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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삼고(錦城三稿) / 금호유사 / 저술(著述)

자료ID HIKS_OB_F9008-01-240502.0008.0001.TXT.0017
행적집록
《미암일기(眉巖日記)》에 다음의 기록이 있다.
"무진년(1568) 6월 20, 도목정(都目政) 나사침(羅士沈)이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수망(首望)에 들어 낙점되었다."
"8월 1일, 나사침을 불러 함께 외조부 금남 선생의 문집을 교정하였다. 【당시 공은 사은숙배(謝恩肅拜)주 61)를 위해 서울에 와 있었다.】"
"기사년(1569) 6월에 나중부(羅仲孚)가 관직을 버리고 멀리 와서 형의 상을 지내기 위해 관직을 그만두었으니 훌륭한 행동이다. 【같은 해 6월 7일에 맏형 시정(寺正) 나사선(羅士愃)이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은 경기전 부임지에서 15일에 부고를 듣고 다음날 곧바로 출발하여 곡하였다. 관례에 따라 전 참봉(參奉) 최감사(最監司)가 주관했는데 관직을 버리고 멀리 떠나면 근무평가 점수가 낮기 때문에 이처럼 관직을 그만둠이 훌륭하다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7월, 나사침이 27일에 보낸 편지를 길 가던 중에 보았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길목마다 각 관아에서 군인과 수레와 소를 성대하게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음식도 내어주고 노자를 도와준 곳도 있었으니 이는 모두 형님께서 편지를 써준 덕분입니다. 감사한 마음을 낱낱이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처음 출발하던 날 광주(廣州)에서는 군인과 소를 또 성대하게 내어주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출발한 날에 용인의 행원까지 이를 수 있었습니다. 충청도의 각 관아에서 감사가 노자를 소략하게나마 주어 상하 노비의 주인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은진(恩津)주 62) 현감은 특별히 모두를 대접하고 또 노자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같은 달 21일에 공은 시정공을 모시고 상갓집을 가기 위해 서울에서 출발하여 여산(礪山)에 이르러 편지를 썼다.】"
"경오년(1570) 5월 15일, 나사침의 편지를 보았는데 지난 4월 26일 무안(務安) 석진리(石津里)에 있는 외증조 최진사(崔進士)의 묘를 찾아 가서 묘지기를 정하고 풀을 베고 소먹이는 것을 금지하도록 했으며 묘의 모습은 예전과 같고 무덤 앞 땅도 완전했으며 석물들도 옛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하여 감개가 무량했다고 하였다. 【최진사의 휘는 택(澤)이고, 부인은 여양 진씨(驪陽陳氏)로, 태평관직(太平館直) 최용지(崔用之)의 따님이니, 곧 금남(錦南)의 어머니이다. 묘소는 석진리 어을곳(於乙串)에 있다. 미암이 일찍이 공에게 가서 성묘를 요청하니 이에 산지기를 정하여 묘소를 지키게 했고 또 본현 수령에게 편지를 보내 그 일을 이루는 데 도움을 주도록 했으므로 공이 요청을 따른 뒤에 이처럼 답장을 한 것이다.】 "
"9월 12일, 호조판서(戶曹判書) 홍담(洪曇) 태허공(太虛空)이 지나가다 들러 조용히 말해주기를 '나사침이 형의 죽음을 듣고 급히 달려갔다가 최하의 평점을 받았습니다. 잘못한 점을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진 사람인지 알 수 있다주 63)고 했는데 내년 6월이면 부임한 지 2년이 되어갑니다. 영공께서 만일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시면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홍공은 '매우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라고 하였다."
