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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집(南圃先生集)

기본정보
· 유형분류 고서-집부-별집류
·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문집
· 작성주체 편저자 : 김만영(金萬英)
· 간사년
· 간사지
· 형태사항
· 소장처 현소장처 : 미상 / 원소장처 : 미상
정의

남포(南圃) 김만영(金萬英, 1624~1671)의 문집

해제
남포선생집(南圃先生集) 해제

나천수/나주시 향토문화연구회 부회장

1. 생애와 출신 배경
남포 김만영1)1) 이하 선생이라 호칭한다.
은 당악김씨 9세로 자는 영숙(英叔) 호는 남포(南圃)로 아버지 김태흡(金泰洽)과 어머니 나주나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1624년에 태어나 1671년에 졸하였다.
살아생전에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 洗馬) 그리고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이 화려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학문은 심오한 경지에 몰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유집에 수록된 작품만 보더라도 매우 심오한 학문의 경지를 득도한 것 같다. 이처럼 그가 문학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당대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문학적 자질 또는 문학적 DNA가 핏줄로 이어 온 것 같아, 선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여기에 소개 하고자 한다.
선생은 당악김씨 9세인데 그의 5대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주 왕곡면 귀업리(龜業里)에 자자일촌을 이루며 살았던 당악김씨 터와 당악김씨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이 있으니, 바로 진사 김효정(金孝禎)이다. 당악김씨 4세 진사 김효정은 충주박씨 박우(朴祐)를 사위로 맞아들인다.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로는 대체로 부유하게 살았던 김효정은 사위 박우를 나주 처가 쪽으로 불러들여 공부를 시켜 마침내 1510년(중종5) 식년시 문과에 16위를 급제를 하였으니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더더욱 김효정의 외손자 사암 박순(朴淳)은 1553년(명종8)에 문과 장원 급제하고, 이조참의, 대사헌,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한 문신이 되었으니, 나주 당악김씨는 더더욱 빛을 보았을 것이다.
한편 1519년 기묘사화 때에 나주출신 선비 11명이 성균관에서 숙식을 하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 두 명이 바로 김효정의 두 아들 김구(金臼)와 김두(金㪷)도 있었다. 이들 11명이 궁궐에 가서 조광조를 신원하는 하소연을 하다가 쫓겨나게 되자, 그러한 정치상황에서 벼슬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11명 모두 나주로 낙향하여 소위 「금강11인 현계(錦江11人賢禊)」를 결성하여 매양 좋은 날에 영산강을 선유하며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 여지승람과 나주읍지에도 기록될 정도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에 지었던 정자와 글이 모두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지고, 오로지 김두의 시한수와 당시 회원인 나일손의 아들 나창[羅昶, 세자시강원 필선]이 남긴 차운 시 한수만 남아 있다.
선생의 가승을 보면 김효정- 김두 –김태각- 김원록- 김태흡- 김만영의 핏줄이 이어짐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남평에서 활동하다가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정유재란 이후에 맥이 끊어진 「금강11인 현계」의 계칙을 복원하고 현계 회원의 후손들 간에 모임을 계속 이어지도록 복원 하였다. 그러한 활동의 숨은 공로가 오늘날 왕곡면의 금사정(錦社亭)에 담겨져 있다. 「금강11인 현계」가 태동한지 어언 500년이 흘렀지만 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교류를 하고 있어 이 분야도 학문적으로 연구해 볼 만하다.


