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행록(西行錄》은 전라남도 고흥군에 사는 송정악(宋廷岳, 1697~1775), 송지행(宋志行, 1741~1802), 송석년(宋錫年, 1778~1842)이 당대 절의가 있는 벼슬아치와 석학들에게 선조의 묘문(墓文)을 부탁하기 위해 경기도 및 서울 일대를 왕복하면서 기록한 기행 일기이다. '서행(西行)'이란 뜻은 곧 '서울에 간다'는 의미이다.
《서행록》은 총 3책의 필사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1책은 '西行錄'이라는 표제와 권두에 1817년 류재호(柳在浩)가 쓴 서문이 있으며 1744년부터 1769년까지의 기록이 실려 있다. 그러나 1750년, 1752~1754년, 1756년의 기록은 없다. 권말에는 1808년 불초손(不肖孫) 송석년(宋錫年)과 외손(外孫) 조형엽(趙馨燁), 1819년 족손 송상의(宋相懿)가 쓴 후기 3편이 실려 있다.
2책은 '西行錄'이라는 표제와 1768년부터 1800년까지의 기록이 실려 있으며 권말에 1811년 불초손 송석년이 쓴 후기 1편이 실려 있다. 3책은 1, 2책과는 달리 '西行錄'이란 표제와 권말에 후기가 없고 1821년부터 1839년 기해년에 기록한 영행일기(嶺行日記)만 마지막에 실려 있다.
《서행록》은 한 면이 12행 26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의 이름과 시문은 작은 글자로 1행에 두 자씩 쓰여있다. 1817년 류재호가 쓴 서문을 살펴보면, 《서행록》 간행을 위해 송석년이 서문을 부탁한다고 하였다. 그 점으로 보아 《서행록》 1책과 2책은 송석년과 외손인 조형엽, 족손인 송상의 중에 한 사람이 필사하였고, 3책은 송석년의 후손인 송동기(宋東圻)가 필사하여 엮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책은 2책, 3책과 서체가 다르고 2책과 3책은 서체가 같아서 두 사람이 필사한 것으로 보이며 차후 더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1책은 송정악이 서행한 내용이고 2책은 송정악의 아들인 송지행이 서행한 내용, 3책은 송정악의 손자인 송석년이 서행한 내용이다.
이번에 발간되는 《서행록》 제1권은 3책 중에 제1책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1744년(갑자년, 영조 20) 4월부터 1759년(기묘년, 영조35) 2월까지의 기록을 번역하여 출간한 것이다. 이 일기는 필사본이라 원문을 입력하고 표점 작업을 하여 모두 수록하였다.
이 책은 송정악이 그의 고조부인 참의공(參議公) 송대립(宋大立, 1550~1597)과 증조부인 승지공(承旨公) 송심(宋諶, 1590~1637)의 사적을 선양하는 《충효록(忠孝錄)》 발간을 위하여 충청도와 경기도 및 서울을 왕래한 기록이다. 그 속에는 당대 벼슬아치와 석학들을 만나 묘문과 시문을 청탁한 상황, 곳곳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느끼는 감회, 서행하는 과정 중에 홍수를 만나거나 얼어붙은 강을 건너며 죽을 고비를 넘기는 험난한 여정, 그러면서도 글을 받겠다는 일념으로 고통을 감수했던 여산 송씨 한 후손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다.
1. 여산 송씨의 가계1) 여산 송씨의 고흥 입향
여산 송씨의 시조는 송유익(宋惟翊)이다. 그는 고려 때 진사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졌다. 송유익의 4대손인 송송례(宋松禮)가 여산 송씨의 중시조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송송례는 홍규 등과 함께 1274년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였던 임유무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우면서 고려 왕실로부터 추성익대보리(推誠翼戴輔理) 동덕좌명공신(同德佐命功臣)에 임명되었으며,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광정대부(匡靖大夫) 문하시중판전리사사(門下侍中判典理司事) 상장군(上將軍)이라는 시호를 받게 되었다. 이와 함께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고 고려 왕실로부터 1000호 가량의 식읍을 받으면서 여산 송씨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후 송송례의 아들인 송염(宋琰)과 송분(宋玢) 형제를 시작으로 원윤공파(元尹公派), 밀직공파(密直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지신공파(知申公派), 정가공파(正嘉公派) 등으로 파가 갈라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윤공파, 밀직공파, 소윤공파는 송염의 아들들이 이어받았고, 지신공파, 정가공파는 송분의 아들들이 이어받았다.
이 중에 원윤공파는 주로 전라남도 고흥에 세거하고 있다. 고흥의 입향조는 송간(宋侃)이다. 송간은 원윤공파의 파조인 송운(宋惲)의 6세손이며 호는 서재(西齋), 시호는 충강(忠剛)이다.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455년 왕명으로 호남을 순시하고 돌아오던 중 단종이 영월에 쫓겨 갔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영월에 가서 복명한 후 대성통곡하고 고향 여산으로 내려가 두문불출하였다.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깊은 산 속에 들어가 3년상을 치르고 전라남도 고흥군 마륜촌 산정(山亭)에 들어가 서산정(西山亭)을 짓고 숨어 살았다. 10여 년 후에 가족들이 그를 찾아냈으나 항상 술에 만취하여 산길을 달리기도 하고 산수를 찾아다니며 대성통곡하므로 모두 미쳤다고 하였다. 그대로 생애를 마쳤는데 지금도 그곳을 서재동(西齋洞)이라 부른다고 한다. 1793년에 '충강(忠剛)'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 이후로 후손들이 고흥에 세거하였다.
