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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집(南圃先生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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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선생집(南圃先生集) 해제나천수/나주시 향토문화연구회 부회장
1. 생애와 출신 배경남포 김만영1)1) 이하 선생이라 호칭한다.은 당악김씨 9세로 자는 영숙(英叔) 호는 남포(南圃)로 아버지 김태흡(金泰洽)과 어머니 나주나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1624년에 태어나 1671년에 졸하였다.살아생전에 세자익위사 세마(世子翊衛司 洗馬) 그리고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벼슬이 화려하다고는 볼 수 없다.그러나 그의 학문은 심오한 경지에 몰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유집에 수록된 작품만 보더라도 매우 심오한 학문의 경지를 득도한 것 같다. 이처럼 그가 문학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당대에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문학적 자질 또는 문학적 DNA가 핏줄로 이어 온 것 같아, 선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여기에 소개 하고자 한다.선생은 당악김씨 9세인데 그의 5대 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나주 왕곡면 귀업리(龜業里)에 자자일촌을 이루며 살았던 당악김씨 터와 당악김씨를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이 있으니, 바로 진사 김효정(金孝禎)이다. 당악김씨 4세 진사 김효정은 충주박씨 박우(朴祐)를 사위로 맞아들인다.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로는 대체로 부유하게 살았던 김효정은 사위 박우를 나주 처가 쪽으로 불러들여 공부를 시켜 마침내 1510년(중종5) 식년시 문과에 16위를 급제를 하였으니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더더욱 김효정의 외손자 사암 박순(朴淳)은 1553년(명종8)에 문과 장원 급제하고, 이조참의, 대사헌, 예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한 문신이 되었으니, 나주 당악김씨는 더더욱 빛을 보았을 것이다.한편 1519년 기묘사화 때에 나주출신 선비 11명이 성균관에서 숙식을 하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중에 두 명이 바로 김효정의 두 아들 김구(金臼)와 김두(金㪷)도 있었다. 이들 11명이 궁궐에 가서 조광조를 신원하는 하소연을 하다가 쫓겨나게 되자, 그러한 정치상황에서 벼슬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라고 반문하고 11명 모두 나주로 낙향하여 소위 「금강11인 현계(錦江11人賢禊)」를 결성하여 매양 좋은 날에 영산강을 선유하며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이 여지승람과 나주읍지에도 기록될 정도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에 지었던 정자와 글이 모두 정유재란 때 불타 없어지고, 오로지 김두의 시한수와 당시 회원인 나일손의 아들 나창[羅昶, 세자시강원 필선]이 남긴 차운 시 한수만 남아 있다.선생의 가승을 보면 김효정- 김두 –김태각- 김원록- 김태흡- 김만영의 핏줄이 이어짐을 볼 수 있다. 또한 그는 남평에서 활동하다가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정유재란 이후에 맥이 끊어진 「금강11인 현계」의 계칙을 복원하고 현계 회원의 후손들 간에 모임을 계속 이어지도록 복원 하였다. 그러한 활동의 숨은 공로가 오늘날 왕곡면의 금사정(錦社亭)에 담겨져 있다. 「금강11인 현계」가 태동한지 어언 500년이 흘렀지만 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교류를 하고 있어 이 분야도 학문적으로 연구해 볼 만하다.
2. 《남포선생집》 서지(書誌) 사항과 문집 구성내역《남포선생집(南圃先生集)》은 1831년에 목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권수제나 판심제나 모두 같으며, 권책은 원집(原集) 16권, 부록(附錄) 2권의 2책으로 행자는 10행 20자에 규격은 25.7×18.1(cm)이다 어미는 상일엽화문어미(上一葉花紋魚尾)이다. 총392쪽으로 되어 있다.《남포선생집》은 문인 나만성(羅晩成/金漢明의 외조카, 1678년 문과급제)의 편집을 거쳐 1831년(손조31)에 5세손 김양국(金亮國)이 주축이 되어 간행하였다.목활자본이 간행되기까지의 과정은 세 사람의 권수(卷首) 글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가장 오래된 발문은 1698년(숙종24)에 이현일(李玄逸, 1627-1704)에게 써 받았는데, 이현일은 1627-1704년대 인물로 사헌부장령,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이며 학자인데, 선생의 제자이며 당시 사헌부 지평 나만성(羅晩成,1646-1700)이 서울의 이현일 집을 찾아가 《남포선생집》의 서발(序跋)을 창하였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 후 이현일은 1697년 광양현에 이배(移配)한 것으로 보아, 전라도로 귀양 온 이현일을 선생의 외손자 나경성(羅景聖)이 찾아가 남포집 발문을 예전 나만성이 부탁한 바를 상기시키면서 마침내 써 받은 듯하다.그렇다면 이때는 필사본으로 된 《남포집》이 먼저 탈고되었을 것으로 유추되나 그 흔적을 알 수 없고 나만성, 나경성 사후 여러 해를 미루었다가 선생의 5세손 김양국(金亮國/字 明叟)이 목활자본으로 발간하고자 1831년 지제교(知製敎) 안동김씨 김유헌(金裕憲)에게 부탁하여 후서(後序)를 써 받고, 또한 1831년 무안 현감 한용간(韓用幹)에게 신간발(新刊跋)을 써 받았다. 그리하여 이현일의 발문을 구발(舊跋)로 넣어 목활자본을 만들어 낸 것이다. 김양국의 가승을 보면 다음과 같다. 台角-元福-泰溟-百英-國亨-汝澤- 命祚-禎瑜-亮國이다.《남포선생집》은 제목으로 보아도 총565편의 많은 글이 수록되었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특징이 보인다.첫째, 작품을 쓴 간지(干支)를 거의 기록해 놓지 않아서 작품 생산의 연보를 쓸 수 없다는 점이 단점이다. 다만 몇 군데 글만 간지를 알 수 있게 하였다. 특히 오언고시 〈감흥(感興)〉에서 "나이 14살에 짓다"란 기록 한곳이 있다. 오언고시 132연의 시를 14살에 지었다는 것은 천재성을 보여준 것이다.둘째, 1831년 간행본을 발간하면서 특히 시에서 "일작(一作)" 즉 어떤 본에는 글이 다르게 써졌다는 것을 13번이나 기록하고 있다는 점은 1831년 이전에 미상(未詳)의 초간본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런 연유 때문인지 1831년 간행하면서 무안현감 한용간에게서 써 받은 발문이 "신간발(新刊跋)"로 썼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그렇다면 최초 간행본은 언제쯤 만들어졌을까? 그 해답은 「갈암집 제21권 〉 발」에 써진 이현일이 쓴 〈書南圃金公行狀後〉에 그 해답이 있다. 여기에서 "호남(湖南)의 징사(徵士)인 남포 김공 만일(金公萬鎰)은 죽은 지 이미 28년이 된다. 그 문인인 간의(諫議) 나만성(羅晩成)이 서울 집으로 나를 찾아와 그의 유문(遺文) 3권을 주고"라 한 것을 보면, 남포의 최초 문집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만일(萬鎰)로 하였는데, 만영(萬英)의 오기(誤記) 같다. 그러므로 "구발(舊跋)"은 '나간의(羅諫議/나만성)가 써달라고 한 것을 미루다가 이현일이 1697년 광양현에 이배(移配)한 것으로 보아, 전라도로 귀양 온 이현일을 외손자 나경성(羅景聖)이 찾아가 1698년도에 써 받은 것으로 유추되며, 구발(舊跋)의 기록 내용과 일치한다.셋째, 문집의 발문(跋文)을 권수(卷首)에 놓아 서문(序文)역할을 하게 한 점이다. 서문(序文)은 대체로 선생 살아생전에 교유했던 문장가에게 받아야 맞는데, 이때를 놓치고서 훗날 후세사람에게 서문을 써 받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후 28년만[1698년]에 써 받은 발문을 1831년에 문집 간행하면서 책머리에 넣어 간행하면서 '舊跋'이라고 한 것이다.선생의 사승(師承)관계는 문집에 특별히 기록해 놓지 않아서 글의 내용이나 족보기록으로 유추해 낼 수밖에 없다.족보에 보면 아버지 김태흡(金泰洽)은 문장과 학행이 뛰어나, 당세에 향시(鄕試)에서 1등을 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선생의 유년 스승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여 진다.한편 문집 서간문 편에 보면 스승을 대체로 유추할 수 있는데, 그런 맥락으로 보면 우산 안방준(安邦俊)과 이수인(李壽仁)을 스승으로 볼 만하다.안방준은 1573-1654년 대 인물이니 선생의 51년 대선배이다. 서간문 편 첫 번째 수록된 편지가 〈상우산질의서(上牛山質疑書)〉인데 이는 '이때에 우산 안방준이 〈우산답문〉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그 의론이 편벽되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변론을 지어 질의하신 것이다.'라 기록해 놓고 있으며, 글의 내용을 보면 사제 간 자신의 견해를 논하여 스승께 올리는 편지임을 알 수 있다.이수인(李壽仁)은 1601-1661년대 인물이니 나이로 보아도 선생보다 23살 위이다. 1633년 문과급제하고 전적, 병조좌랑, 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54년 홍문관교리·집의·장악원정·사간·부수찬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경사·성리학에 모두 밝았다. 이수인에게 올리는 답서의 글과 〈부시선생이심경질문(附時先生以心經質問)〉를 보면 사승관계임을 알 수 있다.또한 그는 남평과 고향 나주 귀업리에 와서 살 때 배우러 오는 제자들을 물리치지 않고 가르쳤다. 특히 남평에서는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의 유의(遺意)와 같이 하였는데 문하에 출입하는 자들 중에는 또한 이론가(異論家)의 자제들이 있어 마침내 문생(門生)과 자제(子弟)들이 심히 미워하여 유언비어(流言蜚語)로 헐뜯고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들었기에 마침내 가솔(家率)들을 이끌고 나주(羅州)의 고향으로 왔다. 나주에서도 배우는 자가 끊이지 않으니 그의 평생은 가르치면서 배우고 배우면서 가르치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수범이 된 듯하다.