2. 《남포선생집》 서지(書誌) 사항과 문집 구성내역
《남포선생집(南圃先生集)》은 1831년에 목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권수제나 판심제나 모두 같으며, 권책은 원집(原集) 16권, 부록(附錄) 2권의 2책으로 행자는 10행 20자에 규격은 25.7×18.1(cm)이다 어미는 상일엽화문어미(上一葉花紋魚尾)이다. 총392쪽으로 되어 있다.
《남포선생집》은 문인 나만성(羅晩成/金漢明의 외조카, 1678년 문과급제)의 편집을 거쳐 1831년(손조31)에 5세손 김양국(金亮國)이 주축이 되어 간행하였다.
목활자본이 간행되기까지의 과정은 세 사람의 권수(卷首) 글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가장 오래된 발문은 1698년(숙종24)에 이현일(李玄逸, 1627-1704)에게 써 받았는데, 이현일은 1627-1704년대 인물로 사헌부장령,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인데, 선생의 제자이며 당시 사헌부 지평 나만성(羅晩成,1646-1700)이 서울의 이현일 집을 찾아가 《남포선생집》의 서발(序跋)을 창하였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 후 이현일은 1697년 광양현에 이배(移配)한 것으로 보아, 전라도로 귀양 온 이현일을 선생의 외손자 나경성(羅景聖)이 찾아가 남포집 발문을 예전 나만성이 부탁한 바를 상기시키면서 마침내 써 받은 듯하다.
그렇다면 이때는 필사본으로 된 《남포집》이 먼저 탈고되었을 것으로 유추되나 그 흔적을 알 수 없고 나만성, 나경성 사후 여러 해를 미루었다가 선생의 5세손 김양국(金亮國/字 明叟)이 목활자본으로 발간하고자 1831년 지제교(知製敎) 안동김씨 김유헌(金裕憲)에게 부탁하여 후서(後序)를 써 받고, 또한 1831년 무안 현감 한용간(韓用幹)에게 신간발(新刊跋)을 써 받았다. 그리하여 이현일의 발문을 구발(舊跋)로 넣어 목활자본을 만들어 낸 것이다. 김양국의 가승을 보면 다음과 같다. 台角-元福-泰溟-百英-國亨-汝澤- 命祚-禎瑜-亮國이다.
《남포선생집》은 제목으로 보아도 총565편의 많은 글이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

첫째, 작품을 쓴 간지(干支)를 거의 기록해 놓지 않아서 작품 생산의 연보를 쓸 수 없다는 점이 단점이다. 다만 몇 군데 글만 간지를 알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오언고시 〈감흥(感興)〉에서 "나이 14살에 짓다"란 기록 한곳이 있다. 오언고시 132연의 시를 14살에 지었다는 것은 천재성을 보여준 것이다.

둘째, 1831년 간행본을 발간하면서 특히 시에서 "일작(一作)" 즉 어떤 본에는 글이 다르게 써졌다는 것을 13번이나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1831년 이전에 미상(未詳)의 초간본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1831년 간행하면서 무안현감 한용간에게서 써 받은 발문이 "신간발(新刊跋)"로 썼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최초 간행본은 언제쯤 만들어졌을까? 그 해답은 「갈암집 제21권 〉 발」에 써진 이현일이 쓴 〈書南圃金公行狀後〉에 그 해답이 있다. 여기에서 "호남(湖南)의 징사(徵士)인 남포 김공 만일(金公萬鎰)은 죽은 지 이미 28년이 된다. 그 문인인 간의(諫議) 나만성(羅晩成)이 서울 집으로 나를 찾아와 그의 유문(遺文) 3권을 주고"라 한 것을 보면, 남포의 최초 문집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만일(萬鎰)로 하였는데, 만영(萬英)의 오기(誤記) 같다. 그러므로 "구발(舊跋)"은 '나간의(羅諫議/나만성)가 써달라고 한 것을 미루다가 이현일이 1697년 광양현에 이배(移配)한 것으로 보아, 전라도로 귀양 온 이현일을 외손자 나경성(羅景聖)이 찾아가 1698년도에 써 받은 것으로 유추되며, 구발(舊跋)의 기록 내용과 일치한다.

셋째, 문집의 발문(跋文)을 권수(卷首)에 놓아 서문(序文)역할을 하게 한 점이다. 서문(序文)은 대체로 선생 살아생전에 교유했던 문장가에게 받아야 맞는데, 이때를 놓치고서 훗날 후세사람에게 서문을 써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후 28년만[1698년]에 써 받은 발문을 1831년에 문집 간행하면서 책머리에 넣어 간행하면서 '舊跋'이라고 한 것이다.

