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화콘텐츠
  • 특화콘텐츠
  • 일기
  • 서행록(西行錄)
  • 향산일기
  • 10월(十月)
  • 10월(十月)

서행록(西行錄) / 향산일기 / 10월(十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7.0001.TXT.0001
10월
장차 묘향산에 들어가려 하면서 절구 한 수를 지었다.

우리 동방 곳곳의 명승지 중에(東國名區某某處)
약산의 풍경이 서관의 으뜸이라(藥山風景最西關)
약산동대주 1)의 장관이야 따질 것 없어라(壯觀不足東臺與)
멀리 보이는 묘향산 백설로 단장하였네(望蜀香岑白雪間)

나는 어렸을 적에 풍악산(楓岳山, 금강산)을 유람하였고, 중년에는 두류산(頭流山, 지리산)을 구경하였다. 우리나라의 산 중에 다만 두 산수의 사이를 살펴보았다. 비록 통취(通趣)는 없으나 식견이 있는 자들이 말하기를, "금강산은 천하제일의 명산이요, 두류산은 그 다음인데 묘향산과는 어금지금하다."라고 하였으므로 매번 묘향산을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런데 남북은 아득히 떨어져 있고 길[道里]은 매우 멀어 거의 2천여 리에 가까우니, 이 산을 구경하는 남쪽 사람은 천백 중에 한둘도 안 될 것이다.
임자년 가을, 나는 선조(先祖)의 시호를 청하는 일로 경성(京城)에 와서 머물렀다. 그때 차동(車洞)의 민 영공(閔令公)이 영변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영변향산읍(香山邑)이다. 나에게 한번 구경 오라기에 마침내 10월의 날에 서쪽으로 길을 나섰다.
대개 우리나라 평안도의 승경은 묘향산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구경할 만한 곳이 많다. 송경(松京, 개성)은 옛 도읍으로 경물이 처량하고 평양은 웅부(雄府)로 풍경이 아름다운데, 만월대(滿月臺)주 2)와 취적교(吹笛橋)주 3)송경의 명승지이고, 연광정(練光亭)과 부벽루(浮碧樓)는 평양의 승경지이다. 그 나머지 황주(黃州)의 월파루(月波樓)와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도 경치가 빼어난 곳인데, 모두 묘향산 지나가는 길에 있으니 승경을 유람하는 일행들이 다 볼 수 있다. 약산의 동·서대나 철옹성 같은 곳도 모두 우리나라의 유명한 곳이다. 이 때문에 천 리 먼 길을 바람과 눈보라를 무릅쓰고 1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철옹성에 들어갔다. 곧바로 대아(大衙)로 갔더니 손님과 주인 간에 손을 맞잡고 매우 기뻐하였다. 다음날 운 좋게도 성안에서 군사훈련을 하였다.
밥을 먹은 뒤에 3천 병마를 거느리고 원수대(元帥臺)주 4)에서 조련하고, 이어서 약산 서장대(西將臺)에 오르더니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며 곧바로 약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로 올랐다. 장졸들이 모두 벼랑을 타고 나무를 휘어잡으며 어관진(魚貫陣)을 이루고 산성으로 들어가 호령하였다. 이날은 눈바람이 몰아쳐서 몹시 추웠다. 성 위에서 열을 지어 진세(陣勢)를 펼치고 비로소 군령을 내려 호궤(犒饋)주 5)한 뒤 이어 등(燈)을 달게 하였다. 10리의 성 위에 일시에 횃불이 올라 불빛이 환하게 비추었는데, 흰 눈으로 뒤덮인 산에 불빛이 일제히 길을 밝혀 참으로 장관이었다.
