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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년(을묘)
  • 9월(九日)
  • 21일(계사)(二十一日 癸巳)

서암일기(棲巖日記) / 1915년(을묘) / 9월(九日)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4.0007.TXT.0021
21일(계사)
맑음. ≪문순공 퇴도선생 언행록(文純公退陶先生言行錄)≫을 보고 기록한다.

≪언행록≫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정신과 풍채가 맑고 밝았다. 성품은 어릴 때부터 단정하고도 아름다웠으며, 희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성년이 되어서는 학문을 좋아하여 도의로서 수양하였기 때문에 총명정직하고 효제충신(孝弟忠信)하였으며, 정순(精純)하고 온수(溫粹)하여 모가 나지 않았다. 기운은 온화하면서도 굳세고, 말은 부드러우면서도 바르고, 학문은 넓으면서도 요약되었으며, 행동은 온전하면서 독실하였다. 맑으면서도 괴팍하지 아니하며, 개결면서도 고집스럽지 않고, 옛것을 사모하였지만 꽉 막히지 않았으며, 세상에 처함에서는 휩쓸리지 않았다.
선생의 사람됨은 아름답고 크며, 편안이 이룬 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여윈 모습은 옷을 이기지 못할 것 같지만, 도(道)에 나아가려는 뜻은 금석(金石)처럼 굳건했다. 초연히 속진(俗塵)을 멀리 벗어났지만, 몸가집이나 수양의 공은 일상(日常)에 드러났다. 작록(爵祿)의 영광을 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두려워했고, 의리의 진리를 탐하기는 추환(芻豢)주 34)이 입에 맞는 것 같이 하였다.
학문을 이미 이루었지만 급급해 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한 듯 하였고, 덕이 이미 닦여졌지만 겸손한 태도로 터득한 것이 없는 듯이 하였다. 옛 사람이 말한 '자품(資稟)이 이미 남과 다르고 충양(充養)하에 도가 있다'라는 것이 어찌 선생을 두고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선생은 태어난 지 겨우 반년만에 아버지[所怙]주 35)를 여의고 나이가 초츤(髫齔, 7~8세)이 되지 않아서 이미 독서를 좋아하였다. 비록 부모나 스승이 권면(勸勉)하고 정독(程督 )주 36) 수고가 없을지라도 날마다 과정을 정해놓고 외우길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응대(應對)하고 배궤(拜跪)하는 것이 온화하고 공손하니, 보는 사람이 이미 보통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조금 자라서는 ≪논어≫와 ≪소학≫ 등의 책을 읽고 더욱 경계하고 삼가하여 말과 행동거지를 반드시 예법에 맞게 하였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함에 더욱 독실하여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대를 반드시 갖추고서 어머니에게 문안하였다. 기뻐하는 말소리로 기운을 가라앉히고 낙낙한 얼굴과 부드러운 안색으로 혹 조금이라도 빠뜨림이 없게 하였는데, 저녁에 부모를 위해 잠자리를 보아 드리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이하였다. 잠자리를 펴고 이부자리를 개 드리는 일도 반드시 몸소 친히 하였으며, 일찍이 시중드는 아이에게 맡기는 일이 없었다.
둘째 형과 여러 해 동안 함께 살았는데, 둘째 형의 나이가 몇 살 위였지만 섬기기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였다. 수숙(嫂叔)간에 아침저녁으로 만나 뵈었지만 반드시 예의와 공경을 다하니 대부분은 스스로 회피하고 감히 마주하지 않았다. 대부인(퇴계의 어머니)이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자제들이 반드시 부모나 형의 교육을 받아야한다고 말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내가 이 아이에게 조금도 인도하고 길러주는 방법이 없었건만 일찍이 관(冠)을 안 하거나 띠(帶)를 안 하거나 다리 뻗고 앉거나 비스듬히 누워있다든지 하는 일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는데, 대개 천성이 그런 것이다.
이미 또 경전에 널리 보고, 겸하여 성리학 관련 책들에까지 통하여 성현(聖賢)의 사업에서의 대의(大義)를 보고서는 존심(存心)주 37)을 가슴에 새긴 것이 오래되었다. 무리들과 거처함에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앉아 혹 책을 보거나 혹 종일 고요히 묵상하였고, 일찍이 한가하게 잡담을 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를 경외(敬畏)하였다.
비록 검속하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또한 모두 몸을 수렴하고 스스로를 바로잡아 감히 방자하지 않았다. 약관의 나이에 성균관에 공부하러 갔는데 때가 기묘사화를 지난 시기라, 사습(士習)이 날로 방탕하였다. 선생이 하는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비웃고 업신여겼지만, 선생은 뜻을 바꾸지 않고 처신하기를 초연히 하였다. 임학(林壑)에 뜻을 두고 명예와 영달을 구하지 않았고, 중간에 지나친 공부로 인하여 자못 몰골이 파리하고 초췌한 질병을 얻었다.
또 세속의 상황이 더불어 부앙(俯仰)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사마시(司馬試)에 참여하여 뽑혔지만 다시는 영달에 나아가려는 뜻이 없었다. 천석(泉石)주 38)을 소요하면서 가난한 생활을 달게 여기고 장차 죽을 때까지 하려고 하였지만 마침내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어가므로 부지런히 힘써 과거시험에 나아가 현달한 길에 들어섰지만 그가 좋아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을사년의 변고가 거의 불측에 빠지자, 이윽고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퇴계(退溪)의 물가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세상의 맛은 더욱 각박했지만 책 읽고 도를 구하는 뜻은 더욱 견고해지고 확실해졌다.
