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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15년(을묘) / 12월(十二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4.0010.TXT.0026
25일(을축)
흐림.
퇴계선생이 〈이중구(李仲久)에게 보낸 편지〉- 이담(李湛)으로, 자는 중구(仲久)이고, 호는 정존(靜存)이며, 본관은 용인(龍仁), 서울에 거주하였다. 선생보다 9살 어리지만 겸손하게 후학으로 자처했다.-
≪회암서절요(晦菴書節要)≫의 잘못된 곳을 지적해 보여 주니 매우 고맙습니다. 그러나 보내온 편지에 '의리의 정심(精深)과 사위(事爲)의 수작(酬酢)은 나의 몸과 나의 마음에 간절한 것과 마땅한 것은 먼저 취하지만, 그 사이에 혹 긴요하지도 않은데 수록되기도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 말과 같이 다하고자한다면 아마도 한쪽에 치우치는 병통에 빠지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릇 의리는 진실로 정심(精深)한 곳이 있으니, 어찌 조천(粗淺)한 곳이 없겠습니까? 사위(事爲)는 진실로 긴밀하게 수작함이 있으니, 한가하게 수작함이 없겠습니까? 이 몇몇의 일은 나의 몸과 나의 마음에 관계된 것으로, 진실로 간절하면 마땅히 먼저 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있거나 사물에게 있는 것이 간절하지 않다고 해서 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유가(儒家)의 학문이 이단과 같지 않음이 바로 이러한 곳에 있습니다.
오직 공자 문하의 여러 제자들만이 이 의미를 알았기 때문에 ≪논어≫에 기록된 것이 정하고 깊은 곳도 있고, 거칠고 얕은 곳도 있으며, 긴밀히 수작한 곳도 있고, 한가히 수작한 곳도 있으며, 나의 심신에 긴절한 것도 있고, 다른 사람과 사물에 있는 것이어서 심신에 긴절하지 않은 듯한 것도 있습니다. 시험 삼아 몇 가지 헤아려보면, 염자가 곡식을 청한 일[冉子請粟]주 92), 강자가 약을 보낸 일[康子饋藥]주 93), 거백옥이 사람을 보낸 일[蘧伯玉使人]주 94), 원양이 공자를 기다린 일[原壤夷俟]주 95), 봉인이 뵙기를 청한 일[封人請見]주 96), 유비가 공자를 뵙고자한 일[孺悲欲見]주 97), 호향의 동자가 공자를 접견한 일[互鄕見]주 98), 악사 면이 공자를 뵌 일[師冕見]주 99) 등 이와 같은 류(類)가 정심(精深)하지 않다고 해도 좋고, 한가히 수작한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비록 심신에 긴절하지 않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어찌 도(道)의 일단이 아님이 없겠습니까?
진실로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이른바 정심(精深)하다는 것, 긴절(緊切)하다는 것도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어떤 사람이 구산(龜山)주 100)에게 묻길, "(논어) 이십편 중에 어느 것이 요절(要切)한가?"라고 하자, 구산이 "모두 요절하다."라고 대답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취할 것은 보내주신 편지에서와 같이 마땅히 먼저해야 할 것이 진실로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혹 피차에 편지를 주고받을 때, 또한 안부를 말하며 마음의 정을 펼 때, 산수(山水)를 구경하고 노닌 일, 시국을 한탄하며 시속을 걱정한 말 등 한가로운 수작으로 긴절치 않아 보이는 말도 간간히 취해서 겸하여 두고 완미하게 하는 것은 마치 직접 선생을 연한우일(燕閒優逸)한 사이에 보고, 경해(謦欬) 담소(談笑)하는 나머지에서 친히 목소리와 뜻을 들은 것과 같으니, 도가 있는 자의 기상을 풍범(風範)과 신채(神采)의 사이에서 얻은 것은 오로지 정심함에 힘쓰는 데 더욱 깊어지지 않을 수 없고, 탐탁지 않거나 긴절하지 않는 것의 덕은 외롭게 하여 얻음이 없게 될 것이니, 비단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이 편지를 읽은 이래로 곧 사우(師友)의 의(義)가 이와 같이 지중함을 알았습니다. 오직 그 의가 중하기 때문에 정이 깊고, 정이 깊기 때문에 허다하게 서로 주선하고 관서(款敍, 정성스럽게 회포를 품)하는 말이 있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의리를 논한 것이 아니고 심신에 긴절치 않는 것이라고 하여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어떻게 옛사람의 사우(師友)의 도(道)가 이와 같이 중차대함을 볼 수 있겠습니까?
