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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갈명 【서문과 함께 적는다.】(墓碣銘 【竝序】)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호유사 / 저술(著述)

자료ID HIKS_OB_F9008-01-240502.0008.0001.TXT.0015
묘갈명 【서문과 함께 적는다.】
나는 어려서부터 관직에 있는 분들과 종유하면서 호남의 나 씨(羅氏) 가문이 찬란하게 대대로 덕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노인이 되어 선비 나두하(羅斗夏)를 만났는데 그의 돌아가신 아버지와 돌아가신 큰형님 비문을 부탁하였기에, 내가 사모하던 마음을 표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어 그 적임자가 아님에도 사양하지 못하고 애써 일을 마쳤다. 지금 또다시 그 고조와 증조 2대의 묘문을 부탁받으니 돌아보건대 나는 더욱 늙고 병들어 실로 내 힘으로 다시 나두생의 요구에 부응할 수 없어 오래도록 머뭇거렸다. 그러나 남쪽을 향하여 길 떠난 사람이 영(郢) 땅주 52)에 이르지도 못하고 돌아와서 "나는 이미 초(楚)나라를 다 보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기에 마침내 억지로 일어나 마른 몸에 기운을 불어 넣어 글을 짓는다.
나생의 고조부는 찬성공(贊成公)에 추증된 나사침(羅士沈)으로, 자는 중부(仲孚)이다. 그 시조는 고려 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나부(羅富)이다. 그 후손으로는 공조 전서(工曹典書) 나진(羅璡)과 전농시(典農寺) 정(正) 나공언(羅公彦)이 가장 현달하였다. 나자강(羅自康)은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지내고 장사랑(將仕郎) 나계조(羅繼祖)를 낳았으며, 장사랑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나일손(羅逸孫)을 낳았으며, 승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된 나질(羅晊)을 낳았으니, 이 분이 찬성공의 4대조이다. 어머니 최 씨(崔氏)는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을 지내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된 금남(錦南) 선생 최부(崔溥)의 따님이다. 금남 선생은 박학하고 장엄한 절의가 있어 성종 때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찬성공은 가정(嘉靖) 을유년(1525) 12월 28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을 지녀 16세에 최 부인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약에 타서 올리니 곧바로 병이 나았다. 중종께서 정려를 표창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라 명하셨다. 장성하여 이소재(屬素齋)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동문인 남봉(南峰) 정지연(鄭芝衍),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등 모두 서로 추대하며 인정해 주었다.
명종 을묘년(1555) 국자생(國子生)이 되었고, 선조 원년 무진년(1568)에 관찰사 송찬(宋贊)이 공의 바른 행실을 임금께 아뢰니 임금께서 가상하게 여겨 여름에 경기전 참봉(慶機殿參奉) 관직을 내리셨으나, 맏형의 상을 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뒤에 선릉 참봉(宣陸參奉)을 맡았고, 다시 금오랑(金吾郞)을 지냈다. 종묘서 직장(宗廟署直長)을 거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였다. 갑신년(1584)에 이산 현감(尼山縣監)이 되자, 세력이 강한 자를 억제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구휼하는 정치를 펼치다가 방백에게 미움을 받아 고과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다.주 53) 그러나 고을의 백성들은 그를 추모하여 비를 세웠으니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
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 있구나 行李蕭然古人風

기축년(1589) 겨울에 역신(逆臣)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발생하자 위관 정철이 기회를 타서 죄상을 꾸몄는데 호남인 정암수(丁巖壽) 등이 정철의 뜻을 받들어 상소를 작성하여 한 시대의 이름난 선비들에게 화를 덮어씌웠으니 재상 이산해(李山海), 재상 정언신(鄭彦信), 유성룡(柳成龍),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등 모두 30여 명이 모두 한 그물에 걸려들었고 또 공의 부자 이름을 거론하며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는 정여립과 사귐이 지극히 친밀합니다. 아무개는 그가 연루되는 것이 두려워 여러 차례 속임수를 펴서 풀어날 것을 구할 것이니 모두 죄를 주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공의 아들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정암수의 소장을 심문하는 자리에 나가서 큰 소리로 변론하고 배척하였다. 정암수의 소장이 임금께 오르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반역의 변란을 틈타 부정한 소장을 진언하여 어질고 이름 있는 재상들을 지목하여 배척하지 않은 자가 없으니 나라를 텅 비게 한 뒤에야 그만둘 것이다. 이는 반드시 간사한 놈이 있어 부추긴 것이다."라고 하고 의금부에 명하여 정암수 등 10인을 붙잡아 심문하게 하셨다. 정철이 두려워 대관(臺官)과 성균관 유생들에게 부탁하여 소를 올려 요구하여 임금의 명이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임금의 혜안은 대단히 밝았기에 믿고 근심하지 않았다. 또 무안(務安)의 유생(儒生) 배명(裴箕) 등이 상소를 올려 곤재와 공의 원통한 상황을 매우 분명하게 밝혔다. 하지만 끝내 이전 정암수의 소장을 저지한 것이 죄가 되어 경인년(선조 23, 1590)에 공과 다섯 아들이 모두 연루되었다. 임금께서 하교하시길 "효자는 용서해주고 무고한 사람을 끌어들인 자는 자세히 살펴라."라고 하셨다. 공은 곧 다행히 용서를 받았지만 다섯 아들은 벗어나지 못하여 북쪽으로 귀양 갔으니 참으로 위태로웠다.