서울에 있을 때 일찍이 ≪주자전서≫을 얻어서 읽고는 즐거워하였다. 이로부터 문을 걸어 잠그고 조용히 거처하면서 종일 몸을 바르게 하고 앉아 오로지 정일한 뜻을 이루려고 했다. 구부려 독서하고 우러러 생각하였으며 참으로 알고 실제로 터득하는 것에만 힘을 썼다. 그 믿음이 독실하고 기뻐함이 깊어서 직접 귀로 듣고 직접 수업 받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로부터 소견은 날로 정밀해지고 밝아졌으며, 조예는 날로 순수해지고 견고해졌다. 여러 경전의 은미한 말과 깊은 뜻을 연못을 더듬어 구슬을 캐고 바다에 들어가 용을 보는 것과 같이 하였다. 그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인하여 더욱 정밀함을 이루고, 그 미진한 것을 미루어 그 나머지 것을 통달하였다.
반착(盤錯)과 긍경(肯綮)주 39)의 곳은 모두 파헤쳐 갈래를 치고 발라내서 매우 깊게 기미를 연구하였다. 구하여 얻지 못하면 혹 다른 사람에게 묻고, 남에게서 얻으면 반드시 마음속에서 구하여서 옛날에 풀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모두 풀게 되었다. 아래로는 염락(濂洛) 등 여러 책에 이르기까지 더욱 침잠완색(沈潛玩索)하고 우유함영(優游涵泳)하였으며, 마음과 몸에서 체험하여 행동에 보였다.
이에 세상에서 칭찬하고 천거하는 자는 혹 서법이 정밀하다는 것으로써, 혹은 문장이 오묘하다는 것으로써, 혹은 염퇴(恬退, 기꺼이 물러남)하다는 것으로, 혹은 청백(淸白)하다는 것으로써 하였으니, 그를 아는 것이 경전에 밝고 행위가 예에 합당한 사람이라고 한 것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진퇴함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생은 일심으로 도를 향하길 마치 물이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듯, 화살이 과녁으로 향하듯, 금을 백번 단련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요체는 박실(朴實)한 곳에서 공부해가서 지극히 크고 바른 도를 구했고, 하나의 재능과 하나의 행실로 이름을 이루고자 하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날마다 반드시 일찍 일어났고, 일어나면 반드시 관대를 하였으며, 앉으면 무릎을 모았고, 서서는 건들거리거나 기대지 않았다. 어깨와 등은 바루세우고 시선은 단정했으며, 보행은 편안하고 천천히 하였다. 발언은 정밀하게 살펴서 했고, 고집함도 없고 속박함도 없었으며, 방자하지 않고 태만하지 않았다.
내면을 기른 것이 습관이 되고 표리가 통했으며, 응대하고 진퇴할 때는 온화하게 법도에 맞았고, 어묵동정은 단정하고 자상하며 안정적이었다. 성내는 말을 볼 수 없었고, 노복에게 꾸짖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음식과 의복에 있어서도 더욱 절검하니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편안한 것이 성품인 것 같이 사물을 접하고 일을 처리하였다. 자제를 가르칠 때는 자애로우면서도 의롭게 하였으며, 집안사람을 거느릴 때는 엄하면서도 은혜롭게 하였다. 어른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늙었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태만하지 않았고, 제사를 받드는 데 있어서는 근력이 없다는 것으로써 스스로 게을리하지 않았다.
종족에게는 반드시 돈목하게 하였고, 손님이나 벗을 대할 때는 한결같이 화순하고 공경하게 하였으니, 가깝거나 멀거나 귀하거나 천한 사람이 모두 그 마땅함을 얻었다. 길흉의 경조사에 있어서도 각각 그 정에 걸맞게 하였다. 집안의 재물이 자주 비게 되어서도 일찍이 다른 사람에게 구한 적이 없었다.
임금이 하사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들과 나누었으며,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였고 궁한 사람을 구휼하기는 두텁게 하였다. 재산을 다스리는 것은 간결하게 하고, 몸가짐에 있어서는 치밀하게 하였다. 용모와 행동 사이나 사물을 응접할 때는 각각 그 이치를 얻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향당사람들은 복응하였고, 멀리 있는 사람은 그 덕을 사모하였으며, 현명한 자는 그 도를 즐기고 현명하지 않은 자는 그 의리를 두려워하였다.
무슨 일을 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선생께선 어떻게 여기실까'라고 말하고, 가르침을 청한 후에 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잘 아는 사람이건 모르는 사람이건 모두다 '퇴계'라고 하고 관직명으로 부르지 않았으니, 대개 감히 작위로써 선생을 찬양하지 않은 것이다.
옷자락을 걷어 올리고 배우기를 청하는 선비들이 날로 늘어나고 다시 나아가 번갈아가며 질문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얕거나 깊게 하지 않음이 없었고, 조용히 계도하고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귀를 잡아당기고 이끌어 도와주길 열심히 하며 권태로움을 잊었으며, 한결같이 마음을 깨우치고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하였다.
그 말은 성현의 가르침이었으며, 그 이치는 마음에서 터득한 것이었고, 그 용(用)은 만사에 퍼져 있으며, 그 체(體)는 한 몸에 갖추어져 있었다. 때문에 종일토록 논한 것은 공자・맹자・증자・자사・염락(濂洛)・관민(關閩)의 책에 불과하더라도 나오는 말은 무궁하였으며, 말은 더욱 친절하였다. 이치를 궁구하여 앎에 이르고, 자신을 반성하여 실천하였으며, 자신을 수양하여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그것을 확충해갔으니, 비록 나라와 천하에 들어서 실시하여도 되었다. 이 때문에 먼 곳의 선비들도 풍모만 듣고도 흥기하여 삼 백리 먼 길을 발을 싸매고 이르러 왔고, 현달한 관리와 귀인에 있어서도 모두 마음속으로 사모하고 대부분 강학하고 자신을 삼가는 것으로 일삼았다.
이에 경서에 고쳐야 할 뜻이 있으면 모든 속학의 고루하고 천착한 것을 이리저리 참고하여 바른 데로 돌렸다. 계몽(啓蒙)에 전의(傳疑)가 있으면 모든 제가들의 분합하고 달라진 것을 두루 통하고 구석구석 통창케 하여 그 깊은 내용을 다하였다. 회옹이 이미 죽어 지파가 드디어 나뉘어져서 배우는 사람이 반드시 그 적전을 지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학(理學)에는 통록(通錄)이 있는 것이고, 학술에는 계통이 있는 것이다. ≪주자서(朱子書)≫가 비록 있다고는 하나, 편질이 너무 많아서 독자들이 그 지취(指趣)를 궁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주요한 말만을 깎아내고 절을 만드니, 성학이 단서가 드러난 것이 있게 되었다.
