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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28년(무진) / 10월(十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13.0011.TXT.0002
2일(계사)
–소양대황락(昭陽大荒落)-. 흐림.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손부(孫婦)의 산곽(産藿, 해산하고 먹는 미역)을 사왔다.

방득이 나물을 먹다[榜得茹蔬]〉-송(宋)나라-
북군(北軍)이 요주(饒州) 땅을 공격할 때 강동제치사(江東制置使) 사방득(謝枋得)안인(安仁)에서 막아 싸우다가 패하여 성명을 바꾸고 당석산(唐石山)에 들어갔다. 원군(元軍)이 신주(信州)에 이르러 방(榜)을 붙여 근포(跟捕, 죄인을 찾아 쫓아가서 잡는 일)할 때에, 아내 이씨(李氏)를 잡아서 양주(楊州)에 구류하였고, 사방득창산(蒼山) 등지의 험한 산골로 들어갔다. 갑신년에 대 사면령이 있어 사방득이 나왔으나 이때 아내는 이미 죽고, 건양(建陽)역교(驛橋)에 우거하였다. 무자년참정(參政) 위천우(魏天佑)가 조경(朝京, 조정의 사신)으로 북행(北行) 하기를 다그쳤다. 사방득이 수긍하지 않고 죽기로써 스스로 맹세하고,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서 곧바로 먹지 않았다. 위(魏)와 함께 앉았으나 대언하지 않았는데, 혹 오만한 말로 무례하게 하였다. 위천우가 꾸짖어 말하길 "봉강(封疆)의 신하는 봉강에서 죽어야 마땅한데 안인에서 패하였는데 어찌 죽지않는가?"라고 하니, 사방득이 말하길 "정영(程嬰)저구(杵臼)는 한 사람은 앞에 죽고 한 사람은 뒤에 죽었으며주 176), 왕망이 한(漢)을 찬탈한지 14년에 공승(龔勝)주 177)도 이내 죽었으니, 죽음은 태산보다 무거울 때도 있고, 홍모(鴻毛)보다 가벼울 때도 있어서 개관사정(蓋棺事定)주 178)하는 것이니, 참정(參政)은 어찌 이것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사방득이 이십 여 일 동안 먹지 않았는데도 죽지 않아 다시 먹었다. 마침내 작은 수레에 누워 채석강(采石江)을 건널 때 다시 먹지 않았다. 다만 채소와 과일만 먹으니 여러 달 곤궁하고 위태로움이 쌓여 기축년 초1일에 연경(燕京)에 이르러, 초 5일에 역교에서 죽었다.

시(詩)
칼날이 꺾이고 적에게 함락되어 뜻 이루지 못하니,(摧鋒陷敵志無成)
산림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성명을 바꾸었네.(遁跡山林變姓名)
몇 달 동안 나물만 먹으며 끝내 죽음으로 절개 지켜,(數月茹蔬終死節)
늠름하게 천년동안 풍격과 성망을 세웠네.(凜然千載樹風聲)

원나라 군사의 질탕질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워,(元兵跌宕力難當)
전쟁에서 패배하여 떠돌다가 건양에 우거하였네.(戰敗流離寓建陽)
두 임금을 섬김은 부끄럽고 한 번 죽음은 가벼우니,(羞事二君輕一死)
이름은 역사주 179)에 남아서 더욱 빛나는구나.(名留竹帛更輝光)
주석 176)정영(程嬰)과 저구(杵臼) …… 뒤에 죽었으며
춘추시대 진(晉)나라 경공(景公) 3년에 도안가(屠岸賈)가 조삭을 죽이고 조씨를 멸족시키려 하자 조삭의 문객 공손저구(公孫杵臼)와 친구 정영(程嬰)이 조삭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가짜 아들을 만들어 공손저구가 데리고 있다가 적들에게 잡혀서 죽고 진짜 아들은 정영이 몰래 키웠다. 15년 뒤 한궐(韓闕)의 주선으로 그 아들이 조씨의 후계자가 되자 정영이 먼저 죽은 공손저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살하였다.(《사기》 권43 〈조세가(趙世家)〉)
주석 177)공승(龔勝)
한 애제(漢哀帝) 때 사람인데, 세 번 효렴(孝廉)의 추천을 받아 간의대부(諫議大夫)가 되었다. 그가 간관(諫官)이 되자, 자주 소(疏)를 올려 조정의 정사를 논하였고, 뒤에 외직으로 나가 발해태수(渤海太守)로 있다가 왕망(王莽)이 황위(皇位)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왕망이 사자를 보내어 상경(上卿)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문인 고휘(高暉) 등에게 말하기를, "내가 조만간에 땅속으로 들어갈 터인데, 어찌 일신(一身)으로 두 성씨를 섬길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14일 동안 음식을 먹지 않다가 죽었다. 《한서(漢書)》 72권 〈양공전(兩龔傳)〉 참조.
주석 178)개관사정(蓋棺事定)
관 뚜껑을 덮을 때에야 일이 비로소 정해진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모든 일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주석 179)역사
원문의 '죽백(竹帛)'은 서적(書籍)이나 사기(史記)를 이르는 말로 고대에 종이가 없을 때 죽간(竹簡)과 명주에 글을 썼던 데서 온 말이다.
初二日 癸巳
【昭陽大荒落】。陰。雨濛濛。買來孫婦産藿。

榜得茹蔬【宋】。
北軍攻饒州江東制置使謝枋得。 拒戰于安仁敗績。 變姓名入唐石山。元軍至信州。 鏤榜根捕。 執妻李氏楊州。謝入蒼山等處。 崎嶇山谷。甲申大赦。 乃出。 時妻已斃。 寓建陽驛橋戊子參政天祐。 朝京逼以北行。不肯。 以死自誓。 知不可免。 卽不食。魏與坐而言不對。 或嫚言無禮。讓曰。 "封疆之臣。 當死封疆安仁之敗。 何不死?" 曰。 "程嬰杵臼。 一死於前。 一死於後。王莽簒漢十四年。 龔勝乃死。死有重於泰山。 輕於鴻毛。 蓋棺事定。 參政豈足以知此?" 不食二十餘日不死。 乃復食。遂卧轎中。 渡采石。 復不食。只茹蔬果。 積數月困殆。 己丑四月初一日至燕京。 初五日死於

詩。
摧鋒陷敵志無成。遁跡山林變姓名.數月茹蔬終死節。凜然千載樹風聲.
元兵跌宕力難當。戰敗流離寓建陽.羞事二君輕一死。名留竹帛更輝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