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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두집(小蠹集)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서-집부-별집류
·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 작성주체 편저자 : 정하원(鄭河源)
· 간사년 序: 庚戌(1910)...奇宇萬 (1910)
· 간사지
· 형태사항 크기 : 30.8 X 30.4 / 古活字本(後期木活字) / 책수 : 4 / 반곽 : 16.0 X 22.6 / 10行21字 / 한자 / 內向二葉花紋魚尾
· 소장처 현소장처 : 국립중앙도서관 / 원소장처 : 미상
정의

1910년에 간행한 조선 말기의 학자 정하원(鄭夏源, 1827~1902)의 시문집.

해제
󰡔소두집(小蠹集)󰡕 해제

1. 정하원(鄭夏源)의 생애
『소두집(小蠹集)』은 정하원(鄭夏源, 1827~1902)의 시문집이다. 10권 4책 목활자본으로 1910년에 간행되었다. 정하원의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희청(希淸), 호는 소두(小蠹)이다. 진양군(晋陽君) 정황(鄭璜)의 후손이며, 증조는 계당(溪堂) 정회찬(鄭悔燦, 1759∼1831), 조부는 정인규(鄭麟奎)이다. 아버지는 학와(學窩) 정종하(鄭鍾夏)로, 송시열(宋時烈)의 6대손인 조선후기의 주자학자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 1759~1838)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스승의 장려와 칭찬이 두터웠다.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 李氏) 이광배(李光培)의 딸이다. 생부는 정종은(鄭鍾殷)이며, 생모는 평산 신씨(平山申氏) 신종팔(申宗八)의 딸로, 연안 이씨가 자식이 없어 정하원이 그 후사를 이었다.
정하원1827년(순조27) 3월 16일에 태어나 1902년(고종22) 10월 9일 향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증조인 계당(溪堂) 정회찬(鄭悔燦)에게 가학(家學)을 익혔다. 일찍 학문에 뜻을 두어 그 지인들과 주고받은 글에서 명덕(明德)·이기(理氣)·형상형하(形上形下)의 변론을 발휘하였는데, 기우만, 최익현 등과 시와 서를 통해 교유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으며,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며 성리학을 닦고 학행이 뛰어났다.
정하원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 그 재주가 무리들 중에 출중하였는데, 글자를 배우면서 글을 읽고 문장을 지을 줄 알았고, 의심스러운 뜻에 대해서 질문을 할 경우에는 서당의 훈장이 대답을 못할 정도로 학문을 향한 깊이와 경지가 남달랐다. 7세에 양부(養父)의 상을 당하자 어린 나이에 어버이를 떠나보내는 애상(哀喪)의 예가 극진하여 곡전(哭奠)을 거르지 않으니 곁에 있는 사람이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장로(長老)들이 모두 기특하게 여겼다. 자라서는 생가(生家)와 양가(養家)에 전후(前後)로 모두 6차례나 상을 당하였는데, 정의(情誼)와 예의(禮儀)를 다하고 삭망(朔望)마다 애성(哀省)하는 예(禮)를 18년 동안 하루같이 지성(至誠)을 다하였다고 한다.
송사 기우만의 행장에 따르면, 정하원은 17세에 기씨(奇氏) 가문의 사위가 되었는데, 당시 조선 성리학의 6대가(大家)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의 정신적 지주였던 노사 기정진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고, 이후 50여 년을 변함없이 기정진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일심(一心)으로 자제가 부형을 섬기 듯하니, 기정진정하원을 향해 이와 같은 인물은 자주 있지 않다며 매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정하원은 물러나 선생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간혹 스승이 무언가를 질문하면 스승께서 어리석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며 기뻐하였고, 칭찬을 들으면 뜻을 더욱 견고하게 세워 나아가는 강인한 모습을 보이고 물러나는 나약함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평소 강개(剛介)한 성품으로 인해 남의 잘못을 보면 면전에서 지적하고 용납하지 않았는데, 온 세상이 모두 자신을 칭찬한다고 하여 일부러 더욱 힘쓰지 않았으며, 온 세상이 모두 비난하더라도 더욱 기(氣)를 꺾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스승의 가르침을 체득하여 잘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한 일화를 소개하기를, "어느 날 밤, 호랑이가 스승을 움켜쥐자 함께 있던 무리들은 모두 두려움에 평정심을 잃었으나 정하원 만이 홀로 당당히 스승을 모시고 서서 응대함이 평상시와 같으니 호랑이가 물러갔다.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들이 어찌 홀로 두려움이 없냐고 묻자 선생님께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두려움이 없었다. 게다가 맹수가 사람을 잡으면 끝나는 법이기에 염려가 앞서 스스로의 재앙은 근심할 겨를이 없었다고 하자 모두가 탄복하였다."라고 하였다.