〈천명도설〉의 경우에는 처음에 처사 정지운(鄭之雲)이 지은 것으로 인하고, 주렴계(周濂溪)와 자사(子思)의 설을 참고하여 그 오류를 고치고 그 부족함을 보완했다. 무릇 인물의 품부받은 것과 이기의 화생(化生)이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분명해지니, 고요할 때 수양하고, 움직일 때 살피는 공부도 그 속에 담겨 있다. 이것은 모두 세속의 누추한 습속을 씻어버리고 성현이 온축한 뜻을 발휘하여 후학의 심목(心目)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편지의 문답 사이에 보인 것도 명백하고 꼭 들어맞았으며, 정미(精微)하고 간곡하게 자세히 진술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이해시켰다.
중원의 도학이 실전되어서 백사(白沙)주 40)의 선회(禪會), 양명(陽明)주 41)의 파벽(頗僻)함에 이르게 되었으니, 또한 모두 근본을 뽑고 파헤쳐서 극력 논의를 다하고 그 잘못됨을 배척하였으니, 모두 진백사의 시교(詩敎), 왕양명의 ≪전습록(傳習錄)≫발문에 나타나있다. 우리 동방의 경우는 도학을 지향하는 선비가 없지는 않았으나, 혹 상수(象數)의 학문에 구애되거나 혹 이기의 나뉨에 어두웠다. 천근(淺近)한 자는 구설사(口舌事)에만 이(理)를 들먹이고, 고원(高遠)한 자는 요요명명(窈窈冥冥)한 곳으로 마음을 치달리어 혹 도를 백 가지만 들어도 자기와 같은 자가 없다고 여기는 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능히 박학(博學), 심문(審問), 정사(精思)를 힘써 실천하여 사도(斯道)에 나아가기를 구하는 자를 대개는 그런 사람을 얻기 어려우니, 선생은 매번 자다깨어 한탄하고 몰래 근심하며 우리 도의 병통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 학문은 먼저 근소한 것에서 원대한 것에 미치고, 정밀한 것과 거친 것이 합치되어 안과 밖을 겸하였으며, 지행을 병진하고, 움직일 때나 쉴 때를 서로 길러주며, 번거로움을 참고 신고하였으며, 주야로 부지런하고 조심하였다. 또한 어두워지면 들어가 쉬는 곳에서도 해이해지지 않았고, 한밤중에도 일어나 항상 사서와 심경 등의 글을 외우고 스스로 책려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대개 이것으로서 도를 다했다고 여기지 않았다. 마음을 비우고 뜻을 공손히 하여 묻기를 좋아하고 가까운 곳을 살폈다. 자신이 터득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버리고 다른 사람을 쫓았고, 말을 하여 이치에 맞으면 자기보다 잘하는 것을 취하였다. 남과 내가 서로 도움이 되게 하고 피차가 서로 발현되게 하여, 성기성물(成己成物)주 42)의 도를 갖추었다.
평생동안 책을 읽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사치스럽고 허탄한 글을 섞지 않았다. 이치를 궁구하지 않음이 없어서 반드시 도덕과 인의의 실상에 돌아갔다. 사람을 가르칠 때에도 차근차근히 순서가 있었는데, 대본과 대원에 대해서는 반드시 숨김없이 지시하였다.
대개 배우는 사람으로써 비록 절근(切近)한 공부에 급하지 않을 수 없을지라도 또한 도체(道體)의 높고 깊음을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말한 것은 모두 수용(受用)에 절실하여 대군(大軍)의 유기(游騎)가 멀리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것과는 같지 않았다.
만년에는 다시 예서(禮書)에 뜻을 두고 유전(遺傳)을 토론하고 시의(時宜)를 참작하여 배우는 자들에게 가르쳤지만 저술하여 책으로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설에 대해서는 본디 속된 이해의 비루함을 배척하였으며, 이미 그 설을 지은 것은 마침내 고봉(高峯) 기명언(奇明彦)을 얻고서 곧 다시 연구하여 비로소 전설(前說)이 그릇됨을 깨달아 다시 정론(定論)하여 대답하였다. 그러나 선생이 이미 병들어 손으로 쓸 수가 없어, 다만 자제(子弟)들에게 탈고(脫藁)하게 하여 일찍이 더불어 논변했던 여러 곳에 보내었다.
또 역책(易簀)주 43)하기 며칠 전에도 여전히 ≪심경부주(心經附註)≫주 44)의 오자(誤字)를 바로잡은 것을 취하여 동도(東都)로 보내어 판본(板本)을 개정(改正)하게 하였다. 아! 선생의 독학(篤學)에 대한 일념은 단(丹)과 같이 밝게 빛나서 죽음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음을 또한 여기서 볼 수 있다. 그 도덕의 높고 낮음와 학문의 깊고 얕음 같은 것에 대해서는 말학(末學)이 감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나, 그 도에 대한 신념의 독실함과 학문을 좋아하는 정성은 노여워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았으며 싫어하거나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비록 '회옹(晦翁)의 세적(世適)'이라고 할지라도 옳은 말이다.
흉회가 소쇄하고 기품은 맑고 초탈하여 매번 아름다운 산수(山水)와 한적한 절경을 만나면 혹 술병을 들고 홀로 가거나, 혹은 짝을 불러 함께 노닐며 읊조리다가 해가 지면 돌아왔다. 이 모두가 가슴을 툭 트이게 하고 정신을 소통하게 하며 성정을 기르는 일이었으니, 한가로움을 틈타 경치만을 완상하고 멋대로 임천(林泉)에서 노는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시(詩)나 자획(字畫)과 같은 묘함에 이르러서도 단지 여가의 일이었지만 전아(典雅)하고 연정(硏精)한 것은 일찍부터 명성이 있었다. 만년에 지은 작품은 모두 화려한 빛깔을 벗겨내고, 날카로운 칼날끝을 수렴하여 감추어서, 충담(沖澹, 담백)하고 건오(健奧, 내실이 있음)하며, 단방(端方, 단정)하고 진밀(縝密, 주밀)하여 마치 다른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였다. 그것을 얻은 사람들은 영귀(靈龜)나 공벽(拱璧)과 같이 여겼으니, 또한 품부받은 기질이 두텁고 소양이 깊으면서도 다재다능하여 날로 나아간 것이 이와 같음을 볼 수 있다.
