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일기
  • 서암일기(棲巖日記)
  • 1912년(임자)
  • 3월(三月)
  • 20일(임오)(二十日 壬午)

서암일기(棲巖日記) / 1912년(임자) / 3월(三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1.0003.TXT.0020
20일(임오)
오늘은 입하(立夏)이다. 지곡(芝谷)의 정상원(鄭象源)・정종원(鄭琮源) 종형제가 경양(景陽)의 김영후(金永厚)와 함께 위문차 방문해주었다. 오후에는 함께 동행하여 지곡의 녹실(綠室)주 54) 어르신 댁에 도착했다. 〈지평공행장(持平公行狀)〉을 보여주어 그로 인해 기록한다.

〈고(故)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오천(烏川) 정재건(鄭在楗)주 55) 행장(行狀)〉
공의 이름은 재건(在楗)주 56)이고 자는 계주(啓周)인데, 본조 경술년(1910) 9월 4일에 살고 있는 옥과의 집에서 순절했다. 대개 이때에 섬 오랑캐가 창양(搶攘, 몹시 어수선함)하여 우리나라를 도둑질함에 8도가 윤상(淪喪, 모두 망함)하고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다. 이에 구신(舊臣) 중에는 의리에 죽은 자가 거의 12~13명이었지만, 척촌의 비수를 가지고 목을 찔러 자살을 맹세함으로서 뜨거운 풍모와 늠름한 기운이 천지에 가득하게 한 것은 유독 충정공(忠貞公) 민영환(閔永煥)주 57)과 공 두 사람뿐이었다.
공의 성은 정(鄭)으로, 영일인(迎日人)이다. 먼 조상은 이름이 균지(均之)인데, 고려에서 벼슬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후대에 도 고관대작이 대대로 이어져 석학이 끊이지 않았으니, 3대를 전하여 문정(文貞)이 나왔고 2대를 전하여 정숙(貞肅)이 나왔으며, 또 4대를 전하여 문청(文淸)에 이르렀다. 문청은 곧 송강(松江) 선생이며, 선생의 8대 뒤에 공이 태어났다.
문정은 이름이 사도(思道)이고, 고려 말의 명신으로 충실 근면하고 절의가 있었으며, 익찬공신(翊贊功臣) 정당문학(政堂文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에 올랐다. 오천군(烏川君) 정숙은 이름이 연(淵)으로, 우리 태종(太宗)・세종(世宗) 양조(兩朝)에 이르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함으로서 벼슬하여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曺判書)가 되었고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에 증직되었다. 문청은 이름이 철(澈)로, 목릉(穆陵, 선조) 때 서인(西人)의 영수(嶺袖)가 되어 관직이 좌의정(左議政)에 올랐고, 광국(光國)・평난(平難)의 두 공훈으로 책록되어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증조의 이름은 취하(就河)주 58)로, 영조 무오년(1738)에 사마 양시에 합격했고 호가 이간재(易簡齋)이다. 휘 검(檢)과 휘 최환(最煥)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인데, 두 분 모두 덕을 숨기고 벼슬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부안 김씨 덕감(德鑑)의 딸로, 여행(女行)이 있었으며, 헌종(憲宗) 계묘년(1843) 5월 25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6~7세에 큰형과 작은 형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곁에서 기억하여 암송했는데 한 글자도 착오가 없었다. 8세 때는 ≪소학(小學)≫에 통달해서 아버지 설송(雪松)공은 그가 원대한 그릇이 될 것임을 알고 기특하게 여겼다.