선생의 사승(師承)관계는 문집에 특별히 기록해 놓지 않아서 글의 내용이나 족보기록으로 유추해 낼 수밖에 없다.
족보에 보면 아버지 김태흡(金泰洽)은 문장과 학행이 뛰어나, 당세에 향시(鄕試)에서 1등을 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선생의 유년 스승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
한편 문집 서간문 편에 보면 스승을 대체로 유추할 수 있는데, 그런 맥락으로 보면 우산 안방준(安邦俊)과 이수인(李壽仁)을 스승으로 볼 만하다.
안방준은 1573-1654년 대 인물이니 선생의 51년 대선배이다. 서간문 편 첫 번째 수록된 편지가 〈상우산질의서(上牛山質疑書)〉인데 이는 '이때에 우산 안방준이 〈우산답문〉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그 의론이 편벽되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변론을 지어 질의하신 것이다.'라 기록해 놓고 있으며, 글의 내용을 보면 사제 간 자신의 견해를 논하여 스승께 올리는 편지임을 알 수 있다.

이수인(李壽仁)은 1601-1661년대 인물이니 나이로 보아도 선생보다 23살 위이다. 1633년 문과급제하고 전적, 병조좌랑, 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54년 홍문관교리·집의·장악원정·사간·부수찬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경사·성리학에 모두 밝았다. 이수인에게 올리는 답서의 글과 〈부시선생이심경질문(附時先生以心經質問)〉를 보면 사승관계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는 남평과 고향 나주 귀업리에 와서 살 때 배우러 오는 제자들을 물리치지 않고 가르쳤다. 특히 남평에서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와 같이 하였는데 문하에 출입하는 자들 중에는 또한 이론가(異論家)의 자제들이 있어 마침내 문생(門生)과 자제(子弟)들이 심히 미워하여 유언비어(流言蜚語)로 헐뜯고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었기에 마침내 가솔(家率)들을 이끌고 나주(羅州)의 고향으로 왔다. 나주에서도 배우는 자가 끊이지 않으니 그의 평생은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수범이 된 듯하다.


3. 문집 항목별로 특이점
시편을 보면 그는 평생 460제목에 534수의 시를 지었다. 특히 본 유집에는 13세 때부터 지은 시가 수록되었는데 14세 때 지은 오언고체시 〈감흥〉은 총132연으로 그가 시의 천재임을 여기서 보여준다 하겠다.
이현일도 '나이 겨우 훼츤(毁齔 이를 갈 정도의 나이인 7, 8세)에 언어와 행동이 보통의 아이와 달랐고, 나이 12, 3세 때에는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배웠다'라 한 것을 보면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 벼슬을 제수하여도 나아가지 않고 두문불출 배우면서 가르치는 일에 몰두 한다. 그가 지은 시제(詩題)를 보면 자연의 사물, 현상, 경치 등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쓴 시가 매우 많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자연이 경승(景勝)으로 보인다. 자신의 서재인 구암서실(龜巖書室)에서 이른 바 팔경을 읊었는데, 1경 구암효운(龜巖曉雲), 2경 오령만하(鰲嶺晩霞), 3경 죽포어적(竹浦漁篴), 4경 송암범종(松庵梵鍾). 5경 북록청송(北麓晴松), 6경 동정제월(東亭霽月), 7경 봉악조돈(鳳岳朝暾) 8경 저탄모범(猪灘暮帆)이다.
영암 구림에 종제 해영(海英)이 사는데 아마 해영의 구호정사(鳩湖精舍)에서도 팔경(八景)을 지었으니 1경 서호추월(西湖秋月), 2경 용산락조(龍山落照), 3경 강촌모연(江村暮烟), 4경 전교춘흥(前郊春興), 5경 동원청견(東園聽鵑), 6경 남맥문앵(南陌聞鸎), 7경 학령귀운(鶴嶺歸雲), 8경 구봉만풍(龜峯晩風)이다.
이러한 시문은 장차 향부(鄕富)의 자원으로 상품화가 될 여지가 매우 많다.

소(疏)편을 보면 단 두 편만 수록된 것을 보면 그가 정치 지향적 인물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산릉분곡후언사소(山陵奔哭後言事疏)〉는 인조 승하 후 올린 상소로, 국론이 분열된 현실과 국론 분열이 망국의 길임을 역설한 후,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시기하고 편당하는 구습(舊習)을 일소해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음을 주장한 상소이다. 〈만언소(萬言疏)〉는 지었지만 상소를 올리지 않은 것인데, 1659년 효종에는 기근이 매우 심하였다. 내용 가운데 대동법이 근기(近畿) 지방에는 유효하나 원방(遠方)인 경우에는 적실하지 못하다는 주장과 향병(鄕兵)의 창설 주장 등은 조세(租稅)와 병제(兵制) 개혁 논의가 활발했던 당시 시대상과 관련하여 주목된다.