만년에는 도산에 정사를 짓고 마음을 가다듬어 정신을 수양하는[頤神養性]주 45) 곳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그 효효(囂囂)주 46)하고 자득(自得)한 정취가 자찬(自撰)한 시와 기(記) 속에서 모두 볼 수 있는데, 다른 사람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사시음(四時吟)〉주 47)과 〈십이곡(十二曲)〉주 48)을 지어 한가로이 거처하면서 도를 완미하는 무궁(無窮)한 즐거움을 극진하게 말하여 그 회포를 부쳤다. 대개는 이로써 스스로 늙어가고자 하였지만, 명종(明宗) 말년과 금상(今上, 선조) 초기에 권주(眷注, 왕이 특별히 돌보심)가 매우 두터워 초빙하는 명이 거듭 이름에 선생은 두려워하며 스스로 용납되지 못할 듯이 하였다. 한 번 소명(召命)이 내려오고 한 번 작질(爵秩)이 오를 때마다 반드시 간담(肝膽)을 드러내고 의리와 예법에 근거하여 그 나아가 받기 어려운 사정을 주달하였다. 조정에서는 그 정성의 간곡함을 헤아려서 혹 관직을 체직해주기도 하고 혹 직사(職事)를 맡기지 않기도 하였다. 대개 그 뜻을 위로하고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반드시 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선생은 또한 군신의 의리가 중하고 유지(諭旨)가 간절하기 때문에 간혹 서울에 가긴 했지만, 또한 일찍이 오래 머문 적이 없었다. 대개 진퇴와 거취가 마치 저울추가 경중을 다는 것과 같았고, 자[度]가 장단을 잰 것과 같아서 한 치 한 푼[錙銖]주 49)의 세세한 일도 반드시 살피고 조그마한 일도 놓치지 않았으니, 속인의 천견(淺見)으로는 다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며 또한 쉽게 논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일찍이 호문정(胡文定)주 50)의 말을 들어서 다른 사람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사람의 출처(出處)와 어묵(語默)은 마치 춥고 따뜻하고 굶주리고 배부른 것과 같이 스스로 알아서 짐작해야지 다른 사람에게 결정을 받을 수도 없으며, 또한 다른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주 51)라고 하였다.
제왕들이 한 격치성정(格致誠正)주 52)의 학문과 성현들이 한 징질천개(懲窒遷改)주 53)의 방도에 대해서는 혹 면대(面對)하기도 하고 혹은 계차(啓箚)로도 하였으며, 혹은 그림으로 그리고 혹은 저서로 하여 기미(幾微, 사소)의 즈음에서 세밀하게 분석하고, 정밀한 가운데에서 본원을 궁구하여 횡설수설(橫說竪說)주 54)한 것이 정녕하고 간곡하여 더는 남겨둔 것이 없었다.
문소전(文昭殿)의 한 의론주 55)에서 태조는 동향의 위치로 바르게 하고 소목(昭穆)주 56)은 남북의 차례로 정할 것을 청해서 거의 이것으로 다시 삼대(三代) 종묘의 위향(位向)의 바름을 볼 것 같았으나, 끝내 행해지지 못했다. 그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비록 한가히 거처할 때라도 일찍이 하루라도 마음에서 잊은 적이 없었다. 매번 조정 정사(政事)의 한 실(失)을 들으면 근심이 얼굴에 드러났고, 거조(擧措)의 한 득(得)을 들으면 말에 기뻐하는 기색이 보였다. 만년의 염려는 여기에 그친 것이 아니었다. 깊이 임금의 덕을 보양(補養)하고 근원을 맑고 바르게 하는 것을 바로 지금의 급선무로 여겼다. 매양 당세의 어진 사대부를 만나면 매우 간곡하게 말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대개 선생은 도의(道義)에 대해 신명(神明)과 같이 공경하고, 시귀(蓍龜)와 같이 믿었으며, 숙속(菽粟)과 같이 일용했고, 구갈(裘葛)주 57)과 같이 입었다. 그러므로 일이 진실로 의리에 맞는다면 비록 사람들의 비난과 비웃음을 받더라도 근심함이 없었다. 부름을 받아도 오지 않고 잡아당겨도 머물지 않았으니, 위로 정신(廷紳, 조정의 신하)에서부터 아래로 위포(韋布, 재야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가 고집이 너무 지나치다는 의혹이 없지 않았지만, 선생은 확고하게 바꾸지 않고 오직 의리를 따랐다. 그 때문에 선생이 하는 바를 세상 사람들이 대부분 알지 못하였으나 그 행동은 바로 옛사람에게 질정(質正)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때문에 동방의 사람들이 우러러보기를 마치 상서로운 기린이 교외의 숲에 있는 것처럼,주 58) 의젓한 봉황이 천길 절벽에서 날개짓 하듯, 해와 별이 중천에 떠있는 것처럼, 급류속의 지주처럼, 태산 교악이 우뚝한 것처럼 했다. 그러나 선생은 오히려 헛된 이름으로 높은 벼슬을 취했다고 여기고, 강호(江湖)에 처하면서 관리의 명부에 오른 것을 평생의 가장 큰 근심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미 관직에 나가면 물러나기를 청했고, 이미 물러나서는 치사(致仕)주 59)를 청하였는데, 혹은 진정소(陳情疎, 사정을 진달하는 소)로 혹은 자핵소(自劾疏, 허물을 스스로 진술하는 상소)를 올려 한 해라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말년에는 사례를 인용하여 표전(表箋)을 올려 세 차례 치사를 요청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으니, 병이 깊어 누워계신 날에 유훈을 남겨 "비(碑)를 세우지 말며 국장(國葬)을 사양하고 다만 '퇴도만은(退陶晩隱)'의 호(號)만을 묘석(墓石)에 쓰라."고 하셨으니, 오호라, 이것이 선생의 평소의 뜻이다.
