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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집(薪湖集)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서-집부-별집류
·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 작성주체 편저자 : 김녹휴(金祿休)
· 간사년 辛酉 1981
· 간사지
· 형태사항 크기 : 28 X 18.8 / 석판본 / 서명 : 『신호집(莘湖集)』 / 책수 : 1 / 반곽 : 14.4 X 22 / 有界 / 10行24字 註雙行 / 한자 / 판구 : 花口 / 上下向2葉花紋魚尾
· 소장처 현소장처 : 전남대학교도서관 / 원소장처 : 전남대학교도서관_불명처2
정의

1981년에 간행한 신호(莘湖) 김녹휴(金祿休; 1827∼1899)의 시문집, 3권 1책(석인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의 증손 김정중金김晶中)이 편찬하였다.

해제
『신호집(莘湖集)』 해제

1. 생애와 사승
김녹휴(金祿休, 1827~1899)의 자는 치경(穉敬)이고, 호는 신호(莘湖)이다. 본관은 울산(蔚山)이다. 김덕지(金德摯)가 시조이며, 13대조 김달원(金達遠)은 중파(仲派)의 파조이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가 9대조인데 문정공파의 파조이다. 증조부는 백현(伯賢), 조부는 진사 홍조(弘祖)이다. 부친은 진사 방묵(邦黙)이며 모친은 전의이씨(全義李氏)로 정권(貞權)의 딸이다. 슬하에 4남을 두었는데 응휴(膺休), 경휴(景休), 봉휴(鳳休), 녹휴이다. 4형제 모두 생원시와 진사시에 각각 합격했다. 부인은 영일정씨(迎日鄭氏)로 정재영(鄭在瀅)의 딸이다. 5남 3녀를 낳았는데, 5남은 형조좌랑 흥환(興煥), 생원 영환(永煥), 참봉 주환(冑煥), 주사 준환(駿煥), 주사 종환(琮煥)이다. 첫째 아들 흥환은 일찍 세상을 떠난 백형 응휴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김녹휴1827년(정해, 순조 27) 3월 12일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月坪里)에서 태어났다. 16살 때인 1842년(임인, 헌종 8)에 중형(仲兄)의 권유로 응시하여 향시에 급제하였다. 주변에서 정시(庭試)를 권하자 벼슬을 하는 것은 학문이 넉넉한 뒤에 해야 하는데, 아직 학문이 완성되지 않았는데 벼슬을 하는 것은 임금님을 속이는 일이고 나의 뜻이 아니라며 거부하였다. 그해 겨울에 모친상을 당하여 장사를 지내고 나서 상복을 벗자 산방(山房)에 들어가서 학문에 열중했다.
어려서부터 둘째 형 경휴(景休)에게 학문을 배우다가, 20살이 된 1846년(병오, 헌종 12)부터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의 문하에서 나아가 집지(執贄)하고 수학하였다. 당시 노사 기정진장성 하사리(下沙里, 현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 살고 있었는데, 김녹휴는 그곳과 가까운 곳으로 가기 위해 월평리에서 황룡강 건너 신호리(莘湖里, 전남 장성군 황룡면)로 이거하였다. 경전을 정독하며 학문을 궁구하여 스승께 촉망을 받았다.
