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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19년(기미) / 10월(十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8.0008.TXT.0001
11일(기축)
흐림. 참봉(參奉) 김용순(金容珣)과 동행하여 화개산(華蓋山)에 들어가 머물렀다. 다음날 장성(長城) 약수정(弱水亭)에 도착해 술을 시켜 함께 마시고는 달빛을 따라 궐전(蕨田) 김길령(金吉寧) 집에 도착해 유숙했다. 다음날 하만리(河晩里)에 들어가 여러 벗들의 상(喪)을 위문하고, 또 그 다음날 저물녘에는 곽한풍(郭漢豊)의 사랑(舍廊)에 들러 유숙했다. 또 그 다음날 아침에는 딸집에 도착했다. 그날 모현(茅峴)신석휴(申錫休)씨를 방문했지만 만나지 못했고, 유상춘(柳相春)씨 댁에서 점심을 먹었다. 해질녘에 만무정(晩舞亭) 공학원(孔學源) 댁에 도착해 며칠을 머물렀다. 돌아오는 길에 세곡(細谷) 왕림(旺林) 댁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공학원(孔學源)과 이기(理氣)를 논하였다. 학원이 말하기를, "저는 '이(理) 밖에 기(氣)가 없고 이는 기 가운데 있다.[理外無氣, 理在氣中]'라는 8글자로 해결하였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응하여 말하기를, "옳습니다. 이것은 이기를 합해서 말한 것입니다. 이기는 합해져 있으면서도 떨어져 있고 떨어져 있으면서도 합해져 있습니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도 하나라는 것을 선유(先儒)들이 이미 말했습니다."라고 했다.
또 말하기를,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주 31)이 경연(經筵)에서 이기를 논하면서 율곡(栗谷) 선생의 말을 인용하여, '발하는 것은 기(氣)이고 발하게 하는 소이(所以)는 이(理)이다.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고 이가 아니면 발할 곳이 없다. 선후(先後)도 없고 이합(離合)도 없다. 나누어 말할 것 같으면 이는 무위(無爲)하지만 기는 유위(有爲)하고, 이는 무형(無形)이지만 기는 유형(有形)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서암기(棲巖記)〉
선비가 고심(苦心)하여 힘써 학문하는 것은 세상에 쓰일만한 인재가 되는 것에 뜻이 없을 수 없지만, 이미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자취를 감추고 학문에 힘써 홀로 그의 자신을 선하게 할 따름이다. 또 그럴 수 없다면 빈곤하고 궁박할 것이니 바닷가 절도(絶島)가 아니라면 반드시 궁벽한 산의 암혈(巖穴)에 거처하게 될 것이다. 선비가 이런 지경에 이르면 한탄하고 슬퍼하지 않겠는가?
김영찬(金永粲)씨는 담양(潭陽)의 고사(高士)이다. 젊어서는 부지런히 학문을 하여 능히 수신제가(修身齊家)의 도리를 다 하였다. 늙어서는 또 부지런히 힘써서 곁으로 강마(講磨)의 이익을 구하였다. 그러나 유사(有司)가 그의 성명을 천거하지 않아 과거시험에 떨어졌다. 그러자 강의실 한 칸을 지어 향리에서 배우고자 하는 이를 받아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에만 힘썼다. 머리를 굽혀 자취를 감추고 이에 거처하면서 마치 장차 몸을 마칠 듯이 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더럽혀지고 풍속이 경박한 것을 숭상하게 되어 유학자가 가진 것은 선천구물(先天舊物)에 속해버리게 되었다. 몇 칸의 건물도 거의 지탱하기 어려워서, 나가면 의지거나 기댈 가망도 없고 들어오면 무릎을 허용할 땅도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앙앙(怏怏不樂)하며, 구림(邱林)에서 소요하고 집안에서 움추리고 지내니, 그 힘들고 곤고함은 시대가 그렇게 한 것인지라 누구를 탓하겠는가?