또한 양왜(洋倭)에서 나오는 복식(服食)과 기용(器用) 등은 집에 들이지 않으며 말하기를, "사설(邪說)이 사람의 마음을 홀려 변화시키므로 항상 눈과 귀를 절로 즐겁게 하는 것을 처음부터 삼가지 않을 수 없다."라고 했다. 또한 임오군란을 겪은 뒤에는 나랏일이 날로 그릇되어 가자, "진실로 국가에 이로운 것은 재야의 선비들이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자 또한 일찍이 그러한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 조목은 여섯 가지가 있으니 세도(世道)를 책려(策勵)하여 조정을 바로잡고, 나라의 태공(太公)을 맞이하여 돌아오게 하며, 효사(孝思)에 통달하게 하고, 외병(外兵)을 파하여 궁금(宮禁)을 맑게 하며, 격치(格致)를 궁구하여 시무(時務)를 통달하게 하고, 병기를 닦아 응변(應變)의 상황에 대비하며, 인정(仁政)을 펼쳐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소서."라는 등의 상소문을 초안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절실하고 곧았다고 한다.
1880년(고종17) 문과에 급제한 이후 주로 문한직(文翰職)을 역임하였다. 1881년 홍문관(弘文館)에서 벼슬을 시작하여, 이듬해 11월 동지사(冬至使) 심이택(沈履澤)이 청국에 파견될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따라 갔다.
1883년 규장각직각(直閣)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에 홍문관 응교가 되었으며 1884년 통리군국사무아문(統理軍國事務衙門)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 이어 1885년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 내무부(內務府) 참의(參議)를 거쳐 세자시강원보덕(輔德)을 겸하였다.
같은 해 11월 이조참판이 되었고, 이듬해에 시강원 보덕을, 1887년에는 전년도에 설치된 육영공원(育英公院)에 민종묵(閔鍾默), 민응식(閔應植)과 함께 당상(堂上)에 임명되었다. 다시 1889년규장각직제학에 임명되고, 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2.『소두집(小蠹集)』의 구성과 내용
『소두집(小蠹集)』은 조선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학자 정하원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10년에 간행한 시문집이다. 10권 4책 목활자본으로 되어 있으며,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문집 권두의 서(序)는 경술년(1910)기우만이 썼다.
권1에 21편, 권2에 101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권3에 소(疏) 2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4∼6에는 잡저(雜著) 36편이 수록되어 있고, 권7에 서(序) 22편이 수록되어 있다. 권8에는 기(記) 19편, 권9에는 발(跋) 12편, 행장(行狀) 5편, 묘지명(墓誌銘) 2편, 제문(祭文) 9편, 권10에 일기(日記)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어 부록(附錄)으로 행장 등이 수록되어 있으며 발문(跋文)은 없다.
『소두집(小蠹集)』의 서문은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서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던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요 유학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찬하였는데, 그의 서문에 정하원에 대해 기술하기를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기정진의 문하(門下)에서 40여 년의 오랜 세월 동안 가르침을 받으면서 사문(師門)에 숨김이 없었고, 사문도 그대에게 숨김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또한 어렸을 때 당시에 유행하는 시문(時文)에 종사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니 그 수양한 바를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권1~2에는 정하원이 증조부인 정회찬을 그리며 지은 계당팔영시(溪堂八詠詩)가 서두에 실려 있고, 이어 스승을 주제로 한 시가 실려 있다. 또한 쓰러져 가는 국운(國運)을 탄식하는 시들이 보이는데, 「석호리(石壕吏)」·「장탄식(長嘆息)」·「감시(感時)」·「탄세(歎世)」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시에는 대개 그 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병서(幷序)가 붙어 있다.