3. 문집 항목별로 특이점시편을 보면 그는 평생 460제목에 534수의 시를 지었다. 특히 본 유집에는 13세 때부터 지은 시가 수록되었는데 14세 때 지은 오언고체시 〈감흥〉은 총132연으로 그가 시의 천재임을 여기서 보여준다 하겠다.이현일도 '나이 겨우 훼츤(毁齔 이를 갈 정도의 나이인 7, 8세)에 언어와 행동이 보통의 아이와 달랐고, 나이 12, 3세 때에는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배웠다'라 한 것을 보면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서 벼슬을 제수하여도 나아가지 않고 두문불출 배우면서 가르치는 일에 몰두 한다. 그가 지은 시제(詩題)를 보면 자연의 사물, 현상, 경치 등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쓴 시가 매우 많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자연이 경승(景勝)으로 보인다. 자신의 서재인 구암서실(龜巖書室)에서 이른 바 팔경을 읊었는데, 1경 구암효운(龜巖曉雲), 2경 오령만하(鰲嶺晩霞), 3경 죽포어적(竹浦漁篴), 4경 송암범종(松庵梵鍾). 5경 북록청송(北麓晴松), 6경 동정제월(東亭霽月), 7경 봉악조돈(鳳岳朝暾) 8경 저탄모범(猪灘暮帆)이다.영암 구림에 종제 해영(海英)이 사는데 아마 해영의 구호정사(鳩湖精舍)에서도 팔경(八景)을 지었으니 1경 서호추월(西湖秋月), 2경 용산락조(龍山落照), 3경 강촌모연(江村暮烟), 4경 전교춘흥(前郊春興), 5경 동원청견(東園聽鵑), 6경 남맥문앵(南陌聞鸎), 7경 학령귀운(鶴嶺歸雲), 8경 구봉만풍(龜峯晩風)이다.이러한 시문은 장차 향부(鄕富)의 자원으로 상품화가 될 여지가 매우 많다.소(疏)편을 보면 단 두 편만 수록된 것을 보면 그가 정치 지향적 인물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산릉분곡후언사소(山陵奔哭後言事疏)〉는 인조 승하 후 올린 상소로, 국론이 분열된 현실과 국론 분열이 망국의 길임을 역설한 후,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하여 시기하고 편당하는 구습(舊習)을 일소해야 나라가 안정될 수 있음을 주장한 상소이다. 〈만언소(萬言疏)〉는 지었지만 상소를 올리지 않은 것인데, 1659년 효종에는 기근이 매우 심하였다. 내용 가운데 대동법이 근기(近畿) 지방에는 유효하나 원방(遠方)인 경우에는 적실하지 못하다는 주장과 향병(鄕兵)의 창설 주장 등은 조세(租稅)와 병제(兵制) 개혁 논의가 활발했던 당시 시대상과 관련하여 주목된다.서간문은 총 16편인데, 스승 안방준과 이수인과의 학문에 관한 의견을 나누는 편지가 돋보인다. 기타 편지를 보면 영암의 효자 신성필(愼聖弼)에게 답하는 편지가 4편이고, 나머지도 제자나 벗들에게 답하는 글이다.권10은 序(11), 記(9), 跋(3) 편인데, 모두 청탁을 받아 쓴 것이지만 유독 〈금강중수계서(錦江重修禊序)〉는 1665년 남평에서 나주 고향마을로 돌아와 기묘사화 때 결성된 〈금강11인현계〉의 후손들과 수계를 복원하고자 노력하였다. 더더욱 선생의 고조부 김구와 김두는 11인중에 두 분이 참여하였기에 〈금강11인 현계〉에 연민의 정이 많았던 것 같다.서문에 보면 '기묘사화 때 결성된 수계가 정유재란 때 끊어졌는데, 1603년 조부 김원록(金元祿)이 이를 이어 받았다가 1665년 선생이 남평에서 고향 나주로 와서 계부 김태윤(金泰潤)과 상사 정국현(鄭國賢)과 함께 계칙을 중수하였다.'라 하였으니 그 중수계칙의 서문에 쓴 글이다. 한편 그의 조카 김이상(金履相)은 〈중수계안후서〉를 썼다. 이렇게 계칙을 복원하고 매년 후손 자손들이 만남의 장을 갖게 되었고, 그 후 1869년 나주 도약장(都約長)을 역임한 나동륜(羅東綸)은 이를 이어 받아 금사정(錦社亭)을 개축한 기록이 현재에도 금사정에 현판으로 게첨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비록 미미하기는 하나 〈금강11인 현계〉가 오늘날까지 회장 총무가 지정되어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를 다만 옛일로 간과해서 아니 될 것 같다.권11은 경의설(經義說)인데 주로 경문(經文)에 관한 것으로 〈중설(中說)〉, 〈중용스장지도(中庸首章之圖)〉, 〈중용수장존양성찰지도(中庸首章存養省察之圖)〉, 〈중용분절변의(中庸分節辨義)〉, 〈중용분위오대절(中庸分爲五大節)〉, 〈덕성문학도(德性問學圖)〉 등 중용(中庸)에 대한 글들이 많다.중용(中庸)에 관한 도설(圖說)에도 그의 독자적인 해석이 드러난다. 중용수장지도(中庸首章之圖)는 성(性), 도(道), 교(敎)를 주제어로 파악해 도표화 한 것이며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는 왕백(王白)의 「인심도심도」의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하고 독자적인 시각으로 새롭게 그린 것이다. 이 두 도표는 주자(朱子)와 왕백(王白)의 해석과 일정하게 변별되는 독자성을 갖는다.그는 또 중용장구 제1장의 존양, 성찰에 해당하는 부분을 중시하여 중용수장존양성찰지도(中庸首章存養省察之圖)를 별도로 그렸는데 존양공부와 성찰공부를 통해 지정(至靜), 지동(至動)에 이르러 치중화(致中和)함을 도표화 한 것이다. 또한 「중용장구」 제27장의 존덕성(尊德性)과 도문학(道問學)을 존심(存心)과 치지(致知)로 나누어 「덕성문학도(德性問學圖)」를 그렸다.〈역상소결(易象小訣)〉은 "경술년(庚戌年, 1670년, 현종11)에 여러 학생들을 위하여 저술하기 시작했으나, 병이 위독하여 송괘(訟卦)에서 그치고 말았다"는 부기(附記)가 있다.특히 경의(經義說)은 곧 경서의 뜻을 말하는 것으로, 조선조 하반기 1894년 식년시를 마지막으로 문과 과거 시험이 폐하게 되자 많은 선비들이 대거 반발하자, 조선정부는 1904년과 1907년 두 번에 걸쳐 성균관에서 경의 묻고 답하는 경의문대(經義問對)의 시험을 치러 인재 발탁을 끝으로 조선조의 과거제도는 막을 내렸다.권12는 찬(贊), 명(銘), 송(頌), 잠(箴), 상량문(上梁文), 제문(祭文), 묘갈명(墓誌銘) 등총24편이 수록되어 있다.특히 그가 주장하는 잠(箴/경계)을 보면, 마음을 오로지하여 잡된 것을 들이지 말라는 주일잠(主一箴), 배움을 경계하는 경학잠(警學箴), 자신을 경계하는 자경잠(自警箴), 자신을 새롭게 한다는 자신잠(自新箴), 술을 조심하라는 계주잠(戒酒箴), 여색을 조심하라는 계색잠(戒色箴), 게으름을 조심하라는 계타잠(戒惰箴), 몸가짐에서 족(足), 수(手), 목(目), 구(口), 성(聲), 두(頭), 기(氣), 입立), 색(色)의 아홉 가지에 있어서 군자가 지녀야할 자세를 말하는 구용잠(九容箴)에서 선생의 철학이 무엇이고 행동율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권13은 논(論), 전(傳), 격(檄), 의(義)로 총 7편이 수록되어 있다.〈유기졸격(喩氣卒檄)〉은 지(志)를 장수로 기(氣)를 병졸로 의인화하여 지수(志帥)가 기졸(氣卒)에게 명을 따를 것을 효유하는 격문이다. 〈광나양읍전예격(光羅兩邑戰藝檄)〉은 나주 유생의 입장에서 광주 유생들에게 서로 만나서 문예(文藝)를 겨룰 것을 요청한 격문으로 전쟁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들을 문장에 결부시켜 비유하고 있다.권14~15는 남교일기(南郊日記)로, 김만영이 남평에서 살고 있을 때인 1649년(효종 즉위) 7월부터 1665년(현종 6) 2월까지의 일기이다. 그는 시편에서 「제일기(題日記)」라는 시를 지어 인간사를 사절(謝絶)하고 소책자에 한가한 생활을 기록한다고 하여 일기를 처음 쓰게 된 배경을 밝혔다. 일기는 매일 매일의 것이 아니라 중요한 날짜의 것만 있다.이 일기의 하권에는 효종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복상문제로 남인·서인 사이에 있었던 예설 논쟁을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당시의 당쟁사를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그리고 남평⋅나주 지역 양반들의 동향이나 선생의 지인⋅제자 동향, 그리고 기근이나 세금 등 지역사회의 생생한 모습이 이 일기에 담겨 있다.권16은 〈경세통전(經世通典)〉으로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ㆍ병(兵)ㆍ승(僧)을 조치하는 데 있어서의 타당한 방도를 논하였다.부록 권1에는 나만성(羅晩成)이 지은 가장(家狀), 임원(任遠)이 지은 행장(行狀), 이명적(李明迪)이 지은 묘갈명(墓誌銘)이 수록되었고, 말미에 심계석(沈啓錫)이 지은 후서(後敍)가 있다.부록 권2에는 윤증(尹拯)의 《명재유고(明齋遺稿)》, 남구만(南九萬)의 《약천집(藥泉集)》 등 각종 문헌에 실린 저자 관련 기사와 저자 문인(門人)들의 기록, 남용익(南龍翼)의 《기아(箕雅)》에 실린 저자의 시 등을 수합한 〈서술(敍述)〉과 문봉의(文鳳儀), 나위(羅褘)가 지은 제문, 유명현(柳命賢)이 지은 〈풍산사우춘추향축문(楓山祠宇春秋享祝文)〉이 수록되어 있다.
