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인수록(鈍人隨錄) 해제
Ⅰ. 생애와 『둔인수록』 편찬 경위
1. 생애
『둔인수록』의 저자 김진휴는 본관은 광산光山이요, 자는 용여龍汝며, 호는 둔암鈍庵이다. 아버지는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된 문연文淵이요. 어머니는 설씨薛氏이니, 현絢의 딸이다. 1807년 7월 15일에 태어나 광주光州에서 거주하였다.주 1)
김진휴는 1834년 식년시 병과 10등으로 과거시험에 합격하였다. 1854년 강원도 지역인 보안찰방保安察訪(종6품)주 2) 벼슬을 지내다가 8월 9일 강원도 암행어사 강난형姜蘭馨의 소견으로 강릉부사江陵副使 송단화宋端和 등을 탄핵한 일에 연루되어 죄를 받기도 하였다.주 3) 1864년 부사직副司直(종5품)에 제수되고, 이어 장령掌令(정4품) · 부호군副護軍(종4품)에 제수되었다. 이 해에 임금이 군덕君德을 기르는 일과 시무時務에 대한 십조목十條目을 진달하는 상소를 올렸다.주 4)
1867년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는데, 10월 29일 폐장閉場할 무렵 하늘에서 천둥과 번개의 재변이 보이자 일념으로 임금이 학문에 전념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에 연명하였다.주 5) 1868년 헌납獻納(정5품) 벼슬로 죄를 받았다.주 6) 이때 임금은 대사간 이인설李寅卨 등의 파직 전지에 대하여 추고만 하라고 전교하였다. 1872년 4월 홍국영洪國榮에게 노륙孥戮의 형전刑典을 시행할 것을 장령掌令 민치양閔致亮 등과 청請하였다. 이어 효시梟示한 죄인 이성세李性世에게 처자식까지 처형하는 형벌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주 7) 1873년 헌납獻納(정5품)으로 다시 제수되었다. 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에 가자加資 되었는데, 이는 헌납 김진휴에게 특별히 가자하라는 전지를 받는 것이었다.주 8) 1875년 1월 병조참의兵曹參議(정3품)에 제수 되었다.주 9) 그해 6월 세자궁이 동여動輿할 때 배종한 춘방 등 이하의 별단에 시상하라는 전교가 있었는데, 이때 내하 장피獐皮 1령을 사급 받았다.주 10) 1876년 행 부호군 가선대부行副護軍嘉善大夫(종2품)에 가자되어주 11) 부총관副摠管 등을 역임하였다. 이 해에 아버지 김문연金文淵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고, 할아버지 김달명金達明은 좌승지左承旨, 증조할아버지 김성휘金成輝는 사복시司僕寺에 추증되었다.주 12) 1877년 4월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곧이어 5월에 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제수되어 벼슬에 나아갔으나, 6월에 병환이 들자 10월에 병조참판의 사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881년에 잦은 병환으로 인하여 행行 호군護軍으로 감하減下되었다.주 13) 1887년 11월 20일에 죽으니, 향년 81세의 일기였다.
2. 『둔인수록』의 편찬 경위
『둔인수록』은 「호문구虎文狗」를 권수卷首로 시작하여 「과오간수문망훈련원유감過五間水門望訓練院有感」을 권말卷末로 구성한 필사본 형태의 전체 13권으로 되어있다. 책 1면의 크기는 21자×10행, 전체 1701면으로 357,210자이다.
그의 유고는 애석하게도 후손이 아직 정리하지 않아 문집으로 간행되지 않았다. 저자가 처음 시작詩作하고 나서 시간을 따라 농촌의 모습이나 경물을 보고, 그 감회를 그때그때 기록한 글을 모아놓은 필사본의 형태로 현재 그대로 전하여지고 있다. 또한 논자가 짐작컨대 『둔인수록』의 마지막 작품 「과오간수문망훈련원유감」 이후 저술한 작품이 더 많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정되나, 아직 발견되거나 찾지 못하여 증명 할 길이 없다.주 14) 따라서 『둔인수록』은 서문과 발문이 없고, 다만 권두卷頭에 저자의 자서自序와 범례凡例가 실려져 있을 뿐이다. 책의 전체적인 작품 구성은 전체 1,548제 2,242수의 시가 『둔인수록』 내용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둔인수록』에는 시의 형식은 물론 문체를 따라 구분하여 수록되어 있지 않고, 13권 전체에 여러 문체의 작품이 산재散在되어 있다.
『둔인수록』의 시에서는 김진휴가 광주에서 서울까지 가고 오는 여정에서 그 지역을 지나가며 감회를 읊은 시가 다수 보인다. 이와 같은 부류의 시에서는 그 지역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고, 당시 농촌 생활의 실제 모습을 엿볼 수가 있다. 농부가 모내기하는 정겨운 모습과 새참을 나누어 먹는 이웃 간의 구수한 인정을 느낄 수 있는 「조과소사평부이앙」 등 다수가 여기에 포함된다. 또한 관동과 관서 두 지역을 유람하면서 누정과 승경景勝을 보고 감회를 읊은 시, 「동정東征」의 100제題와 「서정西征」의 140제, 지난날 동유東遊하면서 옛 유적에서 감회를 노래한 「동유구적東遊舊跡」의 29제에서는 지역에 흩어져있는 누정문화와 지역문화를 아울러 찾아볼 수 있다. 한편 박상朴祥(1474∼1530. 자는 昌世, 호는 訥齋)이 김시습金時習(1435∼1493. 자는 悅卿, 호는 梅月堂·淸寒子·東峰·碧山淸隱·贅世翁, 법호는 雪岑)의 「산거집구백수山居集句百首」에 화운한 시「화동봉산인산거백절和東峯山人山居百絶」에 다시 화운하여 지은 「화박눌재산거백절운和朴訥齋山居百絶韻」 100수, 여관에서 除夕을 맞이한 감회를 평성 운자 30자로 각각 5수씩 노래한 「여사영회삼십운일백오십첩旅舍詠懷三十韻一百五十疊」 150수 등의 장시長詩 여러 편에서는 그가 시의 천재성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둔인수록』의 산문에는 부賦 · 서序 · 기記 · 명銘 · 논論 · 의擬 · 발跋 등의 다양한 문체의90여 작품이 있다. 그 중 김진휴가 관직생활을 하면서 그날의 政事를 기록한 「척오일기」는 정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관직과 이름이 함께 기록되어 있는 '사일기'의 유類로 되어 있다. 그 외에도 간찰류로 교우들과 지인들과 주고받은 80여 통의 편지가 있다.
한편 김진휴는 『둔인수록』 권두에서 자서와 범례를 통하여 스스로 글을 쓰게 된 동기와 과정을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논자는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자서의 전문을 다음에서 살펴보았다.