권3의 소(疏)에는 「임오의소(壬午擬疏)」와 「부임오의책(附壬午擬策)」가 실려 있는데, 모두 임오군란을 겪고 나서 그 소회를 적은 것이다. 「임오의소」에서는 세도(世道)를 책려(策勵)하여 조정을 바로잡고, 나라의 태공(太公)을 맞이하여 돌아오게 하며, 효사(孝思)에 통달하게 하고, 외병(外兵)을 파하여 궁금(宮禁)을 맑게 하며, 격치(格致)를 궁구하여 시무(時務)를 통달하게 하고, 병기를 닦아 응변(應變)의 상황에 대비하며, 인정(仁政)을 펼쳐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소서." 라는 여섯 조목의 대책을 매우 절실하게 나열하였고, 이어 대원군을 모셔 올 것, 궁중을 호위한다는 미명 아래 들어와 있는 외국 군대의 철수, 그리고 병기 개발 등을 건의하는 상소문이 수록되어 있다. 「부임오의책」에서는 당시 논밭의 결(結), 군인의 수, 환곡(還穀)의 양 등을 숫자로써 제시하면서 전보다 줄어든 현상에 깊은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권4의 서(書)에는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 선생에게 올리는 편지가 9편이 실려 있으며, 그 외 백석(柏石) 기양연(奇陽衍),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송사 기우만(奇宇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 등 23여명과의 주고받은 편지가 실려 있어 그의 교유 인물들과 명덕(明德), 이기(理氣), 형상형하(形上形下)의 변론을 살펴볼 수 있다.
권5에는 17편, 권6에는 19편의 잡저가 실려 있는데, 그 가운데 「봉질(奉質)」에서는『대학』이 심학(心學)의 근원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어 특이하다. 그밖에 유려한 수필식 문장으로 변화해 가는 문물의 변혁을 다룬 「흑죽립설(黑竹笠說)」과 「방산자고별설(方山子告別說)」이 실려 있는데, 「흑죽립설(黑竹笠說)」은 '세갑신칠월지망(歲甲申七月之望)'으로 글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아 1884년(고종21)년에 찬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 일상에서 보고 느낀 것을 적은 「청농가(聽農歌)」, 「구상유설(狗相乳說)」, 「초전문답(草田問答)」이 있으며, 사서(史書)의 내용을 논한 「독사(讀史)」, 「의주장각서(擬誅張角書)」, 「서범증논후(書范增論後)」 등 다수의 흥미로운 글들을 전(傳)과 설(說) 형식으로 실려 있다. 특히 「일득우전(一得愚傳)」은 당시 천주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볼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있다.
권7에는 「정씨족보서(鄭氏族譜序)」를 비롯해서 「대명통보서(大明通寶序)」,『노사집(蘆沙集)』 서문을 의작(擬作)한 「의작(擬作蘆沙集序)」 등 총 22편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다.
권8에는 19편의 기문(記文)이 실려 있는데, 주로 건물에 대한 기문이다. 그 중 저자의 호에 대한 기문이 수록되어 있다. 기문에 따르면, 정하원1868년 3개월 넘도록 스승 기정진을 모시고 오산(鰲山)의 관불암(觀佛菴)에서 지냈었는데, 이때 기정진이 자신의 호를 소두(小蠹)라 지었다 하고, 당시의 그의 나이 73세에 옛일을 추억하며 부끄러운 마음으로 적는다고 하였다. 그의 호가 소두가 된 배경은 바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의 한시인 「악양(岳陽)」의 3구와 4구를 매우 사모하여 지었다고 한다.
「악양(岳陽)」이 지어진 배경을 살펴보면, 정여창1489년(성종20) 4월,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1464~1498)과 동행하여 15일 동안 지리산을 유람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김일손이 큰 산을 둘러보았으니 악양으로 가서 큰 강물을 보고 싶다는 말에 자신의 은거지가 있는 경남 하동군악양으로 길을 잡아 함께 유람하였다고 한다. 정여창은 시 짓기를 좋아하지 않아 유일하게 절구 한 수가 전하는데, 이것이 바로 「악양(岳陽)」이며, 『일두집(一蠹集)』 실려 있다. 시는 다음과 같다.