51세 때인 1877년(고종 14) 학행(學行)으로 공가감역(繕工假監役)선이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882년(임오, 고종 19) 전북 고창군 부안면 상암리 상포(象浦)에 상외정을 세웠고, 1892년(임진, 고종 29)에는 신호리에 문향정(聞香亭)을 짓고 강학하였다. 「문향정기(聞香亭記)」를 영남의 기정진 문인 조성가(趙性家: 1824∼1904)가 지었는데 기문이 1892년v경에 지은 것으로 보아 이때쯤 정자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1899년(기해, 광무 3) 12월 4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 임종 시 가사(家事)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고, 다만 다음 몇 마디를 입으로 부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저 푸른 하늘은 본래 태허(太虛)한데, 불씨(佛氏)는 허(虛)하면서 무(無)하고, 성인(聖人)의 도(道)는 허하면서도 실(實)하다. 리(理)는 분정(分定)에 달려 있고 도는 수분(守分)에 달려 있고 복(福)은 수분(修分)에 달려 있다. 후세 음양(陰陽)·화복(禍福)의 설은 전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흐름만 천착하니, 몸과 집안을 망칠 뿐만 아니라 죽은 후에는 더욱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성부 남쪽 월암촌(月巖村) 뒷산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 장성 고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집안이 부유하여 흉년이 들면 사재를 털어서 족친과 마을 사람을 구휼하였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평소 임천(林泉)에 뜻 두었으며, 학문하는 데도 이것저것 섭렵하지 않고 정밀히 터득하고 실천하는 데 힘썼다. 문사(文詞)와 장구(章句)를 일삼지 않았으며, 특히 󰡔논어󰡕에 잠심(潛心)하여 자기 말을 외우는 것 같았다. 또한 경전의 의미에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한 대목, 한 글자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연구에 몰입하여 때로는 밥도 먹지 않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았다. 학문은 전전긍긍 얇은 얼음을 밟듯 하였고, 거동은 온화하고 아량이 있었으며 법도를 지키고 삼갔다. 평소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혹시 글을 짓더라도 간략하게 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는 굳세고 성률이나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김녹휴는 화창한 봄이나 청명한 가을에 두서너 벗들과 금강산, 지리산 등 명승을 탐방했고, 금강산을 두 번 들어가 그 여행의 경험을 가지고 글을 써서 󰡔유산록(遊山錄)󰡕 1책을 지었다. 김녹휴는 명승지 몇 군데에 정자를 지어 공부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삼고, 조성가, 이응진(李應辰), 김평묵(金平黙, 1819∼1891) 등과 평생 교유하였다.


2. 구성과 내용
󰡔신호집(莘湖集)󰡕은 신호 김녹휴(金祿休)의 문집이다. 3권 1책 석인본으로 1981년에 증손 정중(晶中)이 간행하였다. 김녹휴가 세상을 떠나고 20여 년 뒤 둘째 아들 영환이 부친의 시문을 모으고 여러 사람이 지어준 만시를 붙여 2편으로 만들었다. 권두에 1828년(무자, 순조28)김영한(金甯漢, 1878~1950)이 쓴 서문과 권말에 1981년안종선(安鍾宣)의 발문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녹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둘째 아들 김영환김영한의 서문을 받아서 문집을 편집만 해둔 채 집안에 보관되고 있다가 1981년 증손 김정중안종선에게 발문을 받아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권1에는 총 185제 227수의 시가 실려 있는데 오언절구(五言絶句), 오언율시(五言律詩), 오언고시(五言古詩), 육언(六言), 칠언절구(七言絶句), 육사(六詞), 칠언율시(七言律詩), 칠언고시(七言古詩) 형식별 순으로 정리되어 있다. 다양한 소재로 지어졌는데, 스승을 비롯한 지인(知人)에게 보낸 시(詩)로부터, 누정시, 유람시, 차운시 등이 있다. 조성가, 김유(金瀏), 최산두 선생의 후예인 최시묵(崔時黙), 정해룡(鄭海龍), 이희석(李僖錫), 홍재정(洪在鼎) 등 많은 인물과 시를 주고받았다. 이 가운데 특히 기정진(奇正鎭) 문하에 함께 드나들면서 사귄 조성가(趙性家)에게 준 작품들이 많은데 「증교남귀객(贈嶠南歸客)」, 「차조직교이십운(次趙直敎二十韻)」, 「별조월고(別趙月皐)」, 「조직교래방희음(趙直敎來訪喜吟)」, 「증별조우귀월횡(贈別趙友歸月橫)」, 「상별삼년봉조우직교희음(相別三年逢趙友直敎喜吟)」등이 있다. 조성가경남 하동 출신으로, 기정진 문하에 들어가 기정진의 학통을 이어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김녹휴와 서로 사는 곳이 멀었던 관계로 한 번 만나고 헤어질 때면 아쉬운 석별의 감정을 시문을 통해 전했다. 또, 일상 경물을 뛰어난 관찰력과 담담한 필치로 담아낸 「초당전노송(草堂前老松)」, 「호상십영(湖上十詠)」, 「파초(芭蕉)」, 「분매(盆梅)」, 「주망(蛛網)」, 「현조(玄鳥)」, 「구(狗)」 등이 있다.