이 해에 어머니 상을 당했는데 애훼(哀毁)주 59)함이 성인과 같았다. 어머니를 잃고 큰형수 고씨(高氏)에게 맡겨져서 길러졌는데, 그를 섬기기를 어머니처럼 하여 종신토록 쇠해지지 않았다. 무진년(1868)에 설송공이 죽자 집상(執喪) 예를 다하였고 최질(衰絰, 상복)을 몸에서 벗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아버지의 명령으로 7경을 공부해서 과거에 응시했지만 누차 떨어졌었다. 상복을 벗자[外除]주 60) 마침내 서울로 가서 성균관에 나가서 수십 년 동안 가난을 겪으면서 거친 나물만 먹었다.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데 공은 그것에 처한 것을 편안하게 여겨 조금도 어려워하는 낯빛이 없이 독서를 더욱 부지런히 하였으니, 그 심지(心志)가 돈독함이 어려서부터 이미 그러한 것이었다.
무자년(1888) 식년시(式年試)에 병과로 뽑혔고, 임진년(1892)에 부사과(副司果)에 제수되었으며, 9월에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 계사년(1893)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옮겼으니, 대개 이것이 공이 지내온 관직의 선후이다.
공은 벼슬에 급급(汲汲)한 뜻이 없어 권세를 쫓지도 않았고 부탁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다. 서울[長安]이 바다와 같아 거마(車馬) 소리가 떠들썩하였지만, 문을 닫아걸고 자취를 숨겨서 고요하기가 한사(寒士)와 같았다. 만년에는 낙척(落拓)하여 향리(鄕里)로 돌아와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경전공부에 힘쓰고, 가동에게 일과를 주어 농사일에 힘쓰며, 세간(世間)의 일체 영욕(榮辱)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그 마음을 두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 기신(起身)하기를 권하면 곧 웃으면서 말하기를, "난(亂)을 만나 황야로 은거하는 것은 옛날에도 또한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니, 내게 무슨 서운함이 있겠는가?"라고 하고, 굳게 누워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 문청공(文淸公)주 61)의 충청우국지심(忠淸憂國之心)을 사모하여 그 당의 편액을 '소송(小松)'이라 하였다.
기유년(1909) 봄에 군(郡)이 폐지되어 학교[鄕校]를 장차 철거하려고 하자,주 62) 공이 유생들을 모아놓고 개연(慨然)하여 이르기를, "국세(國勢)가 이에 이르러 부자묘(夫子廟)가 철거되니, 무릇 우리 고을 사람은 누구인들 통한(痛恨)하지 않겠는가? 내가 마땅히 봉소(封疏) 하리라."라고 하고 죽음으로써 기약하고 상소문을 이루었으나 마침내 일을 이루지 못하고 끝나게 되었다.
임종한 날에는 의관을 바르게 하여 묘(墓)에 참배하고, 친우들을 방문하여 태연자약하게 담소하면서 근심하는 얼굴빛이 하나도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는 집안사람들에게 닭을 잡아 점심 반찬을 만들게 하고 처자(妻子)와 함께 즐겁게 먹고 밖으로 나가니,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는데,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자 집안사람들이 비로소 놀라 급하게 찾아다녔다. 곧 사랑채의 고요하고 후미진 곳에 깨끗하게 소제하고 단정하게 앉아서 손칼[手刀]로 자인(自刃)하여주 63) 피가 흘러 몸을 적신 채 조용히 의리를 위해 목숨을 버려 얼굴 모습이 살아있는 듯 하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휘둥그레지며 혀를 차면서 큰소리로 "충신이로다. 충신이로다."라고 말하였다. 부고가 나가자 원근(遠近)에서 들은 자들이 공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어진 사람이나 불초(不肖)한 사람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친척을 애도하듯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 유서(遺書)에 이르기를, "망국(亡國)의 신하가 구차하게 사는 것은 의리상 옳지 않다. 나는 명치(明治)주 64)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로 맹세하였으므로 9월 4일에 칼을 품고 죽는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당연히 죽어야 할 때 죽는 것은 죽었으나 죽은 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나의 죽음 때문에 마음 흔들리지 말고, 부지런히 주경야독하고, 우애를 더욱 두터이 하여 나의 가르침에 부응하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또 "나라를 위해 순절(殉節)하는 것은 신하의 직임이오. 내가 죽은 후 모름지기 세 아들을 잘 이끌어서 우리 집안을 잘 보존하도록 하시오."라고 했으니, 이것은 부인과 자식들에게 남긴 것이다.