물 위 부들 잎은 바람 따라 흔들리고(風蒲泛泛弄輕柔)
사월 화개 땅엔 보리가 다 익었네(四月花開麥已秋)
두류산 천만 봉을 두루 다 돌아보고(看盡頭流千萬疊)
배는 또 섬진강을 강물 따라 내려가네(孤舟又下大江流)

바람에 나불거리는 부들잎이 가볍게 하늘거리는 4월, 꽃이 만발하고 보리도 익어가는 화창한 봄날에 지리산의 천만 봉우리를 모두 구경하고 나서 외로운 배를 타고 또 다시 강줄기를 따라 섬진강으로 내려간다는 내용이다. 「악양」은 표면적으로는 두류산을 구경하고 하동군화개를 거쳐 악양에 이르러 지은 유람시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면에는 현재의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더 크고 넓은 세계로 향하는 학문적 구도의 세계를 표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정하원은 이시의 3구와 4구를 매우 사모하여 자신의 호를 소두라 지었다고 한다.
권9에는 12편의 발문(跋文)이 실려 있고, 소초재(小撨齋)를 비롯한 행장이 5편, 송와공(松窩公)과 수촌공(水村公)의 묘지명(墓誌銘), 그리고 선생에 대한 제문과 기만연(奇晩衍), 박만동(朴萬東) 등 지역 인물들에 대한 제문이 9편 실려 있다.
권10에 수록된 일기 「관불암기의(觀佛庵記意)」는 저자의 나이 42세 때 기정진(奇正鎭)을 관불암에서 3개월 정도 모시며 성명이기(性命理氣)와 고금사변(古今事變)에 대해 논한 것을 기록한 글이다. 이기설은 따로 「태극동정론(太極動靜論)」을 붙여 기정진의 학설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또 이 일기에는 옛 선현들의 비화와 지리설(地理說)의 필요성을 강조한 내용도 들어 있다.
마지막으로 기우만이 찬한 행장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 이는 정하원이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지나서 그의 아들 휴명(休明)기우만을 찾아와 행장을 부탁하여 찬한 것인데, 동문수학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비교적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3. 세부목차
序(奇宇萬)

卷1
詩 : 追次八詠, 南菴招提, 沙上上先生詩, 先生新寓, 沙上題懷, 蘆沙集有感, 蘆沙集有感, 蘆沙集有感, 上先生詩, 呈堂叔, 再呈堂叔, 次家仲韻, 自嘲答家仲, 答家仲, 答家仲江字韻, 詠貧答家仲, 答家季韻, 保家季疏廳韻, 寄家季, 答族弟子仲, 漢城觀先歸路, 宿淸道院店, 沙上答趙直敎, 答放叟, 答小蕉, 答族叔種台, 答免叔種愚, 答族叔種澤, 答閔仲浩, 答李樓山, 次閔南湖, 次族弟龍源, 答鄭晩悔, 答安蓮上, 答柳春莊, 別金敬受, 答李道三, 和打垂吟, 次諸生詠松, 詠樗, 詠初月, 次三芝齋韻, 上甲閤丈, 過皇華亭, 追和松川韻, 挽鄭船隱, 次瀛洲洞閣, 崔昌三睟宴韻, 歎歲, 答溪堂書齋, 秋峯墓祀後, 贈南平宗孫, 水砧, 石壕吏, 漁父, 新月, 雪梅, 聽琴, 流水勉諸生, 謹步石翁韻, 答高竹史, 贈文章華, 答姜秀才, 答幻海, 步海佛菴韻, 聞鵑, 臥松, 葉笛, 鷺問答, 答柳東錫, 題懷, 步高士吟, 小奚, 答溫洞諸友, 過□率贈諸友, 上月明菴, 挽金繼鎭, 挽族從欄, 步答梁益瑞, 長歎息, 贈吳秀才, 感時, 答全性愚, 贈庚秀才, 答李秀才, 答族姪休寬, 答金箕昔, 答陳生烋三, 答洪在新, 答庚聖求, 答金箕聲, 贈別全龜容, 答徐白卿, 送別曺國彬, 看山勉諸生, 外言甚熾, 送成德龍, 答族孫寬燾, 答族叔鍾韻, 贈權錫圭, 答族姪伯賢, 贈魯在煥, 贈安行純, 贈申期淵, 答洪鍾歡, 看感贈諸生, 寓居有感, 贈別族叔鍾韺, 答再從弟潤源 課孫, 贈別李南坡, 歎歲, 答魯生親稧韻