아! 생명이 생긴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생각하여 오래도록 금석에 전하며 백 대를 보아도 없어지지 않게 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성현이나 영웅일지라도 문장이 없으면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문장이 사람에게 간절함이 천박하고 작은 일이겠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문장을 배우고 싶어 후미진 바닷가 고향에 있으면서 이목을 처음부터 힘쓰고, 과거시험 공부의 중도 과정에서 출발하였는데 이것은 구두공부에 지나지 않았다. 가만히 생각하여보면 인생은 참으로 적막하고 공허하다. 명성 없이 문득 100년이 지나면 미래의 사람들이 누가 김둔암이 어떠한 사람으로 살았으며, 어느 세상에서 성공하였으며, 무슨 사업을 하였는지, 알겠는가. 그러므로 이와 같은 일은 내게 분수에 넘치나 평소에 지은 글을 주워 모아 가장으로 삼았으니, 나를 아는 사람은 웃고,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욕하는 것을 나는 알아야 한다. 그러나 웃어도 나는 김둔암이오, 욕하여도 나는 김둔암이다. 세상에 웃는 사람과 욕하는 사람이 다 없어지지 않는다면, 김둔암의 명적 또한 끝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김둔암이 사람들의 웃음과 욕을 당함은 불행이 아니라 바로 행운인 셈이다. 지금 여기 주워 모은 글을 높은 시렁 위에 올려놓고 사용하지 않을지라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아!주 15)
김진휴는 스스로 세상에 이름을 남기려면 먼저 유명한 글을 남겨야 함을 말하고 있다. 또 이를 금석에 전하여 영원히 없어지지 않게 하려면 글이 필요하다고 덧붙여 말하였다. 때문에 글은 결코 천박하거나 작은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후미진 바닷가 고향에서 글을 배우고 싶어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과거시험 공부의 하나인 구두口讀공부였음을 밝히었다.
자서 후반부에서는 "김둔암이 사람들의 웃음과 욕을 당함은 불행이 아니라 바로 행운이다.주 16)"라고 하여 글을 쓰는 이의 겸허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주워 모은 글을 높은 시렁 위에 올려놓고 사용하지 않을지라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주 17)"라고 하여 글을 쓰는 일을 멈출 수 없는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김진휴는 이어 범례에서 스스로 『둔인수록』을 남긴 이유를 하나하나 꼬집어서 설명하고 있다. 아울러 그는 글을 수록隨錄하고나서 다시 정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도 밝히었다. 한편 김진휴는 자신의 유고에 대하여 후손이나, 후학이 일목요연하게 문체별로 정리하여 문집을 간행해 줄 것을 내심 바라고 있다. 논자는 범례의 전문을 다음에서 살펴보았다.
첫째, 나이 어려서 지은 글이 많은데, 글에는 더러 길을 걸으면서 강을 건너면서 느낀 의취를 담고 있으니, 보는 사람이 애석하게 여길 수 있다. 게다가 글은 그 해 한 번에 기재하지 않아 지금 찾아보려고 하면, 망양지탄의 학문 같다. 따라서 평일 이목에 전해지고 보아 온 한두 가지 일만 기록하였을 뿐이다.주 18)
둘째, 과거시험 공부의 문자가 고체에 가깝지 않고, 예전에 한 일을 지금 온전하게 정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대략 그 과장에서 시작한 것과 시험관이 점수를 준 것을 취하여 각 문체의 한두 가지를 책 가운데 첫머리로 두었다. 그러므로 이것이 좋고 저것이 나쁘다고 하여 채우거나 뺀 것은 아니다.주 19)
셋째, 패관·서·발의 문장을 두루 보지 못하였고, 그 문사만 취하여 두었다. 안목이 있는 사람으로 보게 한다면, 문사의 취할 만한 부분은 쉽게 알 것이라고 본다.주 20)
넷째, 중늙은이의 시어 말이 경솔한 뜻으로 망령되게 지은 글이 많아 선인이 주고받은 시를 취하여 가지런히 하였으니, 주워 모은 글을 탐닉하여 그런 것은 아니다.주 21)
다섯째, 책명을 오로지 '수록'으로 이름 할 수밖에 없다. 산란하고 통일성이 없는 뜻을 취하였으니, 후학은 이것을 가지고 표준을 삼아서는 안 된다.주 22)
여섯째, 지금 여기 주워 모은 글은 실상으로 얻은 족족 기록하였으니, 후학 가운데 혹 나의 뜻을 이을 사람이 있다면, 잘잘못을 바로 잡아 같은 형식으로 나누고 모으는 것이 옳을 것이다.주 23)
김진휴는 범례에서 시종일관 글을 쓰는 이의 입장에서 겸허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혹은 '망양지탄의 학문'이라고 하여 두서없음을 지적하였고, 혹은 '패관·서·발의 문장을 두루 보지 못하였고, 혹은 그 문사만 취하여 두었다.'라고 말하고, 혹은 '중늙은이의 시어 말이 경솔한 뜻으로 망령되게 지은 글이 많아'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경우의 말에서 그가 겸허한 태도를 지녔음을 우리는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김진휴는 책명을 오로지 '수록'으로 이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혹은 '산란하고 통일성이 없는 뜻을 취하였으니, 후학은 이것을 가지고 표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한 것과 혹은 '후학 가운데 더러 나의 뜻을 이을 사람이 있다면, 잘잘못을 바로 잡아 같은 형식으로 나누고 모으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그 까닭을 말하는 곳에서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말들은 김진휴가 한편으로 내심 자신의 글이 문집으로 간행되어지기를 바라는 글쓴이의 솔직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장점으로 보인다.
Ⅱ. 『둔인수록』의 내용
『둔인수록』의 내용은 너무 방대할뿐더러 현재 문집형태의 분류가 이루어지지 않아 솔직하게 본 논문에서는 그 내용을 자상하게 살펴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전체적인 내용을 상세하게 논의하지 못하고, 다만 권1에서 권13까지 작품의 이름만 소개하는 형식으로 논의를 전개하였다. 논자가 『둔인수록』의 권별 내용을 대략적으로나마 살펴본 바는 다음과 같다.
권1에는 호랑이무늬 털의 개를 읊은 오언절구 「호문구虎文狗」 등 시 132제 179수가 있다. 또 전북 고창 선운사의 이모저모와 경관을 기록한 「서유선운록西游禪雲錄」, 태고 천황씨를 천황이라고 부르게 된 명목名目을 논의한 「태고천황씨론太古天皇氏論」, 두 집안에서 아들을 낳았는데 공교롭게도 관상이 같았다. 이에 근거한 관상에 대하여 자기의 뜻을 말한 「내일용일저율부乃一龍一猪律賦」, 전국戰國시대 맹자孟子의 제자 만장萬章이 순舜임금과 그 아버지 고수瞽瞍와의 관계에서 위로는 부모라고 칭하고, 아래로는 고수라고 칭하는 까닭을 묻고 답하는 형식을 빌려 경서經書의 의난처疑難處를 자문자답하는 「경서변의經書辨疑」가 있다. 이외에도 「동유서석부東游瑞石賦」, 「의한군신 하공수치발해지일 권민농상 사민지도검자 매검매우 매도매독표擬漢群臣賀龔遂治渤海之日勸民農桑使民持刀劍者賣劍買牛賣刀買犢表」, 「패관창선감의록稗官倡善感義錄跋」, 「감몽황우묘부感夢黃牛廟賦」, 「독서내원암기讀書內院庵記」, 「인정필자경계시부仁政必自經界始賦」, 「수습락하시화서收拾洛下詩話序」, 「착빙충충부鑿氷冲冲賦」, 「패관홍백화전서稗官紅白花傳序」, 「서의린재신재書義隣哉臣哉」, 「종미당시 성고재부鐘未撞時聲固在賦」, 「숭정문명崇政門銘」이 있다.