집 주변에는 쌍암(雙巖)이 벽처럼 우뚝 서 있어서 때때로 오르내리며 소요하고 걸터앉기도 하면서 이끼를 긁적이고 새의 발자국을 지우기도 했다. 높고 험하여 그 완고함을 사랑하였고, 두드리고 밀어보아 그 견고함에 압도되었으며, 굽어보고 쳐다보거나 누웠다 일어나는 것을 오직 바위에만 의지하였다. 그것을 인하여 문미에 '서암(棲巖)'이라고 편액 하였으니, 옹(翁)은 바위에 대해서는 계획을 얻었다고 할 만하다.
다만 생각건대 '바위에 깃들어 살며 은미한 효험 바라노라[巖棲冀微效]'주 32)는 고정 부자(考亭夫子, 주자)가 지은 것인데, 그 귀의처는 유(劉) 병산(屛山)주 33)이 말한 '회(晦)'에 있다. 지금 옹의 '회적(晦跡, 자취를 감춤)'은 이미 서암 이전에 있으니, 어찌 암서한 이후에 그 은미한 효험을 바랐다고 할 수 있겠는가? 가령 '봄의 자태가 찬란히 펴지고, 신명이 안에서 넉넉하다.[春容燁敷, 神明內腴]'주 34)는 것은 도체(道體)를 다 설명하였고, 정묘함을 철저히 발용(發用)한 것이다. 비록 고정(考亭)과 같은 학문으로도 오히려 평생에 힘을 들였는데, 궁벽한 시골의 만생(晩生, 선배에 대한 후배의 겸칭)이 어찌 감히 갑자기 의의(擬議)할 수 있겠는가? 바로 원하는 바는 곧 주자를 배우는 것이니, 옹의 품은 뜻[志尙]은 여기에 근거해 대강을 볼 수 있다.
학원은 사산사(泗山祠)의 제사를 대개 창주정사(滄洲精舍)주 35)에서 행한 예(例)를 본받았는데, 옹이 자주 찾아 주었으니 또한 (주자의) '좋은 날에 꽃을 찾아 사수 가를 찾는다.[勝日尋芳泗水濱]'주 36)는 뜻을 본받은 것이다. 이 때문에 나이를 잊고 함께 놀며 계합(契合)이 매우 친밀하니, 문미에 걸 기문에 대한 요청을 감히 어리석고 비루하다는 이유로 끝내 사양할 수가 없었다.
기미년(1919) 10월 하순, 곡부(曲阜) 공학원(孔學源)이 삼가 짓는다.
주석 31)한원진(韓元震, 1682~1751)
자는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 본관은 청주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 중 한 사람이며,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인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성삼층설에 입각하여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形氣)의 성, 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또한 성은 이(理)가 기질 속에 내재된 뒤에 말해질 수 있는 개념이라는 이이(李珥)의 생각을 계승하여, 인성과 물성은 기질을 관련시키는 인기질의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고, 이와 같은 사고를 바탕으로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그는 미발심체(未發心體)의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도 미발의 심체는 본래부터 선하다고 주장하는 이간(李柬)과는 달리, 미발의 심체에도 선악의 가능성이 공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미발심체유선악설(未發心體有善惡說)을 주장하였다.
주석 32)바위에 …… 바라노라
주자의 〈회암(晦菴)〉시에 "오랫동안 자신하지 못하니 바위에 깃들여 은미한 효험 바라노라.[自信久未能, 巖棲冀微效]"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후 산속에 기거하며 학문에만 정진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도산에 있는 퇴계의 암서헌(巖棲軒)과 화양동에 있는 우암 송시열의 암서재(巖棲齋)가 널리 알려져 있다.