2) 송간의 후손들
송간의 6세손인 송대립(宋大立)은 자가 신백(信伯)이고 부친은 송관(宋寬)으로 내금위, 광양 현감을 지냈다. 송대립은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공으로 훈련원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권율이 창의별장으로 임명하여 전라좌도 연해지역을 방비시켰다. 또한 고흥의 첨산(尖山)에 성루를 쌓고 왜군에 대비하여 백성들을 안무하며 1598년 3월 보성으로 쳐들어 온 왜선 30여 척을 대파하였다. 4월에는 고흥 망제도에서 왜선을 수색하여 첨산까지 도망간 왜군을 섬멸하고자 추격하다가 매복 중이던 1,000여 명의 왜군을 만나 힘껏 싸우다 조총에 맞아 첨산에서 전사하였다. 선조 조에 병조참의(兵曹參議)로 추증되었고 선무 일등 원종공신(宣武一等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송눌(宋訥), 송겸(宋謙), 송심(宋諶) 세 아들이 있다.
송대립의 셋째 아들인 송심(宋諶)은 자가 사윤(士允)으로 부친이 전사하자 어려서부터 무예를 연마하였다. 1614년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수군통제사 구굉(具宏)의 막료가 되었고 그의 천거로 선전관이 되었다. 전라도 병마우후를 거쳐 1635년 함경도 홍원(洪原) 현감이 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을 만나 북병사 이항(李沆), 남병사 서우신(徐佑申) 휘하의 척후장으로 남한산성을 호위하였다. 그러나 강화 조약이 체결되고 몽고군이 철수하면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청군 소속 몽고병을 추격하여 안변(安邊)의 남산역(南山驛)에서 전후 영장(前後營將)과 함께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숙종 조인 1704년에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었고 또한 부친인 송대립과 함께 정려(㫌閭)를 받았다. 송문상(宋文祥, 1631~1706), 송문우(宋文佑, 1637~1710), 송문형(宋文亨, 1637~1708) 세 아들이 있다.
송문상은 자가 국경(國慶), 호는 봉은옹(鳳隱翁) 또는 이우당(二憂堂)이다.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했고 송대립과 송심을 전사하게 한 왜나라와 청나라를 잊지 않기 위해 이우당(二憂堂)이라 자호하였다. 슬하에 4남 4녀가 있는데 4남은 송가징(宋可徵), 송협(宋莢, 1657~1730), 송막(宋莫), 송란(宋蘭)으로 모두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송문상의 둘째 아들인 송협은 일명 송필징(宋必徵)으로 자는 계례(季禮)이고 호는 용전(龍田)이다. 증조부 송대립과 조부인 송심의 충의를 선양하는 일에 힘썼다. 숙종 조에 송협이 어가를 가로막고 송심의 순절을 호소함으로써 송심이 좌승지에 추증되고 송대립과 함께 정려를 받을 수 있었다. 슬하에 1남 2녀가 있는데 1남이 바로 송정악(宋廷岳, 1697~1775)이다.
송정악은 자가 군거(君擧)이고 호는 만회당(晩晦堂)이다. 48세의 나이에 한천의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에게 나아가 집지(執贄)의 예를 행하고 고조부 송대립과 증조부 송심의 묘갈명을 청탁하였다. 그곳에 머무는 몇 개월 동안 《격몽요결(擊蒙要訣)》과 《소학(小學)》을 수학하였다. 또 이재의 문인들과 당대의 석학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25여 년 동안 묘문과 시문 등을 받았고, 사적을 수집하여 《송씨충효록(宋氏忠孝錄)》을 기묘년인 1759년에 간행하여 여러 인사에게 배포하였다. 청주 김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고, 서산 류씨와의 사이에서 1남 8녀를 두었다. 1남은 송지행(宋志行, 1741~1802)이다.
송지행은 자가 효원(孝源)이며 호는 절와(節窩)이다. 부친이 선조의 선양을 위해 힘쓰던 일을 극진히 이어받아, 십여 년 동안 고흥과 서울을 오가며 송간이 '충강(忠剛)'이라는 시호를 받도록 노력하였고, 보첩(報牒)을 후대에 알리고 이어갈 수 있도록 정리하였다. 슬하에 1남 1녀가 있다. 1남은 송석년(宋錫年, 1778~1842)이다.
송석년은 자가 수이(壽而), 호는 송와(松窩)이다. 송치규(宋穉圭, 1759~1838)의 문하생으로 경서를 깊이 있게 탐구하였으며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으나 관직에 오르지 못하였다. 송간의 행적을 담은 《서재실기(西齋實記)》를 1822년 편집 간행하였다. 슬하에 2남 2녀가 있다. 2남은 송진하(宋鎭夏)와 송진상(宋鎭商)이다.
