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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월(十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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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행록(西行錄) / 1792년(임자) / 10월(十月)

자료ID HIKS_OB_F9008-01-202010.0001.0002.TXT.0008
8일
이른 새벽에 말에게 꼴을 먹이고 길을 나서 10리 임진강에 이르니 날이 비로소 밝았다. 말 위에서 시 한 절구를 읊었다.

파평관 밖 새벽 닭 우는 소리에(坡平館外聽晨鷄)
첫 새벽 찬 서리 밟고 십리 길 갔네(冥踏寒霜十里蹊)
채찍질하며 곧장 임진강을 건너는데(鳴鞭直渡臨津水)
고개 돌려 고향 바라보니 시야가 아득하네(回首鄕關望眼迷)

또 한 수를 읊었다.

왕성을 보장주 37)하는 백 리 고을(保障王城百里州)
서쪽 경기에 진을 쳐 거대한 요새로세주 38)(西畿鎭作大咽喉)
하늘은 뜻이 있어 기이한 형세 늘어놓았는데(天應有意排奇勢)
땅은 어찌 무심히 명승지를 묻는가(地豈無心問勝區)
어지러운 세상엔 산하가 나라의 보배요(世亂山河爲國寶)
화평한 시절엔 풍물이 사람을 노닐게 하네(時和風物供人遊)
긴 강은 참호요 바위는 성가퀴가 되니(長江爲塹巖爲堞)
북쪽 오랑캐 황금 채찍 던지지 못하노라(北虜金鞭不敢投)

동파(東坡)를 지나 장단(長端)에 이르렀다. 대개 그 산천의 기세가 매우 밝고 고와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경치가 뛰어난 고장이니 정승 집안의 분묘가 곳곳에 있었다. 덕수(德水)주 39)도라(道羅),주 40) 진봉(進鳳)주 41)의 산을 바라보니, 여러 백악이 모두 완만하고 부드러워 사랑스러웠다. 멀리 송악산(松嶽山)을 바라보니 웅려하고 삼엄하여 하늘을 찌를 기세가 삼각산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장대하고 원대한 기운은 나은 듯하였다. 오산(烏山)에 이르니 안개가 주막에서 50리까지 짙게 깔려 있었다.
아침을 먹고 말에게 꼴을 먹인 다음 판문(板門) 취적교(吹笛橋)와 탁타교(橐駞橋)를 건너 남대문으로 들어갔다. 인가가 즐비하였으나 집들이 매우 좁았다. 주막집에 들어가 탁주 한 사발을 마시고 바로 만월대(滿月臺)주 42)에 올랐는데, 그 무너진 담과 부서진 주춧돌 등 보이는 것마다 온통 황량하였다.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오백년 전 고려의 궁궐 만월대에(五百前朝滿月臺)
풀 시든 저물녘 멀리서 지팡이 짚고 왔네(夕陽衰草遠笻來)
백마 타고 주나라로 조회 가는 길 아니지만(雖非白馬朝周路)
가던 길 멈추고 옛 슬픔에 젖어보네(留作行人感古哀)

채찍을 재촉하여 청석동(靑石洞)주 43)에 이르러 묵었다. 이날 100리를 갔다.
주석 37)보장
'보장(保障)'은 국가를 보위(保衛)하는 성벽이나 기반이 되는 지역이란 뜻으로, 위정자가 백성을 잘 보호함으로써 백성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쳐 든든한 울타리로 삼을 수 있게 하는 공적을 가리킨다.
주석 38)거대한 요새로세
원문의 '인후(咽喉)'는 목구멍과 같은 곳으로, 매우 중요한 요새(要塞)의 땅인 요충지를 말한다.
주석 39)덕수(德水)
강원도 평창군 방림면과 대화면에 걸쳐 있는 덕수산을 말한다.
주석 40)도라(道羅)
옛 장단군 중서면(中西面), 진남면(津南面)에 있는 도라산을 말한다. 임진강을 경계로 북한지역이며 고려 왕조의 수도 개경(開京)과 이웃하는 곳에 위치해 고려문화권에 속한 지역이다. 도라산에 대한 명칭은 《신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동국여지리(東國輿地志)》등의 문헌상에는 '都羅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道羅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도라산과 관련된 구전 기록에, 고려 충렬왕이 때때로 이 산에 올라가 놀이를 즐겼는데 그 때마다 꼭 궁인(宮人) 무비(無比)를 데리고 갔으므로 사람들은 무비를 가리켜 '도라산(都羅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주석 41)진봉(進鳳)
개성의 동남쪽에 있는 진봉산을 말한다. 저본의 '封'은 '鳳'의 오기로 보고 고쳐서 번역하였다.
주석 42)만월대(滿月臺)
경기도 개성시 송악산(松嶽山)에 있는 고려 시대의 궁궐터이다. 919년(태조2) 정월에 태조가 송악산 남쪽 기슭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건한 이래 1361년(공민왕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고려 왕들의 주된 거처였다.
주석 43)청석동(靑石洞)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고동면(古東面)에 있는 청석골[靑石峴]을 말한다
初八日
凌晨秣馬登程, 至十里臨津江, 日始開東矣。 馬上口占一絶, "坡平館外聽晨鷄, 冥踏寒霜十里蹊。 鳴鞭直渡臨津水, 回首鄕關望眼迷。" 又吟一律, "保障王城百里州, 西畿鎭作大咽喉。 天應有意排奇勢, 地豈無心問勝區。 世亂山河爲國寶, 時和風物供人遊。 長江爲塹巖爲堞, 北虜金鞭不敢投。" 過東坡, 至長端。 盖其山川氣勢, 極甚明麗, 爲吾東之第一勝鄕, 家墳墓, 處處有之。 望見德水道羅進鳳, 諸白岳諸婉軟, 可愛。 遙見松嶽, 雄麗森嚴, 其揷天氣勢, 似不及三角, 而長遠之氣似勝矣。 至烏山, 交烟撥所幕五十里。 朝飯秣馬, 過板門, 至吹笛橋橐駞橋, 入南大門。 人家雖擳比, 而但其家舍制度, 甚狹窄矣。 入酒家飮一盃濁醪, 直上滿月臺, 見其類垣敗礎, 滿目荒凉矣。 遂吟一絶, "五百前朝滿月臺, 夕陽衰草遠笻來。 雖非白馬朝周路, 留作行人感古哀。" 催鞭至靑石洞留宿。 是日行百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