권2에는 소를 읊은 「우牛」 등의 영물시詠物詩 다수가 전체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다. 전체 시 287제 376수가 있다. 또 서남산西南山 아래에서 둔세행의遯世行義하는 군자 최경철崔景喆(호는 訥圃)이 영유永柔주 24)로 갈 때 전송하면서 지은 「송영유최경철서送永柔崔景喆序」가 있다. 고시 형태의 월령가 「염십이월괘 영십이월령拈十二月卦詠十二月令」, 「전사십이월가田舍十二月歌」, 본도 옥과현玉果縣에 사는 효자 허서소許瑞素의 부모상 6년을 이어 조부모상 6년을 전후 12년의 시묘廬墓살이를 한 효행과 그의 두 아들 향晑과 앙昂, 일문삼효一門三孝를 본도 유생을 대신하여 예조禮曹에 상소한 「대본도유생등 상예조서代本道儒生等上禮曹書」가 있다. 이외에도 「희용이십팔수 영석류戱用二十八宿詠石榴」, 「희용간지 부매화戱用干支賦梅花」, 「이십팔수가二十八宿歌」, 「납조술회 희우약초 득십오배률臘朝述懷戱寓藥草得十五排律」, 「전하餞夏」, 「독한학노걸대讀漢學老乞大」, 「남정도한강 야숙승방점南征渡漢江夜宿乘舫店」, 「천안로중天安路中」, 「견서원매발수삼타 적독주시 화동파운부매화 칠언고시 수보성팔족見西園梅發數三朶適讀朱詩和東坡韻賦梅花七言古詩遂步成八足」이 있다.
권3에는 사문 송학로【공희】의 「죽재에서 노닐며」에 차운한 시 「차송사문학로【공희】유죽재운次宋斯文學魯【孔希】遊竹齋韻」 등 113제 233수가 있다. 이외에도 조카 진사 용만容晩이 사마재司馬齋 집강執綱(책임자)의 말석에서 불감당不敢當한 일을 당하여 광주光州에 사는 지주 조철영趙徹永에게 보낸 편지 「대종자진사용만 상지주서代從子進士容晩上地主書」, 한나라 무제가 어렸을 적에 진오陳午의 딸인 아교阿嬌를 얻어 금옥金玉에 두고 길렀다가, 즉위한 후 그를 황후로 삼아 대단히 총애했다는 고사의 주인공을 주제로 한 「아교阿嬌」가 있다. 「보한시부독서성남운 요기기아겸욱린질 병서步韓詩符讀書城南韻遙寄驥兒兼勖麟姪並序」, 「죽피선竹皮扇」, 「구작행驅雀行」, 「화백곡처 능일이삼체 병인和白谷處能一二三體幷引」, 「화백곡처 능건제체和白谷處能建除體」, 「제아수계서諸兒修禊序」, 「대산막곡 최기중 상지주서 지주견상代山幕谷崔基中上地主書地主見上」, 「대도천면민인등 상지주서 지주견상代陶泉面民人等上地主書地主見上」, 「추화최양암형평숙 우암구화후상감유작 병서追和崔羊巖衡平叔尤庵遘禍後傷感有作並序」, 「노호행老虎行」, 「술회 병지述懷幷誌」, 「칠월망일 흥감사회七月望日興感寫懷」, 「추팔월장환향 여사야등 신구점득 오언장편秋八月將還鄕旅舍夜燈信口占得五言長篇」, 「야헐희점夜歇戱占」, 「뇌뇌음惱惱吟」, 「대향신待鄕信」, 「포서음捕鼠吟」, 「사고시유서謝髙時愈書」, 「독박사암순자화숙유집讀朴思菴淳字和叔遺集」, 「제석除夕」, 「원조元朝」, 「축판사蹴板詞」, 「지연음紙鳶吟」, 「매귀곡埋鬼曲」, 「성학송 병서인聖學頌並序引」, 「매화초개 부용동파운부 득일첩梅花初開復用東坡韻賦得一疊」, 「부용전운부 매화배율復用前韻賦梅花排律」, 「제박눌재유집후題朴訥齋遺集後」, 「화박눌재 산거백절운和朴訥齋山居百絶韻」, 「제후題後」가 있다.
권4에는 진사進士 미천薇泉 재현在顯 집에서 종인宗人 사과司果 재헌在獻과 참봉參奉 재학在鶴, 해석옹海石翁 술현述鉉이 모여 시를 지으면서 연회를 즐기며 지은 「미천진사재현사 회제종인사과재헌 참봉재학 해석옹술현 작문주유薇泉進士在顯舍會諸宗人司果在獻參奉在鶴海石翁述鉉作文酒游」 등 시 177제 400수가 있다. 이외에도 박을 심은 농부를 통하여 '박이 그릇을 만들었는가'(瓠之爲器)와 '사람이 그릇을 만들었는가'(人之爲器)를 설명한 「종호자설種瓠者說」, 포동여관匏洞旅館에서 제석을 맞이하여 지은 「포동여사봉제석匏洞旅舍逢除夕」이 실려 있다. 이외에도 「오월당기梧月堂記」, 「취광재기醉狂齋記」, 「유장불령踰長佛嶺」, 「효자전경백전孝子田耕百傳」이 있다.
권5에는 인일人日에 양화楊花를 가기 위해 아현만鵞峴漫을 건너가면서 지은 「인일출양화 도과아현만영人日出楊花渡過鵞峴漫詠」 등 시 143제 186수가 있다. 이외에도 1849년 설날 아침 환갑을 맞이하는 대왕 대비전에 축하의 글을 올린 「원조하전元朝賀箋」, 「타삽음墮箑吟」, 「속자경 병소서續自警箴幷小序」, 영광靈光에 사는 사인士人 노득좌魯得佐의 처 김씨의 열부烈婦 행실을 예조禮曹에 올린 「대본도유생등 상예조서代本道儒生等, 上禮曹書」, 헌종憲宗의 죽음을 애도한 「헌종대왕 만사憲宗大王挽詞」가 있다. 그리고 「묵재기嘿齋記」, 「영포채십육종詠圃菜十六種」, 「고현재기古玄齋記」, 「방헌기放軒記」, 「운계유거기雲溪幽居記」, 「송계헌주인 이군악헌자문 귀대초 서送桂軒主人李君樂獻子文歸大草序」, 「취봉래 병지醉蓬萊幷誌」, 「염박귀가 병인琰珀鬼歌幷引」, 「남가자 병지南柯子幷誌」, 「무곡연명 병소서霧穀硯銘幷小序」, 「오주연명 병소서烏咮硯銘幷小序」, 「마간연명 병소서馬肝硯銘幷小序」, 「취곤륜 병지醉崑崙幷誌」, 「감사불우부 병지感士不遇賦幷誌」, 「억포천김령공윤근백운憶匏泉金令公胤根百韻」, 「억풍계김태정균백자憶風溪金台鼎均百字」, 「팔월십이일 관천창보두시 삼천이십삼운八月十二日觀川漲步杜詩三川二十三韻」, 「옥출위서소실희부 이십일운玉秫爲鼠所失戱賦 二十一韻」, 「야심안심촌夜尋安心村」, 「수초괴림서手鈔瓌林序」, 「태세축백구太歲祝百句」, 「상전장계이판김태수근上銓長啓吏判金台洙根」이 있다.
권6에는 1837년 7월 26일부터 1848년 10월 8일까지의 관직에 있으면서 벼슬 생활을 기록한 「척오일기尺五日記」가 실려 있는데, 서두에 「척오일기尺 서五日記 序」와 각각의 일기에는 군데군데 당시 아무개 누가 참관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이는 '사기仕記'가 첨부되어 있다.