4. 마무리 글남포 김만영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강11인 현계」의 연구가 같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기묘사화 이후 500년이 흘렀고, 선생이 돌아가신 지 2019년 현재 348년이 지났으나 〈금강11인현계〉의 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현재는 당악김씨 김승병이 회장이고 나주나씨 나종석이 총무로 일하고 있다.세월이 흘러 선생의 사당 풍산사(楓山祠)가 남평에 있었던 것을 2005년경에 나주 귀업리 고향으로 이축된 것이 변화의 모습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은 선생의 유집 속에 녹아있는 선생이 혼이다. 선생의 문집이 학계에서 관심을 두고 번역과 학술적 재조명을 하게 되니 만시지탄이지만 참으로 호남학 연구에 다행한 일 아니겠는가.
- 기사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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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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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언절구)(詩(五言絶句))
- 주정(主靜)
- 감회가 일어(有感)
- 어버이 곁을 떠나며 감회를 읊다(離親寓懷)
- 밤중에 앉아 읊조리다(夜坐口號)
- 산을 바라보며(看山)
- 눈 감고 짓다(瞑作)
- 용호주인에게 수답하여 보내다(酬寄龍湖主人)
- 동명 정군평의 「제승축」 시에 화운하다(和東溟鄭君平題僧軸韻)
- 윤생【선기】이 술을 들고 찾아와 준 것에 감사하며(謝尹生【先夔】携酒見過)
- 이재를 허물고서 제생을 작별해 보내며(毁二齋後謝送諸生)
- 제생과 작별하며 준 시(贈別諸生)
- 행자 운을 써 시를 지어 오질에게 보여주다(用行字韻示吳侄)
- 도원량의 「지주」 시에 화답하다(和陶元亮止酒詩)
- 고청사가 매백 장인에게 준 시에 차운하여 이문백에게 보여주다(次韻高晴沙贈梅栢丈人詩 示文伯)
- 일가 형제들과 종갓집 터에 있는 배나무 아래에서 함께 술을 마시며(與同宗兄弟共飮宗基梨樹下)
- 어떤 중의 시축에 제하다 【2수】(題僧軸【二首】)
- 흑변의 도화옹에 쓰다【선생 나이 14세 때 이 시를 읊었다】(題黑邊桃花翁【先生年十四詠此詩】)
- 김【중원】에게 남겨주어 후일을 기약하며(留別金【仲源】爲後期)
- 일기에 쓰다(題日記)
- 순상 심공【택】이 사람을 시켜 문안을 하기에(廵相沈公【澤】使人問安)
- 한가로이 읊다(閒吟)
- 이른 봄에(早春)
- 몽헌이라 자호하며(自號夢軒)
- 감회가 일어(有事)
- 잠에서 깨어 일상을 적다(睡罷書事)
- 천지음 3수【감회가 일어 짓다】(天地吟 三首【◎有感而作】)
- 남산 바위의 노래(南山石謠)
- 한가로운 흥취가 일어(閒興)
- 밭고랑의 양귀비화(田間鸎粟)
- 묵매에 쓰다(題墨梅)
- 비 온 뒤에 깨달음이 있어(雨後有得)
- 시월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감회가 일어(十月曉起有感)
- 유쾌하여 【3수】(快意【三首】)
- 장성 가는 도중에(長城道上)
- 전원의 집으로 돌아오다(歸田園居)
- 대수음(大樹吟)
- 비 온 뒤에(雨後)
- 우연히 벽에 쓰다(偶書壁上)
- 감회가 일어(有懷)
- 눈 내리는 밤에(雪夜)
- 들녘의 학(野鶴)
- 「영월」 시에 화운하다(和詠月韻)
- 생각나는 대로 읊다(漫吟)
- 술이 없음을 한하며(恨無酒)
- 술이 없는 아쉬움을 달래며(寬無酒)
- 벽에 쓰다(書壁)
- 윤유월 칠일에 장난삼아 읊다(閏六月初七日戲吟)
- 밤에 앉아서(夜坐)
- 고객(賈客)
- 새벽에 일어나(曉起)
- 홀로 나는 기러기에게 주다(贈孤鴈)
- 그 기러기가 나에게 답하다(鴈答余)
- 저물녘의 구름(暮雲)
- 섣달 그믐날 밤에(除夕)
- 느즈막하게 일어나서(晏起)
- 산을 노래하다(詠山)
- 용촌에 유숙하며 감회가 일어(留宿龍村有懷)
- 경물에 감흥하여 뜻을 말하다(感物言志)
- 가을날의 회포를 읊은 절구 두 수를 지어 당질에게 보여주다【이상】(秋懷二絶 示堂侄【履相】)
- 책을 보며(看書)
- 《역도설》을 보고(觀易圖說)
- 고요히 앉아(靜坐)
- 샛별이 창틈을 통해 내 품으로 들어오기에 감회가 일어(明星從窓隙入懷有感)
- 봄을 보내며(送春)
- 비 온 뒤 경치가 기이하기에(雨後奇形)
- 봄을 보내며 감회가 일어(送春有懷)
- 책을 읽으며(讀書)
- 저물녘 풍경(暮景)
- 강가에서 생각나는 대로 읊다(江上漫吟)
- 함정에 빠진 호랑이를 비웃으며【제나라 사람처럼 마음속으로 깨닫는 자가 있다면 이 두 수의 시는 나의 찌꺼기임을 충분히 알 것이다.】(嘲陷中虎【齊人中若有神會者。 二詩足以知余糟粕。】)
- 새장에 갇힌 학을 비웃으며(嘲籠中鶴)
- 산속에서 즉흥으로 읊다(山中卽事)
- 백봉산에서【백봉산은 바로 선생의 선영이 있는 산 이름이다】(白鳳山【白鳳山。 卽先生松楸山名。】)
- 일상을 적다(書事)
- 홀로 술잔을 기울이며(獨酌)
- 맑은 새벽에 두견새 소리를 듣고서(淸曉聞鵑)
- 꿈에서 깬 뒤에 나중에 「몽중상별」 시에 차운하여 짓다(夢覺後 追次夢中相別詩)
-
시(오언절구)(詩(五言絶句))
- 권2
-
-
시(오언율시)(詩(五言律詩))
- 홀로 앉아(獨坐)
- 그냥 짓다(漫成)
- 산에 살면서 객을 사절하다(山居謝客)
- 밤에 앉아 있자니 감회가 일어(夜坐有感)
- 윤후【종지이다】가 부쳐 온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어 보내다(次尹侯【宗之】寄詩韻以呈)
- 당질【이상이다】에게 주다(贈堂侄【履相】)
- 상인 삼근에게 주다(贈上人三勤)
- 한창려의 선대체로 쓴 시의 운을 사용하여 감회를 적다(用韓昌黎扇對軆書懷)
- 강사의 문한에 종사하는 여러 어른에게 부치다(寄江舍翰墨諸老)
- 나자정【반이다】의 만휴당 시운으로 시를 지어 수답하다(酬羅子整【襻】晩休堂韻)
- 금릉의 조 사군【성이다】에게 부쳐 보내다(寄贈金陵使君趙【惺】)
- 봄날 종제 영중에게 부치다(春日寄從弟英仲)
- 회포를 적어 종제 영중에게 보이다(書懷示從弟英仲)
- 청화에 부슬비가 내리기에 배를 남강에 띄워놓고(淸和微雨 泛舟藍江)
- 조보의 기사를 듣고(聞朝報紀事)
- 꿈에 대성전에 들어 술잔을 올리고 인하여 이 율시를 지었는데 꿈에서 깨어 기록하다(夢入大成殿奠爵 仍作此律 覺而記之)
- 여름날 너무도 덥기에 장남 삼아 쓰다(夏日甚炎戲題)
- 구강에서의 멋진 유람(龜江勝遊)
- 여름 구름이 매우 기이하였는데 누군가가 전한 시가 신운이 있으므로 마침내 흉내 내어 짓다 【평한다. "구름이 변하여 산이 되고 산이 변하여 눈이 되며, 눈이 변하여 아름다운 구슬이 되고 아름다운 구슬이 변하여 저물녘 바람이 되는 것이 또한 기이하다."】(夏雲奇甚 有人傳有神韻 遂效嚬而成【評曰雲變爲山。 山變爲雪。 雪變爲瓊璧。 瓊璧變爲晩風。 亦奇也。】)
- 흐뭇하여(自怡)
- 소요음(逍遙吟)