해가 저물어 파진하자 일제히 하산하였는데, 나는 술기운이 오른데다가 유람한 곳은 관서에서도 가장 칭송받는 곳임에랴! 청천(晴川)의 큰 강은 빙 둘러있어 성 오른쪽에서 내려다보면 한 줄기 얼음 가닥 같고, 묘향(妙香)의 높은 산은 구불구불 뻗어 있어 성 왼쪽에서 멀리 바라보면 일천 송이 부용(芙蓉)과 같으니, 참으로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요충지라 이를만 하였다. 마침내 두세 사람과 서운사(捿雲寺)로 가서 묵었다.
다음날 동대(東臺)로 올라가니 평안도의 40여 개 주(州)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 마치 태산(泰山)의 개밋둑과 같았다. 북쪽 땅 천만여 리가 하늘 끝에 아득하여 눈으로는 다 볼 수 없어서 비록 상세히 알 수는 없지만, 그 통쾌한 승경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그 뒤로도 여러 날을 묘향산에 갔다.
주석 1)동대
약산의 제일봉에 있는 큰 바위로, 구룡강과 대령강, 멀리 묘향산 등을 조망하는 풍광이 아름다워서 이유태, 김소월을 비롯한 많은 문인들이 시의 소재로 삼았다.
주석 2)만월대(滿月臺)
고려의 정궁으로, 919년 태조가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궐한 이래 1361년 소실될 때까지 고려왕의 주된 거처였다. 본래 특정한 명칭은 없었으나 고려 멸망 이후 조선시대부터 만월대라 불리기 시작했다. 2007년부터 2018년까지 남북 공동발굴 사업이 8차례 진행되었다.
주석 3)취적교(吹笛橋)
개성시 덕암리에 있었던 고려 시대의 돌다리이다. 천마산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곱돌천과 개성시 용흥동에서 흘러내리는 마미천이 합쳐져 사천강으로 흘러드는 합수목으로, 개경 이남 지역에서 개경으로 들어가는 간선도로에 세워져 있었다. 2007년 개성에서 주춧돌 및 지지돌 등이 발굴되었다.
주석 4)원수대(元帥臺)
함경북도(咸鏡北道) 경성군(鏡城郡)에 있있다.
주석 5)호궤(犒饋)
군사(軍士)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는 것을 말한다.
十月
將入香山一絶, "東國名區某某處, 藥山風景最西關。 壯觀不足東臺興, 望蜀香岑白雪間。" 余小也遊楓岳, 中歲看頭流。 吾東四山之中, 第觀其二山水之間。 雖無通趣, 而有識者稱, "金剛則天下第一, 頭流則次之, 香山則伯仲"云, 故每有一見香山之願, 而南北夐絶, 道里絶遠, 將近二千餘里, 則南人之看此山者, 則千百人無一二焉。 壬子秋, 余以先祖請諡事, 來留京城矣。 其時車洞 公宰寧邊, 寧邊香山邑也。 要余一觀, 故遂以十月之日, 登程西征。 盖我國西關之勝, 除非香岳外, 亦有可觀處多。 松京舊都, 景物悲凉, 平壤雄府, 風景佳麗, 滿月臺、吹笛橋, 松京之名區也, 練光亭、浮碧樓, 平壤之勝槩也。 其餘黃州之月波樓, 安州之百祥樓, 亦皆名勝之處, 而皆在於香山路次, 則其遊玩之勝, 一行可盡。 至若藥山之東、西臺及鉄瓮城, 俱是吾東之有名處也。 是故千里長程, 觸冒風雪, 首尾十日, 始入鉄瓮城。 直入大衙, 則賓主之歡欣可掬, 而翌日幸城操也。 食後率三千兵馬, 組練於元帥臺, 因上藥山 西將臺, 鳴囉擊鼓, 直上藥山之最上峯, 將士皆緣崖攀木, 便成魚貫陣, 入山城號令, 是日風雪極寒。 列成陣勢於城頭, 始以軍令犒饋, 因使懸燈。 十里城頭, 一時擧火, 火光照曜, 而白雪滿山之中, 火色齊明, 眞壯觀也。 日昏破陣, 一齊下山, 而余則爲酒力所困, 而且其遊玩之處, 爲關西最稱! 晴川大江周回, 於城右俯視, 若一帶氷條, 妙香高山逶迤, 於城左遠望, 如千朶芙蓉, 眞所謂金湯之地也。 遂與二三人, 向捿雲寺留宿。 翌日上東臺, 則西關四十餘州, 羅列於眼下, 若泰山之丘垤。 北地千萬餘里, 㟽杳於天外, 眼力所窮, 雖不得盡詳, 而其通爽之勝, 不可言矣。 其後數日入香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