권7에는 「동정 상東征上」 1편이 있는데, 서두에 「동정 자서東征自敍」가 실려 있다. 1852년 8월 10일 단구丹邱주 25) 북문을 출발하여 동년 동월 29일까지의 여정기이다. 동정東征은 금강산 일대 및 동해 지역 100여 곳을 유람하면서 정경을 설명하고, 그 감회를 시로 남기었고 일기를 겸하고 있다. 전체 시 100제 104수가 있다.
권8에는 「동정 하東征下」 1편이 있는데, 1852년 9월 1일 신계사神溪寺주 26)를 출발하여 그해 9월 15일까지의 여정기이다. 140여 곳의 정경을 찾아 각각 그 경관을 설명하고 시를 남기었고 일기를 겸하고 있다. 권미卷尾에는 안창安昌을 출발하여 돌아오는 날까지 35일이 걸렸고, 거리상 2,220여 리임을 자상하게 밝히었다. 권7과 같이 그 지역의 경관과 누정 등을 읊은 시 170제 180수가 있다.
권9에는 서정西征의 여정에서 누정과 승경을 보고 읊은 시 145제 146수가 있다. 이외에도 「서정부 병소서西征賦幷小序」, 「치악사 병소서雉嶽辭幷小序」, 「국향사 병서國香寺幷序」, 「수초미산수렵서手抄眉山蒐獵序」, 「선고비언행실록서先考妣言行實錄序」, 「유치악록遊雉嶽錄」, 「영봉비찬 병비문靈鳳碑贊幷碑文」, 「서동해비첩자후 병비문書東海碑帖子後幷碑文」, 「원천석사실元天錫事實」, 「黃戊辰事實」, 「어서비각 병지御書碑閣幷誌」, 「언고풍이십운言古風二十韻」이 있다.
권10에는 홍우신洪祐信·김병학金炳學·김수근金洙根·이근우李根友·윤자일尹滋一·김경신金敬鎭·권기화權基和·박교희朴敎熙·권교정權敎正·이용준李容準·김병고金炳皐·안순安洵·오취선吳取善·엄석제嚴錫濟·이민상李敏庠·최상유崔尙儒·권강權絳·김태수金台秀·민경익閔景翼·송단화宋端和·김진한金雲漢·김옥근金沃根·이직李溭·남대유南大儒·오현규吳顯圭·정이원鄭頤源·송지성宋持性·김세균金世均·김계진金啓鎭·기만箕晩·김문근金汶根·홍기섭洪耆燮·홍재룡洪在龍·김병국金炳國·김보근金輔根·신석우申錫愚·기항箕恒·김익연金翼淵·박수풍朴受豊·이긍식李肯植 등 교우들과 주고받은 56편의 간찰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외에도 「고악 게축古樂癸丑」, 「고문古文」, 「상청사 병소지上淸辭幷小識」, 「동사요람서東史要覽序」, 「서강수은간양록후 갑인書姜睡隱看羊錄後甲寅」, 「표해록서漂海錄敍」, 「형산신우비가 병지衡山神禹碑歌 幷志」, 「충신엄흥도고사忠臣嚴興道古事」, 「관란정고사觀瀾亭古事」, 「야게오중읍점 병소지夜憩奧中邑店幷小誌」, 「월아별당유감부회 병소서越衙別堂有感賦懷 幷小序」이 있다. 그리고 시 29제 33수가 있다.
권11에는 洪家 小亭을 지나가면서 현판에 걸려 있는 시의 운자에 차운한 「과홍가소정 차판상운過洪家小亭次板上韻」 등 시 75제 160수가 있다. 이외에도 영월寧越 기생 고경춘高瓊春의 순절을 기린 「경춘비 병기瓊春碑幷記」, 주천현酒泉縣의 바위 설화 「주천석 병지酒泉石幷志」, 청허루淸虛樓 아래 남당南塘에 있는 「연리촌 병소지連理樹幷小志」, 상원사上院寺 용추암龍湫庵의 설화 「억상원천 부용주천석운 병지憶上院泉復用酒泉石韻幷志」가 있다. 그리고 「평창석륙연가 병소서平昌石六硯歌幷小序」, 「최영전崔瑩傳」, 「단구사실 병소서丹邱事實幷小敍」, 「동유구적 병기東遊舊跡幷記」, 「서곡용추일차기우제축문瑞谷龍湫一次祈雨祭祝文」, 「치악사재차기우제축문雉嶽祠再次祈雨祭祝文」, 「희우가 병소서喜雨歌幷小序」, 「학남비 병소서鶴南飛幷小序」과 간찰 6편이 있다.
권12에는 임금의 은혜에 대한 감회를 읊은 「감군은感君恩」 등 시 56제 58수가 있다. 이외에도 김진휴가 보안찰방保安察訪으로 있을 때, 암행어사 강난형姜蘭馨(1813∼?)의 소견召見과 동우東郵의 일로 죄를 받은 상황의 「행로난 병지行路難幷志」가 있다. 그리고 「임금호사실林錦湖事實」, 「임관해사실林觀海事實」, 「강수은사실姜睡隱事實」, 「죽교노인 한석효초갑연 병소서竹橋老人韓錫斅醮甲讌幷小序」, 「억정난하해명憶鄭蘭下海明」의 사실기事實記와 간찰 9편이 있다.
권13에는 1856년 늦가을에 운용촌사에서 쉬면서 읊은 「만추게운용촌사晩秋憩雲龍村舍」 등 시 121제 187수가 있다. 이외에도 이조판서吏曹判書 김병학金炳學(1821∼1879)에게 올린 계啓 「상이판계上吏判啓」, 좌의정 조두순趙斗淳(1796∼1870)에게 올린 계 「상좌합심암조상공계上左閤心庵趙相公啓」, 영의정 김좌근金左根(1797∼1869)에게 올린 계 「상영합하옥김상공계上領閤荷屋金相公啓」, 철종哲宗의 사위이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使인 김문근金汶根(1801∼1863)에게 올린 계 「상영은국구계【영돈령김문근】上永恩國舅啓【領敦領金汶根】」, 영어穎漁 김병국金炳國(1825∼1905)의 어머니, 정경부인貞敬夫人 신씨愼氏의 환갑을 맞이하여 지은 「연하 병지燕賀幷識」이 있다. 그리고 「증병조참판상주리삼억제문贈兵曹參判尙州李三億祭文」, 「남원관류촌 오생기상 방여여우 비설기조언주【호호암운】실행 색여일언료부근체이증지南原官留村吳生基常訪余旅寓備說其祖彦宙【號壺庵云】實行索余一言聊賦近體以贈之」, 「하옥김상공수연荷屋金相公晬宴」, 「대경기유생 상언초代京畿儒生上言草」, 「우사단기행雩祀壇紀行」, 1862년 전부田賦와 군적軍籍과 환곡還穀에 대한 국가의 대정大政을 논한 「삼정책三政策」, 「사교재영은부원군 육십이세진갑시 병서四敎齋永恩府院君六十二歲進甲詩並序」의 산문류와 간찰 6편이 있다.