일찍이 남시보(南時甫)주 101)의 편지를 받았는데, ≪회암서절요(晦菴書節要)≫ 중 〈여백공(呂伯恭)에게 보내는 답장〉의 '며칠 내로 매미소리가 더욱 맑아 매번 들을 때마다 일찍기 고고한 풍모를 그리워하지 않음이 없었다.'라고 한 단락을 들어서 말하기를 "이런 헐후(歇後)한 말을 취하여 어디에 쓰겠습니까?"라고 했었습니다. 제가 답한 말을 지금 기억해낼 수는 없습니다만, 그 큰 뜻은 이런 것으로 '헐후하다고 보면 헐후한 것이요, 헐후하지 않다고 보면 헐후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저 사람의 소견은 같지 않고, 좋아하는 것도 역시 다릅니다. 저는 평소에 이런 곳을 매우 사랑하여 매번 여름철 녹음이 어우러지고 매미소리가 귀에 가득 들려올 때면, 마음으로 일찌기 두 선생주 102)의 기풍을 그리워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또한 뜨락의 풀들이 한 한물(閒物)일 뿐이나 이를 볼 때마다 문득 주렴계(周濂溪)의 '일반의사(一般意思)'주 103)를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세속에 이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진실로 괴이할 것이 없고, 좋아할 줄을 아는 사람도 또한 모두 이처럼 같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한공(韓公, 한유)이 말한 '처음에는 들쭉날쭉하여 다르다가도 끝에는 무르녹아 귀추가 같아진다.'고 한 것이 사실은 또한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 보내주신 편지에 '지경(持敬)을 하기 어렵다'는 말은 진실로 학자들의 공통된 근심입니다. 만약 이곳에 어려움이 없다면 사람마다 성현의 지위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 〈무이도(武夷圖)〉주 104)는 유념해서 그림을 완성하고 잘 꾸며서 진중하게 보내왔습니다. 동부(洞府)주 105)의 연하(烟霞)와 대은병(大隱屛)의 유적을 손에 넣고 눈으로 비춰보면서 매일 열어서 완미하니, 귓가에는 뱃노래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주 106)(詩)
만년에 책속을 따라 미혹된 길을 깨우쳤으나,(晩從書裏悟迷途)
병자의 학업이라 도리어 대장부에게 부끄럽네.(病業還慚大丈夫)
정존(靜存)에게 존양(存養)의 일을 물었더니,(爲問靜存存底事)
편지를 보내와 속마음을 잘도 드러내었네.(書來肝膽好相輸)

산목이 어찌 문득 하늘까지 빼어날 수 있겠는가,(山木何能便秀穹)
존심의 요체도 오랫동안 공들여야 하네.(存心要居積年功)
그대는 주야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을 보는가,(君看日夜東流水)
바다에 이르는 것은 먼저 작은 웅덩이로부터 시작되느니.(放海先從一坎中)
주석 92)염자 …… 청한 일
≪논어≫ 〈옹야(雍也)〉에 염자(冉子)가 공서적(公西赤)의 어머니를 위해 식량을 줄 것을 공자에게 청했을 때의 일을 말한다.
주석 93)강자 …… 보낸 일
≪논어≫ 〈향당(鄕黨)〉에 강자(康子)가 약을 보내오자, 공자가 절하고 받으면서 이르기를, "나는 약성(藥性)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감히 맛보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주석 94)거백옥 …… 보낸 일
≪논어(論語)≫ 헌문(憲問)에 "거백옥이 사람을 보내 공자에게 문안드렸다.[蘧伯玉使人於孔子]"라고 한다.