2. 《서행록》의 편찬 배경과 체제1) 《서행록》의 편찬 배경
조선 시대 후손들이라면 선조의 절의가 뛰어났거나 학식이 높았거나 간에 누구나가 선조에 대한 선양사업을 필연의 사명감으로 생각한다. 호남 지역에서 절의로 이름난 김덕령, 고경명, 고인후, 고종후, 김천일, 양대박의 후손들도 필연의 사명감으로 선조에 대한 선양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785년 김덕령은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받았고, 그 형 김덕홍(金德弘)과 그 아우 김덕보(金德普)는 증직(贈職) 되었다.주 1) 또 같은 해 11월에는 충장공 김덕령의 유고가 호남백(湖南伯)에 의해 간행되었고, 그 마을에 '증 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 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석이 세워졌다. 1791년에는 《김덕령유사(金德齡遺事)》가 간행되었다.주 2)
1796년에는 양대박이 정경(正卿)으로 증직되었고 시제(諡祭)를 내렸으며, 그의 문집인 《청계집(靑溪集)》과 《창의록(倡義錄)》의 판본을 만들어 인쇄하였다. 그의 아들 양경우도 한 품계가 올랐고, 《제호집(霽湖集)》도 간행되었다.주 3) 또 보국숭록대부 판중추부사 겸 병조판서로 증직되었으며, 그해 10월 양대박은 '충장(忠壯)'이란 시호를 받았다.주 4)
고인후(高因厚)는 1786년 창평(昌平)에 사는 후손 고시옥(高時沃)의 상소에 의해 고종후(高從厚)와 함께 부조지전(不祧之典)주 5)의 은전을 입었다.주 6) 1793년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은 의정부 영의정에 추증되었고주 7), 1795년에는 《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가 간행되었다.주 8)
이렇듯 절의가 있는 집안의 후손들은 그 선조를 선양하는 사업에 활발했다. 그 배경에는 후손들에게 충신의 가문임을 각성시켜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고 종족이 화목하고 효제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또 대대로 자신의 가문이 충신의 가문임을 세상에 알려 정계 진출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거나 서용의 기회를 얻으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또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유학 사상이 뿌리 깊이 자리한 이유도 있다. 《중용장구(中庸章句)》에서 공자가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는 효자일 것이다. 효란 것은 어버이의 뜻을 잘 계승하며, 어버이의 일을 잘 따라 행하는 것일 뿐이다.[武王周公 其達孝矣乎 夫孝者 善繼人之志 善述人之事者也]"라고 하였다. 또 《서경》 〈대고(大誥)〉에서는 "아버지가 집을 지으려고 모든 방법을 강구해 놓았는데 아들이 집터를 닦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면, 나아가 집을 얽어 만들 수가 있겠는가.[若考作室 旣底法 厥子乃不肯堂 矧肯構]"라고 하며 조상의 사업을 받들고 계승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송정악도 어려서부터 경서 공부나 가풍을 통하여 선조를 선양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뿌리 깊이 자리했을 것이다. 그래서 절행이 있는 두 선조의 사적을 후세에 전해야 한다는 필연의 사명감으로 《충효록》 간행에 성심을 다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일기 속에 보인다.
여러 달 동안 도성에 머문 이유는 당대 벼슬아치 및 사우(士友) 중에 지조와 절개가 맑고 높아 우리 사문(師門)에 어긋나지 않을 자들의 문자를 받아서 《충효록(忠孝錄)》의 서(序)・발(跋)・기(記)・지(識)로 삼고, 이전 공사 문자(公私文子)인 전(傳)・발(跋)・묘지(墓誌)・묘갈(墓碣)을 합하여 하나의 책자로 엮어서 후세에 전해 영원히 불후(不朽)의 자료로 만들고자 해서였다.주 9)
당대 벼슬아치 중에 지조와 절개가 곧은 분을 골라 글을 청탁했고 후세에 길이 전하여 두 선조의 사적을 영원히 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또 "선조의 충절이 아무리 높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 후손이 그 사적을 편찬하여 전하지 않으면 그 충절을 누가 알겠는가?"라고 하며 계술(繼述)과 계지(繼志)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서행록》 1책의 후기를 보면 그 선조의 사적을 본 후손들이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잘 말해주고 있다.
장차 우리 자손들이 이 기록을 보고 출연(怵然)히 감모하고 척연(惕然)히 분려(奮勵)하여 집안의 명성을 계술하는 일에 선왕부께서 성심으로 애쓰신 것임을 알게 하고자 한다.주 10)
《서행록》을 읽은 후손들은 척연히 사모하고 분발하여 송정악 등 선조들이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그 책을 편찬했는지를 기억하라고 하였다.
2) 《서행록》의 체제
《서행록》은 총 3책의 필사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면이 12행 26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람의 이름과 시문은 작은 글자로 쓰여 있다.
1책은 '西行錄'이라는 표제가 있고 권두에 1817년 류재호(柳在浩)가 쓴 서문이 있다. 1744년부터 1769년까지의 기록인데 1750년, 1752~1754년, 1756년의 기록은 없다. 권말에는 1808년 불초손(不肖孫) 송석년(宋錫年)과 외손(外孫) 조형엽(趙馨燁)이 쓴 후기와 1819년 족손 송상의(宋相懿)가 쓴 후기가 실려 있다.
1책의 체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1744년(영조20) 4월 20일~7월 21일(7장), 1745년(영조21) 9월 3일~10월 14일(4장), 1746년(영조22) 12월 10일~12월 29일(5장, 한천분곡일기(寒泉奔哭日記)), 1747년(영조23) 1월 1일~1월 28일(3장, 한천분곡일기), 1748년(영조24) 10월 11일~12월 21일(5장, 한천재기시상락노정기(寒泉再朞時上洛路程記), 동방록(同房錄)), 1749년 2월 28일~7월 19일(20장, 경행북정록병부(京行北征錄幷附)), 1751년 10월 15일~11월 1일(4장), 1752년 4월 13일~9월 4일(11장), 1754년 10월 13일~12월 13일(6장), 1755년 6월 9일~8월 1일(7장), 1757년 10월 15일~12월 28일(18장, 청천동우암선생개장후묘소치전축문(淸川洞尤庵先生改葬後墓所致奠祝文), 태복정박성원제문(太僕正朴聖源祭文)), 1758년 6월 3일~12월 30일(20장), 1759년 1월 1일~3월 20일(7장), 4월 25일~5월 14일(9장, 통행일기(統行日記)), 1761년 12월 13일~12월 30일(1장), 1762년 1월 1일 4월 12일(12장, 경중각댁해의분송기(京中各宅海衣分送記)), 1763년 1월 19일~1월 30일, 8월 15일~9월 9일(7장, 연영노정기(蓮營路程記), 서유경조록(西遊慶弔錄)) 1768년 1월 15일~6월 14일(25장), 1769년 5월 10일~7월 3일(4장, 심혼록(心昏錄))까지 총 175장으로 되어 있다.
