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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행록(西行錄)
- 1797년(정사)
- 1월(正月)
- 28일(二十八日)
서행록(西行錄) / 1797년(정사) / 1월(正月)
28일
간촌의 박생(朴生) 두 사람이 돌아갈 것을 고하였기 때문에 구전으로 병이 차도가 있다는 기별을 가지고 갔다. 이 흥양(李興陽)은 연일 노복에게 서신을 보내 안부를 물었다. 관교지(官敎紙)주 3)를 창동(倉洞)의 박 승지(朴承旨) 집에 보냈는데, 나는 병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들것에 실려 가려고 했다. 박 영(朴令)이 두세 번 전갈(傳喝)하여 "병이 이미 이와 같으니 비록 오지 않더라도 어찌 일의 체모에 손상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으므로 고지(誥紙)만 보냈다. 저녁 무렵에 써서 보냈으니 기쁘고 다행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조 낭관은 전적으로 원 좌랑(元佐郞)을 의지하였는데, 원 좌랑이 공적인 일 때문에 사직원을 내어주 4) 반드시 체차되었을 것이라 하니, 이를 장차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조 낭관 4인 중에 한 사람은 이미 회헌(晦軒) 조 상서(趙尙書)가 선시(宣諡)하는 행렬에 갔으며, 한 사람은 사직서를 냈고, 한 사람은 들어오지 않았으며, 그 나머지 한 사람은 윤기(尹愭)주 5)라고 하였는데 소식을 서로 물어볼 곳도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이날은 세수하고 머리도 빗었지만 종일토록 정신이 매우 편치 않아 답답하였다.
- 주석 3)관교지(官敎紙)
- 임금의 교지나 중앙 관서의 공문서용 한지인데, 주로 관아에서 사령(辭令)이 사용한 종이이다.
- 주석 4)사직원을 내어
- 원문의 '정순(呈旬)'은 낭관(郞官)이 사임하려 할 때 10일에 한 번씩 세 번을 계속하여 소속 상관(上官)에게 사직서(辭職書)를 올리는 것을 이른다.
- 주석 5)윤기(尹愭)
- 1741~1826.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경부(敬夫), 호는 무명자(無名子)이다. 1773년(영조49)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20여 년 간 학문을 연구하였다. 1792년(정조16)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초사(初仕)로 종부시주부, 예조·병조·이조의 낭관으로 있다가 남포현감·황산찰방을 역임하였다. 이후 중앙에 와서 《정조실록》의 편찬관을 역임하였다. 벼슬이 호조참의에까지 이르렀다. 저서로 《무명자집(無名子集)》 20권 20책이 있다.
二十八日
看 朴兩人告歸, 故口傳病差之奇而去。 李興陽連日送奴書問。 送官敎紙於倉洞 朴承旨家, 而以余病之莫可運動, 故初欲擔去矣。 朴令再三傳喝, "病旣如此, 則雖不來, 豈有損於事體乎?"云, 故只送誥紙矣, 夕間書送, 喜幸不可言。 吏郞則專恃元佐郞矣, 元也以公故呈旬, 必遞爲意云, 此將奈何? 吏郞四人中, 其一已去於晦軒 趙尙書宣諡之行, 一則呈旬, 一則未入, 其餘一人, 卽尹愭云, 而無聲息相問處, 奈何? 是日洗手梳髮矣, 終日神氣甚不安, 悶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