"신미년(1571) 6월 5일, 중부가 나의 선조 제사를 위하여 담은 술 두 병을 보내와 냉수에 담가 두었다. 【미암이 본도의 감사로서 순행하다 나주에 도착했는데 6월 6일이 곧 부모님의 기제(忌祭)이므로 공관에서 지방을 써서 제사를 올리고자 했으니 공이 제사에 쓸 술을 걸러 보내온 것이다.】"
"8월 19일, 나사침이 선릉 참봉(宣陵參奉) 수망(首望)에 들어 낙점을 받았기에 매우 기뻐 급히 편지를 보내 축하하였다. 【곧 20일 곡성을 순행할 때의 일이다.】"
"갑술년(1574) 4월, 나사침이 정(正) 나중묵(羅仲默) 형의 아들 나몽남(羅夢男)이 3월 26일 상한(傷寒)주 64)으로 죽었다고 알려왔다. 이 사람은 바로 병사(兵使) 임진(林晉)의 사위이다. 깜짝 놀라고 슬프다. 【몽남은 바로 나덕순(羅德純)의 어릴 때 이름이다. 재작년에 겨우 혼례를 치렀는데 올해 16살로 요절한 것이다. 공이 초상을 치르고 난 뒤에도 여전히 매일같이 소찬을 먹었기에 미암이 공을 맞이하여 간곡히 육식을 권하며 말려놓은 꿩 한 마리를 보냈다.】"
"5월 6일, 나사침을 맞이하여 잘 정미한 쌀을 주고 매화시(梅花詩)를 주었다. 【이는 퇴계의 작품이다.】"
"7일, 황해감사(黃海監司) 민기문(閔起文)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나사침에게 보냈으니 답서를 보내왔는데 '이는 평소 경모하고 갖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감히 보배처럼 진주처럼 아끼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서 씨가 아들을 잃은 후 나사침에게 편지를 보내 나덕윤을 양자로 삼기를 청하였지만, 나사침은 그럴 수 없다고 답장을 보냈다. 나는 그가 의를 안다고 칭찬하였다. 【서 씨는 나정(羅正)의 둘째 부인이자 나몽남의 어머니이다. 6월 그믐과 7월 20일 두 차례 편지를 보내 양자로 삼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뒷날 서 씨가 부인 임 씨와 더불어 간사한 꾀를 내고서는 몰래 고을 서문 밖에 살고 있는 사노비 김서비(金西非)의 아들을 유복자라고 속이고 윤달 12월 22일 해산했다고 하였다.】"
"병자년(1576) 4월 20일, 나사침을 다시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으로 삼았다."
"김학봉(金鶴峰)이 임 씨와 나 씨의 송사 결미의 문건에 '임 씨가 나사침을 불러 말했지만, 그의 자식을 양자로 들이지 않음을 분하게 여겨 이처럼 생각지도 못한 말을 지어냈다. 당초 서 씨가 나사침에게 양자를 들일 수 있도록 요구했지만, 나사침이 허락하지 않자, 서 씨는 억지로 그 일을 하고자 하여 언문으로 무식한 부인이 무슨 법을 알겠나 하고 썼으니 서 씨의 간절한 요구와 나 씨의 견고한 사양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서 씨가 간곡하게 양자를 요구했으나 끝내 도리가 아닌 말을 더했으니, 나사침은 매우 흉험함에 빠진 것이다.' 【김학봉은 김성일(誠一)이다. 자는 사순(士純)이고, 의성 사람이며, 거주지는 안동으로 퇴계의 문인이다. 가정(嘉靖) 갑자년(1564)에 생원에 급제하였다. 융경(陰慶) 무진년(1568) 문과에 급제하였고, 계미년(1583)에 사인(舍人)으로 특별히 나주목사(羅州牧使)의 관직을 받았다. 병술년(1586)에 임 씨와 나 씨에 대한 송사를 판결을 내려 거짓자식에 관한 복잡한 사연을 밝혔다. 그해 겨울 파직되어 체임되었다. 계사년(1593)에 경상 우감사(慶尙右監司)로 진주(晉州)에서 죽었다. 훗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라고 하였다."