주석 95)원양이 …… 기다린 일
≪논어≫ 〈헌문(憲問)〉에 "공자의 친구 원양이 걸터 앉아서 공자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공자께서 와서 보시고 "어려서는 공손하지도 못하고, 커서는 칭찬 받을 만한 일 하나 없고, 늙어서도 죽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도적이다."라고 하시며, 지팡이로 그의 정강이를 두드리셨다.[原壤夷俟, 子曰, '幼而不孫弟, 長而無述焉, 老而不死, 是爲賊.' 以杖叩其脛.]"라는 내용이 있다.
주석 96)봉인이 …… 일
≪논어≫ 〈팔일(八佾)〉에 "의 땅의 봉인이 뵙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군자가 이곳에 이르면 내가 만나 보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공자의 수행원이 뵙게 해 주자, 그가 뵙고 나와서 말하였다. '그대들은 어찌 공자께서 벼슬을 잃음을 걱정할 것이 있겠는가.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하늘이 장차 선생님을 목탁으로 삼으실 것이다.'고 하였다.[儀封人請見曰, 君子之至於斯也, 吾未嘗不得見也. 從者見之, 出曰, '二三子, 何患於喪乎? 天下之無道也久矣, 天將以夫子爲木鐸.]"라는 내용이 있다.
주석 97)유비가 …… 일
≪논어≫ 〈양화(陽貨)〉에 "유비(孺悲)가 공자를 뵙고자 했는데, 공자께서 병이 있다고 거절하셨다. 명을 전하는 자가 문밖으로 나가자 비파를 가져다 노래를 부르시어 그로 하여금 듣게 하였다.[孺悲欲見孔子, 孔子辭以疾, 將命者出戶, 取瑟而歌, 使之聞之.]"라는 구절을 가리킨다. 그 주석에 유비는 노나라 사람으로 일찍이 공자에게 사상례(士喪禮)를 배웠는데, 이때 반드시 죄를 지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주석 98)호향 …… 일
호향(互鄕)은 풍습이 비루해서 모두 상대하기를 꺼려했다는 마을 이름인데, 호향의 동자가 찾아왔을 때 공자(孔子)가 거절하지 않고 접견을 허락했다는 이야기가 ≪논어≫ 〈술이(述而)〉에 나온다.
주석 99)악사 …… 일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악사 면(冕)이 뵈러 왔을 때 계단에 이르자 공자께서는 계단이라 말씀하시고 자리에 이르자 자리라고 말씀하시고, 모두 자리에 앉자, '아무개는 여기에 있고, 아무개는 여기에 있다.'[師冕見, 及階, 子曰階也, 及席, 子曰席也, 皆坐, 子曰某在斯某在斯.]"라고 한 구절이 있다.
주석 100)구산(龜山)
송대의 학자 양시(楊時)를 가리킨다.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의 제자이다.
주석 101)남시보(南時甫)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양명학자(陽明學者)인 남언경(南彦經 : 1528~1594)을 말한다. 시보는 자이고, 호는 정재(靜齋)・동강(東岡)이며,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1593년에 공조 참의가 되어 이요(李瑤)와 함께 이황(李滉)을 비판하다가 양명학을 숭상한다 하여 탄핵을 받고 사직하였다. 양근(楊根, 현재 양평군)의 미원서원(迷源書院)에 제향되었다.
주석 102)두 선생
주자와 여조겸(呂祖謙)을 가리킨다.
주석 103)일반의사(一般意思)
≪근사록≫ 권14에서 염계(濂溪)는 살던 곳의 창 앞에 풀이 무성히 자라도 베지 않기에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나의 의사와 같다 [與自家意思一般]"라고 하였다. 이는 풀도 나와 마찬가지로 살려는 생(生)의 의사가 있다는 것이다.