김녹휴는 전국의 멀고 가까운 산하를 자주 유람하였는데, 시문에 나타난 그 구체적인 곳으로는 합천 가야산, 양양 의상대, 청령포, 남해 금산, 묘향산, 화순 적벽, 두류산, 장성 백양산, 내장산, 부안 내소사, 채석강, 하동 쌍계사, 평양, 금강산 등등이다. 특히 금강산의 경우 시문의 기록을 통해서 보면 두 번 유람했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1차는 32세 때인 1858년(무오, 철종 9)이고, 2차는 42세 때인 1868년(무진, 고종 5)이다. 1차 금강산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두 편의 시문을 남겼는데, 칠언절구 형식의 「금강귀로(金剛歸路)」와 칠언율시 형식의 「금강귀로」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10년 후 2차 유람 때는 비로봉까지 올라갔던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와 관련하여 「등비로봉(登毘盧峰)」 시문을 남겼다. 그 외 「등양양의상대관일출(登襄陽義相臺觀日出)」, 「청령포감고(淸泠浦感古)」, 「가야산학사대(伽倻山學士臺)」, 「지도두류산(智島頭流山)」, 「추유백양산(秋遊白羊山)」, 「남해금산견노인성(南海錦山見老人星)」, 「남해노량(南海露梁)」, 「약사암관풍((藥師庵觀楓)」 등 다수의 유람시에서 자연과 동화된 탈속의 경지를 엿볼 수 있으며, 단종이 유배된 청령포에서는 쓸쓸히 죽어간 단종을 추억하였다.
김녹휴의 시는 유람시와 정자에서 벗들과 만나 차운하거나 수창한 시들이 많다. 몇 곳에는 정사를 지어두고 벗들과 함께 즐겼다는 내용이 「행장(行狀)」에 있는데, 상외정(象外亭)은 1882년(임오, 고종 19)고창군 부안면 상암리 상포(象浦)에 세웠고, 문향정(聞香亭)은 1892년(임진, 고종29) 무렵에 신호리와 가까운 곳에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누정들은 사라지고 없다. 김녹휴가 지은 기문에 "집 앞에 연꽃 천여 그루를 심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정자에서 향기를 맡으려고 문향정이라고 이름을 지었다."라고 하며 문향정이라고 명명한 내력을 밝히고 있다. 그가 변산에 거처한 것은 1878년(무인, 고종 15)부터인 것으로 나오는데, 과거시험에 대한 마음을 접고 난 뒤로 추정된다. 그의 문집 안에 「상외정운(象外亭韻)」,「상외정주련(象外亭柱聯)」, 「문향정」, 「문향정회(聞香亭會)」 2수가 있다.
순창 물외정(物外亭)에서 읊은 시 「등물외정(登物外亭)」 외 「완재정주련(宛在亭柱聯)」, 「환아정(煥鵝亭)」, 「동림산정운(東林山亭韻)」, 「관해정(觀海亭)」, 「차만우정운(次晩寓亭韻)」등 정자에서 읊은 시도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그 중 「차삼석정운(次三石亭韻)」은 소서(小序)가 실려 있어 시를 짓게 된 경위가 나온다. 삼석정은 전북 순창군 복흥면 봉처리 화양(華陽) 마을 근처에 행주기씨 기기진(奇麒鎭, 1830~1903)이 지은 정자이다. 신묘년 가을 김녹휴가 처음 이 정자에 오르고 정자의 명칭을 묻고 이 시를 지었다. 기기진의 자는 원서(元瑞)이고, 호는 삼석(三石)이다.
권2에는 서(書) 58편, 서(序) 1편, 기(記) 6편, 제발(題跋) 4편, 상량문 1편, 제문 4편, 묘지명 1편, 행장 · 사실(事實) 3편이 실려 있다. 편지는 심기택(沈琦澤), 조성가(趙性家), 이응신(李應辰), 조성주(趙性宙), 김오현(金五鉉), 조성덕(趙性悳), 조의곤(曺毅坤), 김훈(金勳), 김유현(金維鉉), 이상규(李庠珪), 채상필(蔡相弼), 정국현(鄭國鉉), 기양연(奇陽衍), 정의림(鄭義林), 오형석(吳滎錫), 김평묵(金平默), 이승욱(李承旭) 등 약 40여 명과 주고받은 것이다. 편지 58편 중 분량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 것은 경남 하동조성가에게 보낸 편지이다. 「답조직교(答趙直敎)」·「여조직교(與趙直敎)」 등 10여 편인데 간단한 안부를 물으며 영․호남으로 멀리 떨어져 편지도 만남도 쉽지 않은 마음을 드러내는 것부터, 질병에 관한 것,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운동 등 나라의 변고에 대한 걱정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보인다. 이상규에게 보낸 편지 「답이강진(答李康津)」은 1885년 천관산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이상규의 집에서 묵고, 집으로 돌아온 후 보낸 것이다. 정의림에게 보낸 편지 「답정계방(答鄭季方)」에는 자기가 잠 귀신을 이기지 못한다는 내용과 친구가 그리워 갑자기 영남으로 길을 나섰으나 중도에 돌아와 몸이 망가진 상태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답이직지사(答李直指使)」는 1898년(광무 2) 직지사 이승욱에게 종사(宗事)에 관하여 협조를 요청한 편지이다. 그 외 다른 편지들은 계절에 따라 안부와 근황을 주고받거나 집안의 화복을 알리는 짧은 편지가 대부분이다.
