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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암일기(棲巖日記)
- 1915년(을묘)
- 10월(十月)
- 2일(계묘)(二日 癸卯)
서암일기(棲巖日記) / 1915년(을묘) / 10월(十月)
2일(계묘)
흐림. 치포관(緇布冠)주 68)을 만들었다.
우암(尤庵)이 말하기를, "상투가 큰 사람은 그 수치를 좀 넉넉하게 한다."라고 했다.
무(袤, 길이)는 4촌
광(廣, 너비)은 3촌
다 왼쪽을 향하도록 꿰맨다.
비녀
무(武, 관의 테두리)의 높이는 1촌쯤이다.
두꺼운 종이에 풀을 먹여 재단하고, 한 가닥의 긴 끈으로 무(武)를 만든다. 무(武)의 높이는 1촌쯤 되게 하고, 길이는 1자 4촌쯤 되게 하며 -지척(指尺)주 69)-, 그 양 끝단을 둥글게 이어 붙인다.
또 한 가닥의 끈을 사용하여 사방이 8촌쯤 되는 네모를 만든다. 주름[襞積]주 70)은 5량(梁)이 되게 한다. 그 법을 따라 한 쪽을 계산하면 6푼 6리이고, 유기[有奇]주 71)의 밖은 또 가운데를 접어 8푼으로 양(梁)주 72)을 만드는데, 이와 같이 하는 것이 모두 5곳 남짓이다. 또한 6푼 6리의 유기로 주름을 잡으니 너비는 4촌이다. 정수리를 앞뒤로 걸치게 해서 아래를 무(武)에 붙이는데, 그 양 끝을 바깥으로 구부리고, 각각의 반 촌을 바깥쪽으로부터 안쪽을 향하게 하며, 무(武)의 안쪽에 풀칠을 하면 무(武)의 좌우는 각각 너비 3촌, 전후 각각 너비 4촌이다. 무(武)의 양쪽 중앙의 각각 반 촌 되는 위에는 구멍을 뚫어 비녀[笄]를 꽂을 수 있게 한다. 관 5량(梁)의 주름은 다 왼쪽을 향하여 꿰매고 흑칠을 한다. 혹시 오사(烏紗)주 73)를 쓰려면 칠을 더해 만든다.
〈가례(家禮)〉의 글을 보면, 주름은 바깥으로 5량(梁)인데 각각이 8푼이니, 5×8은 40이다. 40이라는 것은 4촌이다. 무(袤)의 너비가 4촌이란 것이 이것이다. 안의 선후(先後)는 6푼 6리, 다음은 2푼 8리, 또 3번째는 4푼이다. 뒤집어 접어서 8푼이란 것은 3×8은 24푼으로 합 40푼으로 무(袤)의 안이 4촌이 된다는 것이 이것이다.
- 주석 68)치포관(緇布冠)
- 유생(儒生)이 평시에 쓰던 관. 검은빛의 베로 만들었다.
- 주석 69)지척(指尺)
- '손가락 자'라는 뜻으로, 가운뎃손가락[中指]을 굽혔을 때 가운뎃마디[中節]의 두 주름[指紋]이 각이 진 사이의 거리를 1촌(寸)으로 삼고 10촌을 1척(尺)으로 삼아서 길이를 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회암집(晦菴集)≫ 권68 〈심의제도(深衣制度)〉에 "마름질할 때에는 가는 백포를 쓰고, 길이를 잴 때에는 지척을 쓴다.[裁用細白布 度用指尺]"라는 주희의 말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중지의 중절을 촌으로 삼는다.[中指中節為寸]"라고 하였다.
- 주석 70)벽적(襞積)
- 주름. 옷의 가닥을 접어서 줄이 지게 한 것이다.
- 주석 71)유기(有奇)
- 나머지가 있다는 뜻이다.
- 주석 72)양(梁)
- 모자 등에 가로로 둥긋하게 마루가 진 부분. 관(冠)의 이마에 골지게 하여 세로로 잡은 줄을 말한다. 이 줄의 숫자에 따라서 오량관(五梁冠), 사량관(四梁冠), 삼량관(三梁冠) 등 명칭이 각기 다르다.
- 주석 73)오사(烏紗)
- 조선시대 문무관(文武官)이 평상복에 착용(着用)하던 모자. 검은 사(紗)로 만들며, 뒤에 뿔이 2개 있음. 지금은 흔히 전통(傳統) 혼례식(婚禮式) 때 신랑(新郞)이 쓴다.
二日 癸卯
陰。成緇布冠。
尤庵曰。 "䯻大者。 稍寬其寸數。"
袤四寸
廣三寸
縫皆向左
笄
武高寸許
用厚紙。 糊爲材裁。 一長條爲武。高寸許。 長一尺四寸許【指尺】。 環之聯其兩端。又用一條。 方八寸許。襞積爲五梁。其法從一㫄計六分六釐。有奇之外。又中摺八分爲梁。 如是者凡五所餘。又六分六釐有奇襞積之。 則廣四寸。跨頂前後。 下着於武。 外屈其兩端。 各半寸自外向內。 黏於武之內。 則武左右各廣三寸。 前後各廣四寸。武之兩㫄中央各半寸之上。 爲竅以受笄。冠五梁襞積。 縫皆向左。 而黑漆之。或用烏紗。 加漆爲之。
按〈家禮〉文。 襞積。 則外五梁各八分。 則五八四十。 四十者四寸也。袤廣四寸是也。內先後六分六釐。 次二分八釐。 又三次四分。反摺之八分者。 三八二十四分。 合四十分爲袤內四寸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