2책은 '西行錄'이라는 표제와 1768년부터 1800년까지의 기록이 실려 있으며 권말에는 1811년 불초손 송석년이 쓴 후기가 실려 있다.
2책의 체제는 1768년(영조44) 1월 15일~4월 15일(12장), 1773년(영조49) 2월 15일~4월 6일(13장, 회행일기(會行日記)), 1791년 2월 26일~8월 23일(13장), 11월 13일~12월 30일(3장), 1792년 1월 1일~4월 15일(12장), 1792년 9월 15일~12월 30일(12장, 향산일기(香山日記)), 1793년 1월 1일~2월 3일(3장), 1794년 1우러 16일~5월 1일(7장), 1796년 11월 20일~12월 30일(3장), 1797년 1월 1일~2월 22일(7장), 1798년 9월 2일~12월 30일(4장), 1799년 1월 1일~2월 20일(4장), 1780년 3월 2일~4월 19일(4장)까지 총 97장으로 되어 있다.
3책은 1, 2책과는 달리 '西行錄'이란 표제와 권말에 후기가 없고 1821년부터 1839년 기해년에 기록한 영행일기(嶺行日記)만 마지막에 실려 있다.
3책의 체제는 1821년 2월 20일~4월 10일(6장), 11월 19일~12월 20일(6장, 오촌동방록(鰲村同房錄)), 1823년 3월 21일~4월 28일(11장), 8월 1일~10월 6일(7장, 문회계(文會契), 정시시동행록(廷試時同行錄), 신안서원장(新安書院狀)), 1827년 9월 25일~10월 19일(3장), 1828년 4월 4일~5월 30일(9장), 9월 11일~11월 3일(8장, 동행록(同行錄)), 1831년 10월 2일~10월 26일(6장, 총문(通文), 동학회통(東學回通)), 1832년 윤9월 22일~11월 10일(7장), 1839년 3월 12일~3월 25일(3장, 영행일기(嶺行日記))까지 총 67장으로 되어 있다.
3. 《서행록》의 내용1) 묘문과 시문 청탁 및 수령
송정악이 《서행록》을 기록한 주된 이유는 송대립, 송심 두 선조의 《충효록》 발간을 위해 경기 도 및 서울 일대를 찾아다니며 묘문(墓文)과 시문을 청탁하고 수령했던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송정악은 당대 벼슬아치와 석학들에게 글을 청탁하였는데 윤봉조(尹鳳朝)주 11), 남유용(南有容)주 12), 박성원(朴聖源)주 13)에게는 《충효록》 서문을, 이재(李縡)주 14)에게는 묘갈명을, 유척기(俞拓基)주 15)에게는 묘지명을 청탁하였다.
일기는 1744년 4월 21일부터 시작하는데 바로 한천의 이재 선생을 처음으로 찾아뵙고 두 선조의 묘갈명을 청탁하려고 출발하는 것이다. 5월 10일 처음으로 찾아뵙고 인사하며 청탁하는 상황이 일기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중략) 나는 일어나 다시 청하며 말하기를 "이미 선조의 감춰진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천 리 길을 발을 싸매고 왔으니 그 원하는 바를 이루기 전에 다시 내려가게 된다면 사사로운 저의 심정은 절박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중략) 나는 예를 마친 뒤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가장(家狀)의 초고를 올리니 선생께서 여러 차례 감탄하며 말하기를 "어찌 바닷가 한 모퉁이 궁벽한 시골에서 이처럼 세상에 드문 절행(節行)이 있을 줄 생각이나 했겠나? 내 비록 병들었지만 끝내 고사할 수는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어서 나의 나이와 벼슬에 대해 물으니 내가 대답하기를 "나이는 48세이고 벼슬은 없습니다."라고 하자 선생께서 말하기를 "충성스러운 신하의 후손인데 벼슬이 없으니 진실로 애석하도다. 그리고 타고난 성품이 독실하니 학문을 할 만하도다."라고 하였다.주 16)
송정악은 5월 10일 이재의 승낙을 받은 후로 6월 27일까지 머물면서 《격몽요결》과 《소학》을 잠깐이지만 수학하였고 이재와 동행하며 여러 편의 차운시를 남겼다. 이재의 원운시에 송정악이 차운한 시를 감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재의 원운시
냇가에서 돌아올 때 비에 진흙탕이 되니 川上歸來雨和泥
늙은이와 젊은이가 서로 보고 한바탕 웃네 相看一笑共旄倪
즐거울 때도 조심해야 바야흐로 바른 선비이니 樂時瞿瞿方良士
실솔주 17)이 참으로 '복규'주 18)를 대신할 수 있다네 蟋蟀眞堪代復圭
송정악의 차운시
가벼운 티끌 밟고 갔다가 진흙 밟고 돌아오니 去步輕塵返踏泥
천기의 실마리는 헤아리기 어렵구나 天機難可測端倪
높이 실솔을 읊조리며 경계로 삼고 高吟蟋蟀爲規警
남용이 백규를 반복함을주 19) 본받고자 하네 願效南容復白圭
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재는 유학자로서 언행을 매우 중시했으며 평소에도 삼가고 유념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가르침에 대해 송정악은 성실하게 본받고 따르겠다는 마음을 차운시로 표현하였다.
