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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821년(신사) / 3월(三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0.0003.TXT.0019
18일
가랑비가 내렸다. 아침 전에 이찬(而贊)과 비를 무릅쓰고 폐문동(閉門洞)오위장(五衛將)이 사는 곳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왔는데, 의복이 모두 젖어버렸으니 매우 속상했다. 아침을 먹은 뒤에 날씨가 개기를 기다렸다가 행장을 꾸려 동진(銅津) 어귀에 이르렀다. 광풍이 세차게 부는 바람에 모래가 날려 눈앞에 가득하였는데, 배를 타자 바람의 형세가 더욱 심하여 매우 위태로웠다. 간신히 강을 건너 승방(僧房) 주막주 45)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지지현(遲遲峴)주 46)을 넘어 화성(華城)에 이르러 묵었다. 70리를 갔다.
주석 45)승방(僧房) 주막
승방평(僧房坪)에 있었던 객점을 말한다. 승방평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동에 있던 마을로서, 마을 뒷산에 관음사라는 절이 있고, 그 절 앞들에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 승방뜰・심방뜰이라고도 불렀다.
주석 46)지지현(遲遲峴)
지지대(遲遲臺)고개로, 수원과 의왕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고개이다. 《화성지》에 따르면 원래는 사근현이었는데 정조가 '미륵현' 그 후에 다시 '지지현(遲遲峴)'으로 고쳤다고 한다. 사근현(沙近峴)이라고 한 것은 고개 아래에 사근참이 있었기 때문이며 '지지(遲遲)'라고 한 것은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고 돌아갈 때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이곳에서 한참 지체하였던 데서 비롯되었다. 정조는 이곳에 장승과 표석을 세웠고, 1807년(순조7)에 지지대 서쪽에 지지대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다
十八日
微雨。 朝前與而贊, 冒雨往居閉門洞五衛將所在處, 暫敍而來, 衣服盡濕, 可憤可憤。 食後待霽治發, 到銅津頭, 狂風大作, 飛沙滿目, 而爲乘船, 以風勢之極惡, 萬分危凜。 艱渡至僧房酒幕中火。 越遲遲峴, 抵華城留宿。 行七十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