주석 104)〈무이도(武夷圖)〉
중국의 복건성(福建省) 건안(建安)에 있는 무이산(武夷山)의 구곡(九曲)을 그려 놓은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라 부른다. 무이구곡은 주희(朱熹)가 노닐던 곳으로, 그 경치를 그림으로 그린 다음 그 위에 주희의 시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써 놓았다.
주석 105)동부(洞府)
도교(道敎)의 용어로, 신선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주석 106)
이 시는 ≪퇴계선생문집≫ 권3에 〈기증이중구(寄贈李仲久)〉 의 3편 중 하나이다.
二十五日 乙丑
陰。〈退溪先生與李仲久書〉【李湛。 字仲久。 號靜存。 龍仁人。 居京。少先生九歲。 而退然以後學自居。】
≪晦菴書節要≫。 蒙示病處。 甚荷不外。然來諭云。 '義理之精深。 事爲之酬酢。 切於吾身與吾心者。 所當先取。 而其間或有不緊。 而見收云云'。 此固然矣。然而必欲盡如此說。 恐未免又墮於一偏之病也。夫義理固有精深處。 其獨無粗淺處乎? 事爲固有緊酬酢。 其無有閒酬酢乎? 是數者。 其關於吾身與吾心者。 固切而當先矣。 若在人與在物者。 其以爲不切而可遺之乎? 吾儒之學。 與異端不同。 正在此處。惟孔門諸子。 識得此意。 故 ≪論語≫所記。 有精深處。 有粗淺處。 有緊酬酢處。 有閒酬酢處。 有切於吾身心者。 有在人在物而似不切於身心者。試略數之。 如冉子之請粟。 康子之饋藥。 伯玉使人。 原壤夷俟。 封人請見。 孺悲欲見。 互鄕見。 師冕見。 若此之類。 謂之非精深。 可也。 謂之閒酬酢。 可也。雖謂之不切於身心。 似亦可也。然何莫非道之一端也。苟極其至而言之。 則所謂精深者緊切者。 皆不外此。故或問於龜山曰。 "二十篇。 何者爲要切?"。 龜山曰。 "皆要切。"正謂此爾。然則是書所取。 如來諭所當先者。 固已不勝其多矣。其或彼此往復之際。 亦有道寒暄敍情素。 玩山遊水。 傷時悶俗等閒酬酢。 似不切之語。 間取而兼存之。 使玩而味之者。 如親見先生於燕閒優逸之際。 親聆音旨於謦咳談笑之餘。 則其得有道者氣像於風範神采之間者。 未必不更深於專務精深。 不屑不緊者之德孤而無得也。非獨此耳。某讀此書以來。 乃知師友之義如此其至重。惟其義重故情深。 情深故有許多相周旋款敍之言。若以爲非論義理。 不切身心而盡去之。 則何以見古人師友之道。 若是其重且大乎? 嘗得南時甫書。 擧 ≪節要≫中。 〈答呂伯恭書〉。 '數日來蟬聲益淸。 每聽之。 未嘗不懷仰高風也'。一段云。 '若此歇後語。 取之何用?'。某答說。 今不能記得。 其大意若曰。 '作歇後看則歇後。 作非歇後看則非歇後'云云。大抵人之所見不同。 所好亦異。某平日。 極愛此等處。 每夏月綠樹交蔭。 蟬聲滿耳。 心未嘗不懷仰兩先生之風。亦如庭草。 一閒物耳。 每見之。 輒思濂溪一般意思也。今自世俗不好此學者言之。 固無怪。 其知好者。 亦不能皆同如此。然則韓公所謂 '始參差而異序。 卒爛熳而同歸'者。 實亦非易事也。〇垂諭持敬難做。 固學者之通患。若此處無難。 則人人可到聖賢地位矣。〇武夷圖。 留意畵成。 裝軸精絶。 珍重寄來。洞府烟霞。 大隱遺跡。 入手照眼。 每一披玩。 耳邊如聞櫂歌之聲。

〈詩〉
晩從書裏悟迷途。病業還慚大丈夫.爲問靜存存底事。書來肝膽好相輸.

山木何能便秀穹。存心要居積年功.君看日夜東流水。放海先從一坎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