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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792년(임자) / 10월(十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01.0002.TXT.0013
13일
동틀 무렵 출발하여 노복과 말을 영변(寧邊)의 주인집으로 먼저 보내고는 시종 혼(混)과 대동루(大同樓)에 올라 두루 살펴본 뒤에 이어서 연광정(練光亭)주 54)에 올랐다. 사방 벽에 걸린 제영시(題咏詩)가 선배들의 저술(著述)이 아닌 것이 없었는데, 그 풍 중에 "긴 성벽 한 면주 55)에는 넘실넘실 흐르는 물이요, 큰 들판 동쪽 언저리에 점점이 솟아 있는 산이로세. [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주 56)라는 시구는 참으로 그림으로 그려낸 듯하였는데, 큰 글자로 새겨 두 기둥에 붙여 놓았다.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읊었다.

하루에 서쪽으로 백 리 길 달려왔건만(一日西驅百里餘)
단군 기자 묵은 자취 이미 페허가 되었네(檀箕陳跡已丘墟)
높다란 성은 천년을 흘렀고(高城閱劫千年後)
넓은 벌판엔 시월 초순의 서리가 내렸네(大野經霜十月初)
얼어붙은 먼 포구에 돛 그림자 차갑고(遠浦氷生帆影冷)
물에 비친 장림의 언덕 풍경 멀도다(長林水落岸容疏)
고요히 기댄 난간 옆으로 강물은 흘러가는데(欄頭靜倚江聲立)
빼어난 경치 졸필로 다 형용하기 어렵구나(勝槩遍難拙筆書)

다시 성 위의 영명사(永明寺) 부벽루(浮碧樓)에 올라가 모란봉(牧丹峯)을밀대(乙密臺)를 보고, 능라도(凌羅島)백운탄(白雲灘)이 보았다. 마침내 성 바깥쪽으로 강을 따라 내려오는데 석벽이 우뚝 솟아 있고, 가운데에 '청류벽(淸流壁)'이라 새겨져 있었다. 큰 강을 굽어보니 길이가 10리 남짓 되었다. 장도문(長渡門)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니 여염집이 즐비하여 송도보다 나았는데, 대개 그 내룡(來龍)주 57)이 매우 완만하여 한 곳도 높은 봉우리가 없고 모두 평지행룡(平地行龍)주 58)의 지세였다. 영주인 집에서 아침을 먹고 부벽루에서 〈삼연(三淵)〉주 59)의 시에 차운하였다.

평양이 좋다는 말 예전부터 들었노니(昔聞平壤好)
하루아침의 유람 하늘이 빌려준 것이라(天借一朝遊)
산세는 황량한 벌판을 담아내더니(山勢容荒野)
물빛은 높은 누각에게 양보하였네(水光讓高樓)
누대에 머물며 을밀을 불러보고(臺留招乙密)
우뚝한 벼랑에 서서 맑은 강물을 굽어보네(壁立俯淸流)
기이한 경치 따로 있노니(別有奇觀處)
텅 빈 강의 달빛 배를 가득 채우네(江空月滿舟)