"학봉이 송사를 판결한 이후 추고공함(推考公緘)주 65)에 '나 씨의 집안은 화목한 가문이라 온 고을사람들이 감복한다. 나사침이 정려를 표창 받고 부역과 세금을 면제받은 일 또한 온 나라 사람들도 아는 것이다. 일이 드러나기 전에는 서 씨가 매번 슬픈 말과 괴로운 말로써 나사침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나사침이라는 사람은 천리나 떨어진 부임지에서 답장을 쓰면서 우선 위로하여 마음을 풀어주려는 뜻을 지극하게 했으니 이는 인정상 매우 지극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부제학 유희춘은 나 씨 가문과 사촌으로서 두 번이나 편지를 써서 선처해 줄 계획을 냈다. 부사(府使) 김천일(金千鎰)은 임 씨와 서 씨의 이웃으로서 그들의 간악한 상황을 잘 알고 있어 의리상 은혜를 끊어야 한다고 권하였다. 이러한 우여곡절이 모두 《추안(推案)》에 실려 있다. 유희춘의 글에는 6~7월에 양자를 구한 일들이 분명히 실려 있고 김천일의 공함(公緘)에도 김서비(金西非)가 아이를 요구한 일이 분명히 실려 있다. 오직 이 두 사람의 말로도 옥사를 판단하기에 충분한데 이러한 말들을 믿지 않고 괴이한 아녀자의 말을 믿으니, 나 씨 가문에 대한 편지 전후가 서로 어긋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로 이해할 수 없다."
"3월부터 7월까지 이전에는 조금도 사악한 뜻이 없었고, 단지 나사침에게 양자를 요구할 생각만 있었다. 7월 20일 편지에는 마음을 유복자에 두어 또한 어디에 의탁하여도 따질 수 없는 일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뜻이 정성스럽고 비통하여 양자를 구하려는 생각이 더욱 간절했던 것이다. 나사침이 의로써 준엄하게 사양한 뒤라면 계책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8월에 처음으로 거짓 임신하였다는 상황을 만들었는데 어떻게 6~7월에는 형태도 없던 임신이 갑자기 8월에 형태가 생기는 이치가 있겠는가. 그 거짓 임신한 곡절이 이러하다."
"가령 나 씨 한 집안이 진실로 흉험하다 한들 반드시 남에게 혐의를 씌우고 자기에게 이익이 있은 뒤에 송사를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나 이들은 화목한 행실이 평소에 있고 재물로 다투는 일이 없다. 18세의 질부가 유복자가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무도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기쁜 행실과 슬픈 감동의 마음이 있는데, 무슨 이유로 효행으로 정려를 표창 받고 학업으로 일을 삼는 자가 온 집안이 한 마디 말을 한다고 하여 반드시 죽은 조카의 후손을 끊으려고 했겠는가. 이런 일들은 법사(法司)가 이미 명확하게 살폈기에 다시 미루어 법으로 다스릴 것이 없는 데에도 굳이 여의사의 말을 믿고서 그렇게 했으니 정말 이해되지 않는다."