선생의 학문은 배우는 자들이 비록 많으나 아는 자는 드물며, 아는 자가 비록 있더라도 얻는 자는 더욱 적었다. 이 때문에 그 덕행의 아름다움을 나타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선생의 글이 모두 남아 있으니, 뒷날 좋은 독자들이 마땅히 여기에서 구한다면 또한 선생의 마음을 알 것이다.
선생이 태어남은 위로 주자(朱子)의 세상과 거의 4백년이 떨어지고, 땅이 서로 떨어진 거리는 또 거의 만 여리이다. 그러나 선생은 그의 글을 숭상하여 읽고 그 뜻을 구함으로써 그 도(道)에 통달했으니, 후인들이 만약 선생이 회옹(晦翁, 주자)의 마음을 배우듯이 선생의 학문을 구한다면 도에 이르는 것이 멀지 않을 것이다.
아! 우리 동방은 궁벽하게 치우치고 선비들은 견문이 국한되어 위로는 전수된 것이 없고, 아래로는 잇는 것이 없다. 비록 만들려는 사람이 있어다 할지라도 반드시 이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 학문의 정대함과 의리의 바르고 깊음, 공부의 극진함, 지조와 행실의 굳건함을 구하고, 잠심발분(潛心發憤)하고 도를 체득하여 덕을 이룬 자는 나 조목의 소견으로는 한 사람 뿐이다. 태산과 대들보[山梁]가 무너졌으니주 60) 우리 도를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다. 아아, 슬프도다!
주석 34)추환(芻豢)
소, 돼지와 같은 가축의 고기를 말한다. ≪맹자(孟子)≫ 〈고자(告子)상〉에서 "의리가 내 마음에 기쁜 것이 고기가 내 입에 맛있는 것과 같다.[義理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하였다.
주석 35)소호(所怙)
아버지의 아칭임. ≪시경(詩經)≫ 〈육아편(蓼莪篇)〉에, "아비가 없으면 무엇을 믿으랴.[無父, 何怙?]"에서 기인되었다.
주석 36)정독(程督)
계책을 정하고 책망하여 바로잡음.
주석 37)존심(存心)
유가의 수양론인 '존심양성(存心養性)'으로, ≪맹자≫ 〈진심 상(盡心上)〉에 "그 마음을 보존하며 그 성을 기름은 하늘을 섬기는 것이다.[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라고 하였다.
주석 38)천석(泉石)
천석고황(泉石膏肓)에세 온 말로 마치 고질병 환자처럼 산수(山水)에 중독되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는 뜻으로, 자연의 승경(勝景)에 대한 혹독한 애착심을 표현할 때 쓰는 말이다. 전유암(田游巖)이 당 고종(唐高宗)에게 "신은 물과 바위에 대한 병이 이미 고황에 들고 연무(煙霧)와 노을에 고질병이 들었는데, 성상의 시대를 만나 다행히 소요하고 있습니다.[臣泉石膏肓煙霞痼疾, 旣逢聖代, 幸得逍遙.]"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舊唐書 卷192 田游巖傳≫
주석 39)반착(盤錯)과 긍경(肯綮)
반착은 반근착절(盤根錯節)의 준말로, 어려운 일에 비유되고, 긍경은 일의 핵심을 말한다.
주석 40)백사(白沙)
진헌장(陳獻章, 1428~1500)의 호. 명나라 학자. 자는 공보(公甫), 호는 백사(白沙), 본관은 신회(新會)임. 학문은 정좌(靜坐)를 위주로 하였다. 성현의 책을 읽었지만 도리를 얻을 수가 없자, 마음과 이(理)가 하나로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여기고, 정좌(靜坐)를 통해 물(物)이 이(理)를 체인(體認)하는 것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주석 41)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 1472~1528)의 호. 명나라의 정치인·사상가. 자는 백안(伯安)이다. 주자의 격물치지설에 회의를 품고, 심즉리설을 제창하였다.
주석 42)성기성물(成己成物)
자기의 덕을 완성하고 그 덕으로 남을 교화시킴을 뜻한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5장에 "성(誠)은 자기만 이룰 뿐 아니라 남을 이루어 주니, 자기를 이룸은 인(仁)이고 남을 이루어 줌은 지(智)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43)역책(易簀)
스승이나 현인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책(簀)은 와상(臥床)의 깔개로서 증자(曾子)가 병환 중에 대부(大夫)의 신분에 걸맞은 화려한 깔개를 깔고 있었는데, 임종(臨終)할 당시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제자들로 하여금 깔개를 바꾸게 하고 죽은 데서 유래하였다.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
주석 44)심경부주(心經附註)
중국 송(宋)나라 때 학자 서산(西山) 진덕수(眞德秀)의 ≪심경(心經)≫에 명나라의 정민정(程敏政)이 주(註)를 붙인 책이다.
주석 45)마음을 …… 수양하는[頤神養性]
이신양성(頤神養性)은 마음을 가다듬어 정신을 수양한다는 뜻이다. ≪주역≫에 보면, 〈이괘(頤卦)〉는 산(山)을 뜻하는 간괘(艮卦)와 우레[雷]를 뜻하는 진괘(震卦)의 결합이다. 또한 이(頤)는 '턱'이라는 뜻인데, 턱을 움직여 음식물을 씹어 몸을 기르기 때문에 '기르다[養]'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
주석 46)효효(囂囂)
제 분수에 만족하여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석 47)사시음(四時吟)
원 제목은 〈산거사시각사음(山居四時各四吟)〉으로 사계절을 아침・점심・저녁・밤으로 나누어 각각 네 수씩 읊어, 모두 16절로 구성되어 있다.
