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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821년(신사) / 12월(十二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0.0007.TXT.0015
15일
밤에 눈이 내렸다. 새벽에 출발하여 임실(任實) 읍내에 이르러 아침을 먹었다. 고개를 넘어 간신히 현동(玄洞) 송기렴(宋基濂)의 집을 찾아갔으나 기렴은 출타하여 만나지 못하고, 그 아들 전(椣)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돈학문적(遯壑文蹟)》을 보고자 하였다. 그 문적이 모두 신안서원(新安書院)주 61)에 있다고 하므로 신안서원(新安書院)에 이르렀다.
신실(神室)은 동서로 나누어 만들었는데, 서실(西室)은 주부자(朱夫子)의 영정(影幀)을 걸어 쌍창(雙窓)으로 여닫게 되어 있고, 동실은 돈학(遯壑) 송경원(宋慶元, 1419~1510)·신재(新齋) 한호겸(韓好謙, 1535~1579)·만회당(晩晦堂) 한필성(韓必聖, 1625~1691)·홍운정(鴻雲亭) 한명유(韓鳴愈)·거묵당(巨墨堂) 송시태(宋時態) 등 6현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신실(神室)은 새로 만들어 깨끗하였지만 서원의 사당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으니, 어진 이를 사모하는 도리가 매우 개탄스럽고 애석하였다. 참배하고 봉심(奉審)한 뒤에, 송연영(宋延英)한원택(韓元宅)에게 요구하여 문적(文蹟)을 보여 달라고 하였더니, 전주의 이 생원(李生員)이 지난번에 가지고 갔다고 하였다. 문적을 볼 수 없으니, 한탄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대로 길을 나서 대곡(大谷)송낙철(宋洛哲) 집에 이르러 묵었다. 20리를 갔다.
주석 61)신안서원(新安書院)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신안리에 있는 서원으로, 1588년(선조21)에 신재(新齋) 한호겸(韓好謙)의 문하들이 스승을 위해 세웠으며, 정유재란으로 불탄 것을 1669년(현종10)에 다시 복립하였다. 처음에는 이서(李舒, 1332~1410)와 한호겸만을 봉안하였으나, 1788년(정조12)에 사림들의 결의에 따라 돈학(遯壑) 송경원(宋慶元), 만회당(晩晦堂) 한필성(韓必聖), 홍운정(鴻雲亭) 한명유(韓鳴愈), 거묵당(距墨堂) 송시태(宋時態)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훗날 김수(金洙)·강백진(康伯珍)을 추가하여 모두 8현을 배향하였다.
十五日
夜雪。 曉發抵任實邑內朝飯, 越嶺艱尋玄洞 宋基濂家, 則基濂出他, 不得相面, 只與其子暫敍, 欲見《遯壑文蹟》矣。 其文蹟盡在新安書院云, 故抵新安書院, 則神室分作東西, 而西室則掛朱夫子影幀, 以雙窓開閉, 東室則遯壑、新齋、晩晦堂、鴻雲亭、巨墨堂六賢妥靈之所也。 神室則新創鮮明, 而院貌尙未成樣, 其於慕賢之道, 甚爲慨惜。 參謁奉審後, 要宋延英韓元宅, 欲見文蹟, 則全州 生員, 頃來持去云, 故不得尋見, 可歎耳。 仍爲發程, 抵大谷 宋洛哲家留宿。 行二十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