워지는 것을 걱정하는 말을 하고 파했다. 고두강(高斗綱)주 72) - 자는 천경(天卿)이다 - 의 ≪회과당유고(悔過堂遺稿)≫를 보았는데, 장계(藏溪) -성명은 오이정(吳以井)주 73)이며 자는 명중(明仲)이다- 가 그를 추회(追懷)하면서 수필을 적은 것이 있어서 이에 그것을 기록한다.
나의 벗 고천경(高天卿)은 인품이 매우 높고 쇄락하여 마치 얼음으로 만든 병에 비치는 가을 달과 같았고, 세상맛에 대해서는 담담한 것 같아서 물욕이 침범하지 못했다. 일찍이 나와 더불어 색욕을 논할 때 곧 이르길, '남녀 음양의 도는 다만 조화가 생생하는 묘일뿐이니, 어찌 여기에 정(情)을 해당시킬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했다. 내가 그것을 듣고 나도 모르게 가슴이 트여 마치 천 길이나 되는 구덩이 속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다른 무리들에게서 이와 같은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미 이것에 대해서 철저히 알게 되었다.
일찍이 임오년 여름에 나와 천경이 대자암(大慈庵)주 74)에 있으면서 ≪계몽(啓蒙)≫주 75)을 읽고 있었는데, 천경이 나에게 이르길, "그대는 음양이 하나의 기(氣)라는 묘리를 아는가?"라고 물어서 내가 "그렇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랬더니 천경이 "다만 이처럼 경솔하게 응대하여 말하는 것은 옳지 않네. 모름지기 굴(屈)한 것은 음이 되고 편[伸] 것은 양이 되는 것은 단지 하나의 기가 굴신 왕복한 것일 뿐, 특별히 두 개의 기가 있어서 양이 되고 음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네."라고 하였다. 그 소견의 뛰어남이 이와 같았는데도 성취함이 없이 죽었으니,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없도다.
주석 72)고두강(高斗綱, 1614~1643)
자는 천경(天卿), 호는 회과(悔過),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고경명(高敬命)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부천(傅川)이다.
주석 73)오이정(吳以井, 1619~1655)
자는 명중(明仲), 호는 장계(藏溪),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아버지는 희도(希道)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 복흥(復興)의 딸이다. 정홍명(鄭弘溟)의 문인이다. 1639년(인조 17) 사마 양과(司馬兩科)에 합격하고, 1640년 고두강(高斗綱)・정한(鄭漢)을 찾아 산사로 가서 함께 ≪주역≫을 강론하였다. 1650년(효종 1) 태학(太學)에 들어가 이듬해 정시(庭試)에 응하였으나 자급(資級)이 없다는 이유로 낙방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력하였다. 유고로 ≪장계유고≫ 1책이 있다.
주석 74)대자암(大慈庵)
담양군 창평면 용수리의 상월정(上月亭)이 있던 자리가 원래 대자암 터라고 한다. 대자암은 고려 때 세워진 절인데 조선 초에 폐사된 것으로 보이며, 1457년 언양인(彦陽人) 김자수(金自修)가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이곳에 상월정을 창건하여 손자사위인 함평이씨(咸平李氏) 이경(李儆)에게 양도하였고, 그 후 이경(李儆)은 사위 고인후(高因厚)에게 다시 양도하여 주었다고 한다.
주석 75)계몽(啓蒙)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말함. 주희(朱熹)가 초학자를 위해 지은 ≪주역≫의 해설서이다.
二十二日 甲申
陽而風。午前入綠室。 討論古經。 午後還。與參奉暫爲酬酌。 憂世俗之似是亂。 眞話而罷。看悔過堂【姓高字天卿】遺稿。 至藏溪【姓吳。 名以井。 字明仲】追懷隨錄。 因以記之。
吾友高天卿。 人品甚高灑落。 如氷壺秋月。其於世味。 淡淡如也。 不爲物欲之所侵屈。嘗與余論色欲。 乃曰'男女陰陽之道。 只是造化生生之竗。 豈可當情於此?'云云。余聞之。 不覺爽然。 若超出於千仞坑塹中。 不是他徒說得如此。 已於此處透了。曾在壬午夏。 余與天卿。 在大慈庵。 讀啓蒙。 天卿謂余曰。 "君知陰陽一氣之竗?" 答曰。 "然。" 天卿曰。 "不可只如此草草應對說將去。須得屈而爲陰伸而爲陽。 只是一氣之屈伸往復而已。 非別有二氣爲陰爲陽者。" 其所見之超詣類如此。 而不克有成就而死。 可勝歎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