글을 청탁했던 인물들에 대해 언급해 보면, 1752년 7월 5일에 윤봉조를 처음 만나 《충효록》 서문을 청탁하고 승낙받았다는 내용이 있고, 같은 해 8월 3일에 남유용을 만났고, 박성원은 1746년 이재의 장례식 때 재우(再虞)에서 종헌(終獻)을 올렸다는 기록이 이재의 장례식을 기록한 〈한천분곡일기〉에 보인다. 그 이후에도 박성원은 몇 차례 언급이 되는 것으로 보아 동문으로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성원이 언급된 내용을 살펴보면, 1749년 4월 1일에 박성원의 임시 거처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고, 6월 1일에는 이달경, 조목 등과 모화관 견산대를 방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1751년 11월 1일에는 박성원이 상을 당하여 조문하였고, 1752년 5월 8일에는 정언인 박성원의 사랑에서 유숙하였고, 1757년 10월 27일에는 이재의 장례식 참석자로 명단에 보인다. 같은 해 12월 7일 박성원이 상을 당하여 조문하였고, 또한 송시열의 분묘를 청천(淸川)으로 이장한 뒤에 박성원이 지은 제문을 〈太僕正朴聖源祭文(태복정박성원제문)〉이란 제목으로 일기에 실어 놓았다. 유척기(俞拓基)에 대한 언급은 1747년 1월 5일에 "미호(渼湖, 경기도 남양주)에 도착하였다. 재상 유척기(俞拓基)를 만나 전자(篆字)를 부탁하자 유 재상께서 흔쾌히 허락하였다."는 내용이 있는데 전자(篆字)는 묘비명을 말하는 것이다.
이 외에도 박필주(朴弼周)에게는 묘표를, 민진원(閔鎭遠)에게는 상계문(上啟文), 박태저(朴泰著)에게는 제문을, 민진원(閔鎭遠)과 서봉령(徐鳳齡)에게는 발문을, 이의현(李宜顯)에게는 부자전기(父子傳記)를, 이의철(李宜哲)에게는 부자정려기(父子旌閭記)를 받았다. 또 김진상(金鎭商), 조관빈(趙觀彬), 이존중(李存中), 박성원(朴聖源), 조중회(趙重晦), 김상복(金相福), 남태저(南泰著), 이명식(李命植) 등 30여 명에게 한시를 받았고, 이덕휴(李德休)에게 사(辭)를, 조관빈(趙觀彬), 이기진(李箕鎭), 민우수(閔遇洙), 김원행(金元行), 홍계능(洪啟能), 송명흠(宋明欽) 등 10여 인에게는 발문(跋文)을 받았다.
또 송정악은 경기도 섬락(蟾樂)과 단강(丹江)에 사는 민우수, 민창수 등을 여러 차례 방문한 기록이 있고, 민씨 집안의 인물들에게 많은 글을 수령한 것으로 보아 민씨 집안과 특별한 교분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민진원에게 상계문(上啟文)과 발문을. 민진후에게 회계문(回啓文)을, 민우수와 민백순에게는 각각 발문을 1편씩 받았다.
2) 명승지 유람 및 선조의 행적 답사
송정악은 글을 청탁하러 가면서 많은 명승지와 서원을 유람하고 선조의 유적지를 답사한다. 1745년 10월 2일에는 화양서원과 만동묘를 참배하였고 1749년 4월 5일 남한산성을 유람하였다. 같은 해 4월 13일에는 송심의 전장지였던 함경남도 안변(安邊)을 찾아갔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몇 마장(馬場)을 남쪽으로 내려가니 바로 옛날에는 철령으로부터 안변(安邊)으로 향하는 대로(大路)였는데 지금은 황폐해졌다. 농부가 이르기를, "난리 당시 우리 군사는 이 지역에 들어왔고, 오랑캐는 동쪽 최고봉 이른바 화산(花山)의 정상에 주둔했습니다. 한번 사기(蛇旗)를 휘두르자 대군이 어지럽게 내려와 우리 병사와 접전하였습니다. 이때 병사(兵使)가 달아나버리자, 영장(營將)이 힘써 싸우며 적에게 활을 쏘다가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게 되자 왼손을 바꾸어 오른손으로 쏘며 종일토록 쉬지 않았습니다. 통인(通引)주 20)은 옆에서 화살을 올렸고 화살이 다 떨어지자 애죽(艾竹)으로 계속 올렸습니다. 비록 애죽이라 하더라도 적이 활을 쏘자마자 쓰러지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애죽도 또한 끊기자 마침내 검을 들어 적을 베었는데 검이 부러지자 이에 죽었으며 통인도 또한 죽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 농부가 전한 영장(營將)은 곧 나의 증조부이고, 통인은 아마도 귀학(貴鶴)과 충로(忠老)인데 잘못 와전된 듯하였다. 그러나 《남관지(南關誌)》의 기록에는 "전영(前營)과 후영(後營)에서는 한발의 화살도 쏘지 못하고 모두 죽자, 중영(中營)에서 힘써 싸우다 죽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말을 들으니 감격의 눈물이 절로 솟구쳐 실성하여 통곡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일이 변한 뒤에 다만 야인의 말을 듣고 슬퍼한다는 것이 편치 않아서, 다만 배회하고 사방을 돌아보며 말을 멈추고 방황하였다.주 21)
후손으로써 선조의 생생했던 유적지를 돌아보고 복받쳐 오르는 슬픔을 느끼며 애통해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1752년 4월 20일에는 부여 백마강 일대의 고란사와 조룡대, 낙화암을 유람하며 의자왕이 나라를 잃은 것에 대해 "의자왕(義慈王)은 견고함을 믿고 충성스런 말을 물리쳐 버리고 마침내 나라가 망하는 화에 이르렀으니주 22), 고인이 '사람의 덕에 달려 있지, 산천의 험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 그렇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1752년 8월 15일에는 북한산성을 유람하는 길에 온조대왕의 유적지인 중흥사(中興寺)를 둘러보았다. 1757년 12월 12일에는 이순신의 종손인 이한규(李漢揆)를 방문하여 《난중일기》 9책을 받아서 송대립 3형제와 관련된 사적과 고흥사람의 사적을 베껴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내용을 살펴보면 다름과 같다.