Ⅲ. 김진휴의 시 감상
김진휴는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전체 시 1,548제 2,242수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자서(自書) 『둔인수록』에 남겨 놓았다. 그의 시를 들여다보면 전체적으로 서경을 노래하면서 사실적 묘사가 두드러져 보인다. 한편 그의 장시에서는 그가 시의 천부적인 자질을 지녔음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본 논문에서는 김진휴 시의 전반적인 내용과 특징에 관하여서는 다음 연구과제로 남겨두었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당시 농촌의 현실을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는 「조과소사평부이앙」과 농촌에서 재배되는 다양한 채소의 모습을 노래한 「영포채십육종」 두 작품을 감상해 보려고 한다. 아울러 논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둔인수록』 13권에 실려 있는 전체 시의 표제수와 작품 수를 권 별로 파악하여 다음 표1에 제시하여 보았다.
표1
권수
오언절구
칠언절구
오언율시
칠언율시
기타
전체
1
10제 11수
25제 31수
21제 26수
75제 110수
연구시 1수
132제179수
2
16제 21수
55제 94
40제 44수
173제 214수
4첩시 1수
연구시 1수
6언시 1수
287제376수
3
12제 16수
28제134수
24제 26수
46제 53수
연구시 1수
6언시1제2수
4언시 1수
113제233수
4
35제 36수
40제 44수
28제 29수
72제 288수
칠언고시1수
배율 2수
177제400수
5
17제 32수
9제 9수
58제 66수
57제 75수
육률시3수
오언고시1수
143제186수
6
0
0
0
0
0
0
7
9제 9수
35제 38수
12제 12수
43제 44수
육율시 1수
100제104수
8
40제 41수
30제 30수
58제 67수
42제 42수
0
170제180수
9
16제 16수
19제 19수
69제 70수
41제 41수
0
145제146수
10
1제 1수
6제 8수
2제 3수
20제 21수
0
29제 33수
11
1제 1수
34제 34수
2제 2수
37제 117수
칠언고시6수
75제 160수
12
2제 2수
21제 23수
1제 1수
32제 32수
0
56제 58수
13
5제 5수
23제 24수
13제 23수
78제 133수
3첩시 1수
2첩시 1수
121제187수
계
164제191수
325제488수
328제369수
716제1,170수
15제 24수
1,548제 2,242수
1. 「조과소사평부이앙」의 감상
「조과소사평부이앙」은 김진휴가 1834년 과거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고향에 내려왔다가 2년 후 다시 서울로 가는 길 아침에 소사주 27) 넓은 들판을 지나며 모내기를 하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을 보고 그 감회를 노래한 시이다. 이 시의 형식은 근체시 오언율시이며, 상성上聲 마자馬字 운자로 압운하였으며, 이 시는 『둔인수록』 권1에 실려 있다.
혹은 엎드리고 혹은 서서或伏仍或立
백로처럼 무리지어 내려오네.隊隊群鷺下
김매려고 밭에 올라가는 사람上田耘草人
모심으려 논에 내려가는 사람.下田移秧者
열 손가락 노고를 몇 번이나 하면幾度十指勞
여덟 농가 주림 겨우 면할까.纔免八口餓
유식遊食하는 객은 스스로 돌아보고自顧游食客
얼굴을 붉히지 않을 수 없네.주 28)能不顔如赭
시의 화자가 서울로 가던 길에서 바라보이는 들판에 일하는 농부들은 삼삼오오三三五五 무리 지어 놀고 있는 백로처럼 보였다. 한 여름이라 풀이 우거진 밭에 풀을 매려고 올라가는 사람들, 모를 심기 위해 바지를 걷고 논에 들어가는 사람들, 화자의 시야에 농촌의 아침 들판은 여기저기서 모두가 야단법석이다.
아침 일찍 길을 재촉하면서도 지나가는 객은 마음의 여유를 부리는가. 밭에서 김을 매고 논에서 분주하게 모를 심는 농부의 노고를 손가락으로 헤어본다. 예나 지금이나 농사를 짓고는 가난을 벗어나기 어렵나 보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여덟 식구 끼니를 겨우 면한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선비의 마음엔 미안함이 있었나 보다. 부지런히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유식遊食하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니, 부끄러운 마음에 절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으니 말이다.
경련은 "열 손가락 노고를 몇 번이나 하면, 여덟 농가 굶주림 겨우 면할까.주 29)"라고 하였다. 여덟 농가 농부의 걱정스런 마음은 있으나 여덟 농가 식구들의 원망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노동요가 멀리서 들려온 듯하다.
미련은 시간적 배경이 오전 새참 무렵으로 보인다. 여기저기 논밭두둑에 서서 위아래로 손짓하며 새참을 먹고 잠시 쉬었다 하라고 서로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농촌의 한가로운 시골 구수한 인정이 물씬 풍겨온다. 소사의 아침 들판에서 우리 조상들은 삶에서 여유롭게 막걸리 한 사발 마시며 고단한 농사일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슬기로운 지혜가 엿보인다. 농사가 한창일 때 품앗이는 향약鄕約과 같이 이웃끼리 서로 도와주는 미풍양속이다. 농촌의 농사철 만중한忙中閑의 여유가 있는 들판에는 어느새 풍년가가 들려오고, 농부들은 논바닥에 가득히 들어서서 한 손에는 모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구수한 인정을 들고 서 있었다.
2. 「영포채십육종」의 감상
『둔인수록』 권5에 실려 있는 「영포채십육종」은 농촌에서 재배되는 채소의 특징을 사실적으로, 혹은 해학으로 노래한 시로, 16종의 채소를 읊은 전체 16수의 작품이다. 시의 소재는 농부가 봄부터 가을 서리가 내릴 때까지 시간을 따라 농촌의 남새밭에서 심고 가꾸는 채소들이다. 항상 식단에 올라와 우리가 아침저녁으로 먹을 수 있는 친근감 있는 채소 16종이다. 그는 「영포채십육종」을 통하여 농촌의 일상적인 생활과 다양한 채소의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본 절에서는 우리의 식단에 올라오는 채소 16종에 숨어있는 특징을 시의 화자가 어떻게 표현하였는지 살펴보고 감상하려고 한다.
뽕나무 그늘 두 이랑 가량桑陰二畝半
가랑비 봄바람에 내리네.纖雨下東風
추운 겨울 품고 자란 뒤라時蓄玄冬後
채소 향내 집안 가득하네.蔬香滿屋中
첫째, 「봉비葑菲」다. 이른 봄에 나오는 나물식물 달래를 말한다. 농촌의 산자락 뽕나무밭 어디에서든지 흔히 보이는 나물채소이다. 시의 화자는 기구起句에서 달래가 뽕나무밭 양지바른 쪽으로 두어 이랑 파릇파릇 새싹을 보았다. 달래는 추운 겨울을 어떻게 지냈을까? 전구轉句에서는 따스한 봄바람에 가랑비가 살짝 내렸다. 화자의 시야에는 시골 처녀가 삼삼오오 앉아 도란도란 나물 뜯는 모습이 시각적 이미지로 선하였다. 달래는 냉이와 함께 봄의 전령사로 알려져 있다. 겨우내 언 땅을 헤집고 뾰족이 나와 봄소식을 제일 먼저 전한다. 결국 시의 화자는 결구結句에서 집마다 풍기는 풋풋한 달래의 봄 향내를 후각적 이미지를 살려 자극하고 있다.
