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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792년(임자) / 10월(十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01.0002.TXT.0007
7일
새벽안개가 진시(辰時 오전 7~9시)까지도 짙게 깔려 있었다. 해가 뜰 무렵에 조겸(趙傔)·홍 첨지(洪僉知)와 서로(西路)주 31)로 길을 떠났다. 길을 나설 즈음에 죽을 먹고 술을 마시며 참봉백건(伯健) 형제와 작별하였다. 말에 올라 사현(沙峴) 전석치(磚石峙), 창릉(昌陵)주 32) 여현(礪峴),주 33) 신원(新院)주 34) 망실치(望賓峙)를 넘어 고양(高陽)까지 50리를 가서 아침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였다. 벽제(碧蹄)·헌음령(憲陰嶺)주 35)·세류점(細柳店)·신점(新店)을 거쳐 파주(波州) 읍내까지 가서 묵었다. 이날 100리를 갔다.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서관의 아름다운 풍광 들은 적 있어(西關佳麗飽曾聞)
안개 속 채찍을 울리며 백문주 36)을 나왔네(霧裡鳴鞭出白門)
지금 떠나는 향산 천 리 길(此去香山千里路)
풍광이 어찌 그리 듣던 대로인가(風光何似所云云)

해가 질 무렵에 일행이 상재(喪災)가 생겨 머물 객점에 들어갔는데, 고을 수령이 또한 나와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첨지가 하루 종일 크게 취하여 속된 말을 지껄이니 그 고민스럽고 위태로운 상황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간신히 주인집 안방을 얻어 피하여 잠을 잤다. 다행히 별 탈이 없었다.
주석 31)서로(西路)
평안도와 황해도, 즉 관서(關西)와 해서(海西)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주석 32)창릉(昌陵)
예종(睿宗)과 그의 계비 한씨의 능으로, 경기도 고양시 신도읍 용두리(龍頭里)에 있다.
주석 33)여현(礪峴)
홍은동네거리에서 은평구 녹번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서, 이 고개 석벽에 자연동(自然銅)인 속칭 산골이 산출되므로 산골고개라 하고, 여현이라고도 불렀다.
주석 34)신원(新院)
서울 서초구 원지동과 신원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조선시대에 새로 이곳에 원(院)을 설치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신원동의 서북쪽에 위치하였으며, 새원이라고도 하였다.
주석 35)헌음령(憲陰嶺)
1864년에 편찬된 《대동지지》에 따르면, 한양에서 의주까지 연결된 간선도로인 의주로(義州路)는 병전거리를 지나 유대소록반현(踰大小綠礬峴)-양철평(梁鐵坪)……벽제역(碧蹄驛)- 헌음령(憲陰嶺)-세류점(細柳店)……. 등으로 연결된다. 그러므로 저본의 '瑞'는 '憲'의 오기로 보고 고쳐서 번역하였다.
주석 36)백문(白門)
본래 서남방의 별칭으로, 도성의 서문이나 남문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이백(李白)의 시 〈양반아(楊叛兒)〉에 "어느 곳이 사람들 맘 가장 끄는가, 까마귀가 우는 백문 버들이라네.[何許最關人, 烏啼白門柳.]"라고 하였다.
初七日
曉霧至辰時量大塞矣。 平明與趙傔僉知, 作西路之行。 登程之際, 食粥飮酒, 遂別參奉伯健兄弟。 上馬踰沙峴 磚石峙昌陵 礪峴新院 望賓峙, 至高陽五十里, 朝飯秣馬。 自碧蹄憲陰嶺、細柳店、新店, 至波州邑內留宿。 是日行百里。 口吟一絶, "西關佳麗飽曾聞, 霧裡鳴鞭出白門。 此去香山千里路, 風光何似所云云。" 黃昏時分, 有一行喪災, 入所住之店, 而主官亦出來, 只隔一牕, 而也終日大醉, 肆發俚語, 其苦悶危凜之狀, 不可言。 艱得主者內房避宿, 幸得無事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