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오유고(東塢遺稿)』 해제
1. 생애와 사승·교유조의곤(曺毅坤, 1832~1893)의 자는 사홍(士弘)이고, 호는 동오(東塢)이며,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시조는 계룡(繼龍)이다. 선조 휘 침(琛) 때에 모양(牟陽, 전북 고창)으로 내려와 살면서 자손들이 세거하였다. 수계(壽階)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오른 5대조 휘 언징(彥徵)은 한익(漢翊)의 막내아들로 형조참판으로 추증된 휘 한명(漢明)의 양자로 들어갔다. 호는 삼오(三吾)이다. 고조의 휘는 수량(守亮), 증조의 휘는 영화(永華), 조부의 휘는 계성(啓聖)이다. 부친의 휘는 현위(炫瑋)이고, 모친은 죽산안씨(竹山安氏)로 안광영(安光暎)의 딸이다. 조의곤은 1832년(순조 32) 5월 6일 검암리(儉巖里, 현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월암리)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맑고 순수하였으며 기질이 총명하였고, 효도하고 우애하는 성품을 갖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을 어른들이 아이들과 놀고 있는 의젓한 조의곤의 모습을 돌[石] 중의 옥(玉)과 같다고 해서 조의곤의 어릴 적 이름은 석(石)이었다.
1847년(헌종 13) 16세 때에 노사 기정진에게 집지(執贄)하고 이때부터 과거 공부를 마다하고 오로지 자신을 닦아 널리 경서를 공부하였다. 기정진이 평상시 말씀하신 여러 가지 가르침에 대해 "아무리 총명해도 둔한 붓보다 못하다.[聰明不如鈍筆]"라고 하며 모두 기록하였다. 이 기록은 문집을 발간할 적에 「강산차록(江山箚錄)」이라는 제목으로 권4에 수록되어 있다. 37세 때인 1868년(고종 5) 겨울에는 노사 기정진을 모시고 관암(觀庵)에서 유숙하면서 시를 짓기도 하였다. 1870년(고종 7)에는 기정진이 「동오기(東塢記)」를 지어주었다.
1876년(고종 13) 겨울 조의곤이 노사 선생을 담대헌(澹對軒)에서 모셨는데, 한밤중에 노사 선생이 일어나 꿈속의 일을 노래로 읊조리자 이를 듣고 조의곤은 "세상을 싫어하는 뜻을 밤에 노래로 드러내셨으니, 아마도 선생님이 장차 병환이 있겠구나."하고 종종걸음으로 급히 달려가 노사 선생을 뵈었다. 노사는 "그대는 어찌하여 늦게 왔는가. 어제저녁 꾸었던 꿈을 노래로 불렀으니, 이것이 바로 나의 명사(命詞)라네. 노래 한 구절을 지었으니 기억하게."라고 말하였다. 조의곤은 나오면서 비통해하며 "철인이 세상을 떠나면 나는 장차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고 하였다.
46세 때인 1877년(고종 14)에 아버지가 위독해지자 걸음을 똑바로 걷지 못할 정도로 걱정하였으며, 약을 달이고 죽을 끓이는 일이나 요강을 비우고 옷을 세탁하는 일을 반드시 친히 행하였다. 그해 8월 19일에 부친이 세상을 떠났다.
1879년(고종 16) 스승 기정진이 세상을 떠나자 빈렴(殯斂)에서 장제(葬祭)까지 어버이를 여읜 것같이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가마(加麻)와 심상(心喪)을 면재(勉齋) 황간(黃榦)이 주자의 상제(喪制)에 행한 고사처럼 하였다. 그 후 행장을 챙겨 고향으로 가서 동오정[처음 전북 고창군 고창읍 석정리에 지었는데, 현재는 고창읍 월산리로 옮겼다.]을 짓고 은거하면서 강학 활동을 하였다. 고을에서 조의곤을 조정에 추천하려고 하였는데 그때마다 글을 보내 중지시켰고, 고을 수령이 조의곤을 만나자고 해도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서제(庶弟) 하곤(河坤), 한곤(漢坤)에게는 성심껏 살림살이를 도왔을 뿐만 아니라 사소한 음식이나 물품도 반드시 나누었다.
