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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28년(무진) / 5월(五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13.0006.TXT.0004
4일(임진)
-현익집서(玄黓執徐)-. 갬. 흐림. 《초계정씨보첩》을 보았는데, 제목을 '동계선생 팔계정씨세계도(桐溪先生八溪鄭氏世係圖)'라고 했다. 전3세, 후18세가 있다.
전3세 배걸(倍傑)은 문과에서 장원급제하였으며, 예부상서 중추사(禮部尙書中樞使)를 지냈다. 홍문광학추성찬화공신(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위문하시중(守太尉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 광유후(光儒侯)에 증직되었다. 부인은 최씨(崔氏)이다. 아들 문(文)은 자(字)가 의덕(懿德)으로, 문과에 급제하고 예부상서(部尙書) 정당문학(政堂文學)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지냈다. 좌복야(左僕射)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증직되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부인은 김씨(金氏)로, 윤의(允義)의 딸이다. 아들에는 복공(福公)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복경(福卿), 복유(福儒)가 있다.
11세에 온(蘊)이 있는데, 자는 휘원(輝遠)이니 바로 동계선생이다. 부친 유명(惟明)은 진사이니,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되었다. 호는 역양(嶧陽)이다. 조부 숙(淑)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되었다. 증조 옥견(玉堅)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이고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다. 호는 확계(蠖溪)이다.
10세조 승(丞)국자박사(國子博士)이니, 곧 후1세이다.

《동사찬요(東史簒要)》주 62)
정문(鄭文)의 자(字)는 의덕(懿德)이고 초계(草溪)인이며, 시중(侍中) 배걸(倍傑)의 아들이다. 처(妻) 최씨(崔氏)는 현숙하였지만 아들이 없어서 그 족친의 딸을 키워서 배걸의 첩으로 삼았다. 얼마 안가서 배걸이 죽고, 유복자 문(文)이 태어났다. 은 나이가 겨우 15~6세에 숙성하기가 마치 노성인(老成人) 같았다. 국자감시(國子監試)에 나아가 〈군위민천부(君爲民天賦)〉를 지었는데, 그 부에 이르기를, "만물이 만약 초췌하면 나는 곧 우로의 은혜를 베풀 것이고, 풍속이 만일 완흉하면 나는 곧 뇌정의 노여움을 펼칠 것이다.[物如憔悴, 我則施雨露之恩。俗若頑兇, 我則布雷霆之怒。]"하니, 문종이 듣고 칭탄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직한림(直翰林)에 발탁되었고, 좌습유(左拾遺)로 옮겼다. 대간이 "문(文)의 외가는 처인부곡(處仁部曲) 출신이니, 간관(諫官)으로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논박하여 내급사(內給事)로 고쳐 제수하였다. 관직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공검(恭儉)하고 박눌(朴訥)하였으며, 생업에 종사하지 않아 거처하는 집은 겨우 풍우(風雨)만 가릴 정도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청신(淸愼)하여 형조(刑曹)를 맡은 10여 년 동안 일찍이 함부로 남의 죄를 잘못 출입주 63)시키기 않았다. 일찍이 서경(西京)에 호종하였을 때 기자사(箕子祠)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 사신(使臣)으로 송에 들어갔는데, 이때 하사받은 돈과 비단을 따라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로는 다 서적(書籍)을 구입하였으며, 달리 구하는 바가 없었다. 송나라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였다. 졸(卒)함에 시호를 정간(貞簡)이라 하고, 좌복야 참지정사(左僕射參知政事)에 추증하였다.
주석 62)동사찬요(東史簒要)
1606년(선조 39)에 문신 오운(吳澐)이 지은 역사책이다. 8권 8책이며, 목판본이다.
주석 63)출입
법관(法官)이 형벌 쓰는 데 '출(出)'과 '입(入)'이 있으니, 두 가지가 다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 출은 중죄(重罪)를 경형(輕刑)에 처하는 것이요, 입은 경죄(輕罪)를 중형에 처하는 것이다.
四日 壬辰
【玄黓執徐】。晴。陰。看《草溪鄭氏譜牒》。 題目云 '桐溪先生八溪鄭氏世係圖'。有前三世。 後十八世。前三世。 倍傑。 文科壯元。 禮部尙書中樞使。 贈弘文廣學推誠贊化功臣 開府儀同三司 守太尉 門下侍中 上柱國 光儒候。夫人崔氏。子。 。 字懿德。 文科。 禮部尙書 政堂文學 太子賓客。 贈左僕射參知政事。 諡貞簡公。夫人金氏允義女。子。 福公刑部員外郞福卿福儒
十一世有。 字輝遠。 卽桐溪先生。父惟明。 進士。 贈吏曹參判。 號嶧陽。祖。 贈左承旨。曾祖玉堅司圃署別提。 贈司憲府執義。 號蠖溪。十世祖國子博士。 卽後一世也。

東史簒要。
鄭文。 字懿德。 草溪人。 侍中倍傑之子。妻崔氏。 賢而無子。 養其族女。 以爲倍傑妾。未幾。 倍傑死。 遣腹生。年甫十五六。 嶷然若老成人。 赴試作〈君爲民天賦〉曰。 "物如憔悴。 我則施雨露之恩。俗若頑兇。 我則布雷霆之怒。" 文宗聞之稱歎。登第。 擢直翰林。 轉左拾遺臺諫駁奏。 "文外系出處仁部曲。 不宜諫官。" 乃改授內給事。官至政堂文學禮部尙書。爲人恭儉朴訥。 不事生業。 居室僅庇風雨。莅官淸愼。 典刑曹十餘年。 未嘗妄出入罪人。嘗扈駕西京。 請立箕子祠。奉使入宋,所賜金帛,分與從者,餘悉買書籍,他無所求。宋人多之。卒謚貞簡。 贈左僕射參知政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