아침을 먹은 후에 종가(宗家)의 주인 이한규(李漢揆)에게 갔는데, 그는 일찍이 참봉을 지냈으며 어제 통사의 집에서 만났던 사람이다. 요청하여 내어준 일기책 9권은 모두 충무공의 친필로 필체가 정교하고 강건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과 감탄을 자아내게 했는데, 나도 모르게 옷깃을 여미었다. 우리 고조 3형제주 23)와 다른 흥양 사람 중에 충무공을 함께 섬겼던 자 5, 6명의 성명을 베껴 왔으나 그들에 대한 사실은 전부 기록할 수는 없었다. 정병사(丁兵使)와 흥양의 승장(僧將) 의능(義能), 그리고 순천의 승장 삼혜(三惠) 또한 그 기록 속에 있어서 다 베껴 적었다.주 24)
12월 18일에는 공암서원을 둘러보며 건물 내부에 세워진 비석들을 누가 지었는지 일일이 언급하고 창건해서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중창된 내력들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1758년 11월 25일에는 성균관을 방문하여 대성전을 참배하고 동무와 서무 등 곳곳을 경건하게 둘러보고 봉심한 내용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수복의 인도로 대성전 동쪽 문을 통과하여 대성위(大聖位)에 들어가 봉심(奉審)하고 다음으로 사성위(四聖位)에 나아가 봉심하였다. 다시 동쪽 종향위(從享位)에 나아가 봉심하고 또 서쪽 종향위에 나아가 봉심하였는데 종향은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팔위(八位)였다. 서쪽 문을 나가자 재지기가 이미 동쪽 문으로 들어갈 때 벗었던 신발을 가지고 와서 서쪽 문밖에 순서대로 놓아두었다. 입문하여 봉심하고 나아갔다 물러나며, 왔다 갔다 하고, 문을 나와 신발을 신는 등의 예절을 수복이 모두 외쳐 고해주었다.
동쪽 계단을 내려와 대성전 뜰을 지나 동쪽을 향해 동무(東廡)로 들어갔으며 돌을 쌓아 만든 정로(正路)는 경유하지 않았다. 아마도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알성(謁聖)할 때 통과하는 곳인 듯하였다. 동무(東廡)로 들어가 북쪽으로부터 제일 먼저 봉심하고 남쪽까지 이르러 마치고 나오니 신발을 재지기가 이미 놓아두었다. 그 문밖에서 다시 서무(西廡)로 가서 북쪽으로부터 봉심하여 남쪽까지 이르러서 나왔다. 몇 개의 위독(位櫝)을 지났는데 동서로 각각 오십 사 오 개였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서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주 25)
제법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매우 인상적이었고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이다.
3) 특별한 제목의 일기들
송정악의 일기 속엔 특별한 제목의 일기들이 있는데 1746년 〈한천분곡일기(寒泉奔哭日記)〉와 1749년 〈경행북정록(京行北程錄)〉이 그것이다.
〈한천분곡일기〉는 1746년 10월 이재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12월 한천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장례를 치르는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일기이다. 일기는 12월 10일부터 길을 떠나 20일에 한천에 도착하여 27일 장례를 치르는 상황을 기록하였는데 18세기 장례 절차와 형식을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기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장례식이 시작되는 부분이다.
동틀 무렵 발인(發引)하였다. 괴정(槐庭)에서 상여에 시신을 실었다. 호상하는 여러 집사는 서쪽에 서고, 주빈(主賓 상주)과 가마(加麻)주 26)한 사람들은 동쪽에 섰다. 견전(遣奠)주 27)을 마친 후 행상(行喪)주 28)하였다. 주인과 복인(服人)은 가운데에서 뒤를 따랐다. 호상과 집사는 서문을 경유했고, 주빈과 가마한 사람들은 동문을 경유하여, 두 길에서 두 줄로 행차하며 질서정연하였다.
주빈과 제자들은 동계에 서고 호상하는 집사들은 서계에 서서 두 줄로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학에 밝은 이재의 제자들답게 철저하게 《주자가례》에 입각하여 장례절차를 진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시(申時)주 29)에 이르자 영구를 받들어 광상(壙上)의 가로대(撗杠)에 안치하고, 영구의 상하를 포로 둘러맸다. 또 녹로(轆轤)의 큰 밧줄을 영구를 둘러맨 포에 묶은 연후에 또 하관포를 영구의 아래에 가로로 둘러 좌우로 그 양 끝을 내니, 각각 1길 남짓 된 것이 모두 네 가닥이었다.
집사 8명이 모두 그 끝을 잡은 연후에 녹로(轆轤) 집사가 서서히 돌려 풀면, 좌우의 집사가 점점 내려서 안정적으로 영구를 내리고, 구의(柩衣)와 명정(銘旌)을 정리하였다. 명정은 곧 유 판부사(兪判府事)가 지은 것주 30)이었다. 현훈(玄纁)주 31)을 올리고 폐백을 바쳤다. 집사는 바로 이행상 공리(李行祥公履)주 32)이었다. 현훈으로 축원하고 영구의 동쪽 관곽(棺槨)의 사이에서 전을 올렸다.
