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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호유사
- 여러 공들의 시편(諸公詩章)
- 나중부의 시에 차운하여 선릉재소에 올리다(次羅仲孚韻 仍呈宣陵齋所)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호유사 / 여러 공들의 시편(諸公詩章)
나중부의 시에 차운하여 선릉재소에 올리다
【이언양, 자는 경례(景禮)이고, 양성(陽城) 사람으로, 흥룡동(興龍洞)에 거주하며 자호를 용강(龍江)이라 하였다.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주 68)의 문인이며 공과 더불어 을묘(乙卯) 사마(司馬) 정묘(丁卯) 문과에 합격하고, 벼슬은 함양 군수에 이르렀다. 공이 일찍이 선릉 침랑으로 함께 벼슬하고 있을 때 "이공과 함께 객지에서 벼슬하며 같은 집에서 살 적에 셋째 아들 나덕윤(羅德潤)이 나를 따라 왔다. 중학(中學)에 이름을 걸고 《소학》, 《심경》, 《근사록》을 이공에게 배웠다. 그래서 사운시에서 '그대가 아들 하나를 데리고 왔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이공은 그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딸을 시집보냈다."라고 하였다.】
풍우에 차가운 창 흰 머리에 수심 가득한데 風雨寒窓鶴髮愁
남쪽하늘에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네 南天杳杳白雲悠
사람 없는 호수 너머 봄옷을 전하니 無人湖外傳春服
천리 밖 여름에 응당 그대 고생하리 千里應勞爲子夏
- 주석 68)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 1510~156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여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인종이 즉위하여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次羅仲孚韻 仍呈宣陵齋所
【李彦讓, 字景禮, 陽城人, 居州之興龍洞, 自號龍江. 金河西麟厚門人, 與公同中乙卯司馬 丁卯文科, 官至咸陽郡守. 公嘗於宣陵寢郞, 供仕之曰 : "與李公同舍旅宦, 第三子德潤, 亦從焉. 托名中學而受小學 心經 近思錄於李公. 其四韻詩所云君來携一子者, 此也. 李公愛其才, 以女妻之."云】
風雨寒窓鶴髮愁, 南天杳杳白雲悠.
無人湖外傳春服, 千里應勞爲子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