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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794년(갑인) / 2월(二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03.0002.TXT.0004
4일
동틀 녘에 길을 떠나 오산(烏山)에 이르러 요기하였다. 옛 수원(水原)에 들어가 멀리 원소(園所)를 바라보고, 화산(花山) 용주사(龍珠寺)주 8)에 들어가서 절을 두루 살펴보니 매우 사치스럽고 아름다웠다. 잠시 말에게 꼴을 먹이고, 화옥(華玉)의 시에 차운하고 절구 한 수를 지어 베꼈다. 성진(性眞) - 1자 원문 결락 -주 9) 성진은 바로 흥양(興陽) 금탑사(金塔寺)주 10)의 승려인데, 이 절에 와서 머물면서 부처와 승려를 공양(供養)한다고 하였다. 시는 다음과 같다.

먼 길을 돌아 천 리를 왔으니(迂路來千里)
화산에서 성진을 찾아가 보리라(花山欲訪)
진정한 도인 석장을 날리고 떠났기에주 11)(眞飛錫杖去)
마음속에 품은 사람 만날 수 없어라(不見意中人)

원운(元韻)은 다음과 같다.

영주주 12)에서 온 그대(爾自瀛州至)
화산에서 참된 본성을 길렀네(花山養性眞)
나 또한 영주의 선비요(我亦瀛州士)
- 1, 2자 원문 결락 - 주 13)(□□塔上人)

마침내 채찍을 재촉하여 신수원(新水原)에 이르니 촌락이 조밀하고 인물이 번화함이 작년 봄보다 갑절이나 더했다. 또 영성(營城)의 역사(役事)로 돌을 운반하여 길 좌우에 늘어놓은 것이 10여 리에 걸쳐 있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 군포천(軍布川)에서 묵었다.
주석 8)용주사(龍珠寺)
조계종의 절로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화산에 위치해 있다. 이 절은 신라 말기인 854년에 염거화상(廉巨和尙)이 지었고, 원래 이름은 갈양사(葛陽寺)였다. 고려 때인 10세기에 확장되었다. 조선 정조 때에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서 정조의 명으로 18세기에 다시 지어졌다.
주석 9)1자 원문 결락
원문은 '性眞養□'인데, '養'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주석 10)금탑사(金塔寺)
전라남도 고흥군 포두면에 있는 절로, 신라 선덕 여왕 6년(637)에 원효가 창건하였다가 정유재란 때에 소실된 것을 왕순(王淳)·궁현(窮玄) 대사가 중건하였다.
주석 11)응진이……가버렸으니
원문의 '응진(應眞)'은 범어(梵語)인 나한(羅漢)을 의역(意譯)한 말로, 진도(眞道)를 터득한 사람을 뜻하며, '석장(錫杖)'은 스님의 지팡이를 말한다. 석장을 날린다는 것은 곧 옛날 고승 은봉(隱峰)이 오대산(五臺山)을 유람하고 회서(淮西)로 나가서는 석장을 던져 공중으로 날아서 갔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전하여 승려들이 정처 없이 이리저리 행각(行脚)하는 것을 말한다. 진(晉) 나라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游天台山賦)'에 "진정한 도인은 석장을 날려 허공을 밟고 다닌다.[應眞飛錫以躡虛]"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주석 12)영주
영주(瀛州)는 흥양(興陽)의 별칭으로, 고흥(高興)을 말한다. 그 외 고양(高陽)이라고도 한다.
주석 13)1, 2자 원문 결락
원문은 '□□塔上人'인데, '塔上人'도 결자와의 관계를 알 수 없어 번역하지 않았다.
初四日
平明啓行, 至烏山療飢。 入舊水原, 望見園所, 入花山 龍珠寺, 周觀梵宇, 最極侈美矣。 暫爲秣馬, 次華玉韻, 咏一絶寫性眞養□。 盖也, 卽興陽 金塔僧也, 來住此寺, 爲供佛僧云, 詩曰, "迂路來千里, 花山欲訪。 眞飛錫杖去, 不見意中人。" 元韻, "爾自瀛州至, 花山性眞。 我亦瀛州士, □□塔上人。" 遂促鞭至新水原, 村落之稠密, 人物之繁華, 有倍於昨春。 又營城役運石, 列置於路之左右者, 彌亘於十餘里矣。 中火後, 宿軍布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