1892년(고종 29) 12월 동문과 함께 노사 선생 고택에서 설을 쇠었다. 12월 29일이 노사 선생의 기일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병이 들었다. 자식들이 소식을 듣고 귀가를 청하였지만, 조의곤이 "나는 선생 댁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를 계기로 병이 더욱 심해져 1893년(고종 30) 1월 22일 인시(寅時) 석정(石汀)의 침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62세였다. 기우만이 곡하고 명정에 '동오처사(東塢處士)'라고 썼다. 3월 15일 장성부 북일면 금량동(金良洞) 선영에 장사 지냈다. 부인은 광산김씨로 김문순(金文珣)의 딸이다.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석휴(錫休)이고, 딸은 고흥류씨 류윤석(柳允錫)에게 시집갔다.
조의곤은 위정(衛正)을 자기 임무로 삼고서 비록 초야에 있어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학자들의 독서 방법을 지적하며 "지금 사람들의 독서는 모두 이해를 하지 않고 오로지 외우는 데만 힘을 쓴다. 비록 만권을 읽어도 우리 자신에게 무슨 이익이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의곤이 교유한 인물은 기기진(奇麒鎭), 기우만(奇宇萬, 1846~1916), 기양연(奇陽衍, 1827~1895), 기홍연(奇弘衍, 1828~1898), 이희석(李僖錫, 1804~1889), 안중섭(安重燮, 1808~1883), 김록휴(金祿休, 1827~1899), 한진석(韓晉錫, 1833~1909), 송영(宋暎), 박승양(朴升陽), 안달삼(安達三, 1837~?), 고제만(高濟萬, 1849~1914), 김재석(金在錫) 등과 영남의 노사 문인인 조성가(趙性家, 1824~1904), 민치완(閔致完, 1838~1911), 정재규(鄭載圭, 1843~1911), 최숙민(崔琡民, 1837~1904) 등이 있다.
2. 구성과 내용『 동오유고(東塢遺稿)는 조의곤(曺毅坤)의 문집으로 1899년에 아들 조석휴(曺錫休)가 편집하여 부록 2권을 포함하여 6권 2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권두에 기우만(奇宇萬)의 서문과 권말에 족자(族子) 조석일(曺錫一)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 82제 123수가 있고, 권2에 서(書) 39편이 있다. 권3에 제문 5편, 축문 5편, 잠(箴) 1편, 잡저(雜著) 5편, 서문(敍文) 1편, 기문 3편, 발문 2편이 있고, 권4에 「강산차록(江山箚錄)」 수록되어 있다. 부록 권1은 제문 7편, 만시 7편이 있고, 권2는 가장, 행장, 묘갈명이 수록되어 있다.
권1의 시는 지은 시기에 따라 편차(編次)되어 있고, 체제를 가리지 않고 실려 있다. 내용은 사우와 강회(講會)를 하며 읊은 시, 서로 만나 수창(酬唱)한 시, 이별하며 지어 준 시, 경물(景物)을 읊은 시, 제야(除夜)의 감회를 읊은 시, 만시(挽詩) 등이 있다. 그 가운데 「동오제경(東塢諸景)」 25수는 오언절구로, 동오정사(東塢精舍), 서봉신월(西峯新月), 매천소우(梅川疏雨) 등 동오(東塢)의 아름다운 경치와 한가한 정경을 그려내었다. 「경차도핵배운(敬次桃核盃韻)」 2수는 각각 오언절구와 칠언율시로 조의곤의 집안에 전해 내려와 보관되고 있는 15대조 청간공(淸㵎公) 조서(曺庶)가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명나라 황제에게 하사받았던 도핵배(桃核盃)에 대한 작품이다. 조서는 1398년(태조 7)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황제를 배알하고 공물(供物)을 줄여 달라고 요청하였다가 참소를 당해 수년간 금치국(金齒國)에 유배되었다. 그 후 명나라 황제는 강직한 충절에 탄복하여 사면해 주면서 복숭아 씨앗에 금과 은으로 상감(象嵌)해서 만든 도핵배(桃核杯)를 하사품으로 내려주었다. 청간공 조서의 현손이 바로 고창으로 입향한 조침(曺琛)이다.
