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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14년(갑인) / 2월(二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3.0002.TXT.0012
12일(계사)
반쯤 흐리고 반쯤 맑음. 근래에 〈퇴고이기왕복서(退高理氣往復書)〉를 보았는데, 오늘 말편(末篇)에 이르러 퇴계선생의 〈의정천명도(擬定天命圖)〉가 있어서 특별히 기록한다.

"도(圖)를 그리고 입설(立說)을 하는 것은 본래 아는 자를 위하여 만든 것이 마땅하고 알지 못하는 자 때문에 폐기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신 말씀은 진실로 당연합니다. 일찍이 명도선생(明道先生)이 말한 것을 보았는데, 이르길 "무릇 입언(立言)은 의사를 함축하여 덕을 아는 자가 싫어하지 않고, 덕이 없는 자가 의혹하지 않게 하고자하여야 한다.[凡立言, 欲涵蓄意思, 不使知德者厭, 無德者惑]"주 7)라고 하였으니, 이 뜻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명도(天命圖)〉주 8)를 살피건대, 비록 모두 성현의 뜻에 근본했다고는 하나, 자세히 보면 그 사이에 지리멸렬한 병통이 없지 않아서 성현의 뜻으로 질정(質正)해 보면 부합하지 않는 곳이 많은 것은 어째서입니까? 지금 또한 조목마다 여쭙지는 못하겠고, 다만 제 생각을 의정도 좌우에 기록하고서 우러러 선생의 재정(裁正)을 바랍니다. 이 일이 진실로 참람하고 분수에 넘는 짓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제 생각에 온당치 못한 바를 감히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로부터 도서(圖書)는 모두 상하(上下)로 위치를 잡아서 남(南)을 상으로, 북(北)을 하로 의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천명도〉는 남북으로 위치를 잡고, 북을 상으로, 남을 하로 하였으니 이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주역대전≫에 '천지가 위치를 정했다.[天地定位]'고 하였고, 소자(邵子)주 9)는 '건(乾)과 곤(坤)이 상하의 위치를 정했다.[乾坤定上下之位]'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천지자연의 역(易)으로서, 바로 주자가 이른 바 '다시 바꿀 수 없는 정론(正論)이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것을 바꾸었으니, 아무리 힘을 다해 해명하더라도 또한 부합하지 않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바라건대 거듭 자세히 고증하시어 저의 의혹을 깨우쳐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의정천명도(擬定天命圖)〉


〈정추만(鄭秋巒) 천명도설서(天命圖說序)〉붙임.
정덕(正德) 기묘년(1519, 중종14)에 사재(思齋) 김선생(金先生, 김정국(金正國))이 작은 견벌(譴罰)을 입고 물러나 고봉현(高峯縣)주 10)의 망동(芒洞)주 11)에 복거(卜居)하셨다. 망동은 바로 나 지운이 사는 마을인지라, 일찍이 그 문하에서 노닐며 수학했다.
가정(嘉靖) 무술년(1538)에 선생이 소명(召命)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가시니, 나는 의지할 곳을 잃고 동생 지림(之霖)과 더불어 집에서 강학을 하였다. 강론하는 것이 천인의 도[天人之道]에 미치면 동생 지림은 유학(幼學)으로서 그 의거할 곳이 없어서 엿보아 추측할 수 없음을 염려하였다. 내가 이에 시험 삼아 주자의 설을 취하고, -≪성리대전(性理大全)≫의 인물의 성[人物之性]을 논한 것에서 보인다.- 제설(諸說)을 참고하여 하나의 도형(圖形)으로 만들었으며, 또 문답의 형식을 취하여 '천명도설(天命圖說)'이라 이름하고서 날마다 동생과 더불어 강론하였다. 이것은 애당초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만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왕 도형을 기초(起草)한 이상 장자(長者)께 수정을 받지 않을 수 없어서 드디어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사재(思齋) 두 선생께 질정(質正)하였더니, 두 선생께서는 심하게 꾸짖지 않으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가볍게 의논할 수 없으니 우선 후일을 기다리자."라고 하셨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두 선생께서 연이어 돌아가셨으니 아, 애통하도다. 이로 말미암아 이 도형의 초본(草本)은 수정을 받지 못하고 나의 학문은 날로 거칠어져서 거의 스스로 진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지난 가을에 퇴계 이 선생이 나의 이름을 잘못 듣고서 몸소 두세 차례나 찾아 주셨으므로, 나는 그 은근한 정성에 감동되어 목욕재계하고 나아가 뵈었다. 퇴계는 흔연히 나와서 만나 주고, 이어 천명도(天命圖)에 대해 언급하셨다. 그래서 내가 사실대로 고하고 질정해 줄 것을 청하였더니, 퇴계는 약간의 기쁜 기색을 지었다.
나는 물러 나와서 스스로 축하하기를 "내가 두 선생을 잃은 뒤로는 다시 어진 사우(師友)를 얻어 학문의 진보를 구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지금 퇴계를 만나게 되었으니 나는 아무 걱정이 없다."라고 하였다. 항상 왕래하며 이 도형에 대해 질문하니, 퇴계는 고설(古說)로써 증거하고 자기의 의견을 섞어서 빠진 것을 보충하고 필요 없는 것을 삭제하여 끝내 완전한 도형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은혜가 이미 두터운데 또 도설(圖說)까지 지어 뒤에 붙여서 가르쳐 주셨으니, 그 다행함이 무엇이 이보다 크겠는가. 나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지난날 두 선생께서 '우선 후일을 기다리자'고 하신 뜻이 오늘에야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니, 이것이 더욱 큰 다행이다. 그러므로 나는 글머리에 도형을 만들게 된 동기를 기록하고, 다음으로 도형을 결정한 일을 언급하여서 집안에 간직하는 바이니, 만약 나와 뜻을 같이하는 자가 나온다면, 그 역시 퇴계가 고증(考證)한 뜻을 알게 될 것이다.
가정 갑인년(1554, 명종9) 정월 초하루 아침에, 추만거사(秋巒居士) 계림(鷄林) 정지운(鄭之雲)주 12)은 서문(序文)을 쓰다.
주석 7)무릇 …… 하여야한다
≪근사록집해≫ 〈교학편〉에 나오는 말이다.
주석 8)천명도((天命圖))
성리학에 의거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그림으로 풀이한 것으로, 조선 중기의 학자 정지운이 작성하고 그의 청에 따라 이황이 증보했다. 정지운이 작성한 것을 천명구도(天命舊圖), 이황이 작성한 것을 천명신도(天命新圖)라 한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현상을 본떠 위로 천명원을 설정하고 아래로는 인체의 각 부위를 본떠 그렸다.
주석 9)소자(邵子)
중국 북송대 학자 소옹(邵雍, 1011~1077)을 일컫는다. 자는 요부(堯夫)이고, 호는 안락선생(安樂先生)이며, 시호는 강절(康節)이다.
주석 10)고봉현(高峯縣)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를 말한다.
주석 11)망동(芒洞)
고양시 망동리(芒洞里)을 말한다.
주석 12)정지운(鄭之雲, 1509~1561)
자는 정이(靜而), 호는 추만(秋巒),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고양 출신으로, 김정국(金正國)과 김안국(金安國)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나중에 이황(李滉)에게 ≪역학계몽(易學啓蒙)≫, ≪심경(心經)≫ 등을 배웠다. 일찍 벼슬에 천거하는 이가 있었지만, 나가지 않고 사양하였다. 고양의 문봉서원에 배향되었고, 저서로 ≪천명도설(天命圖說)≫이 있다.
十二日 癸巳
半陰半陽。近看〈退高理氣往復書〉。 今至末篇。 退溪先生擬定天命圖。 特記。