향년 68세로, 12일 모갑(某甲)에 본현 약천(藥川)주 65)의 진좌(辰坐, 동남쪽을 등진 방향) 언덕에 첫째 부인 배씨(裴氏) 묘와 같은 언덕의 십수보(十數步) 떨어진 곳에 따로 장사지냈으니,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공은 두 번 장가를 들었으니, 첫째 부인인 성주 배씨(星主裴氏)는 규현(奎賢)의 딸로 일찍 죽고 1녀를 두었다. 이 딸은 울산 김모씨에게 출가했다. 재취인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광태(光泰)의 딸로 옥계(玉溪) 진(稹)주 66)의 후손이다.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덕(氵悳)은 경주인(慶州人) 김모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숙(潚)은 서산인(瑞山人) 유영구(柳永耉)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중부(仲父)에게 출계하였다. 익(瀷)은 양천인(陽川人) 허극(許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딸은 죽산인(竹山人) 박해창(朴海昌)에게 시집갔는데 문과에 급제하고 비서랑(秘書郞)을 지낸 사람이다.
아! 공께서는 품성이 순후(純厚)하고 용모가 단중(端重)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화순하고, 아랫사람을 부릴 때는 너그럽게 하였다. 비록 종이나 여대(輿臺, 하인)라고 할지라도 먼저 은혜롭게 하고 뒤에 잘못을 말했는데, 고구정녕하게 하며 급하게 말하거나 엄한 기색이 없었고 회초리로 때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강직하고 방정한 몸가짐과 확고부동한 뜻은 분육(賁育)주 67)도 그 용맹함을 잃었고, 저양(雎陽)주 68)도 그 절조를 잃었으며, 문산(文山)주 69)도 그 충을 잃을 정도이다. 그러니 저 은혜를 저버리고 나라는 팔아먹고 적을 위해 주인에게 짖어댄 자들은 마음이 떨리고 쓸개가 찢어지며 부끄러워서 얼굴이 사색이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자(韓子, 한유)가 말하길, "백이와 숙제가 없었다면 어지럽히는 신하와 해치는 자들이 후세에도 계속하여 나왔을 것이다."라고 했는데, 공과 같은 사람이 이런 사람의 짝이 되지 않겠는가? 오호라, 아름답구나!
삼가 임자년(1912) 봄에 족인 정해만(鄭海晩)주 70)이 찬술하다.
주석 54)녹실(綠室)
정해만(鄭海晩, ?~1913)의 호이다. 자는 성보(成甫),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정철(鄭澈)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해춘(海春)이며,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서 살았다.
주석 55)정재건(鄭在楗, 1843~1910)
자는 계주(啓周), 호는 소송(小松),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1888년 식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전적(典籍), 지평(持平),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고, 시국이 혼란해짐을 보고 사직하여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고 있다가, 1910년 한일합병이 되자, 나라의 운명을 한탄하고 자결하였다.
주석 56)
健은 楗으로 바로 잡는다.
주석 57)민영환(閔泳煥, 1861~1905)
자는 문약(文若)이고, 호는 계정(桂庭)이며,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1878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며, 21세에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96년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서구 선진국의 외교관으로 활동하면서 신문명을 눈으로 체험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양력 11월 30일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저서로 ≪해천추범(海天秋帆)≫, ≪사구속초(使歐續草)≫, ≪천일책(千一策)≫ 등이 있다.
주석 58)취하(就河)
정취하(鄭就河, 1691~1759)로, 자는 회원(會源), 호는 이간재(易簡齋),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5대손이며,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과 친교가 있었다.
주석 59)애훼(哀毁)
부모상을 당하여 몹시 슬퍼해서 몸이 허약해진 것을 말한다.