권2에는 편지 39편이 실려 있다. 스승 노사 기정진을 비롯하여 족인(族人)과 사위 류윤석에게 보낸 것이 있다. 그 외 조성가, 이희석, 김녹휴, 안중섭, 기우만, 기양연, 안달삼 등 동문에게 보낸 안부 편지가 주를 이룬다. 「상노사선생서(上盧沙先生書)」는 1870년 노사가 지어준 「동오기」에 한 것과 1879년 노사의 병증에 관한 내용이다. 「여담양전씨간소(與潭陽田氏刊所)」는 고려말 두문동(杜門洞) 72현(賢) 중 삼은(三隱) 즉, 야은(壄隱) 전녹생(田祿生), 뇌은(耒隱) 전귀생(田貴生),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 삼 형제의 합집(合集) 문헌 발행본을 받고서 감사의 편지를 보낸 내용이다. 「답교회소(答校會所)」는 내용상 어떤 문집인지 알 수 없으나, 간행 유사 직책을 사양하는 답장이다.
권3에는 제문 5편, 축문 5편, 잠(箴) 1편, 잡저(雜著) 5편, 서(敍) 1편, 기(記) 3편, 발(跋) 2편이 수록되어 있다. 제문은 기우기(奇宇夔), 김기설(金箕說), 노사 기정진, 고제만, 안중섭에 대한 추모의 글이다. 기우기는 기우만의 큰 형이다. 신사년(1881, 고종 18)에 조의곤의 어린 시절 스승인 오천(鰲川) 고제만(高濟萬)에 대한 제문을 썼고, 계미년(1883, 고종 20)에는 안중섭에 대한 제문을 지었는데, 같은 고장에 살았던 회상과 늙은 나이에 과거 합격한 것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안중섭의 자는 순화(舜華), 본관 죽산(竹山)이고, 거주지가 고창이다. 73세 때인 경진년(1880, 고종17)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축문 5편은 모두 기우제(祈雨祭) 때 지은 축문이다. 대상은 반등산(半登山), 성황단(城隍壇), 취령산(鷲靈山) 2수, 화실산(火失山)이다. 잠(箴)은 1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부족외잠(不足畏箴)」이다. 조의곤이 40세 때 쓴 작품으로 4언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의곤이 40세 되던 해 전날 밤에 「사십제석(四十除夕韻)」시를 지어 스승인 기정진에게 보내자, 기정진이 「차조사홍사십제석운(次曺士弘四十除夕韻)」 시를 다음과 지어주었다.
칠십삼 년 세월이 물 따라 흘러가나니 七十三年逐水流
여생이 백척간두를 걷는 것과 흡사하더군 餘生一似步竿頭
무문(無聞)이라는 성인의 가르침 두려워 말고 無聞聖訓君休怕
부지런히 새봄을 잡고 지난 세월을 갚아보게 勤把新春贖舊秋
「부족외잠」은 스승이 시를 통해 알려준 무문(無聞)이라는 가르침을 받고서 스스로 경계로 삼기 위해 지은 것으로 보인다. '무문'과 '부족외(不足畏)'는 『 논어에 "후생을 두렵게 여겨야 할 것이니, 앞으로 후생들이 지금의 나보다 못하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40세나 50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또한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겠다.[後生可畏 焉知來者之不如今也 四十五十而無聞焉 斯亦不足畏也已]"라는 공자의 말에서 원용한 것이다.
잡저(雜著)에는 5편의 글이 실려 있다. 「지도론(止盜論)」은 조의곤의 우국 정신이 드러난 작품으로 당시 민란 등으로 발생했던 혼란과 도둑질을 중지시키는 방도에 관해 쓴 작품이다. 조정과 윗사람들의 솔선수범과 뇌물 금지, 폐단 제거, 비용 절감 등을 제시하고 있다. 「송족제병삼서행설(送族弟昞三西行說)」은 족제(族弟) 조풍곤(曺豊坤)이 서울로 가는데 외국인이 왕래하는 인천의 제물포를 지나니 조심해서 다녀오라며 전송하는 글이다. 「과눌설봉정기상사(寡訥說奉呈奇上舍)」는 기우만이 '과눌(寡訥)' 두 글자를 뽑아 글을 요청하여 쓴 글로 과언(寡言)과 눌언(訥言)의 격언이 실려 있다. 「서증족질석일(書贈族姪錫一)」은 조카 조석일(曺錫一)에게 『 노사집』 중 교훈이 되는 편지 내용 몇 가지를 뽑아서 써준 글이다. 「기몽설(記夢說)」은 기양연이 준 물고기를 연못에 방생했는데, 물고기가 꿈에 나와 서로 대화를 나눈 것을 기록한 글이다.