- 꾀꼬리 우는 소리를 듣고 장난삼아 영물체를 모방하여 짓다(聽鸎聲戲 效詠物軆)
- 마음을 달래며(自遣)
- 종형 최운로에 대한 만사(挽崔從兄雲路)
- 서 상사에 대한 만사【진명】(挽徐上舍【晉明】)
- 어떤 이에 대한 만사(挽人)
- 나운봉에 대한 만사【염】(挽羅雲峯【袡】)
- 시(오언배율)(詩(五言排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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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언율시)(詩(五言律詩))
- 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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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언절구)(詩(七言絶句))
- 벽 위에 제하다(題壁上)
- 뜻을 부치다【어릴 적에 지은 것이다. 선생은 당시 나이가 13세였다.】(寓意【兒時作。先生時年十三。】)
- 가을 국화(秋菊)
- 늦은 오후(日晏)
- 동지(冬至)
- 한가한 가운데 감회가 있어(閒中有感)
- 은거하는 집의 세 가지 빼어난 것(幽居三勝)
- 안성초(安性初)의 '천(天)' 자와 '원(圓)' 자 운(韻)을 쓰다(用安性初天圓韻)
- 벗에게 주다(贈友)
- 이생(李生)【문석(文碩)】과 이별하며 주다(贈別李生【文碩】)
- 당조카에게 주다.【이상(履相)이다. 이상은 당시 나이 12세였다.】(贈堂侄【履相。履相時年十二。】)
- 회문시(回文詩)
- 자술(自述)
- 성상의 은혜에 감격하다(感天恩)
- 가을날 재실(齋室)에서(秋日齋居)
- 가을밤(秋夜)
- 족회(族會)에서 감회를 적다(族會敍懷)
- 2월 2일 북창(北窓)을 봉했던 종이를 처음 뜯으니 시원하게 확 펴지는 느낌이 있었다. 이에 이 일을 써서 기록하다.(二月初二日。始開北窓封紙。敞然有伸蠖之意。仍書此以志之。)
- 제비를 읊다(詠鷰)
- 눈 내린 뒤 밤에 앉아【신축년(1661, 38세)】(雪後夜坐【辛丑】)
- 취중에 스스로를 슬퍼하며(醉中自悼)
- 술 깬 뒤 자조(自嘲)하며(醒後自嘲)
- 큰 거북이 당 아래로 와서 엎드려 있기에 느낀 바 있어 짓다(大龜來伏堂下。感而作。)
- 산을 읊다(詠山)
- 거울을 보고 그림자에게 주다(看鏡贈影)
- 밤에 앉아 우연히 읊다(夜坐偶吟)
- 초장군【곧 대황(大黃)이다.】(草將軍【卽大黃也】)
- 옥전자(玉錢子)(玉錢子)
- 초승달을 읊다(詠新月)
- 향기로운 국화가 만개하여(香菊盛開)
- 강가의 옛 농막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은거하며 지내는 곧은 벗에게 남겨 주고 이별하다(將歸江上舊庄。留別隱逸貞友。)
- 낙화를 불쌍히 여겨(憐落花)
- 비 내린 뒤(雨後)
- 들학(野鶴)
- 특명(特命)으로 군직(軍職)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하여 짓다【기해년(1659, 36세) 12월】(聞特命復軍職。感而有作。【己亥十二月】)
- 눈이 개어【기해년(1659, 36세) 12월】(雪晴【己亥十二月】)
- 농사지을 시기에 소를 잃어 말을 팔아 소를 사들이고서 장난삼아 절구 한 수를 짓다(臨農失牛。賣馬買牛。戲成一絶。)
- 새벽 생각(曉思)
- 차를 마시며(飮茶)
- 솔잎을 복용하며(服松葉)
- 전가(田家)의 새해 음악(田家歲樂)
- 겨울날 한가로워(冬日閒意)
- 춘일음(春日吟)
- 선영(先塋) 아래 마을에 묵으며 느낀 바 있어【신묘년(1651, 28세) 정월 개장(改葬)하는 일로 김애반(金崖盤)이 사는 계곡에 머물렀다.】(宿先塋下村有感【辛卯正月。以改窆事。留金崖盤之谷。】)
- 여름밤에 달을 감상하는데 홀연 뜬구름에 가려지다(夏夜翫月。忽爲浮雲所蔽。)
- 감회가 있어(有懷)
- 기해년(1659, 36세)에 대기근이 들어 구걸하는 백성들이 길에 가득하니, 느낀 바 있어 짓다(己亥大饑。丐民盈路。感而有作。)
- 아침노을(朝霞)
- 비를 빌다【경술년(1670, 47세)】(祈雨【庚戌】)
- 비에 감사하다【경술년(1670, 47세)】(謝雨【庚戌】)
- 강이 흐르다(江行)
- 작은 창에 쓰다(書小窓)
- 꿈속에서 짓다【신해년(1671, 48세) 봄 남쪽 지역에 장역(瘴疫)이 돌아 사망자가 줄을 이었다. 우리 집안 또한 이러한 질환에 걸려 늙은 처를 데리고 촌려(村閭)로 나가 지냈으니, 스스로 풀과 나무를 베는 수고로움을 면치 못하였으며 친지 및 이웃 마을과 왕래하지 않은 지 몇 개월이었다. 3월 10일 밤 꿈에서 문득 절구 한 수를 읊었으므로 깨어난 뒤에 이를 기록하였다. 나는 반평생 병에 시달려 세상일을 마음에 두지 않은 것이 50년이나 되었으며 또 늙었으니, 기구(起句)의 뜻은 자연히 감회가 일어서 그런 것이다. '문장' 두 글자는 어떤 본에는 '공명(功名)'으로 되어 있다. 병서.】(夢作【辛亥春。瘴疫遍于南中。死亡者相繼。余家亦罹此患。挈老妻出寓村閭。未免躬自樵蘇之勞。親屬隣里不肯相過數月。暮春初十日夜夢。忽吟一絶。覺罷記之。余半生病癃。世事之不入心者五十年且老矣。起句之意。自然相感耶? 文章二字。或作功名。幷序。】)
- 미인을 그리워하는 노래【이 또한 꿈속에서 지은 것이다】(戀美人詞【此亦夢作】)
- 꿈을 기록하다【병서】(紀夢【並序】)
- 새벽에 읊다(曉吟)
- 구고음(九臯吟)(九臯吟)
- 금리초사(錦里草舍) 23영(錦里草舍二十三詠)
- 구암서실(龜巖書室) 8영(龜巖書室八詠)
- 구담승경(龜潭勝景) 10영(龜潭勝景十詠)
- 구호정사(鳩湖精舍) 8경에 제하다.【종제 해영(海英)이 낭주(朗州) 구림(鳩林)에 우거하였다고 한다.】(題鳩湖精舍八景【從弟海英。寓居朗州鳩林云。】)
- 명옥헌(鳴玉軒)에 제하다【헌의 주인은 상사(上舍) 오이정(吳以井)이다.】(題鳴玉軒【軒主卽吳上舍以井】)
- 남 교리(南校理)에게 답례로 주다【당시 남구만(南九萬) 공이 암행어사(暗行御史)로서 찾아왔기 때문이라고 한다.】(謝贈南校理【時南公九萬以暗行御史來訪故云。】)
- 윤 사군(尹使君)【종지(宗之)】가 부쳐온 시에 차운하다(酬尹使君【宗之】寄詩韻)
- 성석전(成石田)【로(輅)】의 〈수후(睡後)〉 시에 차운하다(次成石田【輅】睡後韻)
- 영평(永平)의 제생(諸生)에게 부쳐 주다【김진화(金振華) 등이다.】(寄贈永平諸生【卽金振華等】)
- 송석정(松石亭) 양군(梁君)의 시에 차운하다(次松石亭梁君韻)
- 강가 정자에서 주인의 시에 차운하여 남겨 주고 이별하다(江亭次主人韻留別)
- 강가의 제로(諸老)에게 장난삼아 주다(戲贈江上諸老)
- 김중원(金仲源)에게 주다(贈金仲源)
- 옥수암(玉峀庵). 박연파(朴煙波)의 시에 차운하여 높이 우러르는 마음을 부치다.【연파의 이름은 개(漑)로, 곧 사암(思庵)의 형이다. 경술년(1670, 47세)】(玉峀庵。次朴煙波韻。以寓景仰之懷。【煙波名漑。卽思庵之兄。庚戌。】)
-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는 종제【해영(海英)】를 전송하며(送從弟【海英】應擧之京)
- 순정 상인(淳淨上人)의 시축에 제하다(題淳淨上人軸)
