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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행록(西行錄)
- 1794년(갑인)
- 2월(二月)
- 4일(初四日)
서행록(西行錄) / 1794년(갑인) / 2월(二月)
4일
동틀 녘에 길을 떠나 오산(烏山)에 이르러 요기하였다. 옛 수원(水原)에 들어가 멀리 원소(園所)를 바라보고, 화산(花山) 용주사(龍珠寺)주 8)에 들어가서 절을 두루 살펴보니 매우 사치스럽고 아름다웠다. 잠시 말에게 꼴을 먹이고, 화옥(華玉)의 시에 차운하고 절구 한 수를 지어 베꼈다. 성진(性眞) - 1자 원문 결락 -주 9) 성진은 바로 흥양(興陽) 금탑사(金塔寺)주 10)의 승려인데, 이 절에 와서 머물면서 부처와 승려를 공양(供養)한다고 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먼 길을 돌아 천 리를 왔으니(迂路來千里)
화산에서 성진을 찾아가 보리라(花山欲訪眞)
진정한 도인 석장을 날리고 떠났기에주 11)(眞飛錫杖去)
마음속에 품은 사람 만날 수 없어라(不見意中人)
원운(元韻)은 다음과 같다.
영주주 12)에서 온 그대(爾自瀛州至)
화산에서 참된 본성을 길렀네(花山養性眞)
나 또한 영주의 선비요(我亦瀛州士)
- 1, 2자 원문 결락 - 주 13)(□□塔上人)
마침내 채찍을 재촉하여 신수원(新水原)에 이르니 촌락이 조밀하고 인물이 번화함이 작년 봄보다 갑절이나 더했다. 또 영성(營城)의 역사(役事)로 돌을 운반하여 길 좌우에 늘어놓은 것이 10여 리에 걸쳐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군포천(軍布川)에서 묵었다.
- 주석 8)용주사(龍珠寺)
- 조계종의 절로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화산에 위치해 있다. 이 절은 신라 말기인 854년에 염거화상(廉巨和尙)이 지었고, 원래 이름은 갈양사(葛陽寺)였다. 고려 때인 10세기에 확장되었다. 조선 정조 때에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서 정조의 명으로 18세기에 다시 지어졌다.
- 주석 9)1자 원문 결락
- 원문은 '性眞養□'인데, '養'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 주석 10)금탑사(金塔寺)
-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에 있는 절로, 신라 선덕 여왕 6년(637)에 원효가 창건하였다가 정유재란 때에 소실된 것을 왕순(王淳)·궁현(窮玄) 대사가 중건하였다.
- 주석 11)응진이……가버렸으니
- 원문의 '응진(應眞)'은 범어(梵語)인 나한(羅漢)을 의역(意譯)한 말로, 진도(眞道)를 터득한 사람을 뜻하며, '석장(錫杖)'은 스님의 지팡이를 말한다. 석장을 날린다는 것은 곧 옛날 고승 은봉(隱峰)이 오대산(五臺山)을 유람하고 회서(淮西)로 나가서는 석장을 던져 공중으로 날아서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전하여 승려들이 정처 없이 이리저리 행각(行脚)하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游天台山賦)'에 "진정한 도인은 석장을 날려 허공을 밟고 다닌다.[應眞飛錫以躡虛]"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 주석 12)영주
- 영주(瀛州)는 흥양(興陽)의 별칭으로, 고흥(高興)을 말한다. 그 외 고양(高陽)이라고도 한다.
- 주석 13)1, 2자 원문 결락
- 원문은 '□□塔上人'인데, '塔上人'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初四日
平明啓行, 至烏山療飢。 入舊水原, 望見園所, 入花山 龍珠寺, 周觀梵宇, 最極侈美矣。 暫爲秣馬, 次華玉韻, 咏一絶寫性眞養□。 盖眞也, 卽興陽 金塔僧也, 來住此寺, 爲供佛僧云, 詩曰, "迂路來千里, 花山欲訪眞。 眞飛錫杖去, 不見意中人。" 元韻, "爾自瀛州至, 花山養性眞。 我亦瀛州士, □□塔上人。" 遂促鞭至新水原, 村落之稠密, 人物之繁華, 有倍於昨春。 又營城役運石, 列置於路之左右者, 彌亘於十餘里矣。 中火後, 宿軍布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