기문은 「삼석정기(三石亭記)」, 「동오기(東塢記)」, 「청사기(靑舍記)」 3편이 실려 있다. 「삼석정기」는 전북 순창군 복흥면 봉처리 화양(華陽) 마을 근처 신선산(神仙山)에다 기기진이 지었던 정자에 관한 기문이다. 기기진의 자는 원서(元瑞), 호는 삼석(三石)이다. 「동오기(東塢記)」는 스승의 초상을 치르고 귀향하여 마을의 동쪽 언덕 위에 동오정을 짓고서 지은 글이다. 「동오기」 바로 뒤에 경오년(1870, 고종7)에 미리 받아놓은 기정진의 기문 「선사소사기문(先師所賜記文)」이 실려 있다. 조의곤은 동오정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학자들과 학문을 강론하였는데 후일 대원군이 현판을 써주기도 하였다. 동오정은 '동오정사'라고도 불렸는데 원래는 고창군 고창읍 석정리에 세워졌다가, 현재는 월산리에 있는데 최근에 옮겨진 것이다.
「청사기(靑舍記)」는 당나라 왕유(王維)의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의 시구 중 "객사에는 푸릇푸릇 버들 빛 싱그럽네.[客舍靑靑柳色新]"와 은나라 탕왕(湯王)의 「반명(盤銘)」에 "진실로 어느 날 새로워졌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마다 새롭게 하라.[苟日新日日新又日新]"의 '신(新)'을 연관 지어 반성과 수신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발문은 「조씨파보발(曺氏派譜跋)」과 「제외은재가훈시첩후(題畏隱齋家訓詩帖後)」 2편이 실려 있다.
권4 「강산차록(江山箚錄)」은 16세부터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하면서 보고 들은 언행과 스승의 가르침, 고사(故事)와 고담(古談) 및 문답과 견문 등을 기록한 글이다. 내용상 네 가지 분류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 17조까지는 기정진의 교훈과 답술(答述), 이후 28조는 문답 기록, 마지막 8조는 인물들의 시비와 득실에 대한 기록이다. 마지막 대목에서 언급된 인물은 기경연(奇慶衍), 최익현(崔益鉉), 홍시형(洪時衡), 홍만섭(洪萬燮), 기우만, 기양연, 이희석이다.
부록 권1은 제문과 만사로 구성되어 있다. 제문은 조석일(曺錫一), 기우만, 조성주(趙性宙), 기우근(奇宇根), 기경연(奇慶衍), 조홍승(曺洪承), 유윤석(柳允錫), 김준묵(金峻默), 기양연 등이 조의곤을 위해 쓴 제문이 실려 있다. 만사는 유기락(柳基洛), 유광희(柳光熙), 조성가(趙性家), 유지진(柳志晉), 정재규(鄭載圭), 이승환(李升煥), 최숙민(崔琡民)의 글이다.
부록 권2는 아들 조석휴(曺錫休)가 쓴 가장(家狀)과 기우만이 1896년(고종 건양 1)에 쓴 행장, 최익현이 쓴 묘갈명, 조석일(曺錫一)이 1899년(고종 광무 3) 2월에 쓴 발문이 실려 있다.