주석 48)십이곡(十二曲)
원 제목은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으로 퇴계가 만년에 예안(禮安)에 도산서원을 세우고 학문하고 수양하면서 얻은 감흥을 주변의 경치와 연계하여 지은 것이다. ≪퇴계집≫ 권43에 실려 있는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에는 '우리 동방의 노래는 대부분 음란하여 말할 것이 없다. 한림별곡(翰林別曲)과 같은 노래는 글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왔으나, 교만하고 방탕하며 겸하여 점잖지 못하고 장난기가 있어 더욱 군자(君子)가 숭상해야 할 바가 아니다. 오직 근세에 이별(李鼈)의 〈6가(歌)〉가 세상에 성대하게 전하니 오히려 그것이 이보다 좋다고는 하나, 그래도 세상을 희롱하고 불공(不恭)한 뜻만 있고, 온유돈후(溫柔敦厚)한 내용이 적은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 …… 그래서 내가 일찍이 이씨의 노래를 모방하여 도산 6곡이란 것을 지은 것이 둘이니, 그 하나는 뜻을 말함이요, 그 하나는 학문을 말한 것이다.'라고 도산십이곡을 짓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다.
주석 49)한치 한푼[錙銖]
한치 한푼의 아주 세세한 것을 의미한 것으로로, 옛날 중국(中國)의 저울 눈에서 백 개의 기장의 낱알을 1수(銖), 24수를 1냥(兩), 8냥을 1치(錙)라고 일컬은 데서 생긴 말이다.
주석 50)호문정(胡文定)
이름은 호안국(胡安國, 1074~1138)이고, 자는 강후(康侯)이며, 문정은 그의 시호이다. 송나라 건주(建州) 숭안(崇安) 사람으로, 저서에 ≪춘추전(春秋傳)≫, ≪자치통감거요보유(資治通鑑擧要補遺)≫ 등이 있다.
주석 51)사람의 …… 아니다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 권13 〈호문정공(胡文定公)〉에 나온다.
주석 52)격치성정(格致誠正)
≪대학≫의 팔조목(八條目) 중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이다.
주석 53)징질천개(懲窒遷改)
그릇된 것을 징계하여 착한 것만을 행함을 말한다.
주석 54)횡설수설(橫說竪說)
사람을 깨우치기 위해 직설(直說)하기도 하고 우회해 말하기도 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 55)문소전(文昭殿)의 한 의론
문소전이란 국가의 종묘에 대응하는 왕실의 사묘(私廟)이다. 세종 대 중반에 기존의 여러 혼전(魂殿)을 통합하여 태조와 현 국왕의 4대조를 모시기 위하여 설립한 것이다. 따라서 왕통에 따라 위차가 정해지는 종묘와는 달리 사묘의 성격이 강한 문소전은 혈통과 왕통의 사이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어 있다. 즉 인종・명종과 같이 형제가 계승한 경우 4대조를 모실 수밖에 없는 묘(廟)의 성격상 당연히 모셔야 하는 현왕의 4대조인 고조(高祖)를 조천(祧遷)해야 하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은 명종의 문소전 부묘에 대해서 형제간인 인종과 명종을 소목을 같이하는 방법으로 봉안하자고 주장하면서 "옛날의 협향(祫享)의 위치는 태조가 동향, 소・목이 남・북향이었는데, 우리나라 종묘에는 협향의 의식이 없고 오직 원묘(原廟)인 문소전에만 협향이 있을 뿐이고, 그 위치가 옛날의 것이 아니니 이 기회에 태조는 동향으로, 소・목은 남・북으로 서로 마주 보게 하면 집을 헐어 고치는 폐단도 없을 뿐 아니라 세속에서도 옛날로 돌아가는 아름다운 일이 있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석 56)소목(昭穆)
종묘의 제도에, 태조는 정중(正中)에 모시고, 그 왼쪽에 있는 신위를 소(昭), 오른쪽에 있는 신위를 목(穆)이라 한다.
주석 57)구갈(裘葛)
동구(冬裘)・하갈(夏葛)의 준말로 곧 겨울 옷과 여름 옷이란 뜻이다.
주석 58)상서로운 …… 것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기린과 봉황이 교외의 숲에 있고, 황하와 낙수에서 하도와 낙서가 나왔네[麟鳳在郊藪 河洛出圖書]"라고 하였다.
주석 59)치사(致仕)
나이가 들어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예기≫ 〈곡례 상(曲禮上)〉에 "대부는 나이가 칠십이 되면 일을 그만둔다.[大夫七十而致事]"는 구절이 있다.
