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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암일기(棲巖日記) / 1919년(기미) / 9월(九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1.0008.0007.TXT.0002
그믐(무인)
흐렸다가 맑음. 《율곡선생전서》권 13, 〈잡기(雜記)〉를 보고 기록한다.

〈잡기(雜記)〉
자고(子固, 윤근수(尹根壽))가 나에게 들려 조용히 담화하다가 말이 심(心)ㆍ성(性)ㆍ정(情)에 미쳤다. 내가 말하기를, "공(公)은 이 세 글자에 대해 다 이해하는가?"라고 하니, 자고가 말하기를, "못합니다. 성이 발하여 정이 되고, 심이 발하여 의(意)가 된다는 것은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공이 이것에 대하여 깨닫기 어려워한다면 심ㆍ성ㆍ정에 대해 거의 견해가 있는 것이다. 선유(先儒)의 이 말은 따로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이고 직접 심성(心性)을 논한 것이 아닌데, 지금 학자들은 이 말을 잘못 알고 심과 성을 나누어 두 개의 작용이 있고 정과 의(意)가 두 가지가 있는 줄 생각하니, 내가 가장 딱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이제 공이 여기에 의심을 가지니 참으로 아는 바가 있는 것 같다.
성은 바로 심(心)의 이(理)요, 정은 바로 심(心)의 동(動)이니, 정(情)이 동한 후에 정으로 인하여 계교하는 것이 의(意)가 된다. 만일 심과 성이 둘이라면 도(道)와 기(器)가 서로 떠날 수도 있을 것이며, 정과 의가 둘이라면 사람의 마음에도 두 가지 근원이 있는 것이니, 어찌 크게 잘못된 이론이 아니겠는가? 반드시 성ㆍ심ㆍ정ㆍ의가 한 길이면서 각각 경계가 있는 것임을 안 연후에야 어긋남이 없다 할 것이다. 어째서 한 길이라 하는가? 심이 아직 발하지 않았을 때는 성이요, 이미 발하면 정이며, 정이 발한 후에 헤아리는 것이 의가 되니, 이것이 한 길인데, 어째서 각각 경계가 있다고 하는가. 심이 고요히 동하지 않을 때가 성의 경계요, 심이 감촉하여 통할 때는 정의 경계이며, 느끼는 바에 따라 이리저리 생각을 찾아내고 헤아리는 것은 의의 경계가 되는 것이니, 다만 이것은 일심(一心)에 각각 여러 가지 경계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장생(金長生)이배달(李培達)이 묻기를, "부모가 자애(慈愛)하고 자식이 효도하는 것은 떳떳한 이치인데, 무슨 까닭으로 자애한 자는 많은데 효도하는 자는 적습니까? 동물의 경우에도 제 새끼는 사랑할 줄 알면서 어버이를 사랑할 줄 모르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이(理)로 말하자면 말(末)이 본(本)을 중(重)히 여기고, 기(氣)로 말하면 구(舊)가 신(新)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니, 기는 낳고 낳아 쉼이 없으니 묵은 것은 지나가고 오는 것이 계속된다. 갈 것이 시들면 오는 것은 새롭기 때문에 이치에 밝은 자는 근본을 소중히 여겨 어버이를 사랑한다. 기가 하는 대로 맡겨 두는 자들은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고 자식만 귀하게 여긴다. 대개 이와 같으니 다만 스스로 궁리하여 깨닫는 데 달려 있다."라고 하였다.

내가 갑자년(1564, 명종19) 겨울에 강릉(江陵)을 향해 가다가 태화역(太和驛)에서 묵었는데, 망중(望中) 최운원(崔雲遠)과 만나 같이 자면서 밤에 대화를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지금 세상 선비들은 말을 잘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할 것이 아니라 잘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근심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망중이 말하기를, "퇴계는 '배우는 자가 자기의 허물은 살피지 않고 먼저 남의 허물을 살피니 이것이 공통된 근심거리이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매우 좋다."라고 하였다.

〈삼가 석호재에 차운하다(謹次石湖齋)〉
-족숙 성현의 재실이다-
편액이 석호인데 이곳에 집을 지으니(扁是石湖宅是所)
훌륭하고 준수한 선비들 이웃하기 좋네(好其俊彦接芳隣)
어찌 나루터에서 길이 은거하는 자를 배우랴(寧學津頭長往者)
반드시 기수에서 노래하며 돌아오는 사람 그리워하리(必懷沂上詠歸人)
그렇지 않으면 모든 일에 어찌 도라 따르랴(不然凡事何從道)
그런 까닭에 평생 스스로 몸을 깨끗히 했네(所以平生自潔身)
정순함은 옥 같고 밝은 지혜는 거울 같아(精純如玉明如鏡)
명분과 실제 모두 같으니 덕도 새로우리라(名實俱同德與新)
晦 戊寅
陰而陽。看《栗谷先生全書》卷之十三〈雜記〉。 而記之。
雜記
子固歷見余談話。 從容語及心性情。 余曰。 "公於此三字。 能一一理會否?" 子固曰。 "未也。性發爲情。 心發爲意云者。 殊未曉得。" 余曰。 "公於此難曉。 則庶幾有見於心性情矣。先儒此說。 意有所在。 非直論心性。 而今之學者。 爲此說所誤。分心性爲有二用。 分情意爲有二岐。 余甚苦之。今公自謂於此有疑。 則庶幾有眞知矣。性是心之理也。 情是心之動也。 情動後緣情計較者爲意。若心性分二。 則道器可相離也。 情意分二。 則人心有二本矣。 豈不大差乎? 須知性心情意只是一路。 而各有境界。 然後可謂不差矣。 何謂一路? 心之未發爲性。 已發爲情。 發後商量爲意。 此一路也。 何謂各有境界? 心之寂然不動時。 是性境界。 感而遂通時。 是情境界。 因所感而紬繹商量。 爲意境界。 只是一心。 各有境界。"
金長生李培達問曰。 "父慈子孝。 常理也。 何故。 慈者衆而孝者甚鮮乎? 至於禽獸。 皆愛其子而不愛其親。 亦何故耶?" 余曰。 "以理言之。 末以本爲重。以氣言之。 舊以新爲貴。氣生生不息。 而往者過。 來者續。往者以謝。來者方新。 而理明者。 重本而愛親。任氣之所爲者。 則不愛親而只貴其子矣。大槪如此。 只在自窮得。"
甲子冬。 向江陵宿太和驛。 遇崔雲遠望中同宿夜話。余曰。 "今世之士。 不患不能言。 只患不能行耳。" 望中曰。 "退溪有言曰。 '學者不省己過。 先省人過。 此是通患'。 此言甚好。"
謹次石湖齋【族叔盛鉉
扁是石湖宅是所。 好其俊彦接芳隣。 寧學津頭長往者。 必懷沂上詠歸人。 不然凡事何從道。 所以平生自潔身。 精純如玉明如鏡。 名實俱同德與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