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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17년(정사) / 8월(八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6.0011.TXT.0003
23일(계미)
맑음. 성묘를 하러 화면(火面) 가지봉에 있는 생모의 묘에 갔다. 이어서 하청(下靑)의 김세규(金世奎)댁으로 내려와 〈회헌신도비명(晦軒神道碑銘)〉을 보았다.

〈문성공 회헌선생 신도비명(文成公晦軒先生神道碑銘)〉
우리나라는 옛날 기자(箕子)가 홍범(洪範)주 116)을 다스려서 이륜(彛倫)을 펼치고 중하의 문명을 써서 오랑캐를 변화시켰는데, 뒤에는 깨달은 자가 드물어서 이교(異敎)의 함정에 빠진 것이 천여 년이었다. 고려 말에 성인의 도를 높일 줄을 알아서 국(國)에는 상(庠)주 117)과 향(鄕)에는 서(序)주 118)가 설치되니 문풍이 울흥해져서 여러 현인이 배출됨에 변화되어 중국처럼 되었다.
또 육백여 년이 지남에, 내가 일찍이 그 사이에 반드시 호걸지사가 일어나 변하기 어려운 것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김학수(金鶴洙)・정은조(鄭誾朝)주 119)・이만규(李晩奎) 등 여러 신사가 그 옛 동료인 윤헌섭(尹憲燮)을 보내 ≪회헌실기(晦軒實記)≫ 한 책을 안고 수륙길 70리를 달려와 궐리(闕里)의 고택에 있는 나를 방문하게 하여 회헌의 〈신도비문〉을 써주길 요구했는데, 나를 성인의 후예라고 여겼던 것이다. ≪회헌실기≫를 살피고 여러 번 반복해 읽어보고는 곧 황홀하게 천여 년을 능히 변화시킬 수 있는 자는 실로 우리 회헌(晦軒) 안자(安子)이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자는 고려 사람인데, 중국에 들어가 주자서를 보고 성문(聖門)의 적전이 됨을 알았다. 일찍이 말하길, "중니[공자]를 배우고자 한다면 먼저 회암[주희]을 배워야 한다."라고 말하고, 마침내 공자의 영정과 주자의 진영을 모사해 와서 집 뒤의 정사에 안치하고 조석으로 참배하였다. 이어서 집을 바쳐서 국학으로 삼게 하고, 전토와 노비를 바치고 창고를 갖추었으며 부릴 사람을 제공하였다. 다시 사람을 강남(江南, 난징)에 보내서 공자와 70제자의 화상, 그리고 예를 강(講)할 악기(樂器)와 육경(六經)주 120) 및 제자(諸子)・사서(史書) 등을 받들어 오게 함으로써 동방이 이로부터 문물이 성하게 되고 예속이 아름답게 되어 기자를 봉한 옛 땅에 부끄럼이 없게 되었다.
여러 왕은 은덕에 보답하고 여러 선비는 우러러 받들어서 위로는 성무(聖廡, 문묘)에 제향하고, 아래로는 서원에서 향사한다. 동방 이학의 비조라고 칭하니 거의 과분한 칭찬이 아니다. 안자의 휘는 향(珦)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며, 회헌(晦軒)은 그의 호이다. 장지는 조선국 장단부(長湍府)의 대덕산 자좌(子坐)의 언덕에 있다.
명에 이르길,

동방의 나라에 안자가 있으니(東國有安氏子)
세상에서는 회헌선생이라 부르네(世稱晦軒先生)
공부자를 근본으로 삼고 회암을 배워서(宗夫子學晦菴)
유도를 흥기시키고 밝혔네(興儒化道以明)
큰 덕은 더욱 높아져서(大德兮彌崇)
천년이 지나도록 체골은 편안하네(閱千歲體骨寧)
선비들도 사모하고 나도 또한 사모하니(多士慕我亦慕)
그 실상을 주워서 명으로 삼는다(摭其實以爲銘)

공자탄강 2468년 정사년(1917) 윤 2월에 66대손 연성공(衍聖公)을 세습한 공영이(孔令貽)가 삼가 지음.
주석 116)홍범(洪範)
≪서경(書經)≫ 〈주서(周書)〉의 편명으로, 홍범은 천하를 다스리기 위한 아홉 가지의 원리이다.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武王)에게 가르쳐 준 것으로 곧 오행(五行)・오사(五事)・팔정(八政)・오기(五紀)・황극(皇極)・삼덕(三德)・계의(稽疑)・서징(庶徵)・오복(五福)을 말한다.
주석 117)상(庠)
고대의 지방 교육기관을 말한다. 삼대(三代)에서는 그 명칭이 달랐다. 즉 하(夏)나라에서는 교(校), 은(殷)나라에서는 서(序), 주(周)나라에서는 상(庠)이라고 불렀으며, 학(學)이란 표현은 세 나라가 공통적으로 사용하였다.
주석 118)서(序)
고대의 지방 교육기관을 말한다. 삼대(三代)에서는 그 명칭이 달랐다. 즉 하(夏)나라에서는 교(校), 은(殷)나라에서는 서(序), 주(周)나라에서는 상(庠)이라고 불렀으며, 학(學)이란 표현은 세 나라가 공통적으로 사용하였다.
주석 119)정은조(鄭誾朝, 1856~1926)
자는 노언(魯言), 호는 연재(淵齋),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880년(고종17)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과 사간원에서 여러 관직을 거친 뒤 1887년 서장관이 되어 청(淸)나라에 다녀왔다.
주석 120)육경(六經)
춘추 시대(春秋時代)의 여섯 가지 경서.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춘추(春秋)≫, ≪악기(樂記)≫, ≪예기(禮記)≫를 이른다.
二十三日 癸未
陽。省行於火面佳枝峯生母墓。因下下靑金世奎宅。 見〈晦軒神道碑銘〉。
文成公晦軒先生神道碑銘。
東國故箕子。 治衍洪範。 以敍彛倫。 用夏變夷。 而後覺者鮮焉。 致䧟異敎。 凡千有餘年。高麗之季。 知尊聖道。 國庠鄕序。 文風蔚興。 群賢輩出。 變而華之。又六百有餘年。 余嘗謂其間必有豪傑之士作。 故卒能變其難變也。日有金鶴洙・鄭誾朝・李晩奎諸紳士。 送其舊僚尹憲燮。 抱 ≪晦軒實記≫一部。 走水陸七十里。 訪余於闕里古宅。 徵〈晦軒之神道碑文〉。 以余爲聖嗣也。按實記而三復之。 乃恍然。 於能變千有餘年者。 實爲我晦軒安子也。安子高麗人也。 入中國。 見朱子書。 知爲聖門嫡傳。嘗曰。 "欲學仲尼。 先學晦菴"。 遂模聖幀及朱子眞。 安於宅後精舍。 朝夕瞻謁。 仍獻宅爲國學。 納土田臧獲。 備廩供役。復遣人于江南。 奉先聖及七十子之像。 倂講禮樂器六經子史。 以東於是乎文物之盛。 禮俗之美。 無愧爲箕封故域。列王崇報。 諸儒尊奉。 上以躋聖廡。 下以享書院。 稱東方理學之祖。 殆非溢美也。安子諱珦。 諡文成。 晦軒其號也。葬在朝鮮國長湍府大德山子坐原。銘曰。 東國有安氏子。 世稱晦軒先生。宗夫子學晦菴。 興儒化道以明。大德兮彌崇。 閱千歲體骨寧。多士慕我亦慕。 摭其實以爲銘。
孔子誕降二千四百六十八年。 丁巳閏二月日。 六十六代孫。 世襲衍聖公。 孔令貽。 敬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