"정한강(鄭寒岡)이 쓴 〈학봉행장(鶴峰行狀)〉에는 다음의 기록이 있다. '계미년(1583)에 특별히 나주목사의 관직을 받았다. 고을에 임 씨와 나 씨가 있는데 모두 한 고을의 명문 집안이다. 나 씨가 임 씨 집안에 장가를 들었으나 자식 없이 죽었다. 임 씨가 몰래 다른 사람의 아이를 취하여 노비와 더불어 몰래 계획하여 유복자가 있어 자기가 낳았다고 하였다. 나 씨 집안에서 그것이 거짓임을 판별함과 동시에 그가 집안을 어지럽힌 것에 대하여 송사를 청하여 여러 차례 조사를 받았지만 몇 년 동안 판결이 나지 않았다. 공이 한 번에 거짓임을 간파하고 그것이 거짓임을 밝혀 판결했기에, 공론이 매우 만족스러웠다.' 【정한강은 정구(鄭逑)로, 자는 도가(道可)이고, 청주(淸州) 사람이며, 거주지는 성주(星州)이다. 한훤당(寒暄堂)의 외증손으로 도학은 대개 유래가 있었고, 퇴계(退溪) 선생과 남명(南冥) 선생의 문하에서 종유하여 더욱 학문을 하는 방법을 배웠다. 선조 초에 음덕으로 벼슬을 받아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 초에 특별히 대사헌(大司憲) 겸 보양관(輔養官)을 지냈다. 정사년(1617) 겨울에 〈학봉행장〉을 짓고 경신년(1620)에 세상을 떠났다. 인조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문목공(文穆公)의 시호를 받았다. 효종 때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무안의 유생 배명(裵蓂) 등이 상소한 글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전 이산 현감(尼山縣監) 나사침은 바로 중종 때 정려로 표창된 효자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에 특별히 참봉(參奉)의 관직을 내리고 승진시켜 이산 현감에 임명하셨는데, 그 고을에 많은 업적이 있으므로 청덕거사비(淸德去思碑)를 세웠습니다. 임금과 어버이가 비록 같지 않다고 하지만, 충성과 효도가 본래 두 이치가 없습니다. 가정의 교훈이 미치는 곳에 반드시 그 근본이 있으니 그 한 집안사람이 비록 모두 충성스럽고 신의를 갖추지는 못하더라도 반드시 역적이 되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 전 도사(都事) 신(臣) 나덕명(羅德明)은 모두가 학문과 독실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로서 상소 안에 들었으니 억울하고 또한 비참합니다. 대낮에 햇빛이 비쳐 충성심이 밝으니 진실로 신 등의 어리석은 말이 필요도 없이 잘 가려서 사실을 조사하여 주십시오.'주 66)"
"임금께서 '알았다.'라고 하셨다. 【기축년(1589) 12월에 정암수(丁巖壽)의 무고한 상소가 있었기에 배명 역시 상소를 올려 정곤재(鄭困齋)와 공의 원통함을 밝혔다.】 "
"전해오는 기문(記聞)에 '나의 형님 취암(鷲巖) 【유성춘(柳成春)이다.】 은 예전 이조 좌랑(吏曹佐郎)을 지내다 일찍 세상을 떠나셔서 손녀는 있지만 부모가 없었기에 내가 공의 형제들에게 사위를 택해 달라고 요청했더니, 공이 외5대조 최유중(崔有中)의 후손 최수경(崔秀景)이 괜찮다는 뜻을 편지로 보내왔는데 나이가 겨우 18세에 인물이 훤칠한 데다 배움의 기상이 있다고 하였다. 나는 평소 공을 신뢰해 왔기에 마침내 그와 혼인시켰다.' 【최공의 실제 계파 외조(外祖)의 선조는 자세하지 않으나 그 내력은 반드시 공의 고조인 무안 현감(務安縣監)이고, 공의 아내 영천 최씨(永川崔氏)의 선고(先考)이다.】 라고 하였다."
"이산으로 부임하였을 때 도적질하는 사람 하나를 붙잡아 의리로 가르치고 놓아주었으니, 도적질을 했던 사람이 감동하여 마음을 고쳐먹었다. 고을 앞에 객점을 설치하여 오가는 손님을 대접하여 스스로 새롭게 할 땅이라며 애써 부지런히 일했으니, 사람들은 덕화가 남에게 미치는 것이 이와 같다며 칭찬하였다."
"이산에 부임하였을 때 사위의 집과 종손의 집에서 모두 말을 보내와 요청하였기에 응하였다. 종가의 물품을 사위의 집보다 넉넉하게 주었으니 사람들은 종가를 중시 여기는 의리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이산현 앞길 옆에 처음 거사비(去思碑)가 있었는데 임진년(1592) 병화에 손상을 입었기에 유민(遺民)들이 다시 그를 위해 비석을 세워 잊지 않는다는 뜻을 깃들이고 칠언 절구를 새겼다.