서문은 「남원진씨족보서(南原晉氏族譜序)」 1편이 실려 있다. 기문은 「국원기(菊畹記)」, 「신호기(莘湖記)」, 「상외정기(象外亭記)」, 「수인산성남문중수기(修仁山城南門重修記)」, 「광산김씨사정공분암중수기(光山金氏司正公墳菴重修記)」, 「묵암공비음기(黙庵公碑陰記)」가 실려 있다. 그중 「신호기」는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가 '신호(莘湖)'라는 글씨를 쓴 내력과 소장하게 된 사연을 소개한 글이다. 이광사는 100여 년 전에 신지도(薪智島)에 유배 와서 섬마을 사람을 위해 '신(薪)'자를 '신(莘)'자로 바꿔서 써주었는데, 김녹휴가 20세 때에 가리포(加里浦)를 놀러 갔다가 이를 보았다. 그 주인이 김녹휴가 사는 마을 이름과 같은 것을 기이하게 여겨 석별의 정으로 주어 편액으로 삼았다는 내용이다. 「상외정기」는 1882년(임오, 고종 19) 김녹휴부안에 세운 정자에 대한 내력을 적은 것이다. 「수인산성남문중수기」는 1885년(무술, 고종 23) 이상규(李庠珪)강진현감에 재임하면서 수인산성 남문의 비각(碑閣)을 수리한 사실을 기록한 기문이다. 그 외 「광산김시사정공분암중수기」는 재실의 중수기를 저은 것이고, 「묵암공비음기」는 하서 김인후의 9세손인 김종휴(金鍾休)의 행적을 적은 음기이다.
제발문(題跋文)은 「발원직문자후(跋元直文字後)」, 「제남파집후(題南坡集後)」, 「제화양산수병(題華陽山水屛)」, 「제덕송송병(題德松松屛)」이 실려 있다. 그 중 「발원직문자후」는 요절한 김성주(金性柱)가 남긴 글에 발문을 쓴 것이다. 「제남파집후」는 장흥 출신 남파 이희석(李僖錫)의 문집에 쓴 짧은 글이다. 「제화양산수병」, 「제덕송송병」은 그림 병풍에 써준 제발(題跋文)이다.
상량문은 재실을 중수하고 지은 「원당상량문(願堂上樑文)」 1편이다. 제문은 총 5편인데, 1879년(기묘, 고종 16) 먼 친척 조카 김희문(金希文)의 발인 날 지은 제문 「제족종희문문(祭族從希文文)」과 1880년(경진, 고종 17) 노사 기정진의 소상 때 지은 제문 「제노사기선생문(祭蘆沙奇先生文)」이 있고, 1885년(을유, 고종 22)에 지은 고원빈(高元賓)의 발인 날 지은 제문 「제고감역원빈문(祭高監役元賓文)」, 1897년(정유, 광무 1) 기양연의 대상 때 지은 제문 「제기교리자민문(祭奇敎理子敏文)」이 있다. 묘지명은 둘째 형 경휴(景休)에 관한 「중씨도정공묘지명(仲氏都正公墓誌銘)」이 있다. 행장은 모두 여인의 행장으로 「조씨부인행장(趙氏夫人行狀)」, 「이씨부인행장(李氏夫人行狀)」, 「열녀신씨사실(烈女申氏事實)」이 실려 있다.