주석 60)태산과 …… 무너졌으니
스승이나 현인을 잃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태산이 무너지려나, 대들보가 꺾이려나, 철인이 시들려나?[泰山其頹乎, 梁木其摧乎, 哲人其萎乎?]"라고 노래하였는데, 과연 7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고사에서 유래하였다.(≪예기≫ 〈단궁(檀弓)〉)
二十一日 癸巳
陽。看 ≪文純公退陶先生言行錄≫。 記之。

言行錄。
先生天資頴悟。 神彩精明。性幼端懿。 不喜狎弄。長好學問。 養以道義。故聰明正直。 孝悌忠信。 而精純溫粹。 不露圭角。氣和而毅。 辭婉而直。學博而要。 行全而篤。淸而不激。 介而不矯。慕古而不滯。 處世而不流。先生之於爲人。 可謂幾乎美且大。 安而成者矣。癯然若不勝衣。 而進道之志。 堅如金石。翛然夐出塵表。 而操修之功。 著於日用。爵祿之榮。 懼若坑塹之陷已。義理之眞。 耽如芻豢之悅口。學已成矣。 而汲汲乎如未能及。 德已修矣。 而謙謙然若無所得。古人所謂'資稟旣異而充養有道'者。 將非先生之謂歟。蓋先生生纔半歲。 失其所怙。 年未髫齔。 已好讀書。雖無父師勸勉程督之勞。 而日謹課誦。 不敢少懈。應對拜跪。 溫恭恪順。 見者已知非常兒矣。稍長。 讀 ≪論語≫ ≪小學≫等書。 益自警悟惕厲。 言語動止。 必以禮法。 而尤篤於愛親敬長。 雞鳴盥漱。 衣帶必飭。 以省大夫人。怡聲下氣。 婉容愉色。 無或少失。 至於昏定亦如之。枕席之設。 衣衾之斂。 必身親爲之。 未嘗委諸侍兒。與仲兄同居累年。 仲兄年長數歲。 而事之甚謹。嫂叔日夕相見。 必致禮敬。 多自遜避不敢當。大夫人嘗謂人曰 "人言子弟必待父兄之敎。 未必然也。吾於此兒。 少無導養之方。 未嘗見其不冠不帶箕踞偃臥之時。"云云。 蓋天性然也。旣又博觀經傳。 兼通性理諸書。 已見大義於聖賢事業。 存心服膺久矣。其羣居。 斂衽端坐。 或觀書。 或靜默以終日。 未嘗爲閒話雜說。 人皆敬畏之。雖有不檢者。 亦皆斂躬自飭。 無敢肆。弱冠游國庠。 時經己卯之禍。 士習日趨浮蕩。見先生所爲。 人皆笑侮。 先生不以易志。 處之超然。雅意林壑。 不求聞達。中因苦學。 頗得羸悴之疾。且知俗情難與俯仰。 自預司馬之選。 無復榮進之意。逍遙泉石。 菽水爲懽。 若將終身。 竟以家貧親老。 黽勉就擧。 以至顯途。 而非其所樂也。乙巳之變。 幾陷不測。旣而棄官東歸。 卜居退溪之上。世味益薄。 而讀書求道之志則愈堅愈確。在京。 嘗得 ≪朱子全書≫。 讀而喜之。自是閉門靜居。 終日危坐。 專精致志。俯讀仰思。 要以眞知實得爲務。 而其信之篤悅之深。 無異於耳承面受。由是。 所見日益精明。 所造日益純固。於諸經微詞奧旨。 如探淵採珠。 入海觀龍。因其所已知。 益致其精。 推其所未盡。 以達其餘。盤錯肯綮之處。 悉皆爬梳剔抉。 極深硏幾。求之未得。 則或諮於人。 得之於人。 則必求於心。 昔所未解者。 今悉融釋。下逮濂洛諸書。 更加沈潛玩索。 優游涵泳。 驗之於心。 體之於身。 而見之於行也。於是世之稱薦者。 或以書法之精。 或以文章之妙。 或以恬退。 或以淸白。 其知之者。 不過以爲明經飭行之人而已。朝命屢掣。 進退無恆。 而先生一心向道。 如水必東。 如矢注的。 如金百鍊。要於朴實頭做工。 以求至乎大中至正之道。 不但欲以一藝一行成名而已。平居日必早起。 起必冠帶。 坐則斂膝。 立不跛倚。肩背竦直。 視瞻端正。 行步安徐。發言精審。 無拘無迫。 不肆不怠。充養積習。 表裏融澈。 周旋進退。 雍容中度。語默動靜。 端詳閒泰。 忿厲未見于詞氣。 罵詈不形乎婢僕。至於飮食衣服。 尤致節儉。 人所不堪。安之若性。 接物處事。 則敎子弟。 慈而義。 御家衆。 嚴而惠。事長則不以貴老自怠。 奉祭則不以筋力自惰。處宗族。 必敦睦婣。 待賓友。 一以和敬。 親疎貴賤。 咸得其宜。吉凶慶吊。 各稱其情。家至屢空。 而未嘗求諸人。君有所賜。 則必以分諸隣。 薄於自奉而厚於恤窮。 簡於治産而密於持己。威儀容止之間。 事物應接之際。 無不各得其理。由是。 鄕黨服其化。 遠人慕其德。 賢者樂其道。 不賢者畏其義。凡有所爲。 必曰'先生以爲何如'。 莫不諮稟而後行之。識與不識。 咸曰'退溪'。 而不以官稱之。 蓋不敢以爵位爲先生榮也。摳衣請學之士。 日以益衆。 更進迭問。無不隨人淺深。 從容啓迪。 諄悉告諭。 提撕誘掖。 亹亹忘倦。 一以開明心術。 變化氣質爲先。其言則聖賢之訓。 而其理則得之於心。 其用則散於萬事。 而其體則具於一身。故終日所論。 不過乎孔孟曾思濂洛關閩之書。 而其出無窮。語益親切。 不離乎窮理致知。 反躬踐實。 爲己謹獨之事。而擴而充之。 則雖擧而措之國與天下。 可也。由是。 遠方之士聞風興起。 百舍重趼而至。至於達官貴人。 亦皆傾心向慕。 多以講學飭己爲事。於是。 經書有訂議。 則凡俗學之膠固穿鑿者。 參互考訂。 以歸於正。啓蒙有傳疑。 則凡諸家之分合異同者。 旁通曲暢。 以盡其蘊。晦翁旣歿。 枝派遂分。學者未必能守其的傳。 故理學有通錄。 而學術有所統。一朱書雖存。 編帙浩穰。 讀者未必能究其指趣。 故刪節其要語。 而聖學有所發端。至於天命圖說。 