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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828년(무자) / 5월(五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13.0002.TXT.0012
13일
○아침 먹기 전에 자윤(子允)과 계성사(啓聖祠)주 35)로 가서 김팔주(金八柱)를 만나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별하고, 경모궁(景慕宮)주 36)으로 내려와 수문장(守門將) 장인원(張仁源)이 출번(出番, 당직 근무를 마치고 나옴)했는지를 물으니 아침 일찍 출번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곧바로 파천동(波川洞) 그의 집으로 갔는데, 밥을 먹고 출타한 터라 만나지 못해 몹시 아쉬웠다. 이 사람은 홍원(洪原)주 37) 사람이다. 무침교(無沈橋)주 38)의 진사 송현재(宋顯載) 집에 찾아갔는데, 마침 출타하여 만나지 못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회동 장성을 만나 전주 북문의 송민수 서간에 답장을 받고자 한다고 말하니, 공교롭게 몸이 아파서 답장을 쓰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대로 작별하였다. 송지순의 집으로 내려와 작별한 뒤에 낙동(洛洞)의 구백(舊伯) 이광문 집으로 와, 잠시 만나고 나서 작별하였다. 용동으로 오니 자윤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개간소(開刊所)의 여러 사람과 작별하고 주인집으로 돌아왔다.
아침을 먹은 뒤에 정동으로 가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는 길에 확교(確橋)주 39) 판서 집에 들렀으나, 판서가 출타하여 작별할 수 없었다. 다만 그 아들 송지학(宋持學)과 작별하고 나와 주인집으로 왔다. 차동(車洞)주 40)으로 가서 석사와 작별하고 오니 공서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에 정동의 석사 이혜길이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날이 저무는 바람에 출발하지 못하고 그대로 머물렀다. 그러므로 저녁을 먹고 난 뒤 정동에 와서 묵으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갔다. 저녁을 먹은 후 정동으로 갔다. 밤에 비가 내렸다.
주석 35)계성사(啓聖祠)
서울시 문묘(文廟) 안에 공자(孔子) 등 다섯 성현의 아버지를 모신 사당이다.
주석 36)경모궁(景慕宮)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에 있는 사도세자(思悼世子)와 그의 비(妃) 헌경왕후(獻敬王后)의 사당이다. '경모전(景慕殿)'이라고도 했다
주석 37)홍원(洪原)
함경남도(咸鏡南道)의 남부해안 중앙에 위치하는 군이다.
주석 38)무침교(無沈橋)
서울시 중구 예관동과 충무로5가 부근에 있던 다리이다. 청계천의 지류인 묵사동천(墨寺洞川)에 있던 다리로 '물에 잠기지 않는 다리'라는 의미이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와 <수선총도> 및 <슈션전도>에는 이 다리 이름이 '상무침교'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무침교와 상무침교를 혼용해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명 '무침다리' 혹은 무침교를 줄여서 '침교'라고도 불렀다.
주석 39)확교(確橋)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과 신창동(새창골) 북쪽에 있던 다리이다. 1966년 발간된 ≪한국지명총람≫에 의하면 이 고을에 학다리가 있어 마을 이름이 학교동(鶴橋洞)이 되었다고 하며, 일명 확교(確橋)라고도 불렀다.
주석 40)차동(車洞)
중구 의주로1가ㆍ순화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수렛골을 한자명으로 표기한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추모동'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가 태어난 터에 비석을 세우고 그를 추모했던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十三日
○朝前, 與子允往啓聖祠, 見金八柱, 移時談話。 仍爲作別, 下來景慕宮, 問守門將仁源出番與否, 則早朝出番云。 故直向波川洞其家, 則食後出他, 故仍爲不見, 悵悵。 此人卽洪原人也。 尋往無沈橋進士顯載家, 則適出他不見, 來路入晦洞長城, 以宋民洙書簡受答爲言, 則適以身病不爲修答云。 仍爲作別。 下來宋持淳家, 作別後, 來洛洞舊伯李光文家, 暫見後, 仍爲作別。 而來龍洞, 則子允來待矣。 與開刊所諸人作別, 來主人家。 朝飯後, 往貞洞暫話。 來入確橋判書家, 判書適出他, 不得作別。 只與其子持學作別, 出來主人家。 往車洞碩士, 作別而來, 則公瑞來待矣。 午後貞洞碩士惠吉來訪談話, 以日暮之致, 不得發程, 仍留。 故夕飯後, 來留貞洞之意, 懇托而去。 夕食後, 往貞洞。 夜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