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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20년(경신) / 기(記)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9.0001.TXT.0001
서암기
선비가 당호(堂號)를 지어 문미(門楣)에 걸어 두는 것은 도(道)와는 관계가 없지만, 옛날 현인들은 하지 않은 이가 없었으니, 어찌 그런가? 사람의 일심(一心)은 허령(虛靈)하고 통철(通徹)하여, 수양(守養)에 도가 없으면 물(物)로 인해 방탕하게 움직이고 인욕(人欲)으로 흘러가서 그 본연의 양심을 잃게 되니, 몸이 서지 않고 도(道)가 닦이지 않는다. 수양(守養)에 진실로 그 도가 있다면, 사물을 접할 때에 물(物)로 인해 정밀하게 살피게 되니, 이치에 합당한 것은 취하여 법칙으로 삼고, 이치에 합당하지 않는 것은 버리고 멀리한다.
일사일물(一事一物)과 일동일정(一動一靜)이 내 마음에서 취재(取裁)하지 않음이 없으니, 인욕을 막고[遏人欲]주 1) 도심(道心)을 확장하면 몸이 설 수 있고 도가 닦일 수 있다. 그러므로 물로 인해 이름을 짓는 것은 진실로 조존성찰(操存省察)의 일도(一道)에 근본한 것이고, 장차 외물(外物)로써 내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김영찬(金永粲)은 필문(蓽門)의 수재로서, 젊어서는 배우기를 좋아하고, 늙어서도 또 게을리 하지 않고 오로지 극기의 도에 힘쓰니, 그 성품이 염정(恬靜, 편안하고 고요함)하고 세리(勢利)와 화려한 것에는 담연(淡然)하여 마음을 주지 않았다. 또 세상이 변화되어 왕의 은택이 이미 마르게 되었으나 임금을 그리워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안고, 주치(州治)의 남쪽인 오룡(五龍)의 궁벽한 골짜기에 자취를 감추고서 날마다 옛 도[古道]를 강의하며 스스로 그 뜻을 깨끗하게 하여 장차 생을 마치려는 듯하였다.
집 주위에 바위가 있었는데, 방박(磅礴, 돌이 크고 단단한 모양)하고 견완(堅頑)하였다. 그 형태가 매우 기이하여 애완하며 보배로 여겨, 그 견완(堅頑)한 것으로써 수심(守心)과 존성(存性)의 법도로 삼았다. 심의(深衣)주 2)에 복건(幅巾)주 3)을 하고 날마다 그 바위에 깃들어 시(詩)를 짓고 읊조리며, 배회하고 서성이면서 잠시라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문미에다가 '서암(棲巖)'이라고 편액을 걸어, 수심(守心)하고 성신(省身)하는 데 일조(一助)하였다.
대개 고정부자(考亭夫子, 주자)가 암서(巖棲)에서 미효(微效)를 바란 의미를 취한 것이다. 그 고정(考亭)의 도를 배우기를 원한 까닭에 마음에 성실하게 한 것이지, 입과 귀를 장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대저 고정부자에게는 끝내 미칠 수 없으나, 고정의 옷을 입고, 고정의 도를 공부하며, 고정의 일을 본받아 부지런히 힘쓰고 노력하여 종신토록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거의 고정의 문도(門徒)가 됨을 잃지 않을 것임을 여기에서 그 지상(志尙)의 대략을 볼 수 있다.
아! 세상이 크게 변하여 세속이 투박함을 숭상하니, 선비들이 지켜온 것이 쓸데없는 말과 소용이 없어져버린 곳에 부쳐졌다. 명색이 학자라는 사람들은 거센 물결 가운데에 빠지지 않은 사람이 없다. 우리 부자의 정대한 도가 장차 어둡고 캄캄한 곳에 이르게 되어 구제할 수가 없으니, 어진 사람들의 근심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나 희적(希迪)은 그가 분발하여 세속을 돌보지 않고 심지를 굳게 지키며 용감하게 스스로 수신하는 것을 아름답게 여겨서 그 대강을 서술하여 후학에게 고하노라.
경신년(1920) 중춘 초삼일 기묘, 선산(善山) 유희적(柳羲迪)은 삼가 기록한다.
주석 1)인욕을 막고
《맹자》에 '인욕을 막고 천리를 보존한다.[遏人欲, 存天理]'라는 말이 있다.
주석 2)심의(深衣)
선비들이 편안하게 거처할 때 입던 편복(便服)으로, 유학자들이 주로 입었다. 주로 백색의 천으로 만드는데, 직령(直領)으로 된 깃과 단, 도련 둘레에 검은색의 가선을 둘렀다. 심의의 각 부분에는 철학적(哲學的)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주석 3)복건(幅巾)
관(冠) 대신 쓰는 두건으로 주로 처사(處士)ㆍ은자(隱者)가 쓰는 것이다.
棲巖記
士之作號揭楣。 無與於道。 而古之賢人莫不有焉。 何者? 人之一心。 虛靈通徹。 守養無道。 則緣物動蕩。 橫流人欲。 失其本然之良。 而身不立。 而道不修。守養苟有其道。 則接乎事物之際。 因物精察。 當於理者。 取而法焉。 不當於理者。 舍而遠之。一事一物。 一動一靜。 無不取裁於吾心。 遏人欲而擴道心。 身可立而道可修矣。故因物名號。 固本於操存省察之一道也。 而將以外物。 守戒於吾心也。金永粲。 蓽門秀才。 少而嗜學。 老且不倦。專務克己之道。 其性恬靜。 勢利芬華。 淡然無與心。又値世變。 王澤旣渴。 抱戀君憂國之誠。 而屛跡於州治之南。 五龍窮谷。 日講古道。 自潔其志。 若將終身焉。宅畔有巖。 磅礴堅頑。其形甚奇。 愛玩寶之。 以其堅頑。 取法守心。 存性之道。深衣幅巾。 日棲其岩賦詩。 嘯咏徘徊盤旋。 不欲暫離。 而扁其楣曰'棲巖'。 以備守心。 省身之一助焉。盖取諸考亭夫子巖棲。 冀微效之意也。其所以願學朱子。 誠於心。 而非餙於口耳也。夫考亭夫子。 卒不可及。 而服考亭之服。 學考亭之道。 效考亭之事。 孜孜勉勉。 終身不怠。 則庶幾不失。 考亭之門徒也。於此可見。 其志之大略矣。嗚呼! 世否變。 俗尙偸薄。 儒子所守。 付之空言。 無所用之地。 名爲學者。 不陷溺於頹波中。吾夫子正大之道。 將至於晦盲。 莫之救。 仁人憂過何如哉? 羲迪。 偉其奮不顧俗。 堅守心志。 勇於自修。而敍其梗槪以諗來者。歲庚申仲春初三日己卯。 善山 柳羲迪 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