則初因鄭處士之雲所撰。 而參究濂溪子思之說。 改其誤補其欠。凡人物之稟賦。 理氣之化生。 粲然如視諸掌。 而靜養動察之功。 寓於其中。是皆有以滌世俗之陋習。 發聖賢之蘊奧。 開後學之心目。 而其見於尺牘答問之間者。 明白切當。 精微曲折。 覼縷畢陳。 有以洽服人心。至於中原道學之失傳。 流而爲白沙之禪會。 陽明之頗僻。 則亦皆披根拔本。 極言竭論。 以斥其非。 具見於白沙詩敎,陽明 ≪傳習錄≫ 〈跋語〉。若吾東方。 則非無志道向學之士。 而或拘於象數之學。 或昧於理氣之分。近者騰理於口舌之間。 遠者馳心於窈冥之域。或聞道百。 以爲莫己若者比比。而然其能博學審問精思力踐。 以求進乎斯道者。 蓋難其人。 先生每寤歎隱憂。 以爲吾道之病。故其爲學也。 先近小以及遠大。 合精粗以兼內外。知行互進。 動息交養。 耐煩喫辛。 日乾夕惕。 而又不弛於嚮晦宴息之地。 中夜以起。 恒誦四子心經等書。 以自策勵。然先生蓋未嘗以是爲足以盡道也。虛心遜志。 好問察邇。己未有得則捨而從人。 言而中理則取善於己。物我相資。 彼此交發。 而成己成物之道備矣。平生無書不讀。 而不雜以浮華虛誕之文。無理不窮。 而必歸於道德仁義之實。敎人循循有序。 而於大本大原處。 亦必指示無隱。蓋以學者。 雖不得不急於切近之工夫。 亦不可不察於道體之高深也。然其爲說。 皆切於受用。 非如大軍游騎出遠無歸也。晩復留意禮書。 討論遺傳。 參酌時宜。 以敎學者。 未及著爲成書。至於格物致知之說。 則素排俗觧之陋。 已著其說。 竟得高峯奇明彦。乃復硏究。 始悟前說之差。 更爲定論以報。而先生已病矣。 不能手書。 只令子弟脫藁。 以送於諸所嘗與論辨處。又於易簀前數日。 猶令取所訂 ≪心經附註≫誤字處。 送于東都。 改正板本。噫! 先生篤學一念。 炳然如丹。 之死不已。 亦見於此矣。若其道德之高下。 學問之淺深。 非末學所敢與知。 而信道之篤。 好學之誠。 不慍不悔。 不厭不倦。 則雖曰 '晦翁之世適'。 可也。襟懷飄灑。 韻度淸越。 每遇佳山麗水幽閒逈絶之處。 則或携壺獨往。 或命侶俱遊。 徜徉嘯咏。 終日而歸。皆所以開豁心胸。 疏瀹精神。 資養性情之一事。 非偸閒玩景。 放意林泉之比也。至如詩字畫之妙。 特其餘事。 而典雅硏精。 早有能聲。晩年所作。 則皆雕華剝彩。 斂鍔韜鋒。 而沖澹健奧。 端方縝密。 如出兩手。獲之者如靈龜拱璧然。 亦可見所稟之厚。 所養之深。 而多能日進如此矣。晩構精舍於陶山。 以爲頤神養性之所。其囂囂自得之趣。 備見於自撰詩記中。 非他人所能道也。又製〈四時吟〉及〈十二曲〉。 極言閒居味道無窮之樂。 以寓其懷。蓋將以是自老。 而明宗晩年。 今上初政。 眷注甚重。 旌招沓至。 先生瞿然。 如不自容。每一召命之下。 一爵秩之陞。 必披肝吐膽。 引義據禮。 以達其進受之難。朝廷諒其誠懇。 或遞其官。 或不任職。 蓋以慰安其意。 而冀其必來也。先生亦以君臣義重。 諭旨懇切。 或到京師。 而亦未嘗久留。蓋其一進一退一去一就。 如權之稱輕重。 如度之度長短。錙銖必察。 不失尺寸。 非俗人淺見所能盡知。 而亦非可以易而論也。故嘗擧胡文定之語以告人曰 "人之出處語默。 如寒溫飢飽。 自知斟酌。 不可決之於人。 亦非人所能決也" 其於帝王格致誠正之學。 聖賢懲窒遷改之方。 則或因面對。 或因啓箚。 或爲圖或著說。 毫分縷析於幾微之際。 極本窮源於靜密之中。橫論竪說。 丁寧懇到。 無復餘蘊。至於文昭一議。 請正太祖東向之位。 定昭穆南北之序。 庶幾因此復見三代宗廟位向之正。 而卒未之行。其愛君憂國之心。 雖閒居。 未嘗一日而忘于懷。每聞朝廷一政事之失。 則憂形于色。 一擧措之得。 則喜見于言。晩年所慮。 非止於此。 深以輔養君德。 淸源正本。 爲當今急務。每遇當世之賢士大夫。 言之懇懇不已。蓋先生之於道義。 敬之如神明。 信之如蓍龜。 用之如菽粟。 服之如裘葛。 故事苟得義。 雖被人非笑。 有不足恤。當其招之而不來。 援之而不止。 上自廷紳。 下至韋布。 無不疑其太執。 而先生確然不易。 唯義之從。故先生之所爲。 世人固多不識。 而其行則可以質諸古人而無愧者矣。故東人之望之也。 如祥麟之在乎郊藪。 儀鳳之翔于千仞。 日星乎中天。 砥柱乎奔(流)。 泰山喬嶽之巍然也。然先生猶自謂以虛名取高爵。 處江湖係朝籍。 最爲平生之患。故旣進則乞退。 旣退則請致。 或陳情或自劾。 無歲不然。 而末年。 援例上箋。 三乞致仕而不得。 則又於疾病之日。 遺誡 '勿立碑。 辭國葬。 只以退陶晩隱之號書於墓石。 嗚呼。 是先生平日意也。先生之學。 學者雖多。 而知者鮮矣。 知者雖存。 而得者尤寡。 是以能形容其德美者難矣。然先生之文俱在。 後之善讀者。 當於此求之。 則亦知先生之心矣。先生之生。 上距朱子之世。 幾乎四百年。 地之相距。 亦幾乎萬餘里。而先生尙且讀其書。 求其義以達其道。 後之人。 若以先生。 學晦翁之心。 而求先生之學則。 其至於道也。 不遠矣。噫。 我東僻陋。 士局見聞。 上無以傳。 下無所承。雖有作者。 鮮克必至。求其學問之正大。 義理之精深。 工夫之至到。 操履之堅確。 潛心發憤。 體道成德者。 以穆所見。 一人而已。山梁頹壞。 吾道無托。嗚呼痛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