시든 꽃 한 송이 외로운 학 한 마리 倭花一朶鶴一隻
쓸쓸히 행리에 옛사람의 풍모 있네 行李蕭然古人風
백성은 훌륭하신 당신 떠남을 안타까워 하니 齊民痛惜仁賢去
소백에 대한 포장도 썩 넉넉한 건 아니리주 67) 召伯修褒亦不公

이 시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공이 경인년(1590)에 붙잡혀 갈 때 다섯 아들까지 일시에 잡혀가 어려움이 많았기에 화를 입을까 두려워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로지 같은 고을의 효자 이유경(李有慶)만이 도움을 행하여 환난에서 서로 구제해주는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듣는 자들은 그것을 바른 행동이라고 하였다. 【이유경의 자는 효숙(孝叔)이고, 경주(慶州) 사람이다. 일찍이 고을의 모산촌(茅山村)에 살면서 효로 이름이 났으니 곧 기묘(己卯)의 이름난 선비 생원 이해(李蟹)의 증손이다. 역시 경인년에 고을 사람들에게 무고로 체포되었으나 곧바로 방면되었다. 훗날 조정에서는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두 번 사부(師傅)의 관직을 내렸지만 모두 나아가지는 않았다.】"
주석 61)사은숙배(謝恩肅拜)
관료로 처음 임명된 자가 궁중에서 임금에게 국궁사배(鞠躬四拜)하여 은혜에 감사함을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주석 62)은진(恩津)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을 말한다.
주석 63)잘못한 …… 있다
《논어》 〈이인(里仁)〉에 보인다.
주석 64)상한(傷寒)
추위로 인한 급성 열병을 말한다.
주석 65)추고공함(推考公緘)
글로써 죄인을 심문하는 것 또는 그 내용을 말한다.
주석 66)전 …… 주십시오
〈기축록(己丑錄)〉과 〈혼정편록(混定編錄)〉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주석 67)소백에 …… 아니리
거사비를 세웠지만 미진하다는 백성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원문 '소백(召伯)'은 주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다. 남국(南國)을 다스릴 때 선정을 펼치자 백성들이 그가 머물고 쉬었던 감당나무를 소중히 생각하여 "무성한 감당나무 자르지도 말고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머무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 하였다. 《詩經 甘棠》
行蹟輯錄
眉巖日記曰 戊辰六月二十日, 都目政羅士忱, 以慶基殿參奉首望受點.
又曰 八月初一日, 邀羅士忱, 相與校正外祖錦南先生集. 【時公以肅謝入京】
又曰 己巳六月, 羅仲孚棄官遠來, 護兄喪而得罷職, 亦有光矣. 【同年六月初七日, 伯兄寺正士愃公卒于京第. 公自慶基殿, 任所十五日聞訃, 翼日卽發奔哭之. 行舊例本, 前參奉殿最監司主之, 而以棄官遠去置下考, 故有此罷職有光之語.】