권3은 부록으로, 제문 5편, 만사(輓詞), 가장(家狀), 행장(行狀), 묘갈명, 발문이 실려 있다. 제문은 조성가(趙性家, 1824~1904), 이돈형(李敦亨), 기우만(奇宇萬, 1846~1916), 김근도(金近度), 김은휴(金殷休)가 지은 글이다. 만사는 조성가, 전지수(田芝秀), 변만기(邊萬基), 최병교(崔炳敎), 서상열(徐相悅) 등 11인의 글이다. 특히 조성가는 100운(韻)의 장편을 지어 추모하였다. 가장은 아들 김영환(金永煥)1828년(무자, 순조 28)에 쓴 것이고, 행장은 후손 김도중(金度中)1891년에 쓴 것이다. 묘갈명은 박하주(朴廈柱), 발문은 안종선(安鍾宣; 1899~1992)이 지었는데, 둘 다 1891년(신묘, 고종 28)에 쓴 것이다. 안종선의 발문에 의하면, 김녹휴는 시문의 저술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보존된 것이 얼마 되지 않지만, 모두 평담각실(平淡慤實)하여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터득한 데에서 나왔다고 평하고 있다.

3. 세부목차
卷1
五言絶句 : 登襄陽義相臺觀日出, 淸冷浦感古, 七月七日, 登毗盧峰(戊辰再入金剛山), 庚午七月十九日卽河西先祖晬辰也與族人聖佐感吟, 淸水芙蓉出之句, 贈嘺南歸客, 紫泉坮(崔孤雲流觴坮), 題呈李叅判
五言四律 : 上元夜踏橋, 登物外亭(潘南朴氏亭), 步唐人韻, 和湖上諸益, 贈別三州橘隱, 追步百花亭原韻(幷小叙), 次百花亭重修韻, 守性堂追挽, 次竹峯(幷小叙), 贈龍岡精舍主人(黃炳中), 輓竹下翁
五言古詩 : 次趙直敎二十韻, 別趙月皐(幷小叙)
六言 : 贈金士亮(瀏), 象外亭柱聯, 宛在亭柱聯
七言絶句 : 兒童取鑿蘿葍一半儲水倒懸有芽結花, 春日登山, 與古阜金雅讀書, 金剛歸路(戊午), 伽倻山學士坮, 新磬, 望市, 辛友士漢歸覲過期不來, 偶題, 酬星山鄭老石(海龍)來訪, 湖上十詠, 贈崔斯文(時黙), 贈別師文上人(幷小序), 戱贈鐵鷂(師文之號), 題烈行錄後, 南坡碧蓮之會喜成一絶, 奉和沙上酬唱贈蒼壁, 哭徐蒼峯(悳老), 贈幻山師, 次松石亭韻, 別大方, 奉和康津朴斯文, 贈雪嶽幻峯師, 謹次丈人山韻, 雪中翫北漢山城題呈李叅判, 南海錦山見老人星, 南海露梁, 追步薇窩韻, 紫泉坮, 題柏石軒, 換鵝亭(幷小序), 覽妙香山後賦一絶, 赤壁, 芭蕉, 癸巳春李元業來請其先三綱旌閭重修記余方病河魚固辭不獲遂書一絶詩以歸之, 智島頭流山, 登大通峙觀漁大
六詞 : 壬申暮春題德山齋
七言四律 : 孫吏在賢作詩要和, 與洪在鼎遊東小門外藥(辛亥), 金剛歸路(戊午), 與諸益遊石水菴, 東林山亭韻, 秋遊白羊山自藥師轉上雲門, 次晩寓亭韻, 李斯文(信叔)訪余山齋次中字韻爲惜別之贈, 石水菴端午會(八), 草堂前老松, 聞院接多士船遊, 自東林轉向山齋有卜築楸下之意故因感懷而述之, 構堂始居吟(庚午), 酬靑陽林友, 夜坐, 登山而歸和諸益, 養鷺, 失鷺, 與趙直敎醉題, 十月看菊, 益梅, 南陽先生來留山齋同過三庚於其歸也作詩贈別, 辛未重陽之再翌作羊山之行宿妙蓮菴, 翌日藥師, 信宿雲門, 梁氏光霽亭移建韻, 仲氏晬辰韻(壬申), 高斯文(伯範)來叩山扉, 走足月軒, 