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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821년(신사) / 3월(三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0.0003.TXT.0016
15일
차동(車洞)에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주인집 겸동(傔童, 어린 하인)을 거느리고 근동(芹洞)주 40)의 이 참봉(李參奉) 집에 갔으나 주인이 부재중이라서 얼굴을 보지 못하고 서소문(西小門)으로 왔다. 동행과 태평동(太平洞)주 41)의 진사 송영재(宋永載) 집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주인이 정성껏 대접해 주어 기쁘고 다행스러운 중에도 서글픈 심정을 금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회포를 푼 뒤에 창동(倉洞)에 가서 승지 이광헌(李光憲)의 집을 찾아갔더니 낙동(絡洞)으로 이주하였다고 하기에 찾아갔으나 승지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고 하므로 만나지 못했다.
이광문(李光文)의 집에 찾아 갔더니, 주인은 지난해에 부친 상(喪)을 당하여 현재 상중(喪中)이었는데, 광문(光文)은 출타하여 얼굴을 보지 못하고, 다만 그 아우에게 조문하였다. 잠시 이야기를 나눈 뒤에 회동(晦洞)의 송 장성(宋長城) 집에 찾아가 장성(長城)의 부친 익형(翼亨)씨 형제를 만났다. 두 노인이 정성스레 대접해 주었으나 서글픈 감회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한참 동안 회포를 풀고 돌아오는 길에 필동(筆洞)의 본관(本官) 집에 들어가 본관(本官)의 대인부친을 만나고 곧바로 나왔다.
주석 40)근동(芹洞)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5가에 있던 마을로서, 미나리를 재배하는 논이 넓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지역을 미나릿골로 불렀으며, 이를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주석 41)태평동(太平洞)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4가・북창동・서소문동・태평로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서소문동에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을 머물게 하고 접대하던 태평관이 있던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하였다. 태평관골이라고도 하였다.
十五日
車洞暫話後, 率主家傔童, 往芹洞 參奉家, 以主人之不在, 不得相面, 來西小門。 與同行往太平洞 進士 永載家敍話, 主人款接喜幸中, 悲懷不可禁。 移時祗敍後, 往倉洞承旨 光憲家, 則移居于絡洞云, 故尋往則承旨慶州 府尹出去云, 故不得相面。 尋往李光文家, 則主人年前, 遭其大人喪, 方在喪中, 而光文則出他不得相面, 只與其弟吊慰。 暫話後, 尋往晦洞 長城家, 見長城大人翼亨氏兄弟, 則兩老人款接, 不勝悲感之心矣。 移時秪敍, 來路入筆洞本官家, 見本官之大人, 卽爲出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