주석 60)외제(外除)
외면으로만 상복을 벗고 속으로는 아직 슬픔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모의 상에 상기를 마치면 외제한다.(≪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
주석 61)문청공(文淸公)
문청공(文淸公)은 정철(鄭澈, 1536~1593)의 시호이다. 정철의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본관은 연일(延日)이다. 아버지는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정유침(鄭惟沈)으로, 서울 장의동(藏義洞, 지금의 종로구 청운동)에서 태어났다. 1551년 을사사화에 관련되어 유배되었던 아버지가 풀려나자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전라도(全羅道) 담양(潭陽) 창평(昌平) 당지산(唐旨山) 아래로 이주하였다. 정철은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여년을 이곳에서 보내면서, 임억령(林億齡)・양응정(梁應鼎)・김인후(金麟厚)・송순(宋純)・기대승(奇大升)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작품으로는 〈성산별곡(星山別曲)〉・〈관동별곡(關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주석 62)기유(己酉)년 …… 하자
1908년에 옥과현을 폐지하고 창평군에 합하였다. 그 뒤 1914년에 다시 곡성군에 이속되었다.
주석 63)손칼로 자인하여
정재건은 1910년 황현(黃玹)의 자결 소식을 듣고, "선비는 마땅히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라고 말하고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정재건이 자결할 때 사용한 칼은 독립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다.
주석 64)명치(明治)
일본의 연호로, 1868~1912년에 사용하였다.
주석 65)약천(藥川)
곡성군 입면 약천리를 말한다.
주석 66)옥계(玉溪) 진(稹)
노진(盧稹, 1518~1578)을 말한다.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칙암(則庵),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1546년(명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형조 참의・병조 판서・이조 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주석 67)분육(賁育)
춘추전국시대 용사(勇士)로, 맹분(孟賁)과 하육(夏育)의 이름이다.
주석 68)저양(雎陽)
당나라 현종(玄宗) 때 저양태수(雎陽太守)를 지낸 허원(許遠)을 말한다. 안녹산(安祿山)의 난에 장순(張巡)과 함께 저양성을 지키다가 몇 달을 포위당했으며 결국 성이 함락되어 함께 사로잡혀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주석 69)문산(文山)
문천상(文天祥)을 말함. 송(宋)나라 말엽의 충신(忠臣)으로, 자는 송서(宋瑞), 호는 문산(文山), 시호(諡號)는 충렬(忠烈)이다. 수도 임안(臨安)이 원(元)에 함락된 뒤에도 단종(端宗)을 받들고 근왕군(勤王軍)을 일으켜 원군(元軍)과 싸우다가 잡혀 죽었다.
주석 70)정해만(鄭海晩, ?~1913)