하관할 때 주인이 곡을 멈추고 임하여 보았다. 여러 집사와 가마(加麻)한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 서서 엄숙하고 질서정연하게 우러러보았다. 이미 가개(加盖)를 내리고 나서는 거애(擧哀)주 33)하며 석회를 채우고 흙을 채워 점점 다져서 점차 높게 하였다. 이에 토지신에게 제사하고 또 지석(誌石)을 묻은 후에 신주를 썼다. 동춘(同春)주 34)의 증손 송문흠(宋文欽)주 35)이 썼다. 쓰기를 마친 후 제사를 거행하고, 곧바로 반혼(返魂)주 36)하였다.
〈한천분곡일기〉에는 유척기와 이공리, 송문흠 등의 이름이 보인다. 이재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대제학 남유용(南有容), 참판 박성원, 이조판서 윤급(尹汲, 1697~1770), 한성부윤 조중회(趙重晦, 1711~1782), 관찰사 이기경(李基敬), 판중추부사 홍계희(洪啟禧, 1703~1771), 김원행(金元行) 등이 참석하였다. 이재는 김창협의 문하에서 조광조(趙光祖)·이이(李珥)를 사숙한 노론의 대표적 인물이다. 심성론에 있어서 인물성동론을 주장했던 이간의 학설을 계승하여 한원진(韓元震) 등의 호론을 반박하면서 낙론의 대표적 학자로 활동했다. 1725년(영조1) 노론이 재집권하자 부제학에 복직하여 대제학·이조참판을 지냈다. 그러나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 중심의 정국이 성립되면서 다시 문외출송을 당했다. 이후 여러 번 영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군흉(群凶)을 몰아낼 것을 주청한 그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모두 사양하고 용인의 한천(寒泉)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길러내는 데 전념했다. 이날 장례식에 참석한 인물들은 모두 이재가 길러낸 진신 석학들로 노론에 속한 인물들임을 알 수 있다.
1749년 〈경행북정록(京行北程錄)〉은 승지공 송심의 항거지인 함경남도 안변(安邊)의 유적지를 탐방하고 관련 문헌들을 수집하며 제사를 지내고, 함경도 일대를 유람한 기록이다. 4월 10일에 함경도로 가는 북정을 시작한다. 14일 함경남도 고원에 이르렀는데 고원 수령의 홀대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또 영흥 주변 선원전을 방문하고 정평의 낙민루를 구경하였으며 함흥의 풍패관, 칠빈정, 지락정을 유람했고 격구정에 올라 주변 정경을 감상하였다.
격구정에서 문회서원을 방문하여 건물 내부의 건축양식과 공자의 화상, 주문공의 진상 등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고 시도 지어 감회를 표현하였다. 18일 홍원에 이르러 향소에서 묵으며 심철희를 만나 함경도 《선생안》을 구하여 보고 송심의 이름을 확인하고 내용을 베껴 왔다. 또 향교에 있는 《읍혈록》을 구해서 보았는데 바로 송정악의 집안에 소장하고 있는 송대립과 송심의 행장이었다. 애통함을 금치 못하였으니 북정의 목적도 선조의 행적을 찾기 위함이었음을 알 수 있다.
향교에 있는 《읍혈록(泣血錄)》을 가져와 살펴보니, 우리 집에 있는 고조부와 증조부 두 대의 행장(行狀)으로 그 필적은 곧 문서(文敍) 하씨가 베낀 것이었다. 인하여 옛날을 생각해보니, 죽은 사촌이 한양을 왕래할 때 마침 이 고을 사람을 만나 부쳐 보내 준 것이었다. 재차 펼쳐 열람하니 더욱 슬픈 마음이 들었다. 또 《여지승람(輿地勝覽)》이 있었는데 증조부 이름 아래에 외재상공(畏齋相公)이 지은 〈남관지〉가 있었고, 강충노(姜忠老)의 사적 몇 줄이 있어서 또 베꼈다. 《여지승람》에 옛 사람들이 읊은 시가 많이 실려 있는데, 펼쳐 열람한 뒤 몇 수를 차운하였다. 한 수는 〈함관령에 올라 느낌이 있어[登咸關嶺有懷]〉라는 제목의 시이다. 다음과 같다.