주석 33)유병산(劉屛山)
유자휘(劉子翬, 1101~1147). 자는 언충(彦沖), 호는 병산(屛山), 시호는 문정(文靖)이며, 복건성 숭안(崇安) 사람이다. 주희(朱熹)의 스승이다. 그는 1127년에 금(金)나라가 송나라의 수도 변경(卞京)을 함락시키고 흠종(欽宗)과 휘종(徽宗)을 포로로 끌고 간 정강(靖康)의 난리에서 아버지 유겹(劉韐)이 전사하자, 금나라에 대한 원한의 칼을 품은 채 평생 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무이산(武夷山)으로 들어가 강학에만 힘을 쏟았다.(《송사(宋史)》 권434 유자휘열전(劉子翬列傳))
주석 34)봄의 …… 넉넉하다
유자휘가 주희의 자(字)를 원회(元晦)라 지어 주며 남긴 축사에 "나무는 뿌리에 감추어야 봄의 자태가 찬란히 펴지고, 사람은 몸에 감추어야 신명이 안에서 넉넉하다.[木晦於根, 春容燁敷, 人晦於身 神明內腴.]"라고 하였다. 주자의 자인 원회(元晦)ㆍ중회(仲晦)와 호인 회암(晦菴)ㆍ회옹(晦翁)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주석 35)창주정사(滄洲精舍)
주희가 복건성(福建省) 건양현(建陽縣)에 지은 정사이다. 주희가 그곳에서 기거하자 많은 제자가 그리로 모여들어 세상에서 그들을 일러 고정학파(考亭學派)라고 하였다.(《복건통지(福建通志)》)
주석 36)좋은 …… 찾는다
주희의 〈춘일(春日)〉 시에 "좋은 날에 꽃을 찾아 사수 가를 찾으니, 가없는 봄 풍경이 한때에 싱그러워라. 심상하게 동풍이 얼굴 스친 줄만 알았더니, 붉고 검붉은 수많은 꽃이 모두 봄이로구나.[勝日尋芳泗水濱, 無邊光景一時新. 尋常識得東風面, 萬紫千紅總是春.]"라고 하였다.
十一日 己丑
陰。與參奉容珣同行。 入華蓋山。 留連。再明到長城弱水亭。 招酒相飮。 隨月色。 至蕨田金吉寧家留宿。翌日入河晩里。 慰問諸友喪。 又明日薄暮轉於郭漢豊舍廊留宿。又明朝。 到女婿家。卽日訪茅峴申錫休氏。 不遇而午飯於柳相春宅。夕陽到晩舞亭孔學源宅。 留數漢回。回路午飯於細谷旺林宅以還。
孔學源論理氣。 學源曰。 "余以'理外無氣。 理在氣中'八字打開。余應之曰 "是也。 是合理氣言。 理氣合而離。 離而合。 一而二。 二而一。 先儒已言之。" 又曰。 "南塘經筵論理氣。 引栗谷先生言。 發之者氣也。 所以發者。非氣不能發。 非理無所發。無先後無離合。若分而言之。 理無爲而氣有爲。 理無形而氣有形也。"
棲巖記
士苦心力學。 不能無意於需世。 而旣不可得。 則晦跡藏修。 獨善其身而已。又不可得。 則厄窮矣。 如非瀕海絶島。 必也窮山巖穴。士而至此。 可不於邑長唏。金永粲之高士。少而勤學。 克盡修齊之道。老且矻矻。 旁求講磨之益。 有司不擧聲名。 不利於場屋。營講室一屋。 納鄕里之願學者。 專務爲己。屈首屛跡。 爰居爰處。 若將終身而已。世級汚下。 俗尙偸薄。 儒者所有。 屬之先天舊物。 數間棟宇。 殆不支吾。 出無依靠之望。 入無容膝之地。由是焉。 怏怏不樂。 婆娑邱林。 跼蹐戶庭。 其所厄窮。 時也誰尤? 宅邊有雙巖壁立。 時復登降。 盤旋箕坐。搔苔髮而浴鳥跡。 崚嶒而愛其頑。 敲推而服其堅。偃仰臥起。 惟巖是依。 因以棲巖扁其楣。 翁之於巖。 可謂得計。第念'巖棲冀微效'。 考亭夫子所作。 而其歸重在於屛山所示之晦。今翁之晦跡。 已在棲巖之前。 豈可謂巖棲然後。 冀其效也? 至若'春容燁敷。 神明內腴'。 說盡道體。 發用精妙到底。 雖以考亭之學。 猶爲平生用力。 寒鄕晩出。 豈敢遽爾擬議? 乃所願。 則學朱子者。 翁之志尙。 卽此而可見梗槪矣。學源俎豆泗山。 放滄洲精舍已例。 而翁頻賜筇屐。 亦效 '勝日尋芳泗水濱'之意。是以忘年相謔。 契合甚蜜。 記楣之請。 不敢以愚陋終辭。
己未陽月下澣。 曲阜孔學源謹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