- 산인(山人) 희현(煕絢)이 구고(九臯)의 양정재(養正齋)로 나를 찾아와 몹시 간절하게 시를 구하기에 부질없이【'만(漫)'이 되어야 할 듯하다.】 제하여 주다(山人煕絢訪余于九臯養正齋。求詩甚勤。慢【恐作漫】題以贈。)
- 정처직(鄭處直)【지(榰)】의 정사(精舍)에 부쳐 제하다(寄題鄭處直【榰】精舍)
- 배생(裴生)【명석(命錫)】에게 주다(示裴生【命錫】)
- 김생(金生)에게 부쳐 국화를 부탁하다(寄金生倩菊)
- 용호 주인(龍湖主人)에게 부치다(寄龍湖主人)
- 신여뢰(愼汝賚)【이름은 성필(聖弼)이고 호는 경암(敬庵)이다.】에게 화답하다(酬愼汝賚【聖弼號敬庵】)
- 광곡자(廣谷子)의 시에 차운하다【광곡은 종제 해영(海英)이다. ◎경술년(1670, 47세)】(次廣谷子韻【廣谷。卽從弟海英也。◎庚戌】)
- 이공(李公)【단상(端相)】의 시에 차운하여 명(明)나라 사람 임인(林寅) 등에게 주다(次李公【端相】韻。贈大明人林寅等。)
- 윤 사군【종지】이 천관산(天冠山)을 노닐고서 엮은 시록(詩錄) 뒤에 제하다(題尹使君【宗之】遊天冠山詩錄後)
- 허 상국(許相國)【적(積)】이 편지를 보내다(許相國【積】送書)
- 안렴 어사(按廉御史) 민공(閔公)【정중(鼎重)】이 방문하였기에 절구 한 수를 쓰다(按廉御史閔公【鼎重】來訪。仍紀一絶。)
-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도산서(陶山序)〉를 읽고서 나도 모르게 상쾌한 느낌이 들어 절구 한 수를 짓다(讀退溪先生陶山序。不覺爽然。因成一絶。)
- 성석전(成石田)【로(輅)】의 〈전가잡흥(田家雜興)〉에 화운하다(和成石田【輅】田家雜興)
- 고생(高生)【부금(溥金)】의 시에 답하다(答高生【溥金】韻)
- 다시 고생(高生)에게 답하다(又答高生)
- 스님에게 주다(贈僧)
- 종형 문백(文伯)에게 부치다(寄宗兄文伯)
- 정생(鄭生)의 시에 답하다(答鄭生韻)
- 여러 족형에게 주다(贈諸族兄)
- 정생(鄭生)【지(榰)】에게 주다(與鄭生【榰】)
- 종형에게 드리다(呈宗兄)
- 금릉(金陵) 조후(趙侯)【성(惺)】에게 화답하다(酬金陵趙侯【惺】)
- 금리(錦里)에 사는 여러 형에게 장난삼아 제하여 부치다(戲題寄錦里諸兄)
- 혜 상인(惠上人)에게 주다【병서. 혜사(惠師)의 스승인 성사(性師)가 목우자(牧牛子)를 위하여 누대 하나를 세우고 '강학(降鶴)'이라 편액하였다. 지금 혜사가 멀리서 찾아와 나에게 기문을 청하였는데 나는 사양하면서 지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혜사가 다시 절구 한 수를 얻어 이 걸음에 대한 증거로 삼기를 청하였다. 이때는 가을 맑고 기운 깨끗하여 산을 마주한 사람이 산수의 흥취를 금할 수 없어 붓 가는대로 써서 주고, 이어 오언절구를 강학루에 부쳐 제하였다. 기유년(1669, 46세) 가을 백봉산옹(白鳳山翁).】(贈惠上人【幷序。惠師之師性師。爲牧牛子起一樓。扁降鶴。今惠師遠來請記文于余。余辭不就。師又請得一絶以證此行。是時也。秋晴氣凈。對山人不禁山水之興。信筆書贈。仍以五言絶寄題降鶴樓云。己酉秋。白鳳山翁。】)
- 김 상사(金上舍)【종량(宗亮)】에게 화답하다(酬金上舍【宗亮】)
- 김중원(金仲源)【오(浯)】 형께 사례하다(謝金仲源【浯】兄)
- 산승에게 주다【산인 희현(煕絢)이 구고(九臯) 서재(書齋)인 양정재(養正齋)에서 나와 종유한 지 오래였다. 연전에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를 찾아와 몹시 간절하게 시를 구하였으니,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이 들었다. 이어 속세 밖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서 부질없이 제하여 주었다.】(贈山僧【山人煕絢。從余于九臯書齋之養正齋久。年前入白雲。又來訪余求詩甚勤。廓然索然。仍居物外之思。漫題以贈之也。】)
- 김장이(金丈而) 신(愼)의 시에 차운하여 오군(吳君)의 소헌(小軒)에 제하다(次金丈而愼韻。題吳君小軒。)
- 남 은대(南銀臺)【구만(九萬)】에게 주다(贈南銀臺【九萬】)
- 학도(學徒)에게 주다(贈學徒)
- 당질【이상(履相)】에게 부치다(寄堂侄【履相】)
- 복초당(復初堂)에 부치다(寄復初堂)
- 여러 형을 모시고 이틀 밤을 묵으며 뜻을 말하다(陪諸兄信宿言志)
- 광곡주인(廣谷主人)이 동자 두세 명으로 하여금 배를 저어 나를 맞이하게 하니, 내가 배 안에서 입으로 시 한 수를 읊다(廣谷主人令童子數三。棹艇邀余。余於舟中。口占一律。)
- 금강(金剛) 시에 차운하다(次金剛韻)
- 도민(道民)의 옛 집 벽 위에 제하다(題道民舊居壁上)
- 구암서실(龜巖書室)에 부쳐 제하다(寄題龜巖書室)
- 제생(諸生)의 운을 쓰다(用諸生韻)
- 제생(諸生)에게 부쳐 쓰다(寄筆諸生)
- 삼학재(三學齋)에 제하다(題三學齋)
- 도화선(桃花扇)에 장난삼아 제하다【선생의 당시 나이 19세였다.】(戲題桃花扇【先生時年十九】)
- 성암(惺菴)【내가 성암에 대한 만시(挽詩)를 지었는데, 지나치게 칭찬하고 인정하였다고 의아해 하는 자가 있었으므로 여기에서 언급하였다.】(惺菴【余作惺庵挽詩。人有疑其過稱許。故於此言之。】)
- 종이 창에 제하다(題紙窓)
- 학을 그린 벽 위에 제하다(題畫鶴壁上)
- 종제가 약속하고서 이르지 않아(從弟有約不至)
- 제생(諸生)과 함께 주자(朱子)의 〈동지음(冬至吟)〉에 화운하다(與諸生和朱子冬至吟)
- 제생(諸生)의 〈독서(讀書)〉 시의 운을 쓰다(用諸生讀書韻)
- 맑은 가을날 지강(砥江)에 배를 띄우다(淸秋泛舟砥江)
- 눈을 읊다(詠雪)
- 동쪽 언덕에 핀 매화를 보며(看梅東臯)
- 한가로이 거닐며(閒行)
- 어떤 사람이 수박을 부쳐왔기에 장난삼아 제하다(有人寄西苽戲題)
- 춘첩【신해년(1671, 48세) 입춘에 우연히 이 절구를 지었다. 이해 5월에 선생께서 별세하셨다.】(春帖【辛亥立春。偶成此絶。是年五月。先生別世。】)
- 동지음(冬至吟)
- 덕룡산(德龍山)의 구름을 바라보고서 짓다(望德龍山雲而有作)
- 비 온 뒤 새벽에 읊다(雨後曉吟)
- 한가한 흥(閒興)
- 아침노을을 읊다(朝霞詠)
- 밤에 앉아(夜坐)
- 봄날(春日)
- 갈대 자란 물가에서 한가로이 낚시하다(蘆磯閒釣)
- 매화를 읊다(詠梅)
- 가을밤 하얗게 누인 밝은 은하수를 올려다보며(秋夜仰見明河練白)
- 국화를 띄우다(泛菊)
- 저녁에 동작(銅雀)을 건너며【기축년(1649, 26세) 국상(國喪)으로 인한 장례 때 선생이 달려가 곡하고 돌아왔다.】(晩渡銅雀【己丑國慽仍山之時。先生奔哭而歸。】)
- 아침에 차령(車嶺)을 넘으며(朝踰車嶺)
- 새벽에 양강(楊江)을 출발하며(曉發楊江)
- 저물녘 전원으로 돌아가며(暮歸田園)
- 큰 바람(大風)
- 북쪽의 소식을 듣고 뜻을 말하다(聞北奇言志)
- 늦게 일어나(晏起)
- 한(漢)나라 역사를 보고 감회가 있어(讀漢史有感)
- 달밤에 피리 소리를 듣고(月夜聞笛)
- 굶주린 백성이 길에 가득하니 느낀 바 있어 짓다(饑民盈路。感而有作。)
- 산사(山寺)에 묵다(宿山寺)
- 경인년(1650, 27세) 정월(庚寅正月)
- 비 갠 뒤에 감회가 있어(霽後有感)
- 공당(公堂)의 제비(公堂鷰)
- 한가로이 지내며(閒居)
- 부질없이 제하다(謾題)
- 밤에 일어나 떨어지는 꽃을 완상하며(夜起翫花下)
- 구월 저녁(九月日夕)
- 섬돌 앞의 늦은 국화(階前晩菊)
- 즐거움을 기록하다(誌樂)
- 달빛 아래서 읊다(月下吟)
