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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15년(을묘) / 12월(十二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4.0010.TXT.0022
21일(신유)
맑음. ≪도산급문제현록(陶山及門諸賢錄)≫을 보았다.
정구(鄭逑)의 자는 도가(道可)이고, 호는 한강(寒崗)이며, 성주(星州)에 살았다. 가정 계묘년(1543)에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부터 기질이 남다르고 영특함이 뛰어났다. 13세에 오덕계(吳德溪)주 87)에게 집지(執贄)주 88)하고, ≪주역≫의 건곤(乾坤) 두 괘를 배워 유추하여 통달하였는데, 일찍이 익혀온 것과 다름이 없었다. 또 조남명(曺南冥, 조식)과 성대곡(成大谷, 성운)주 89)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향시에 뽑혔으나 회시(會試)에는 응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옛 성현(聖賢)과 같이 되기를 기약하였다.
계해(1563)년 퇴계(退溪)에서 선생을 뵙고, 이어서 ≪심경(心經)≫에 대해 질문하자 선생께서 그 영명한 재주를 매우 칭찬하셨다. 만력 초(1573년)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조정의 부름을 여러 번 받아 비로소 이르렀다. 선조께서 "그대의 스승 이황과 조식, 두 사람의 기상과 학문은 어떠한가?"하고 물으니, 대답하여 말하기를 "이황은 덕과 기량이 혼후(渾厚)하고 공부가 순숙(純熟, 완전히 익음)합니다. 조식은 재기가 호매(豪邁)하고, 흔들림 없이 자기 길을 갑니다[特立獨行].주 90)"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대학 공부중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가?"라고 하시자, 대답하여 말하길,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은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방도가 아님이 없지만, 선유(先儒)들이 말하길 '천덕과 왕도에서 그 요체는 다만 근독에 있을 뿐이다.[天德王道, 其要只居謹獨]주 91)'라고 하였으니, 제왕의 학문도 또한 근독에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묻기를 "정전(程傳)과 본의(本義) 가운데 어느 쪽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가?"라고 하시니, 대답하기를 "역(易)의 도(道)는 소장영허(消長盈虛)의 이치와 진퇴어묵(進退語默)의 기미를 밝게 알아 시중(時中)을 잃지 않는 것이고, 점치는 것은 역의 말(末)이니 정전을 우선으로 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주석 87)오덕계(吳德溪)
오건(吳楗, 1521~1574)을 가르킨다.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德溪),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31세 때 남명 조식(曺植)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고 이후 퇴계 이황(李滉)의 문하에서도 학문을 수학하였다. 1552년(명종 7) 진사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급제, 1567년 정언(正言)을 거쳐 1571년(선조 4)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춘추관기사관을 겸하고 ≪명종실록(明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독서와 집필로 여생을 보냈다. 하지만 그가 사직한 이조정랑 후임자를 두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대립하여 동서 분당의 계기가 되었고 이후 조선 정치사를 뒤흔든 300년 당쟁이 시작되었다. 오건의 학문은 궁리거경(窮理居敬)을 중시하였다. 그의 학문은 퇴계 이황의 이기철학(理氣哲學)과 남명 조식의 경의철학(敬義哲學)을 융합한 것으로 평가된다. 저서에 ≪덕계문집≫, ≪정묘일기(丁卯日記)≫가 있다. 산청(山淸)의 서계서원(西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주석 88)집지(執贄)
제자가 스승을 처음으로 뵐 때 예폐(禮幣)를 가지고 가서 경의를 나타내는 것을 이른다.
주석 89)성대곡(成大谷)
성운(成運, 1497~1579)으로, 대곡은 그의 호이다. 자는 건숙(健叔),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을사사화 때 중형(仲兄) 우(遇)가 화를 당하자 속리산(俗離山)에 은거하였다.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출사하지 않았으며, 이지함(李之菡)・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 등 명현들과 더불어 교유하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저서로는 ≪대곡집(大谷集)≫이 있다.
주석 90)우뚝 …… 행합니다[特立獨行]
≪예기≫ 〈유행(儒行)〉에서 온 말로, 뜻과 행실이 고결하여 시류(時流)에 휩싸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주석 91)천덕(天德)과 …… 뿐이다
≪심경부주(心經附註)≫ 〈서문〉에 나온다. 근독(謹獨)은 신독(愼獨)과 같은 말이다. ≪중용장구≫ 제1장의 "숨겨진 것보다 더 나타나는 것이 없고, 미세한 것보다 더 드러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혼자 있을 때를 삼가는 것이다.[莫見乎隱, 莫顯乎微, 故君子, 愼其獨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二十一日 辛酉
陽。 看 ≪陶山諸賢及門錄≫。
鄭逑。 字道可。 號寒崗。 居星州。嘉靖癸卯。 生有異質。 英睿秀茇。十三執贄於吳德溪。 受易乾坤二卦。 以類而通。 無異夙慣。又問業於曺南冥・成大谷之門。嘗選鄕解。 不赴會試。遂棄科業。 以古聖賢自期。癸亥謁先生於退溪。 仍質 ≪心徑≫。 先生極稱其英材。萬曆初薦學行。 累召始至。 宣廟問 "爾師李滉・曹植。 二人氣象學問何如?" 對曰。 "李滉德器渾厚。 工夫純熟。 曹植才氣豪邁。 特立獨行。" 又問 "大學工夫。 何者最要?" 對曰。 "三綱八條。 無非修己治人之方。 而先儒言。 '天德王道。 其要只居謹獨'。 帝王之學。 亦在謹獨。" 又問 "程傳本義。 何先?" 對曰。 "易之道。 明消長盈虛之理。 進退語默之機。 不失乎時中也。 占候。 易之末也。 程傳宜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