고기반찬 없다 걱정하지 않으려고不愁食無肉
작은 동산에 아욱 심어두었지.措置小園葵
싱싱하기가 마힐摩詰 같아주 30)淸淡如摩詰
이슬 털고 따러 가네.露中乎折之
둘째, 「규葵」다. 채소 아욱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심어왔는지 확실하지 않다. 아욱은 어린 순과 잎을 따서 국을 끓여 먹거나, 씨를 약으로 사용한다. 씨는 동규자冬葵子라고 하여 한방에서 이뇨제利尿劑로 사용한다. 『향약구급방』에는 규자葵子, 『산림경제』에는 관상식물로 규葵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아욱을 지칭한 말이다.
시의 화자는 기구起句에서 아욱국이 고기반찬 부럽지 않다고 하였다. 늦은 봄 새벽에 일찍 일어나 더욱 싱싱한 아욱 잎을 따려고 이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찍이 옥담玉潭 이응희李應禧는 아욱을 "기운은 소자의 죽순보다 낫고, 향기는 계응의 순채보다 낫네.주 31)"라고 하였다. 이 시에서 화자는 아침 일찍 구수한 된장국을 끓으려고 남새밭에 아욱을 찾아 나선 것을 알 수 있다.
가소롭다 제해자齊諧子주 32)可笑齊諧子
요주가 부질없이 황당하다고 말하였지.坳舟謾說荒
몰랐네 맑고 시원한 기운不知淸爽氣
코를 베고 창자를 찌르는걸.斤鼻且鍼腸
셋째, 「개芥」이다. 채소 겨자를 말한다. 톡 쏘는 매운맛과 향기가 특징인 겨자는 대부분 지역에서 널리 재배되어 음식에 두루 활용되고 있는 채소이다.
시의 화자는 요주坳舟(겨자)가 황당하다고 부질없이 말한 제해齊諧는 가소롭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제해는 겨자가 톡 쏘는 향으로 코를 베고 창자를 찌르는 맑고 시원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줄 모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가련하다 너의 천성憐爾性之天
크고 단단하고 오래될수록 맵네.高强老逾辣
겨우 입에서纔於齒舌間
마음이 확 트임을 문득 알았네.頓覺靈臺豁
넷째, 「강薑」이다. 채소 생강을 말한다. 『동의보감』 「생강」에서 생강의 효능은 "성질이 약간 따뜻하고 맛이 매우며 독이 없다. 오장으로 들어가고 담을 삭이며 기를 내리고 토하는 것을 멎게 한다. 또 동한風寒과 습기를 없애고 딸꾹질하며 기운이 치미는 것과 숨이 차고 기침하는 것을 치료한다. (중간 생략) 건강乾薑을 많이 쓰면 정기正氣가 줄어드는데 이렇게 된 때에는 생감초를 써서 완화시켜야 한다."주 33) 라고 하였다.
시의 화자는 여기에서 생강이 이와 혀 사이, 곧 입에서 우리들의 답답한 마음을 확 트이게 하는 담膽을 삭이는 효능을 강조하여 말하였다. 흔히 겨울철 감기가 오면 사람들은 생강차를 즐겨 마신다.
사방 한 치 집 서쪽 밭이랑에方寸屋西畦
가는 실은 봄을 맞아 푸르네.細絲春理碧
뒤웅박과 꽃을 맺고匏瓜與結芳
소반에 묻혀 나를 권유하네.侑我盤中麥
다섯째, 「총蔥」이다. 채소 파를 말한다. 담장 너머 사방 한 치 작은 남새밭에 파는 봄을 맞아 실처럼 푸르다. 마침 울타리에는 뒤웅박이 꽃을 맺었나 보다. 그러나 파는 밥상에 올라오면 보이지 않는다. 파는 주로 각종 음식의 양념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특히 고기와 생선의 좋지 못한 냄새를 없애주는 구실을 한다.
시의 화자는 사방 한 치의 서쪽 담장 너머 파릇한 실 같은 파가 봄비를 맞아 더욱 푸르다고 시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한편 화자는 파를 의인화하여 뒤웅박이 어느새 꽃을 맺자 파는 혼자서 사람들에게 가지 못하고 먹음직한 뒤웅박을 유혹하여 아침 밥상에 뒤웅박 무침이 되어 함께 오르곤 하였다.
청낭靑囊주 34)을 꺼리지 않고休把忌靑囊
막힘을 이롭게 함을 넉넉히 보네.贏看利疏滯
사월 밥상에 오른 막걸리濁醪四月床
초계椒桂주 35)보다 백배나 좋은걸.百倍於椒桂
여섯째, 「산蒜」이다. 채소 마늘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마늘의 도입 시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이미 『단군신화』에 마늘이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입추 후 해일亥日에 마늘밭에 후농제後農祭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마늘이 약용·식용작물 등으로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마늘은 소객騷客이 시를 지을 때 필요한 시낭詩囊도 없이 시가 절로 이루어지듯 소화가 안 되어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결구結句는 음력 사월, 농촌은 농사일이 시작된다. 바쁜 농사일 가운데 잠깐씩 바쁜 일손을 멈추고, 고단한 몸을 펼 때 막걸리를 마신다. 이때 막걸리 안주로 마늘은 제격이다. 때문에 시의 화자는 마늘이 고기 안주인 초계椒桂보다 백배나 좋다고 하였다.
세상은 벽곡주 36)할 수 있다고 하니世稱能辟穀
먹고 앉아서 선인이 되었네.餌可坐成僊
군자 같아 사랑하니獨愛如君子
천연天然 지상의 연꽃이네.天然地上蓮
일곱째, 「우芋」이다. 땅속 식물 채소 토란을 말한다. 땅토란·우자芋子·토련土蓮·토지土芝라고도 한다. 고온성 식물로서 고온 다습한 곳에서 잘 자란다. 땅속에서 여러 개 감자 모양으로 달려 있다. 재래종은 조생종으로서 줄기가 푸르고 새끼토란의 알이 작다. 덩이줄기는 새끼토란과 어미토란으로 구분하는데 어미 토란은 떫은맛이 강하여 대부분 먹지 못한다. 식용·약용으로 이용된다. 덩이줄기와 잎자루를 식용한다. 덩이줄기는 주로 국을 끓여 먹고 굽거나 쪄서 먹는다.
토란은 채소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걸맞지 않다. 가을에 수확하여 알토란으로 토란탕, 토란국으로 먹으며, 잎과 줄기는 말려 대보름에 나물로 주로 밥상에 올라온다. 이응희의 『옥담시집』 「우芋」 미련尾聯에서 "세속에서는 무립이라고 부르니 / 늙은이 음식으로 제격이네.〔俗名稱毋立, 端合老翁飧.〕"라고 하였다. 그러나 시의 화자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벽곡할 수 있다고 하여 먹고 신선이 되고 싶었다. 또한 북송의 학자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 나오는 연蓮의 모습과 흡사한 토란의 외적 모습을 보고, 토란의 군자다움을 유달리 사랑한다고 하였다.
바람에 춤을 추니 넓은 자리 같고舞風大如蓆
비에 목욕하니 구름보다 보드랍네.沐雨軟於雲
못난 여종 질투심을 감추지 못하고痴婢不勝妬
주름진 치마와 견주어보네.較看皴幅帬
여덟째, 「송菘」이다. 배추를 말한다. 배추는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저온성 채소이다.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 배추가 처음 등장한다.주 37) 무, 고추, 마늘과 함께 4대 주요 채소며, 배추는 김치의 주재료이다.