- 조는 새(眠鳥)
- 한가로이 지내며 성찰하다【4수】(閒居省察【四首】)
- 오랜 장마(久霖)
- 우연히 읊다(偶吟)
- 밤에 앉아(夜坐)
- 감회를 쓰다(書懷)
- 책을 보다(看書)
- 《참동계(參同契)》를 읽었으나 그 오묘한 이치를 궁구하지 못하였다. 국화를 심다가 감회를 일으키다.【나는 평소 병이 많아 약물과 수련하는 방법에 대해 깊이 살피지 않음이 없었다. 일찍이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참동계》의 비법을 들었으나 궁벽한 곳에서는 구할 수가 없었다. 무신년(1668, 45세) 연간에 남운로(南雲路) 영공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 일을 언급하였는데, 남공이 빌려 주기를 허락하였다. 기유년(1669, 46세) 봄 천리 먼 곳에 전해주었기에 한 해 남짓 읽어 보았으나 그 오묘한 이치를 궁구하지 못하였다. 지금 국화를 심다가 문득 생각이 미쳐 그 뜻을 부친다.】(閱參同契。莫究其妙。仍種菊起感。【余平生多病。凡藥餌修鍊之方。無不窮考。嘗聞魏伯陽參同契之術。而僻地無可求。戊申年間。邂逅南雲路令公話及之。南許以㭒倩。己酉春。千里遠傳。披閱歲餘。莫究其妙。今仍種菊而忽念及焉。以寓其意也云。】)
- 병이 나아 우연히 쓰다(病已偶書)
- 시황(始皇)(始皇)
- 낙화(落花)
- 밤을 읊다(詠栗)
- 도민촌(道民村)(道民村)
- 가을밤 잠 못 이루고 홀로 앉아(秋夜獨坐無眠)
- 입으로 읊조려 어리석은 아이들을 비웃고 꾸짖다(口號嘲責頑兒輩)
- 집안에 쌀이 떨어져 장난삼아 절구 한 수를 짓다(擧家絶粒。戲成一絶。)
- 구름 봉우리(雲峯)
- 꾀꼬리(鸎)
- 제비(鷰)
- 구름(雲)
- 양류음(楊柳吟)
- 오랜 비에 술을 보내 준 사람에게 사례하다(久雨謝人送酒)
- 새벽(曉)
- 고을 사람이 군정(軍丁)을 징발하려고 어린 종을 끌고 가니 허탈하게 웃으며 시 한 수를 짓다(縣人括軍丁挽僮僕而去。笑成一律。)
- 집 뒤의 장송(家後長松)
- 감회가 있어(有懷)
- 자리 옆에 제하다(題座隅)
- 남평(南平) 수령 송시걸(宋時杰)이 영장(營將)과 함께 구담(龜潭)을 노닐다(南平倅宋時杰。與營將遊龜潭。)
- 밤에 비 내리고 아침에 개어(夜雨朝晴)
- 어둑어둑할 무렵에 짓다(暝作)
- 빗속의 해당화에 대해 장난삼아 제하여 아이들에게 보여주다(戲題雨中海棠。示兒輩。)
- 청야음(淸夜吟)
- 3월 그믐날 술 사러 간 사람이 이르지 않아(三月晦日。沽酒不至。)
- 맑은 가을밤에 앉아(秋晴夜坐)
- 꿈에서 짓다(夢作)
- 잠깨어 꿈속 시에 화운하다(覺和夢中韻)
- 겨울날이 매우 따뜻하므로 감회가 있어(冬日甚溫有懷)
- 중구일의 외로운 심사(九日孤懷)
- 신묘년(1651, 28세) 정월 초하루(辛卯元日)
- 잠깬 뒤(覺後)
- 4월에 배를 띄우다【병소서(幷小序)】(淸和泛舟【幷小序】)
- 앞 들의 농부가 종일 밭 갈고 김매고서 소를 풀어놓다(前郊農夫。盡日耕耨解牛。)
- 밭 개구리가 노니는 모습을 보고 짓다(見田蛙游弄有作)
- 큰 새가 밭에서 배회하는 모습을 보고 짓다(見大鳥逡巡於田間有作)
- 꿈을 기록하다.【병소서(幷小序). 무신년(1668, 45세) 여름 나는 백봉산(白鳳山)의 절에 우거하였는데, 이는 곧 내 선영(先塋)의 재소(齋所)이다. 근심 없이 고요히 거처하여 날마다 좋은 뜻을 품었으니, 지난날 가졌던 세상사에 대한 생각이 아무 것도 없는 듯이 빠져나갔다. 그러다 문득 5월 11일 새벽꿈에서 절구 한 수를 읊었는데 깨고 난 뒤에도 기억할 수 있었으니, 말뜻이 맑고 기이하여 몹시도 신기하였다. 다만 기구(起句)를 이해하기 어려워 다음날 멋대로 기록하였다.】(紀夢【幷小序。戊申夏。余寓居白鳳山之佛舍。卽我先隴之齋所也。靜居無慮。日有好意。向念世間事。脫若無物。忽於五月十一日曉夢。自吟一絶。覺能識得。辭意淸異。殊亦奇也。但起句難曉。翊日慢紀之。】)
- 뜻을 말하다(言志)
- 마음대로 읊다【활발하고 자유로운 기상을 가진 사람은 마땅히 위아래 사방으로 막힘없이 두루 흐르기를 선인(仙人) 여암(呂巖)의 시와 같이 하는 것이 옳다. 그의 시에 화답하여 나의 마음을 보이니, 이 시를 보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으로 나의 뜻을 해석하는 것도 괜찮다.】(浪吟【人之自在活潑通脫氣像。當於上下四方。周流無滯。若呂仙之詩則可矣。和之以見意。看者以意迓志。可也。】)
- 대수음(大樹吟)
- 긴 무지개(長虹)
- 한가로운 뜻(閒意)
- 종형【한장(漢章)】에게 부쳐 은빛 붕어를 보내주지 않음을 조롱하다(寄宗兄【漢章】嘲不送銀鯽)
- 아이들이 지은 시의 운을 쓰다(用兒輩韻)
- 백로(白鷺)
- 오랜 비 뒤에 무등산(無等山)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며(久雨喜見無等山)
- 비 내린 뒤의 푸른 산(雨後靑山)
- 이성암(李惺庵)【수인(壽仁)】에 대한 만사(挽李惺庵【壽仁】)
- 호가정(浩歌亭) 어른에 대한 만사(挽浩歌亭丈人)
- 이웃 노인에 대한 만사(挽隣老)
- 어떤 이에 대한 만사(挽人)
- 정생(鄭生)【온(榲)】에 대한 만사(挽鄭生【榲】)
- 나운봉(羅雲峯)【염(袡)】에 대한 만사(挽羅雲峯【袡】)
-
시(칠언절구)(詩(七言絶句))
- 권5
-
-
시(칠언율시)(詩(七言律詩))
- 인지음(仁智吟)(仁智吟)
- 비래각(飛來閣) 주인에게 드리다【주인은 승지 임련(林堜)이다. 선생이 어렸을 때 지은 시로, 당시 나이 14세였다.】(呈飛來閣主人【主人卽林承旨堜。先生兒時作。時年十四。】)
- 종형의 영사재(永思齋)에 부쳐 제하다【종형은 한장(漢章)이다.】(寄題宗兄永思齋【宗兄卽漢章】)
- 정백자(程伯子)의 〈타괴음(打乖吟)〉의 운(韻)을 쓰고 이어서 그 체(體)를 본받다(用程伯子打乖吟韻。仍效其軆。)
- 사군(使君) 정지호(鄭之虎)가 부쳐온 시에 화답하다(酬鄭使君【之虎】見寄)
- 승지 남구만(南九萬)과 이별하며 주다(贈別南承旨【九萬】)
- 상사(上舍) 나위(羅褘)의 강가 우소(寓所)에 답하다(酬羅上舍【褘】江上寓所)
- 동종(同宗) 형제와 배 띄워 노닐며(與同宗兄弟泛舟)
- 박사암(朴思菴) 상공(相公)의 시에 차운하다(和朴思菴相公韻)
- 신여뢰(愼汝賚)【성필(聖弼)】의 시에 차운하다(次愼汝賚【聖弼】韻)
- 앞의 운을 다시 써서 자술(自述)하다(復用前韻自述)
- 고청사(高晴沙)의 문집에 있는 청음(淸陰) 김 상공(金相公)의 시 한편, 이 시에 대한 원운(原韻)은 김상헌의 《청음집(淸陰集)》 권9에 〈봉래각에 올라[登蓬萊閣]〉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시는 다음과 같다. "등주 고을 누관들은 허공 높이 솟아 있어, 푸른 바다 짓누르며 만 리 멀리 바라보네. 석교 이미 진 시황 시절부터 끊어졌고, 성사는 또 한나라의 신하만을 가게 했네. 하늘과 땅 큰 파도의 속에 떠서 일렁이고, 해와 달은 쌓인 기운 가운데서 나눠 뜨네. 반평생의 먼 유랑에 이제 머리 희었거니, 한평생의 기이함이 이와 같긴 어려우리.[登州樓觀跨虛空 勢壓滄溟萬里窮 橋石已從秦帝斷 星槎惟許漢臣通 乾坤盪漾洪波裡 日月分開積氣中 半世遠遊今白髮 百年奇絶此難同]"(高晴沙集中。讀淸陰金相公詩有感。步其韻)
- 인조대왕(仁祖大王)의 인산일(因山日)에 사암사(沙巖寺)로 나와 우거하며 감회를 쓰다(仁祖大王因山日。出寓沙巖寺書懷。)