"建圖立說。 固當爲知者而作。 不當爲不知者而廢。" 誨諭固當然。嘗觀明道先生之言。 曰"凡立言。 欲涵蓄意思。 不使知德者厭。 無德者惑。" 此意。 亦不可不察也。
按天命圖。 雖曰皆本聖賢之旨。 然細看其間。 不無支離破碎之病。質以聖賢之旨。 亦多有所未合。 何也? 今亦未暇逐一條稟。 只以鄙意。 擬定圖子。 錄在左右。 仰祈裁正。此事固知僣踰。 然鄙意所未安。 亦不敢不陳也。且從古圖書。 皆以上下爲位。 而擬上於南。 擬下於北。今此圖。 則乃以南北爲位。 而擬北於上。 擬南於下。 此甚未喩。易大傳曰。 '天地定位'。 而邵子曰。 '乾坤定上下之位'。 此乃天地自然之易。 正朱子所謂'更不可易者'。今而易之。 雖復費力分疏。 而亦恐其有所未合也。如何如何? 伏幸重賜詳證。 以開蔽惑。 何如?

附鄭秋巒天命圖說序。
正德己卯。 思齋金先生被微譴而退。 卜居于高峰之芒洞。芒洞實之雲所居里也。 嘗遊其門受學焉。嘉靖戊戌。 先生被召還朝。 之雲失其依歸。 與舍弟之霖講學于家。論及天人之道。 則之霖以幼學。 患其無據莫能窺測。余於是試取朱子之說【見 ≪性理大全≫。 論人物之性。】參以諸說。 設爲一圖。 而又爲問答。 名曰 '天命圖說'。 日與舍弟講之。此初非欲示諸人而作也。然圖旣草。 則亦不可不見正於長者。 遂取質于慕齋思齋兩先生。兩先生不深責之。 且曰 "未可輕議。 姑俟後日" 不幸兩先生相繼以歿。嗚呼痛哉。由是。 此圖之草。 無所見正。 而余之學問。 日就荒蕪。 幾不能自振。去年秋。 退溪李先生。 誤聞不肖之名。 躬問者再三。 之雲感其慇懃。 齋沐以進。退溪欣然出見。 因語及天命圖。之雲以直告之。 因請證正之意。 退溪稍假肯色。余退而私自賀曰。 "吾喪兩先生後。 意謂更不得賢師友而求進。 今得退溪。 吾無憂矣。" 常往來質問是圖。 退溪證以古說。 參用己意。 補其所欠。 刪其所剩。 卒成完圖。其賜已厚。 又從而爲之說。 附其後而敎之。 其幸孰大焉。非徒余之幸。 在昔兩先生姑竢後日之志。 今始副焉。 是尤幸之大也。余故首記作圖之由。 次及定圖之事。 以藏于家。 如有同志者出。 其亦有以知退溪考證之意也。嘉靖甲寅正月朔朝。 秋巒居士。 鷄林。 鄭之雲。 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