3. 세부목차序(奇宇萬 1899)
卷 1
詩 : 新寓東塢以一絶詩寄江上諸友, 謹次三淵金先生四絶韻, 次睡雲亭重修韻, 戊辰冬至陪蘆沙先生留觀庵, 題南庵石泉, 東塢原韻, 春夜宿寒山偶題, 讀書南庵奉別觀庵留奇友晉錫宇蕃, 呈江上奇友晉錫, 四十除夕韻 附先師次韻, 辛未冬自沙上將歸覲爲雪所魔更留一日以詩贈諸益三首, 挽奇友章一宇虁, 次鄕人飮酒韻, 寄謝講會諸生, 奇閔都事致完匪所, 次北山朴丈鍾浩新居韻, 東塢諸景二十五首, 敬次桃核盃韻二首, 安君行五達三十年久要瀛海送別不能無贐以一絶詩奉呈聊寄紵縞之義, 謹次醉山朴丈福林新居, 奇晉士會一宇萬甫以長篇二十六句見贈步韻以寄, 奉次奇司果亮衍一鑑亭蓮池韻三絶, 次張友榮汝鉉三餞春詩, 挽姓名欠攷◎二首, 贈李斯文承鶴, 贈別李友日端升煥, 贈姜斯文馨秀, 挽柳丈桐庵志驥, 挽姜丈春坡寅會, 贈金禹範咸子潤遊山行, 追次丁斯文錦齋夜韻, 挽奇友晉錫, 戱呈族人羽瑞三絶, 謹次蘆沙先生回甲除夕韻, 贈柳甥允錫讀書, 步韻答金生峻黙, 贈讀書諸兒, 戱次月皐松沙次柳河東八十韻, 觀庵奉別李丈鳳燮, 送李慶運啓徵歸耽羅, 挽李上舍最善, 挽蘆沙先生, 庚辰五月十夜夢見故友章一相向而哭覺甚悵然舊懷如新成一絶詩記夢, 戱贈任致九, 挽金君穉奎, 庚辰歲除卽余五十除夕也孤露之生奄又哭寢此往四十時其感懷復如何用朱文公四十五十無聞韻續吟一絶以寓自警, 惺惺翁示以原韻請余賡和忘拙謹步以供一粲, 挽金友仲翼采衡, 辛巳暮春扶寧金君伯存鍾順講會于竺山佛宇歸路見訪以二絶詩示之彈指相別步韻追謝, 鄭友國彦在弼與同門諸友修契于文殊寺次四十除夕詩寄示而繼聞諸友有韻因其韻賡和奉呈聊發一笑, 送崔卿五宗衡歸茂山, 辛巳十二月二十九日先師二祥奄過與同門諸益守歲于月松臨別奉呈南坡李丈僖錫, 次琴書齋韻, 乙酉冬至宿黃龍奇友弘衍家主翁與櫟梅諸翁和杜工部至日韻囑余賡之忘拙走次, 悼安達三行五, 華南老人趙胤秀逢環當歸留與信宿臨別贈言, 次華南詞宗, 丙戌除夕與族人友生守歲于儉巖三從叔炫五第, 丁亥上元夜諸益來會, 挽金丈孝源, 贈齋中讀書二首, 次奇上舍麒鎭遊太白山黃池韻, 三石亭月夜追和李上舍喬應城樓題月, 追次喜懼堂韻, 寄奇上舍麒鎭匪所三首, 次鄭翁八狂詩, 追步奇上舍回甲韻, 沙上耕叟奇亮衍以古琴一與唐人所編譜六烏遺之蓋有意也然余素昧音律雖甚愛之奈手疎何三首, 贈宗人三隱翁, 謹次繼春園朴性弘韻, 戱題雙女, 溪隱翁柳樂淵以詩見贈步韻賡和, 採菊, 觀魚, 持月, 初雪, 題對月軒, 鷲棲彦會, 與月皐趙性家龍岡奇弘衍諸名勝留對月軒, 與月皐龍岡留鷲棲旬浹還到東岡, 自鷲棲抵東岡信宿還別, 挽卞丈文華
卷 2
書 : 上蘆沙先生書二, 與族弟子厚載坤二, 與族人羽瑞尹承, 答宗人都事斗煥, 與柳甥允錫與三答二, 答趙月皐性家, 與李南坡僖錫書, 答李太守東奭書, 上李太守載哲書二, 答安上舍重燮書答一與一, 與金莘湖祿休, 與奇松沙宇萬與六答二, 答奇上舍麒鎭答二與二, 答韓寢郞晉錫答二與一, 與奇沃溝亮衍二, 與安敬浩基舜, 答奇立夫宰, 答宋致遠暎, 答朴元淑升陽四, 與奇之日益얼, 與金文兼相晙, 答李慶運啓徵, 答金在璿基衡二, 與安行五達三, 與金大壽命鉉, 答羅儀伯壽宜, 答李士文奎魯, 與金禹範在錫, 與金仲心在沃, 答李日瑞升煥, 答柳悅卿志普, 答梁子克疇黙, 與金仲翼采衡, 與潭陽田氏刊所, 與鄭正言奎三喪側, 答校會所, 答尹宗檜, 答姓名欠攷, 家狀, 行狀(奇宇萬 撰, 1896년), 墓碣銘幷序(崔益鉉 撰)
跋(曺錫一 18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