- 현학정(玄鶴亭) 시에 차운하다(次玄鶴亭韻)
- 종제(從弟)의 세심정(洗心亭)에 제하다(題從弟洗心亭)
- 수운정(峀雲亭)에 제하다【정자는 고을 남쪽 영강(榮江) 가에 있으니, 곧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지낸 나위소(羅緯素)가 기거하던 곳이다.】(題峀雲亭【亭在州南榮江上。卽羅慶州緯素棲息之所。】)
- 오래 병중에 윤 사군(尹使君)【종지(宗之)】께 드리다(久病呈尹使君【宗之】)
- 김생(金生)의 운을 쓰다(用金生韻)
- 영암(靈巖) 홍(洪) 수령【종운(鍾韻)】에게 부치다(寄靈巖倅洪【鍾韻】)
- 사군(使君) 윤종지(尹宗之)가 천관산(天冠山)을 유람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쳐 올리다(聞尹使君【宗之】遊天冠山寄呈)
- 구강정사(龜江精舍)의 시에 차운하여 김중원(金仲源)【오(浯)】에게 보이다(次龜江精舍韻。示金仲源。【浯】)
- 종제(從弟)가 사암산(莎巖山) 아래에 작은 정자를 지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멋대로 써서 부치다.(聞從弟將構小亭于莎巖山下。謾筆以寄。)
- 사군(使君) 윤종지(尹宗之)의 운에 화답하다(酬尹使君【宗之】韻)
- 금릉(金陵) 조 사군(使君)【성(惺)】에게 화답하다(酬金陵使君趙【惺】)
- 이 감여(李堪輿)【계현(啓玄)】에게 주다(贈李堪輿【啓玄】)
- 김중원(金仲源)의 시에 차운하다(次金仲源韻)
- 김장이(金丈而) 신(愼)의 시에 차운하여 김 거사(金居士)에게 화답하다(次金丈而愼韻。酬金居士。)
- 나자정(羅子整)의 만휴당(晩休堂) 시에 차운하다(次羅子整晩休堂韻)
- 조보(朝報)를 보고 감회가 일어(見朝報有感)
- 서 감사(徐監司)【필원(必遠)】가 관찰사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聞徐監司【必遠】按節)
- 이 상공(李相公)【경여(敬輿)】의 시에 화운하다(和李相公【敬輿】韻)
- 윤 충의(尹忠義)【장훈(長勳)】의 산실(山室)에 부치다(寄尹忠義【長勳】山室)
- 오씨(吳氏)에게 주다【재발(再發)이니, 곧 처조카이다.】(贈示吳【再發。卽聘侄也】)
- 김중원(金仲源)【오(浯)】에게 답하다(答金仲源【浯】)
- 이 사군(李使君)【정(晸)】이 찾아온 데 대해 사례하다(謝李使君【晸】來訪)
- 종제【해영(海英)】의 산당(山堂)에 부치다【무술년(1658, 35세)】(寄從弟【海英】山堂【戊戌年】)
- 부질없이 읊다(漫吟)
- 묵은 등걸의 분매(盆梅)(古査盆梅)
- 도동(道洞) 산재(山齋)에 제하다(題道洞山齋)
- 동짓날 감회가 있어(長至日有感)
- 거울을 보며(看鏡)
- 기해년(1659, 36세) 봄 응지상소(應旨上疏)를 짓고 점을 쳤는데 둔괘(屯卦)와 둔괘(遯卦)의 점괘를 얻었으므로 올리지 않았으니, 감회가 있어 짓다(己亥春。應旨筮疏。遇得屯遯不進。感而作。)
- 한가한 흥(閒興)
- 늦봄【3월 3일】(暮春【三月三日】)
- 불어난 물을 보며(觀漲)
- 경인년(1650, 27세) 제야(庚寅除夕)
- 감시음(感時吟)(感時吟)
- 생일날 감회【선생의 생일은 2월 17일이다.】(生朝感懷【先生初度日。乃二月十七日。】)
- 한가한 가운데 감회를 적다(閒中書懷)
- 삼학재(三學齋)에서 제생에게 보이다(三學齋示諸生)
- 한가히 지내며 장난삼아 제하다(閒居戲題)
- 노을(霞)
- 늦봄에 꽃이 만개하였는데 눈바람이 몹시 매서워 시동으로 하여금 운자를 부르게 하여 장난삼아 제하다(暮春花盛。風雪甚烈。令侍童呼韻戲題。)
- 풍토(風土)를 읊다(詠風土)
- 승지(勝地)를 읊다(詠勝地)
- 저물녘의 일을 적다(日暮書事)
- 작은 정자가 강가에 임해 있는데 작은 산이 둘러 있으니, 경치가 기이하고 훌륭하여 붓 가는대로 장난삼아 제하다(小亭臨江。微山橫障。景像奇勝。信筆戲題。)
- 구름을 보며(看雲)
- 다시 죽림사(竹林寺)를 노닐며(重遊竹林寺)
- 유거(幽居). 사실체(四實體)를 본뜨다(幽居。效四實體。)
- 제석(除夕)에 감회를 쓰며 스스로 슬퍼하다(除夕書懷自悼)
- 금사탄(金梭歎)(金梭歎)
- 도민고현(道民古縣)【선생의 우거지이다.】(道民古縣【先生寓居地】)
- 중원(中原)에 전란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聞中原多亂)
- 부들부채를 읊다(詠蒲扇)
- 중구일(重九日)에 홀로 술을 마시다 감회가 있어(九日獨酌有感)
- 섬돌 옆 푸른 잣나무 아래 해당화(海棠花)가 있어 붉고 푸른빛이 서로 비쳤다. 이에 감회가 일어 제하다(階邊翠栢下有海棠。紅綠相暎。仍起感而題。)
- 《삼략(三略)》을 읽고(讀三略書)
- 한가로이 거닐며(閒行)
- 제석(除夕)
- 병중의 심회(病懷)
- 이거(移居)
- 어떤 사람의 말에 삼신산(三神山)이 모두 우리나라에 있다고 하였는데, 내가 사는 땅이 선포(仙圃)이다. 이에 이 시를 지어 감흥을 일으키다(有人言三神山皆在我國。吾所居地是仙圃。仍題此而起興。)
- 봄날 맑은 강의 저물녘 흥취(春日淸江晩興)
- 친족 모임(族會)
- 중용(中庸)
- 대학(大學)
- 논어(論語)
- 맹자(孟子)
- 비 내린 뒤(雨後)
- 저물녘 교외를 지나다 우연히 뱁새들이 무리 지어 지저귀는 것을 보고(日暮過郊外。偶見鷦鷯羣噪。)
- 벽 위에 쓰다(書壁上)
- 겨울날 본 것을 기록하다(冬日記所見)
- 달 아래에서 감회가 있어(月下有懷)
- 눈을 읊다(吟雪)
- 홍 장령(洪掌令)【종운(鍾韻)】에 대한 만사(挽洪掌令【鍾韻】)
- 종형【진영(震英)】에 대한 만사(挽從兄【震英】)
- 나운봉(羅雲峯)【염(袡)】에 대한 만사(挽羅雲峯【袡】)
- 윤 충의(尹忠義)【장훈(長勳)】의 내상(內喪)에 대한 만사(挽尹忠義【長勳】內喪)
- 이씨(李氏)【화백(和伯)】의 개장(改葬)에 대한 만사(輓李【和伯】改葬)
- 영평(永平) 채후(蔡侯)【충립(忠立)】에 대한 만사(挽永平蔡侯【忠立】)
- 윤양로당(尹養老堂)【보(保)】에 대한 만사(挽尹養老堂【保】)
- 외종숙 문장(文丈)【완(玩)】에 대한 만사(挽外從叔文丈【玩】)
- 정 태의(鄭太醫)【후계(後啓)】에 대한 만사(挽鄭太醫【後啓】)
- 김생(金生)【일장(日章)】에 대한 만사(挽金生【日章】)
- 남을 대신하여 지은 이웃 부인에 대한 만사(代人輓隣婦)
- 윤 충의(尹忠義)【경(儆)】에 대한 만사(挽尹忠義【儆】)
- 남을 대신하여 지은 만사(代人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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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언율시)(詩(七言律詩))
- 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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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언고시)(詩(七言古詩))
- 《송사(宋史)》의 희풍(煕豐)‧원우(元祐) 연간의 기록을 읽고(讀宋史煕豐元祐紀)
- 칠석탄(七夕歎)(七夕歎)
- 행로난(行路難)(行路難)