일찍이 남제南齊 때의 은사 주옹周顒은 문덕태자文德太子가 채식 중에 어떤 나물의 맛이 가장 좋더냐고 묻자, "초봄의 이른 부추나물과 늦가을의 배추였습니다.주 38)"라고 대답하였다. 시의 화자 눈에는 구름처럼 보드라운 배추 잎이 질투하는 여종의 치마로 변화하였다. 이는 배추가 서민적인 사랑을 듬뿍 받은 배추김치의 다른 표현이다. 찬바람 불기 시작하여 김장하는 날, 동네 아낙 다모여 아궁이에 불 지피우고 돼지고기가 익어가는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에 김장하는 모습이 아련하다.
푸른 잎에 찬밥 쌈靑葉裹寒飱
일생의 업으로 즐기었지.一生業吾耆
온갖 생각 다 재로 보내버리고千思都付灰
다시 흔쾌히 단잠을 부르네.更快招甘睡
아홉째, 「상초裳草」이다. 쌈 채소 상추를 말한다. 와거萵苣·와채萵菜라고도 한다. 중국의 고서인 『천록식여天祿識餘』에 의하면, 고려高麗의 상추는 질이 매우 좋아 고려 사신이 가져 온 상추 씨앗은 천금을 주어야만 얻을 수 있다고 하여 '천금채'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의 화자는 여름날 싱싱한 상추의 상추쌈을 무척 즐겼다. 그러나 그는 현대인처럼 고기쌈을 즐긴 것이 아니었다. 온갖 잡념 잠시 잊고 싶을 때 잠을 부르려고 하였음을 여기에서는 알 수 있다. 화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상추는 줄기에서 나오는 우윳빛 즙액에 락투세린·락투신 등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이 상추는 진통 또는 최면효과가 있다. 따라서 상추를 많이 먹으면 잠이 오는 이유도 이 때문인 것이다.
꼭지가 땅에 떨어지기 어려워着地蒂難爲
울타리를 따라 넝쿨로 뻗어가네.托籬方莚蔓
비로소 오르고 내려가는 사이에始識升沈間
한 자와 한 치 분명함을 알았네.短長分尺寸
열째, 「척라尺蓏」이다. 오이를 말한다. 오이는 익으면 노란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황과'(黃瓜)라고도 부른다. 『동의보감』에서 오이의 효능은 "오이(胡瓜)는 성질이 차고[寒] 맛이 달며[甘] 독이 없다. 많이 먹으면 한기와 열기가 동하고 학질이 생긴다. 오이 잎인 호과엽胡瓜葉은 어린이의 섬벽閃癖을 치료하는데, 주물러 즙을 내어 먹인 다음 토하거나 설사하면 좋다. 그리고 오이 뿌리인 호과근胡瓜根은 참대나 나무가시에 찔려서 생긴 독종毒腫에 짓찧어 붙인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이는 넝쿨식물이다. 농촌에 가면 어디든지 담장을 따라 오이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이는 속성의 성질이 있어 금방 자란다. 때문에 시의 화자는 오이가 꼭지가 땅에 떨어지기 싫어 담장을 따라 넝쿨로 자라고 빨리 자라는 오이의 속성을 전체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층층마다 푸른 옥 아름답고層層蒼玉嫩
농가의 별미라네.滋味野人家
서리화랑주 39) 기다렸다가留待霜花郞
누렇고 달게 늙으니 더욱 아름답네.黃甜老更嘉
열 한번째, 「남라南蓏」이다. 넝쿨채소 호박을 말한다. 호박은 『동의보감東醫寶鑑』의 축소판인 『방약합편方藥合編』에는 '남과'(南瓜)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는 "서리가 내린 다음에 거둬들여 따뜻한 곳에 보관하면 이듬해 봄까지 저장이 가능하다. 씨는 동아[동과冬瓜] 씨와 비슷하며 살은 두텁고 노란빛이 난다. 호박은 날로 먹지는 못하고 껍질을 제거한 다음 쪄서 먹는데 마[산약山藥]와 같은 맛이 난다. 돼지고기와 같이 끓여 먹으면 더욱 좋으며 꿀을 넣어 달이기도 한다."라고 했다.
호박은 호박볶음에서부터 호박전, 호박조림, 호박찌개, 호박나물, 호박죽, 호박고지, 호박떡, 호박엿에 이르기까지 종류만 해도 손으로 다 꼽기 힘들다. 애호박은 애호박대로, 늙은 호박은 늙은 호박대로 다양하게 요리해 먹는다. 호박을 직접 먹는 것 외에도 된장찌개에 호박 줄기를 넣으면 맛이 더 산뜻하고 찐 호박에 된장을 얹어 싸먹는 호박 쌈은 여름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별미다.
시의 화자는 여름 내내 마디마디 달려 있는 애호박은 푸른 옥으로 비유하고, 전과 된장찌개를 끓여먹는 농가의 별미라고 하였다. 어찌 그뿐이랴 찬 서리 내리기를 기다려 덩그렁 국화 담장에 매달려 있는 늙은 호박은 최고의 별미로 칭찬하였다.
희고 둥근 달 일천 알白團月千顆
초가집 처마에 어지럽게 떨어져있네.錯落短簷茆
서생주 40)의 오음五音의 입措大五音口
박 하나 잘도 울리네.주 41)善鳴又一匏
열 두번째, 「호瓠」이다. 박을 말한다. 박은 「흥부전」을 보면 흥부가 제비를 구해준 대가로 박씨를 얻어 심는 대목이 나오는데, 제비가 겨울을 나는 따뜻한 곳에서 박이 자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신라新羅」에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朴赫居世가 박에서 나왔다는 기록을 보아 박은 신라 이전부터 있었다.
박은 덜 익은 박을 잘라 속을 빼버리고 길게 국수처럼 오려 말린 박고지는 반찬으로 쓰며, 덜 익은 박을 잘게 썰어 김치를 담그기도 한다. 박속으로는 나물을 만들기도 하며, 엿에 담가 과자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박에는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많이 들어 있으며, 특히 식물성 칼슘이 풍부해 발육이 늦는 어린이나 아이를 낳은 부인들에게 좋은 영양식품으로 쓰인다. 잘 익은 박은 타거나 구멍을 파서 속을 뺀 뒤 삶아 바가지로 사용한다.
시의 화자는 농가의 초가지붕에 주렁주렁 열려 있는 박에 달이 비친 모습을 말하였다. 단란한 흥부네 식구 같은 외딴 시골집 지붕에 밝은 달이 휘영청 내리비칠 때, 가난한 서생의 집에서는 호파瓠巴의 비파 소리가 들여온 듯하다.
누가 심어 전하였을까阿誰傳此種
서가書架를 채우니 옹기보다 크다네.盈架大於甕
박망博望으로 알게 했다면주 42)若使博望知
서역에 먼저 바쳤을 텐데.應先西域貢
열 세번째, 「동라東蓏주 43)」이다. 열매채소 동아를 말한다. 동과冬瓜·동화冬花라고도 한다.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에 이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조선 초기에 이미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음식지미방』·『산림경제』·『주방문酒方文』 등의 문헌에 동화선·동화누르미·동화적·동화증·동화돈채 등 다양한 조리법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현재는 널리 쓰이지 않지만 조선시대에는 많이 재배되고 이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식용 이외에 약용으로도 쓰여 『향약채취월령』·『동의보감』 등에 그 효능이 기록되어 있다. 약효는 가래를 제거하면서 기침을 멎게 하고, 폐농양이나 충수염 등에 소염의 효과가 있으며, 이뇨작용도 한다.