又曰 七月, 見羅士忱二十七日中路書, 略曰 一路各官, 不特盛出軍人與車牛, 亦有饋餉, 而助行資處. 此皆尊兄主折簡之力, 感泣之意, 益難枚喩. 初出之日, 廣州軍與牛, 亦盛出, 故發京之日, 能到龍仁行院. 忠淸道各官, 則以監司行下略, 供饋上下奴主. 恩津宰則特盡餉一行, 又大助行資. 【同月二十一日, 公陪寺正公喪行, 自京離發到礪山, 有此書.】
又曰 庚午五月十五日, 見羅士忱簡, 則去四月二十六日, 往尋務安石津里外曾祖崔進士墓, 定山直禁樵牧, 墓貌如昨, 階砌尙完, 石物依舊, 感愴不已. 【崔進士諱澤, 配驢陽陳氏, 太平館直諱用之之女, 卽錦南之考妣, 而墓在石津里於乙串. 眉巖嘗要公往省之, 仍使定山直守護, 且致書于本縣宰, 助成其事, 故公依示後裁答如右.】
又曰 九月十二日, 戶曹判書洪曇太虛公過臨, 談話從容, 仍及羅士忱以奔兄之喪遭殿, 觀過知仁. 來年六月, 乃經二年令公, 若判銓曺, 幸可收拾, 則答以甚可矜念云
又曰 辛未六月初五日, 仲孚爲我祭先釀酒送二甁來, 卽浸冷水中. 【眉巖以本道監司巡到羅州, 而六月初六日, 卽其親忌, 故欲以紙榜設祭于公廨, 公精釀祭酒, 以送之.】"
又曰 八月十九日, 政羅士忱入宣陵參奉首望, 受點, 深喜卽馳書以賀. 【卽二十日巡到谷城時事也.】"
又曰 甲戌四月, 羅士忱報羅正仲默兄之男夢男, 三月二十六日死於傷寒, 卽林兵使晉之婿. 驚悼驚悼. 【夢男, 卽德純之乳名. 再昨年, 纔成婚, 年今十六, 致夭. 公成服後, 尙累日行素. 眉巖邀致懇論勸肉▣, 送乾雉一首.】
又曰 五月初六日, 邀羅士忱授粲, 贈以梅花詩. 【卽退溪所作也.】
又曰 初七日, 以黃海監司閔起文所送家禮, 送于羅士忱, 答書略曰 此平日之所景慕而欲得者, 敢不寶藏而珍玩耶.
又曰 徐氏哭子後, 致書于羅士忱, 請以德潤爲侍養, 士忱以不可之意回報. 希春獎其知義. 【徐氏, 卽羅正之後室, 而夢男之母也. 六月晦日及七月二十日, 兩度致書, 懇乞侍養, 而不許之. 後徐氏與其婦林氏, 幻出奸謀, 潛竊本州西門外居私婢金西非之子, 詐爲遺孕, 而謂以閏十二月二十二日解胎.】 云云.
又曰 丙子四月二十日, 政羅士忱復換慶基殿參奉.
金鶴峰林羅訟結尾文案曰 林氏招內羅士忱, 憤其子不爲侍養, 成此不測之言, 而當初徐氏求侍養于士忱, 士忱不許, 而徐氏則堅欲爲之其諺書內乃曰 無識婦人, 何以知法乎云云. 則徐之懇求, 羅之固辭, 於此, 可知. 初則徐氏懇求侍養, 而終以不道之言加之, 士忱極爲兇險. 【金鶴峰諱誠一, 字士純, 義城人, 居安東, 退溪門人. 嘉靖甲子生員. 隆慶戊辰文科. 癸未, 以舍人特拜羅州牧使. 丙戌, 決折林羅訟, 明卞僞子委折. 其年冬, 罷遞. 癸巳, 以慶尙右監司, 卒于晉州. 後贈 吏曹判書, 諡文忠公.】
鶴峰決訟後, 推考公緘曰 羅門睦族, 一鄕之所取服, 士忱則至於旌閭復戶, 抑亦國人之所知也. 事跡未彰著之前, 則徐氏每以悲辭苦語, 抵書於士忱, 則爲士忱者, 千里仕宦, 其答書之際, 姑致慰解之意, 此人情之所必至者也.
又曰 副提學柳希春, 羅門之四寸, 而兩度致書, 以示善處之策. 府使金千鎰, 林徐之比隣, 而明知奸狀, 勸其以義斷恩, 此等曲折備載推案云云.
又曰 柳希春書中, 明言六七月求侍養之事, 金千鎰公緘中, 明言金西非覓兒之事, 惟此兩人之言, 足斷是獄, 不此之信, 而信妖婦之言, 謂羅門之書前後牴牾, 實所未解.
又曰 自三月至七月, 前少無邪意, 只圖侍養於士忱. 七月二十日書乃曰 意謂有遺腹而亦無計較於何依托云. 則其志誠悲而求侍養之計, 益切矣. 及士忱以義峻辭之後, 則計無所出. 八月間, 始爲僞胎之狀, 寧有六七月未形之胎, 遽形於八月之理, 其爲僞胎曲折如此.