함관령 밖에 바람이 불어 말 멈추었는데 歇馬咸關嶺外風
동쪽 하늘 푸른 바다는 끝이 없구나 東天一碧海無窮
정축년 사이의 일을 회상하면서 追思丁丑年間事
만 리의 오랑캐 산을 흘겨보았네 萬里胡山睨視中주 37)
21일 함경남도 북청군 연무당(鍊武堂)에 가서 천총, 중군영 별장, 현별장(縣別將)과 여러 장교들을 만나고 북방의 풍토가 무인의 기상을 숭상하는 풍토임을 실감한다. 23일에는 병영(兵營)에 가서 병마절도사를 만나 증조부 송심의 행적을 찾으러 왔다며 오랜 시간 얘기를 나눈다. 또 병영의 남문인 세전루(洗箭樓)에 올라 남쪽 끝에 사는 사람이 북쪽 끝 높은 누각에 올라 있음을 참으로 기이하다고 느낀다. 병영의 동문과 객사, 병마절도사의 거처인 운주헌(運籌軒), 붉은색 능화지가 도배된 침과당, 쌍간정, 한수정, 장북루 등 병영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건축양식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23일에는 이항복을 주벽으로 제향하는 노덕서원(老德書院)을 참배하고 이항복이 실질적인 공부에 힘쓰고 큰 절의를 세웠음을 언급하고 감회를 기록하였다. 25일 병영 안 침과당에서 베풀어진 연회를 구경하였는데 북쪽에 와서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이라고 하였다. 26일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병마절도사가 만류하여 하루를 더 머물고 경비와 식량 등을 체급받아 홍원으로 돌아왔다. 5월 1일에는 홍원 수령을 만나 정무 보는 광경을 구경하고 일기에 자세히 기록하였다. 4일에는 영흥부 활을 쏘던 군자루(君子樓)에 올라 주변의 정경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5일에 고원에 이르러 고원 수령을 만났는데 소홀한 대접과 야박한 대우에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7일 안변에 이르렀고 8일 본 수령을 만나 경비와 음식 등 도움을 받고 오후에 송심이 싸우다 전사한 제단에 술을 올리고 제사를 지냈다. 제사에 올린 축문이 일기에 기로기되어 있는데 그 축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략)
더러는 남긴 자취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는데 或慮遺蹟之有在
자손 중에는 아직 듣고 아는 자가 없어 未及子孫之聞知
이에 5월에 길을 나서 肆乃五月登程
천 리의 길을 걸었네. 千里跋踄
행하다가 남산의 길을 지나면 行過南山之路
내 마음은 더욱 슬펐네. 一倍余心之悲
전쟁터를 찾아왔는데 來尋戰場
황량한 풀이 우거져 덮여 있으니 荒草蕪沒
흐르는 강물도 목이 메이고 江流含咽
물가의 새들도 슬피 하소연하네. 沙鳥訴哀
배회하며 둘러보니 徘徊觀瞻
푸른 산조차 말도 없네. 碧山無語
농부에게 어느 곳이냐 물으니 問田夫以奈所
강가의 작은 언덕을 가리키네. 指小阜於江濱
애오라지 향긋한 탁주 한 잔을 올리며 聊將一盃之香醪
감히 내 마음속 가득한 정회를 펴네. 敢暴滿腔之懷緖
(중략)
안변을 찾아오게 된 이유와 심정을 느낄 수 있다.
9일에는 안변에 있는 무학대사가 제위에 오르기 전 머물렀던 석왕사(釋王寺) 내 등안각, 불이문, 흥경루, 태조의 사적 등을 둘러보고 건축양식이나 주변 정경, 비문을 쓴 사람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10일 서울로 향하였고 15일에 양주에 도착하여 도봉서원을 참배하였다. 또 이재가 도봉서원 원장으로 있을 때 강론하였던 강규(講規)를 보고 선생을 회고하였고 도봉서원 안에 있는 건물들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일기는 7월 19일 고흥에 도착하면서 끝이 난다.
4) 노정의 어려움
이번에 번역되어 출간되는 《서행록》 1권은 1744년부터 1759년까지의 기록으로 총 13차례 서행을 하였다. 거의 묘문이나 시문을 청탁하러 갔지만 이재의 사망 이후로는 스승인 이재의 제사에 참석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13차례 서울을 오가면서 송정악은 홍수를 만나 떠내려가기도 하고 눈길을 걷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며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다. 또 여러 전염병의 위협에 시달렸으며 데리고 간 노비가 도망가거나 타고 간 말이 병들어 죽는 등 갖은 고생과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투숙할 곳이 없고 경비가 부족하여 느꼈던 고통이 컸다. 여러 사람에게 경비를 빌리러 다녔고 경비가 다 떨어져 가는 상황이 매우 힘들고 두렵다고 기록하고 있다.
1751년 11월 7일 조를 보면 미호로 향하는 길이 눈으로 가득했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는 공포를 묘사하고 있다.
노복에게 채찍을 잡고 따라가게 하고 나도 그 뒤를 따라갔다. 두어 걸음 못 가서 노복이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하고서 먼저 강 한가운데에 이르렀는데, 나도 넘어졌다. 일어나려 하니 발이 미끄럽고 다리가 후들거려 반쯤 일어났다가 다시 넘어졌다. 엎어져 누운 채 얼음판 밑에 콸콸대는 물소리를 들었는데, 혼이 몸에서 빠져나갈 지경이고 정신이 아찔했다. 조금 뒤에 다시 생각하기를, "이러한 지경에 이르면 달리 믿을 데도 없으니 혹 겁을 먹고 벌벌 떨다가 죽고 사는 것이 한순간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주 38)
1752년 6월 8일에는 송파나루에서 홍수를 만나 강물이 범람하고 집들이 물에 잠기는 등 위태로운 상황을 만나서 배를 타고 떠내려가는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다.
이날 밤 온 마을이 불을 밝히고 울부짖으며 하늘에 기원하는 소리가 밤새도록 그치지 않았다. 비로소 닭 울음소리가 들리자 마치 살길을 찾은 듯하였다. 하늘빛이 새벽이 되자 사람들이 모두 서로 축하하였다. 동이 튼 후에 살펴보니 마을 낮은 곳의 주택은 혹은 떠내려가거나 혹은 잠겼고, 이른바 조금 높은 곳은 혹 방이 잠기거나 혹 당벽(堂壁)이 무너졌다. 물에서 구제하는 장정 이외의 인물들은 모두 마을의 남쪽 밭두둑 가에 마치 벌집과 개미 떼 같은 형상으로 모여 있었다.주 39)
이외에도 배를 타고 떠내려가면서 불량배들을 접촉한 얘기, 한국창이란 양반을 만나 주고받은 얘기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비석을 세울 돌을 사는 과정, 뱃사공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 과정, 길을 잘못 들어 겨우 찾아가는 과정 등 수 많은 애환이 깃든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