시의 화자는 누가 심었는지 모르는 동아를 武帝의 명을 받아 서역 일대로 사신을 떠난 박망博望에게 먼저 알려주었다면 서역에 먼저 조세로 바쳤을 텐데 아쉬워하고 있다.
목련처럼 드리워져垂垂似木蓮
꼭지도 없이 헛되이 늘어졌네.結蒂無虛朶
담백한 맛 요리는 되지만澹味主人廚
절대 국이나 절임은 못한다네.羹菹靡不可
열 네번째, 「가자茄子」이다. 열매채소 가지를 말한다. 가지는 『동의보감』과 『방약합편』에 명칭이 '가자'(茄子)이다. 가지의 별명은 '곤륜과'(崑崙瓜)다. 『동의보감』에서는 "가지의 성질은 차고[한寒] 맛이 달며[감甘] 독이 없다. 추웠다가 열이 났다 하는 오장허로를 치료한다."라고 하였다. 가지는 여름철 음식이다. 후텁지근한 날씨로 온몸이 끈적거릴 때 먹는 가지볶음과 가지찜, 더위에 지쳐 헉헉거릴 때 시원하게 땀을 식혀주는 가지 냉국은 여름에 먹어야 제 맛이다. 한방에서도 가지는 성질이 차가워 한여름에 먹으면 더위를 식힐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찬 성질로 인해 너무 많이 먹으면 몸에 좋지 않다고 하는데, 아이를 가진 며느리에게는 가지를 먹이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민간에서 떠도는 속설이지만 明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강목』에 근거를 두고 나온 말이다.
시의 화자는 가지가 담백한 맛으로 요리는 가능하지만 다른 채소처럼 국이나 절임은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꽃처럼 붉게 활활 타오르고似花紅熚爛
서리 맞은 뒤 산가山家에서 빛나네.霜後耀山居
맛과 색을 겸할 수 있으니味色能兼得
온갖 채소를 도와 화려하게 하네.華滋佐百蔬
열 다섯번째, 「고초古椒」이다. 열매채소 고추를 말한다. 고추는 만초蠻椒, 남만초南蠻椒, 번초蕃椒, 왜초倭椒, 날가辣茄, 당초唐椒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지봉유설芝峯類說』에는 "남만초南蠻椒는 대독大毒하다. 처음 왜국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세속에서 '왜개자倭芥子'라 한다. 요즘은 자주 심는데 술집에서 몹시 매운 것을 이용한다(술안주로 고추를 먹는다). 혹 고추를 소주에 타서 팔기도 하는데 이것을 마신 사람이 많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고추는 어린 열매와 잎이 함께 졸이거나 데쳐서 나물로 이용된다. 풋고추는 고추장이나 된장에 찍어 먹는다. 또 반으로 쪼개어 속에 두부·쇠고기 등을 버무려 넣어서 煎을 만드는 데 쓰이기도 하고, 통째로 구멍을 뚫어 젓국에 절여 놓았다가 겨울철의 밑반찬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홍고추는 생것을 갈아서 나물의 조미료로 이용하며, 건고추는 가루를 내어 김치의 양념으로 쓰거나 고추장을 담그는 데 이용한다. 초와 어울린 초고추장은 회와 생선회의 양념장으로 중요하다. 고추장에 오이·무·마늘종 등을 박아서 독특한 맛의 고추장장아찌도 만들게 되었고, 비빔밥의 풍모도 일신하여 놓았다.
시의 화자는 산가山家에서 가을날 고추를 말리는 모습을 노래하였다. 한편 빨간 고춧가루가 음식에 들어가면 화려하고 맛있게 보이는 시각적 이미지를 온갖 채소와 어우러져 있는 김치 양념으로써 고추를 가져와 시의 분위기를 살려내었다.
남쪽 고을주 44) 평생 몸魚稻百年身
네 덕에 항상 병이 적었지.賴渠恒少疾
맞다고 믿는 고을사람信宜中國人
내가 인삼을 먹었다 하네.謂我服葠朮
열 여섯번째, 「나복蘿葍」이다. 뿌리채소 무를 말한다. 무는 김치·깍두기·무말랭이·단무지 등 그 이용이 매우 다양하다. 무에 있는 독특한 쏘는 맛의 성분은 무에 함유된 티오글루코사이드가 잘리거나 세포가 파괴되었을 때 자체 내에 있는 글루코사이다아제라는 효소에 의하여 티오시아네이트와 이소티오시아네이트로 분리되며 독특한 향과 맛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무즙에는 디아스타아제라는 효소가 있어 소화를 촉진시키기도 한다.
시의 화자는 선천적으로 몸이 허약하였다. 때문에 남쪽의 고향 농촌에서 자라면서 그는 항상 인삼대신 값이 싼 무를 즐겨 먹었다고 하였다. 시에서는 고을 사람들은 무의 효능이 인삼의 효능과 같음을 일찍부터 믿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내가 인삼을 복용하였다고 놀려 말하였다.
5. 맺음말
본 논문은 지금까지 둔암鈍庵 김진휴金震休의 유고 『둔인수록鈍人隨錄』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유고의 성격과 문학적 가치를 살펴보았다. 또한 김진휴의 시에서는 「조과소사평부이앙」과 「영포채십육종」을 감상하여 보았다.
『둔인수록』은 19세기 서구열강의 외세침략으로 급변하는 근대의 태동기에 이루어진 작품으로 구한말 조선의 농촌사회 일면을 보여주었다. 아침에 소사素沙 들판을 지나며 모내기하는 모습의 감회를 지은 「조과소사평부이앙」은 조선의 농촌사회에서만 보이는 품앗이의 과정과 새참을 나누어 먹는 구수한 인정을 연상케 하였다. 또 농촌의 남새밭에서 재배하는 채소 16종을 노래한 「영포채십육종」은 다양한 채소를 사실적으로 혹은 해학적으로 노래하고 있었다.
한편 『둔인수록』은 아쉽게도 아직 선현 문집으로 간행되지는 않았으나 해제에서 살펴보았듯이 문집의 형식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또 그 작품마다 보여주는 내용은 근대 농촌사회의 모습을 연구하는 학계의 참고문헌 자료로써 그 기여도가 중차대함을 보여주었다. 특히 강원도 관동과 관서 두 지역에 산재해 있는 누정을 유람하며 명승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 승경을 읊은 경물시景物詩와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한 지역을 지나가면서 그 지역의 감회를 읊은 서사적 서경시에서는 향후 지역사회 관광발전과 지역문화의 고찰연구에 공헌하는 바가 크다고 여겨진다.
논자는 이 두 측면에서 『둔인수록』이 내재하고 있는 의의와 문학적 가치는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둔인수록』은 근대 태동기 문文·사史·철哲을 고루 갖춘 선현의 문집으로 자리매김하여 19세기 근대 유학자이자 정치가로서의 호남인 김진휴의 문학세계에 여러 사람들이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
【참고문헌】
『鈍人隨錄』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東醫寶鑑』
『本草綱目』
『鄕藥救急方』
『維摩詰經』, 「入不二法門品」
『晉書』 권92 「文苑列傳·張翰」
『玉潭詩集』 「萬物篇·蔬菜類」
『莊子』 「逍遙遊」
『楚辭』 「九歌·東皇太一」
『南史』 권34 「周顒列傳」
『文忠集』 권3 「拒霜花」
『荀子』 「勸學」
『荊楚歲時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