卷2
詩 : 謹次九曲韻, 答沈宜恒, 謹次老石韻, 謹次後松韻, 問紅桃, 紅桃答, 挽沈東峯, □谷集雪字, 姜健秀慈親挽, 夢中作, 答諸君, 次八烈望享韻, 白□, 觀魚, 有感, 答吳起源, 答丁聖擧, 詠天, 答鄭船隱, 送別趙耆示, 答金子元, 過程子川, 過丹巖寺, 謹步金海士韻, 次燕申堂韻, 次寒碧堂韻, 再上海士詩, 答海士韻, 答金浩潭韻, 贈金泰玉, 送任南洲, 回甲韻, 奉答洪侯鍾觀, 奉別洪侯, 步敬堂韻, 步石蘭雲寺韻, 登翠白堂, 上李侯詩, 講筵答李侯, 又呈, 步澄字韻, 宿司馬齋, 次李仁學, 送忘年友, 和申侯慶均詩, 上申侯睟宴, 呈申侯行幰, 答李命求, 答李申兩友, 呈金溝倅, 贈別敬堂韻, 書飢字韻後, 次功字韻, 送別尹侯濟翼, 寄讀書所, 答梁相衡, 謹步陽臺韻, 謹步錦城韻, 謹步四悔亭, 留別吳在洙, 詠蘭勉諸生, 鄕飮酒席, 答呈民聽堂, 謹步南壺詩, 贈別韓參奉, 答西都主人, 答三從弟, 松鶴, 贈川獵韻, 詠楓, 詠竹, 答再從弟, 答族弟孟源, 上申侯佐熙, 贈族弟承源, 贈族弟寧源, 贈族弟達源, 觀碁, 聞鴈

卷3
疏 : 壬午擬疏, 附壬戊擬策

卷4
書 : 上先生書(九), 與奇晩衍(二), 答奇陽衍, 與奇宇萬(四), 上宋山丈, 上任全齋, 與崔勉菴(二), 與宋淵齋(三), 上申相國, 答李膺圭(二), 與朴萬東, 答高時勉, 答申碩均, 答梁暾默, 答梁相衡, 與成大永, 答南廷龍, 答李熹翼, 答李輔翼, 與閔鍾烈, 與閔鍾默, 與鄭義林, 與鄭圭三, 與鄭孔麟, 與奇麒鎭, 錦西護喪所, 蓴村護喪所, 倉村護喪所, 與梁晩默, 上李文龍, 答姜俊永, 答李遇春, 答庚煜求, 答鄭在宣

卷5
雜著 : 述懷賦, 奉質, 沙上漫錄, 漫語, 權氏墓閣文, 治本說答客難, 聽農歌, 天人流通銘, 克己復禮銘, 生聖世頌, 言拒揚墨論, 陰陽消長論, 名分紀綱論, 禹湯水旱論, 一得愚傳, 上招討使, 祭外祖祝文

卷6
雜著 : 沙上奇會說, 獘□子傳, 書范增論後, 方圓說, 客談, 狗相乳說, 喩角鬣說, 上李秉文書, 擬誅張角書, 添瘤說戒, 答詠偸春, 書瑞□頌後, 送別李後歌, 上金繼鎭, 鷄雛說, 讀史, 墨竹笠說, 方山子告別, 草田問答

卷7
序 : 鄭氏族譜序, 大明通寶序, 擬作蘆沙集序, 慰家弟序, 送晉錫序, 送金稚倫序, 疏稧序, 送放浪子序, 送洪秀才序, 再送洪秀才, 送柳士彦序, 講罷送諸生序, 送金浩玄序, 送沈郞序, 送安郞序, 送諸生序, 會輔稧序, 外祖歲祭稧序, 送金秀才序, 風謠錄序, 送金侯藝軒序, 送尹濟翼序

卷8
記 : 夢雲奄記, 壽松堂記, 湖隱堂記, 順寧齋記, 四悔亭記, 餘力齋記, 藥圃堂記, 力養齋記, 守信堂記, 櫟齋記, 翠白堂記, 明倫堂記, 誠齋記, 止愚齋記, 敬悅齋記, 東岡亭記, 小蠹記, 沙南記, 盤亭記

卷9
跋 : 書爰斯柏後, 題氷玉臺後, 跋菊圃記, 書船隱詩集, 書日省錄後, 書忠賢世家, 送趙公序後, 題小札後, 書東海翁說後, 題南征錄後, 學文菴記後, 題興學案後
行狀 : 小撨齋行錄, 臨淵齋行錄, 誠齋公行狀, 平岡公行錄, 慕隱公行錄
墓誌 : 松窩公墓銘, 水村公墓誌
祭文 : 祭先生文, 祭奇晩衍文, 祭朴萬東文, 祭季舅文, 祭家季文, 悲慰章一歌, 弔奇宇蕃文, 哭鄭參判文, 延安李氏哀辭

卷10
日記 : 觀佛菴記意, 附太極動靜問答
附錄 : 小蠹先生鄭公行狀
기사목록
卷之一
卷之二
卷之三
卷之四
卷之五
卷之六
卷之七
卷之八
卷之九
卷之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