칠성문(七星門)주 60)에서 나와 채 1리(里)를 못 가 송림 안 기자묘(箕子墓)주 61)로 들어갔다. 묘 앞에 작은 비각(碑刻)이 세워져 있고, 기자묘 좌우에는 각각 두 석인(石人)을 세웠다. 묘 뒤에는 작은 돌을 세워 두었으니, 이것이 바로 용미(龍尾)임을 알 수 있다. 마침내 뒤 기슭에서 큰길로 나와 순안(順安)까지 50리를 갔다. 말에게 꼴을 먹이고 길을 나서 청치천점(晴雉川店)에 이르러 묵었다. 이날 60리를 갔다.
주석 54)연광정(練光亭)
대동강변 덕바위(德巖)에 있는 정자로 고구려 때 세워진 이래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장방형 평면의 누정 두 채가 ㄱ자 모양으로 붙은 형태다. 관서8경의 하나로 꼽힐 만큼 풍치가 빼어나다.
주석 55)긴 성벽 한 면
저본의 '西'는 '一'의 오기로 보고 고쳐서 번역하였다. 이 글귀는 연광정의 서쪽 주련에 쓰인 고려 때 장원(壯元) 김황원(金黃元, 1045~1117)의 <부벽루시(浮碧樓詩)>이다. 김황원이 부벽루(浮碧樓)에 올랐다가 이전 사람들의 제영(題詠)들을 취하여 모두 불살라 버리고 이 한 연(聯)을 얻었는데, 날이 다하도록 잇지를 못하자 통곡하며 내려왔다고 한다.
주석 56)
김황원(金黃元, 1045~1117)이 부벽루에서 보는 황홀한 절경을 "긴 성벽 한쪽 면에는 늠실늠실 강물이요(長城一面溶溶水), 넓은 벌 동쪽 끝으로는 띄엄띄엄 산들일세(大野東頭點點山)"라고 시를 써내려 가다가 다음 시구가 떠오르지 않아 한심스러워서 통곡하며 붓대를 꺾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부벽루의 승경을 보고 지은 미완성의 시 두 연이 연광정 주련에 원문과 번역문으로 걸려 있다.
주석 57)내룡(來龍)
산맥이 시작되는 곳을 가리키는 풍수 용어이다.
주석 58)평지행룡(平地行龍)
행룡(行龍)은 풍수지리에서, 높고 낮은 산이 멀리 뻗어 나간 산맥을 이르는 말이다.
주석 59)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익(子益)이다. 김수항(金壽恒)의 셋째 아들로 김창집(金昌集)과 김창협(金昌協)의 동생이다. 형 창협과 함께 성리학과 문장으로 널리 이름을 떨쳤다. 1689년(숙종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아버지가 진도의 배소(配所)에서 사사되자 형들과 함께 경기도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문집에 《삼연집》, 저서에 《심양일기(瀋陽日記)》, 《문취(文趣)》 등이 있다.
주석 60)칠성문(七星門)
평양 모란봉(牧丹峯)에 있는 성문으로, 전형적인 고구려성이다. 현재의 문루는 조선 숙종대에 개수한 것이다. 을밀대(乙密臺) 쪽에서 등성이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성벽과 만수대에서 북쪽으로 뻗은 성벽을 어긋나게 쌓고, 그 두 성벽 사이에 가로세워 성문을 세웠다.
주석 61)기자묘(箕子墓)
고대 기자 조선의 시조인 기자(箕子)의 묘로, 평양시 기림리(箕林里)에 있다.
十三日
平明離發, 先送奴馬於寧邊主人家, 遂與傔, 上大同樓周觀後, 因上練光亭。 四壁題咏, 無非前輩著述, 而其風則所謂, "長城西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 一句眞畵出矣, 以大字刻之, 付兩柱之中矣。 遂吟一律, "一日西驅百里餘, 檀箕陳跡已丘墟。 高城閱劫千年後, 大野經霜十月初。 遠浦氷生帆影冷, 長林水落岸容疏。 欄頭靜倚江聲立, 勝槩遍難拙筆書。" 自城上又上永明寺、浮碧樓, 見牧丹峯乙密臺望, 見凌羅島白雲灘。 遂自城外沿江而下, 石碧斗起, 中刻淸流壁, 俯臨大江, 長可十里餘。 自長渡門, 入見城中, 閭閻櫛比, 優勝松都, 而盖其來龍甚婉嫩, 無一處高峯, 都是平地行龍矣。 朝飯於營主人家, 於浮碧樓, 次三淵韻, "昔聞平壤好, 天借一朝遊。 山勢容荒野, 水光讓高樓。 臺留招乙密, 壁立俯淸流。 別有奇觀處, 江空月滿舟。" 出自七星門, 未滿一里餘, 自松林中, 入箕子墓。 墓前立小碑刻, 箕子墓左右, 各立兩石人, 墓後立小石, 是知爲龍尾也。 遂自後麓出大路, 至順安五十里。 秣馬登程, 至晴雉川店留宿。 是日行六十五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