서간문은 총 16편인데, 스승 안방준과 이수인과의 학문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편지가 돋보인다. 기타 편지를 보면 영암의 효자 신성필(愼聖弼)에게 답하는 편지가 4편이고, 나머지도 제자나 벗들에게 답하는 글이다.

권10은 序(11), 記(9), 跋(3) 편인데, 모두 청탁을 받아 쓴 것이지만 유독 〈금강중수계서(錦江重修禊序)〉는 1665년 남평에서 나주 고향마을로 돌아와 기묘사화 때 결성된 〈금강11인현계〉의 후손들과 수계를 복원하고자 노력하였다. 더더욱 선생의 고조부 김구와 김두는 11인중에 두 분이 참여하였기에 〈금강11인 현계〉에 연민의 정이 많았던 것 같다.
서문에 보면 '기묘사화 때 결성된 수계가 정유재란 때 끊어졌는데, 1603년 조부 김원록(金元祿)이 이를 이어 받았다가 1665년 선생이 남평에서 고향 나주로 와서 계부 김태윤(金泰潤)과 상사 정국현(鄭國賢)과 함께 계칙을 중수하였다.'라 하였으니 그 중수계칙의 서문에 쓴 글이다. 한편 그의 조카 김이상(金履相)은 〈중수계안후서〉를 썼다. 이렇게 계칙을 복원하고 매년 후손 자손들이 만남의 장을 갖게 되었고, 그 후 1869년 나주 도약장(都約長)을 역임한 나동륜(羅東綸)은 이를 이어 받아 금사정(錦社亭)을 개축한 기록이 현재에도 금사정에 현판으로 게첨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비록 미미하기는 하나 〈금강11인 현계〉가 오늘날까지 회장 총무가 지정되어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다만 옛일로 간과해서 아니 될 것 같다.

권11은 경의설(經義說)인데 주로 경문(經文)에 관한 것으로 〈중설(中說)〉, 〈중용스장지도(中庸首章之圖)〉, 〈중용수장존양성찰지도(中庸首章存養省察之圖)〉, 〈중용분절변의(中庸分節辨義)〉, 〈중용분위오대절(中庸分爲五大節)〉, 〈덕성문학도(德性問學圖)〉 등 중용(中庸)에 대한 글들이 많다.
중용(中庸)에 관한 도설(圖說)에도 그의 독자적인 해석이 드러난다. 중용수장지도(中庸首章之圖)는 성(性), 도(道), 교(敎)를 주제어로 파악해 도표화 한 것이며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는 왕백(王白)의 「인심도심도」의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독자적인 시각으로 새롭게 그린 것이다. 이 두 도표는 주자(朱子)와 왕백(王白)의 해석과 일정하게 변별되는 독자성을 갖는다.
그는 또 중용장구 제1장의 존양, 성찰에 해당하는 부분을 중시하여 중용수장존양성찰지도(中庸首章存養省察之圖)를 별도로 그렸는데 존양공부와 성찰공부를 통해 지정(至靜), 지동(至動)에 이르러 치중화(致中和)함을 도표화 한 것이다. 또한 「중용장구」 제27장의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을 존심(存心)과 치지(致知)로 나누어 「덕성문학도(德性問學圖)」를 그렸다.
〈역상소결(易象小訣)〉은 "경술년(庚戌年, 1670년, 현종11)에 여러 학생들을 위하여 저술하기 시작했으나, 병이 위독하여 송괘(訟卦)에서 그치고 말았다"는 부기(附記)가 있다.
특히 경의(經義說)은 곧 경서의 뜻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조 하반기 1894년 식년시를 마지막으로 문과 과거 시험이 폐하게 되자 많은 선비들이 대거 반발하자, 조선정부는 1904년과 1907년 두 번에 걸쳐 성균관에서 경의 묻고 답하는 경의문대(經義問對)의 시험을 치러 인재 발탁을 끝으로 조선조의 과거제도는 막을 내렸다.