- 월출을 보며【때는 경인년(1650, 27세) 9월 보름날 밤이었다.】(觀月出【時庚寅九月十五夜】)
- 예전의 유람을 추억하며 종형 문백(文伯)에게 부치다.【이름은 한탁(漢倬)이다. 만년에 고월정(孤月亭)을 지어 한 시대의 제현(諸賢)과 함께 시와 술을 즐겼다.】(憶舊遊行。 寄宗兄文伯。【名漢倬。 晩築孤月亭。 與一代諸賢。 詩酒自娛。】)
- 금릉수(金陵守) 조씨(趙氏)【성(惺)】에게 부쳐 주다(寄贈金陵守趙【惺】)
- 종제에게 부쳐 주다【해영(海英)이다. 호는 광곡자(廣谷子)다.】(寄贈從弟【海英號廣谷子】)
- 장계곡(張谿谷)의 〈세서(洗鋤)〉 시에 차운하다【이 해에 조정에서 대동법(大同法)을 반포하였는데, 농민들 가운데 간혹 조세 부담이 심해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시 속에서 언급하였다고 한다.】(次張谿谷洗鋤詩韻【是年朝庭頒大同法。 農民往往疑其賦苦。 故詩中及之云。】)
- 중양절(重陽節)에 장병에게 연향을 베푼 시(重陽饗將士詩)
- 불어난 물을 바라보며(觀漲)
- 명주(明珠)를 읊다(明珠詠)
- 거처를 옮기고서 자술(自述)하다(移居自述)
- 연환체(連環體)(連環體)
-
시(칠언고시)(詩(七言古詩))
- 권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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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書)
- 우산에게 올린 질의서【이때에 우산 안방준이 〈우산답문〉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그 의론이 편벽되었다. 그러므로 선생이 변론을 지어 질의하신 것이다.】(上牛山質疑書【時安牛山邦俊作牛山答問書, 其論陂僻. 故先生作辨以質疑.】)
- 맹교를 대신하여 한퇴지의 '명'이라는 글자에 관한 송서에 답한 편지(代孟郊答退之鳴字序書)
- 나【두삼】태서의 별지에 답하다【나두삼이 예에 대해 물었으므로 선생이 답한 것이다.】(答羅【斗三】台瑞別紙【羅斗三問禮 故先生答之】)
- 별폭【이름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는 사람이 의심스러운 예에 대해 질문한 것이다】(別幅【未詳名何人之問疑禮】)
- 심경문목【물은 사람이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心經問目【夫詳問子何人】)
- 이사원(李士元)【문석(文碩)】에게 주는 편지(贈李士元【文碩】書)
- 신씨(愼氏)【성필(聖弼)】에게 답하는 편지(答愼【聖弼】書)
- 신씨(愼氏)【성필(聖弼)】에게 답하는 편지(答愼【聖弼】書)
- 신씨(愼氏)【성필(聖弼)】에게 부치는 편지(寄愼【聖弼】書)
- 신씨(愼氏)【성필(聖弼)】에게 답하는 편지(答愼【聖弼】書)
- 이 정언(李正言)【수인(壽仁)】에게 답하는 편지(答李正言【壽仁】書)
- 이 전한(李典翰)【수인(壽仁)】에게 답하는 편지(答李典翰【壽仁】書)
- 별록【당시 선생이 《심경(心經)》에 대해 질문한 내용을 덧붙임】(別錄【附時先生以心經質問】)
- 이생(李生)【유인(有仁)】에게 주는 편지(與李生【有仁】書)
- 문생(文生)【사고(師古)】에게 주는 편지(與文生【師古】書)
- 정처직(鄭處直)에게 부치는 편지(寄鄭處直帖)
- 정씨(鄭氏)【세륜(世綸)】에게 답하는 편지(答鄭【世綸】書)
- 윤군(尹君)【선삼(先三)】 및 문생(文生)【팔주(八柱)】, 조카 정씨(鄭氏)【세경(世經)】 등에게 주는 경계의 편지(與尹君【先三】曁文生【八柱】鄭侄【世經】等戒書)
-
서(書)
- 권10
-
-
서(序)
- 김씨족보서(金氏族譜序)
- 김씨족계서(金氏族禊序)
- 매백헌유고서【이름은 희일(喜馹)이고 호는 매백헌(梅栢軒)이다. 한림(翰林) 오빈(吳賓)의 증손이다.】(梅栢軒遺稿序【名喜馹號梅栢軒。 翰林吳公賓之曾孫也。】)
- 성암집서【이름은 수인(壽仁)이고 호는 성암(惺庵)이다. 청련(靑蓮) 후백(後白)의 손자로 인조 연간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역학(易學)에 침잠하여 생을 마쳤다.】(惺庵集序【名壽仁號惺庵。 靑蓮後白之孫。 仁廟朝登第不仕。 沉潛易學而終。】)
- 금강중수계서(錦江重修禊序)
- 구고서재제생명적록서(九臯書齋諸生名籍錄序)
- 삼학재학생계권서(三學齋學生契券序)
- 수운정서(峀雲亭序)
- 구암서실팔영시서(龜巖書室八詠詩序)
- 제정생초동책후서(題鄭生抄東策後序)
- 사잠서(四箴序)
- 기(記)
- 발(跋)
-
서(序)
- 권11
-
-
경의설(經義說)
- 원리기설(原理氣說)
- 중설(中說)
- 관계(冠誡)
- 시학발휘(詩學發揮)
- 한거지(閒居誌)
- 경서문대(經鋤問對)
- 완물편【선생의 나이 스물두 세 살에 독서할 때 쓴 일기이다.】(玩物篇【先生年二十二三。 讀書時日記。】)
- 인구태극도(人具太極圖)
- 《중용》수장지도(中庸首章之圖)
- 《중용》수장 존양성찰지도(中庸首章存養省察之圖)
- 《중용》분절변의(中庸分節辨義)
- 《중용》 분위오대절(中庸分爲五大節)
- 덕성문학도(德性問學圖)
-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
- 노재왕씨 인심도심도부(魯齋王氏人心道心圖附)
- 역상소결【경술년(1670, 현종11) 사이에 서생들을 위해 기록을 시작했는데 질병 때문에 송괘(訟卦)에서 그만두었다.】(易象小訣【庚戌年間。 爲諸生始述。 以疾病。 至訟卦而止。 】)
- 삼학재규의(三學齋規儀)
-
경의설(經義說)
- 권12
-
- 찬(贊)
- 명(銘)
- 송(頌)
- 잠(箴)
- 상량문(上梁文)
-
제문(祭文)
- 이성암에 대한 제문(祭李惺菴文)
- 이성암에 대한 제문을 또 짓다【봉산서원 유생 등을 위해 지었다.】(又祭李惺菴文【爲蓬山書院儒生等作。】)
- 녹동서원에 최산당을 추배하는 제문(祭鹿洞書院崔山堂追配文)
- 존양 선생 신위전 고사문(存養先生神位前告辭文)
- 구담의 강가 집의 터를 닦을 때 제문【조카 오재발을 위해 짓다.】(祭龜潭江舍開基文【爲吳侄再發作。】)
- 이사 후 토지신에 대한 제문【을축년 정월 16일 을해】(祭移家後土神文【乙丑正月十六日乙亥】)
- 지담에서 비를 비는 제문【신축년 여름(1661, 현종2) 영평 사군 채충립을 위해 짓다.】(祭砥潭祈雨文【辛丑夏。 爲永平使君蔡忠立作。】)
- 묘지명(墓誌銘)
- 권16
-
-
경세통전(經世通典)
- 사람을 육과(六科)로 나누다[人分六科](人分六科【總目】)
- 사민에 관한 전례(士民典例)
- 삼사가 시강하는 통례(三士試講通例)
- 농민에 관한 전례(農民典例)
- 내직에 관한 전례를 논하다(論內官制典例)
- 외직에 관한 전례를 논하다(論外官典例)
- 공민에 관한 전례(工民典例)
- 상민에 관한 전례(商民典例)
- 승민에 관한 전례(僧民典例)
- 병민에 관한 전례(兵民典例)
- 승병(僧兵)
- 노병(奴兵)
- 병민(兵民)에 관한 총목(總目)【兵民總目】(兵民總目 【兵分六科】)
- 지방 의병에 관한 전례(鄕義兵典例)
- 육과의 병민이 과거를 치르는 전례(六科兵民科擧典例)
- 내관과 외직에 대한 규정을 세우는 전례(內外立法典例)
-
경세통전(經世通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