重陽翌日行到藥師, 宿雲門菴, 步下白蓮菴, 龍岡夜話, 次四從姪雙壺亭韻(幷小序), 和呈蓮泉調座, 德山齋詩會(戊寅三月), 次櫟亭韻, 次田荷韻, 內藏山, 輓姜春坡(寅會), 象外亭韻, 甲申秋會飯, 逍遙菴, 來蘇寺, 采石江, 藥師菴觀楓, 次魏氏長川齋原韻, 次雪竇華藏山原韻, 乙酉除多, 次岐山精舍韻, 次丈席回甲韻(戊午), 丁亥甲日感吟, 次奇校理晬筵韻, 吾友子敏辭祿歸耕以農巢寓意謹次其韻, 廣石坮韻, 次車老, 次老松齋, 步八狂韻, 和南陽先生, 趙直敎來訪喜吟, 贈別趙友歸月橫, 詩稧韻(幷小序), 水月堂送啞溪老人, 與趙直敎共有雲門之約而余先登十日後直敎踵而到之, 次白羊山雙溪樓原韻, 與諸益會吟, 龍江船遊, 次朴大甫北山新居韻, 三月三日爲雨所戱翌日詩會, 謹次晩歸亭韻(幷小序), 與大方日夜吟, 九月九日作羊山停車之行越三日會于德山齋, 崔雅訪余山齋有韻因次其韻, 相別三年逢趙友(直敎)喜吟, 與林斯文共吟, 與蒼壁期以十月望日爲雨雪所戱十九日佩酒踏雪而來爲之戱吟, 兒曹講一部古詩有客來嘲故戱題, 贈蒼壁, 贈菊畹, 瑞石韻, 題河東雙溪寺(庚申仲秋), 和扶風尹雅, 羊山歸路宿德峙年少家呼韻, 次三石亭韻(幷小序), 聞香亭, 次涵月亭韻, 聞香亭會, 觀平壤, 壺巖永慕亭韻(乙未), 槐西來有韻和之, 和漢南, 竹筧, 櫻桃, 蛛綱, 扇, 恠石, 金佛, 長津觀漁, 客來避暑, 客來閒吟, 錦城韻, 與客酬唱, 與客分韻得無字, 客來, 桐裡逢雪, 趙少年哲奎邂逅於桐裏寺數日團欒新面如舊要和其親竹圃翁甲宴韻忘拙副之, 丙甲春會, 登高, 追題, 龍江泛舟, 和崔景冑, 金城郭氏追遠堂韻, 和族人采禎回甲韻, 丁酉庚日, 聞香亭會, 觀海亭, 仙津泛舟順流訪隱仙菴, 和奇奉鉉晩悔韻, 次兒曹韻, 和邀月亭韻, 玄鳥, 狗
七言古詩 : 願堂齋柱聯

卷2
書 : 答沈叅判(琦澤◎甲申), 答趙直敎(性家◎十), 答趙季豪(性宙), 答趙孟明, 與李素山(應辰◎三), 答李竹峯(三), 答趙同福(性憙), 答本倅金五鉉, 答曺士弘(毅坤), 答金子元(勳), 答金學官(維鉉◎二), 答李康津(庠珪◎乙酉), 答張文一, 答蔡監役(相弼◎二), 答李錫憲, 答鄭校理(國鉉◎戊子), 答奇校理(陽衍◎己丑), 答鄭義和, 答李賢秀, 答鄭季方(義林), 答吳山淸(榮錫◎三), 答金重菴(平黙◎辛卯), 答朴益貞(契晩), 與李節度(仁植), 答或人(辛卯), 慰高世濟(喬◎癸巳), 答鄭景日(雲五◎丙申), 答尹滋鉉, 答鄭(參鉉), 答魏瑞圭(瓘植◎二), 答魏致周(啓泙), 答安基燮, 答金大受(命鉉), 與黃炳中, 與奇進士(東準), 答李直指使(承旭◎戊戌), 答李漢明(載亮), 答奇奉鉉, 與奇仁伯(春度), 答族姪大賢(正煥)
序 : 南原晉氏族譜序
記 : 菊畹記, 莘湖記, 象外亭記, 修仁山城南門重修記, 光山琻氏司正公墳菴重修記, 黙庵公碑陰記
跋 : 跋元直文字後, 題南坡集後, 題華陽山水屛, 題德松松屛
上樑文 : 願堂齋室上樑文
祭文 : 祭族從希文文, 祭蘆沙奇先生文, 祭高監役元賓文, 祭奇敎理子敏文
墓誌銘 : 仲氏都正公墓誌銘
行狀 : 趙氏夫人行狀, 李氏夫人行狀, 烈女甲氏事實

卷3
附錄 : 祭文(五), 輓詞(十一), 家狀, 行狀, 墓碣銘
기사목록
卷之一
卷之二
卷之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