권12는 찬(贊), 명(銘), 송(頌), 잠(箴), 상량문(上梁文), 제문(祭文), 묘갈명(墓誌銘) 등
총24편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그가 주장하는 잠(箴/경계)을 보면, 마음을 오로지하여 잡된 것을 들이지 말라는 주일잠(主一箴), 배움을 경계하는 경학잠(警學箴), 자신을 경계하는 자경잠(自警箴), 자신을 새롭게 한다는 자신잠(自新箴), 술을 조심하라는 계주잠(戒酒箴), 여색을 조심하라는 계색잠(戒色箴), 게으름을 조심하라는 계타잠(戒惰箴), 몸가짐에서 족(足), 수(手), 목(目), 구(口), 성(聲), 두(頭), 기(氣), 입立), 색(色)의 아홉 가지에 있어서 군자가 지녀야할 자세를 말하는 구용잠(九容箴)에서 선생의 철학이 무엇이고 행동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권13은 논(論), 전(傳), 격(檄), 의(義)로 총 7편이 수록되어 있다.
〈유기졸격(喩氣卒檄)〉은 지(志)를 장수로 기(氣)를 병졸로 의인화하여 지수(志帥)가 기졸(氣卒)에게 명을 따를 것을 효유하는 격문이다. 〈광나양읍전예격(光羅兩邑戰藝檄)〉은 나주 유생의 입장에서 광주 유생들에게 서로 만나서 문예(文藝)를 겨룰 것을 요청한 격문으로 전쟁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을 문장에 결부시켜 비유하고 있다.

권14~15는 남교일기(南郊日記)로, 김만영이 남평에서 살고 있을 때인 1649년(효종 즉위) 7월부터 1665년(현종 6) 2월까지의 일기이다. 그는 시편에서 「제일기(題日記)」라는 시를 지어 인간사를 사절(謝絶)하고 소책자에 한가한 생활을 기록한다고 하여 일기를 처음 쓰게 된 배경을 밝혔다. 일기는 매일 매일의 것이 아니라 중요한 날짜의 것만 있다.
이 일기의 하권에는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남인·서인 사이에 있었던 예설 논쟁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당쟁사를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그리고 남평⋅나주 지역 양반들의 동향이나 선생의 지인⋅제자 동향, 그리고 기근이나 세금 등 지역사회의 생생한 모습이 이 일기에 담겨 있다.

권16은 〈경세통전(經世通典)〉으로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ㆍ병(兵)ㆍ승(僧)을 조치하는 데 있어서의 타당한 방도를 논하였다.

부록 권1에는 나만성(羅晩成)이 지은 가장(家狀), 임원(任遠)이 지은 행장(行狀), 이명적(李明迪)이 지은 묘갈명(墓誌銘)이 수록되었고, 말미에 심계석(沈啓錫)이 지은 후서(後敍)가 있다.
부록 권2에는 윤증(尹拯)의 《명재유고(明齋遺稿)》,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藥泉集)》 등 각종 문헌에 실린 저자 관련 기사와 저자 문인(門人)들의 기록, 남용익(南龍翼)의 《기아(箕雅)》에 실린 저자의 시 등을 수합한 〈서술(敍述)〉과 문봉의(文鳳儀), 나위(羅褘)가 지은 제문, 유명현(柳命賢)이 지은 〈풍산사우춘추향축문(楓山祠宇春秋享祝文)〉이 수록되어 있다.


4. 마무리 글
남포 김만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강11인 현계」의 연구가 같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묘사화 이후 500년이 흘렀고, 선생이 돌아가신 지 2019년 현재 348년이 지났으나 〈금강11인현계〉의 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재는 당악김씨 김승병이 회장이고 나주나씨 나종석이 총무로 일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선생의 사당 풍산사(楓山祠)가 남평에 있었던 것을 2005년경에 나주 귀업리 고향으로 이축된 것이 변화의 모습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은 선생의 유집 속에 녹아있는 선생이 혼이다. 선생의 문집이 학계에서 관심을 두고 번역과 학술적 재조명을 하게 되니 만시지탄이지만 참으로 호남학 연구에 다행한 일 아니겠는가.
기사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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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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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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