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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792년(임자) / 10월(十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01.0002.TXT.0001
1일
일찍 예조로 갔더니 다시 논의한 일이 있어 정동관(鄭東觀)주 25)응교(應校)로 삼고 한광식(韓光植)주 26)사인(舍人)으로 삼았다고 했다. 그러므로 급히 주동(鑄洞)으로 가서 응교에게 청탁하는 서간을 써서 전송하게 하였다. 돌아와 이르기를, "이미 조영국(趙榮國)주 27)김준용(金俊龍)주 28) 두 사람의 시호는 의논하였으나 나머지 사람은 하지 않았다."라고 하니 가탄스럽다.
주석 25)정동관(鄭東觀)
1762~1809. 1783년(정조7) 21세에 친시(親試)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일성록》의 기록을 보면, 1792년(정조16) 9월 29일에 응교에 임명되었다 하였고, 12월과 이듬해 3~4월의 기록에도 응교로 삼는다는 기록이 보인다.
주석 26)한광식(韓光植)
1729∼1800. 본관은 청주, 자는 일지(一之), 호는 일재(一齋)이다. 1762년(영조3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1777년(정조1) 증광문과별시에서 급제하였다. 부수찬·수찬·의정부 검상·승지 역임하였으며, 경종대왕수정실록(景宗大王修正實錄)의 오류를 바로잡고 수정·편찬하는 데 참여하였다.
주석 27)조영국(趙榮國)
1698~1760.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군경(君慶). 호는 월호(月湖), 시호(諡號)는 정헌(靖憲)이다. 영조(英祖) 경술(庚戌)년에 문과(文科)에 오르고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주석 28)김준용(金俊龍)
1586~1642.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수부(秀夫)이다. 광해군 원년(1609) 무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 병마절도사에 재임하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병사를 이끌고 광교산에 이르러 격전을 벌인 끝에 청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세상을 떠난 후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충숙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初一日
早往禮曹, 則有更議之擧, 以鄭東觀應校, 韓光植舍人云, 故急往鑄洞, 得請簡於應校, 送傳於闕內, 則回云, "已以趙榮國金俊龍二人議諡, 餘人不爲。" 可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