자는 성보(成甫), 호는 녹실(綠室),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정철(鄭澈)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해춘(海春)이며,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서 살았다.
二十日 壬午
是日立夏也。芝谷鄭象源・琮源從兄弟。 與景陽金永厚。 慰問次枉臨。午後同爲作伴。 到芝谷綠室丈宅。 示以〈持平公行狀〉。 因以記之。
故通訓大夫 司憲府持平 烏川鄭公 行狀。
公諱再健。 字啓周。 本朝。 庚戌九月四日。 殉節于所居玉果之私室。蓋是時島酋搶攘。 竊我邦國。 八域淪喪。 宗社邱墟。舊臣之死於義者。 殆十二三。 而持尺寸之匕。 誓心穴頸。 烈風凜氣。 充塞乎天地。 獨閔忠貞永煥及公二人而已。公姓鄭。 迎日人。遠祖。 諱均之。 仕麗。 金紫光祿大夫。 門下侍郞。 平章事。自後世襲冠冕。 名碩不替。 三傳而爲文貞。 再傳而貞肅。 又四傳而至文淸。文淸卽松江先生也。 先生之後八世而公生焉。文貞諱思道。 麗季名臣。 忠勤節義。 翊贊功臣。 政堂文學。 進賢館大提學。烏川君貞肅。 諱淵。 曁我太宗世宗兩朝。 以司馬筮仕。 正憲大夫。 兵曺判書。 贈議政府左議政。文淸諱澈。 穆陵時爲西人嶺袖。 官左議政。 策光國・平難二勳。 封寅城府院君。曾祖諱就河。 英廟戊午司馬兩試。 號易簡齋。諱檢。 諱最煥。 祖若考也。 兩世皆隱德不仕。妣扶安金氏德鑑之女。 有女行。 癸卯五月二十五日生公。公幼而聰穎絶凡。 兒六七歲時。 聞伯仲讀書。 從傍記誦。 無一字錯誤。八歲而通小學。 考雪松公。 知其爲遠大器。 奇之。是年丁母夫人憂。 哀毁如成人。失怙託邱嫂高氏鞠焉。 事之如慈母。 終身不衰。戊辰雪松公卒。 執喪盡禮。 衰絰不離身。先是以親命。 治七經。 屢屈不第。外除遂赴京。 就齋數十年喫貧。 藜莧苜蓿。人不堪其苦。 公處之晏如。少無難色。 讀書愈勤。 其心志之篤。 從少已然。戊子式擢丙科。 壬辰授副司果。 九月陞成均館典籍。 癸巳遷通訓大夫司憲府持平。 蓋公之歷官先後也。公仕䆠無汲汲意。 不趍權勢。 囁囑趦趄。長安如海。 車馬喧闐。 而閉戶歛跡。 寥寥如寒士也。晩年落拓歸鄕里。 敎兒而劬經傳。 課僮而勤畎畝。世間一切榮辱。 初不嬰其心。人或勸起。 則笑曰。 "遭亂遜荒。 古亦有人。 於我何憾?" 因堅臥不復出。慕先祖文淸公忠淸憂國之心。 扁其堂曰'小松'。己酉春。 郡廢而學校將毁。 公會儒生。 慨然謂曰。 "國勢至此。 夫子廟撤。 凡我鄕人。 孰不痛恨? 吾當封疏。" 期以身斃疏成。 而遂無事乃已。臨終一日。 正衣謁墓。 歷訪親友。 談笑自若。 一無戚戚容。及歸。 命家人殺鷄爲午饍。 共妻子食盡歡而出。 人不以爲恠。及暮不歸。 家人始驚遑索之。 卽於廊舍靜僻䖏。 淨掃端坐。 手刀自刃。 血淋淋濺身。 從容就義。 顔貌如生。 見者皆瞿然。 吐舌嘖嘖謂曰。 "忠臣忠臣。" 訃出。 遠近聞者。 無知不知賢不肖。 莫不咨嗟涕洟如悲親戚。其遺書曰。 "亡國之臣。 義不可以苟生。吾誓不在明治之世。 故九月四日。 伏釼而死。" 又曰 "人生於世。 死於當死。 死而不死。汝等勿以我死動念。 勤苦耕讀。 友愛加隆。 以副我訓。" 又曰 "爲國殉節。 臣子之職也。我死後。 須導率三子。 保我家室。" 此遺夫人諸子者也。享年六十八。 十二日。 某甲。 葬于本懸藥川之負辰原。 與元配裴氏墓同岡。 異窆十數步近。 遺命也。公凡再娶。 星主裴氏奎賢女。 早沒有一女。 適蔚山金某。豊川盧氏光泰女。 玉溪稹後也。生三男一女。 長氵悳娶慶州金某女。 潚娶瑞山柳永耉女。 出后仲父。 瀷娶陽川許極女。女適竹山朴海昌。 文秘書郞。噫! 公性質純厚。 風儀端重。 對人以和。 御下以寬。雖婢僕輿臺。 先恩後誨。 諄諄然。 無疾言遽色。 捶楚不加焉。然剛方之操。 牢確之志。 賁育失其勇。 睢陽失其節。 文山失其忠。彼負恩賣國。 爲賊吠主者。 能不心戰膽裂。 而忸怩面死土色乎? 韓子曰。 "微二子。 亂臣賊子。 接跡於後世。" 如公者。 非若人之儔也歟! 嗚呼韙哉! 謹狀。壬子春。 族 鄭海晩。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