又曰 設使羅家一門實爲兇險, 必有嫌於人, 有利於己然後乃可起訟, 而此則素有和睦之行, 而萬無爭財之事. 十八歲姪婦有遺腹之兒, 則雖大無道之人, 猶有喜行悲感之心, 何故以孝行旌閭, 以學問爲業者, 擧族一談必欲殄絶亡姪之後耶. 此等事狀法司旣已明察, 而不爲更加推卞, 必曰女醫之爲信, 實所未解.
鄭寒岡所撰鶴峰行狀曰 癸未, 特授羅州牧使云云. 州有林氏 羅氏, 皆一邑巨族也. 羅娶於林, 無子而死, 林竊取他人家兒, 與婢陰謀詐爲遺孕而爲己出. 羅門請辨其僞, 而訟其亂宗, 累經推覈, 積年不決. 公一覰看破, 明其爲僞而斷之, 公論大快. 【鄭寒岡諱逑, 字道可, 淸州人, 居星州, 以寒暄堂外曾孫, 道學蓋有所自, 遊退溪 南冥之門, 益聞爲學之方. 宣祖初以遺逸被薦, 歷官內外. 光海初, 特拜大司憲 兼 輔養官. 丁巳冬, 撰鶴峰行狀. 庚申卒. 仁祖朝, 贈吏曹判書 諡文穆公. 孝宗朝, 加贈領議政.】
務安儒生裵蓂等疏略曰 前縣監羅士忱, 乃中廟朝旌表孝子也. 殿下卽位之初, 特命爲參奉, 陞拜尼山縣監, 有茂績, 立淸德去思碑, 君親雖曰不同, 忠孝本無二致. 庭訓所及, 必有其本, 其一家之人, 雖不得皆爲忠信, 而必不欲爲逆賊之所與也. 其子前都事臣羅德明等, 皆以學行之人, 而授入疏內, 寃亦慘矣. 白日照臨, 丹心可明, 固不待臣等愚妄之說而不覈之也. 云云.
答曰 知道. 【己丑十二月, 有丁巖壽搆誣疏, 故裵蓂亦陳疏仲卞鄭困齋及公之案狀.】
傳來記聞曰 眉巖兄鷲巖 【成春】, 嘗爲吏曹佐郞, 早世. 有孫女無父母, 眉巖要公兄弟擇婿, 公乃以外五代祖崔公有中之後孫秀景, 合宜之意, 書以復之曰 年纔十八, 人物英明, 又有學氣. 云云. 眉巖素信公, 遂與之定婚. 【崔公實係外祖先而未詳. 其來歷必是公之高祖 務安縣監. 公配永川崔氏之考也.】
又曰 尼山莅任時, 捕得一賊人, 諭以義理, 而釋之, 賊人感動而懲創之. 創設縣前旅店, 接應行客, 以爲勤苦自新之地, 人稱德化之及人如此云.
又曰 尼山莅任時, 女婿家及宗孫家, 俱送馬求請而酬應. 宗家之物, 優於女婿家, 人服其重宗之義云.
又曰 尼山縣前路傍, 初有去思碑, 爲壬辰兵禍所傷, 故遺民爲之更立石, 以寓不忘之義, 而奮刻七言絶句, "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 齊民痛惜仁賢去, 召伯修褒亦不公"之詩, 不傳焉.
又曰 公之庚寅被拿也, 竝五胤一時發行, 事多艱辛, 而人皆畏禍, 無敢問者, 獨同鄕孝子李有慶, 以其所騎助行, 不負患難相救之義, 聞者韙之云. 【李有慶, 字孝叔, 慶州人. 嘗居州之茅山村, 以孝著聞, 卽己卯名流生員蟹之曾孫. 亦於庚寅爲鄕人所搆被逮尋宥. 後朝家聞其賢, 再除師傅, 皆不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