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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794년(갑인) / 2월(二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03.0002.TXT.0021
21일
꼭두새벽에 밥을 먹고 궐문 밖에 갔다. 박씨 척족(戚族)도 모두 와서 모였는데 오늘은 바로 삼일제(三日製)주 17)가 있는 날이다. 동이 틀 무렵 돈화문(敦化門, 창덕궁 정문)으로 들어가 진선문(進善門)주 18)에서 숙장문(肅章門)주 19) 앞까지 장막을 설치하고 좌정(坐定)하였다. 잠시 뒤에 인정전(仁政殿)주 20)으로 들어오라는 명이 있었기에 인정문(仁政門)주 21)으로 들어갔다. 동편의 인정전 월랑(仁政殿月廊)주 22)에 앉아 '근원이 있는 물이 끊임없이 솟아나 밤낮으로 흘러서 구덩이를 채우고 난 뒤에 나아가 사해에 이른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주 23)라는 부제(賦題)주 24)로 부(賦)를 지어 올렸다. 대개 경과(慶科)주 25)를 치르는 날이라서, 팔도의 과유(科儒)들이 모두 전정(殿庭)에 모였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주석 17)삼일제(三日製)
유생의 학문을 장려하기 위하여 성균관에서 실시하는 제술 시험으로, 절일제(節日製)의 하나이다. 의정부(議政府)와 육조(六曹), 관각(館閣)의 여러 당상관이 성균관에 모여 거재생(居齋生)과 지방 유생에게 제술(製述)만으로 시험을 보인다.
주석 18)진선문(進善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을 지나 금천교(錦川橋)를 건너면 나오는 중문(中門)이고 창덕궁 창건 무렵에 세워졌으며 1908년 인정전 개수공사 때 헐렸다가 1999년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
주석 19)숙장문(肅章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을 통과하여 금천교(錦川橋)와 진선문(進善門)을 지나면 진선문 맞은편에 나오는 중문(中門)이다. 숙장문은 성종 6년(1475) 좌찬성 서거정이 지어 올린 이름을 성종이 낙점하여 사용된 이름으로, 일제에 의해 헐렸다가 1996년 시작된 복원공사를 통해 재건되었다.
주석 20)인정전(仁政殿)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 조정의 각종 의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을 하던 곳이다.
주석 21)인정문(仁政門)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에 이르는 정문으로, 국왕 즉위식이 거행된다. 인정문은 태종 5년 창덕궁의 창건 때 다른 전각들과 함께 지어졌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 조선왕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주석 22)인정전 월랑(仁政殿月廊)
월랑(月廊)은 궁궐이나 사찰과 같이 규모 있는 건물에서 앞이나 좌우에 줄지어 만든 건물을 지칭한다. 비슷한 의미의 말로는 행랑, 행각, 상방이 있다. 기둥과 지붕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도 모양의 형식을 갖춘 것도 있고, 건물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종묘의 월랑은 익실의 끝에서 직각 방향으로 연접한 건물을 말한다.
주석 23)근원이……이른다
《맹자》 〈이루 하(離婁下)〉에 나오는 구절로, "근원 있는 물이 끊임없이 솟아나 밤낮으로 흘러서 구덩이를 채우고 난 뒤에 나아가 사해에 이른다. 학문에 근본이 있는 자가 이와 같은지라 이 때문에 취한 것이다.[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後進, 放乎四海. 有本者如是, 是之取爾.]" 하였다. 이는 사람이 실제 행실이 있으면 그만두지 않고 점차 진보하여 지극한 경지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일성록》 정조 18년 갑인(1794) 2월 21일(기묘)에 "인정전에 나아가 삼일제를 행하였다."라는 기사가 보인다.
주석 24)부제(賦題)
과거를 보일 때 과문(科文)의 부(賦)를 지으라고 내는 글제목이다.
주석 25)경과(慶科)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임시로 보이는 과거이다. 이는 특별히 대궐 뜰에서 보이므로 정시(庭試)라 하며 문무과(文武科)에 한하였다.
二十一日
曉頭食飯, 往闕門外。 戚亦皆來會, 而是日乃三日製也。 平明入敦化門, 自進善門, 至肅章前, 設幕坐定。 有頃有入仁政殿之命, 故入仁政門。 坐東邊月廊製進, '原泉混混, 不舍晝夜, 盈科而進, 放乎四海'賦, 而盖當慶科之日, 八道科儒, 咸集殿庭, 其數夥多, 不可言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