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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792년(임자) / 9월(九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01.0001.TXT.0014
28일
아침 전에 천노(千奴)를 데리고 예조(禮曹)에 가서 안리(安吏, 성이 안씨인 아전)를 만났다. 대개 성상께서 시호를 내려 주도록 재촉하신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는데, 흥양 본관 정만시(鄭萬始)주 19)응교(應校)가 되어 15편의 시장(諡狀)주 20) 중 다섯 사람의 시호만을 행하고 우리 선조의 시호는 준비해 두지 않았으니 가탄스럽다. 그길로 주동으로 가서 종친들과 종일토록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예조 안리(安吏)와 약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 무렵에 다시 예조에 갔으나 이 좌상(李左相)·황 판서(黃判書)·판서 이익정(李益炡)주 21)·공서린(孔瑞麟)주 22)·제말(諸末)주 23) 등 다섯 사람의 시호와 시사(施舍) 낙점이 아직 내리지 않았기에 나와서 차동(車洞)주 24)에 머물렀다.
주석 19)정만시(鄭萬始)
1745~1800. 자는 일지(一之), 호는 정와(靜窩),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경기 출신으로 1782년 임인알성시에 과거에 급제를 하였으며, 주요 관직은 삼사 이랑( 三司 吏郞)을 지냈다.
주석 20)시장(諡狀)
죽은 뒤에 자손들이 시호(諡號)를 조정에 청할 때 죽은 사람의 일생 동안의 행적(行蹟)을 기록하여 적은 글이다.
주석 21)이익정(李益炡)
1699~1782.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숙(明叔)이다.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의 현손이며,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의 아들이고, 영조 때 공조 판서를 지낸 이성규(李聖圭)의 아버지이다. 《한국인물대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주석 22)공서린(孔瑞麟)
1483~1541.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희성(希聖), 호는 휴암(休巖),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기묘사화 때 투옥되었으며, 그 후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여러 번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대사헌, 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주석 23)제말(諸末)
고성(固城)의 천민(賤民)으로, 임진왜란 때에 웅천(熊川)·김해(金海)·정암(鼎巖) 등지에서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그 공이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조정에 알려져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었으므로 공적을 크게 나타내지 못하였다. 제말에 대한 내용은 성주(星州)의 《선생안(先生案)》에 실려 있다. 정조(正祖) 때에 병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주석 24)차동(車洞)
중구 의주로1가・순화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수렛골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二十八日
朝前率奴往禮曹吏。 盖自上催促賜諡之擧已多日, 而興陽本官鄭萬始應校, 十五諡狀中, 只行五人諡號, 而吾先祖不預, 可歎。 因往鑄洞, 終日談話, 盖其禮曹 吏有約故也。 日暮時, 更往禮曹, 則左相判書判書益炡孔瑞麟諸末五人諡號及施舍落點, 尙不下矣。 因爲出來, 留車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