만력 병신년(선조 29, 1596) 12월 23일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2세였다. 무안 주룡(住龍) 나루 손향(巽向)에 터를 잡아 장사를 지냈는데 그것은 유언을 따른 것이다. 세 아들은 모두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서 거듭 추증되어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다. 첫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으로 네 아들을 낳았으며, 묘는 나주 장흥동(長興洞)에 있다. 둘째 부인 광주 정씨(光州鄭氏)는 사도첨사 정호(鄭虎)의 따님으로, 세 아들을 낳았으며 공과 함께 합장하였다. 두 분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아들 나덕명(羅德明)은 기묘년(1579) 진사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고, 나덕준(羅德峰)은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지냈고, 나덕진(羅德進)은 어려서 요절하였고, 나덕윤(羅德潤)은 무자년(1588) 진사에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고, 나덕현(羅德顯)은 효행으로 알려져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에 추증되었고, 나덕신(羅德愼)은 무과에 급제하여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지냈고, 나덕헌(羅德憲)은 무과에 급제하고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지냈다. 큰딸은 윤항(尹抗)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위홍주(魏弘宙)에게 시집갔다. 나덕명(羅德明)은 아들 넷을 두었다. 나이소(羅以素), 나인소(羅因素)가 있고,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나성소(羅成素)가 있고, 또 나취소(羅就素)가 있다. 나덕준(羅德峰)은 아들 다섯과 딸 둘을 두었다. 나찬소(羅纘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계소(羅繼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개천 군수(价川郡守)를 지냈고, 나위소(羅緯素)는 문과에 합격하여 동지 중추(同知中樞)를 지냈고, 또 나치소(羅緻素)와 나경소(羅經素)가 있다, 사위는 주부(主簿)를 지낸 김잡(金據)과 최광헌(崔光憲)이 있다. 나덕윤(羅德潤)은 아들 셋을 두었다. 나회소(羅繪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함안 군수(咸安郡守)를 지냈고, 나유소(羅由素)와 나의소(羅宣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지냈다. 나덕현(羅德顯)은 아들 여섯과 딸 하나를 두었다. 나익소(羅益素)는 선무랑을 지냈고, 나후소(羅後素)와 나득소(羅得素)는 지극한 행실이 있어 삼년상에 죽을 마시고 피눈물을 흘리다 죽었고, 나상소(羅尙素), 나순소(羅純素), 나중소(羅重素)가 있었으며, 정환(鄭換)은 그 사위이다. 나덕신(羅德愼)은 딸 둘을 두었다. 민희일(閔喜一)과 유천(柳遷)이 사위이다. 나덕헌(羅德憲)은 아들 셋과 딸 둘을 두었다. 나수소(羅守素)는 선무랑을 지냈고, 나태소(羅泰素)는 종사랑(從仕郎)을 지냈고, 또 나정소(羅貞素)가 있으며, 진사 김용건(金用健)과 이준신(李備臣)은 그 사위이다. 윤항(尹抗)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우탕(禹湯)이다. 위홍주(魏私苗)는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는데, 위산보(魏山寶)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을 지냈고, 위정보(魏廷寶)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懸監)을 지냈고, 또 위국보(魏國寶)가 있다. 주부(主簿)를 지낸 정경일(鄭敬一)과 최환(崔渙)은 그 사위이다. 내외 자손들이 많아 다 기록할 수 없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참되고 순박하며 효도와 우애가 하늘로부터 이르렀으니 부모형제간에 남들이 나쁜 말을 하는 이가 없었다. 상을 당하여 치룰 때에는 예를 극진히 하였고 부모의 삼년상에 시묘살이를 할 때 전후로 한 번도 집에 들르지 않았으며 제사를 모실 때 정성을 다하였고 남을 구휼해 줌에 어진 마음을 다하였다. 자식들이 모두 훌륭하여 사람들은 육룡(六龍)이라 불렀으니, 가정의 가르침이 세상을 구제하고 행실을 아름답게 함에 이른 것이 있다. 예컨대 나덕신은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노량(露梁)에서 왜적을 섬멸하였고, 나덕헌은 여러 장수들을 따라 안현(鞍峴)에서 이괄(李适)을 물리쳤으며, 사신으로서의 명을 받들고 후금(後金)의 조정에 들어가 절개로 항거하여 굽히지 않았던 일과 같은 것은 충(忠)이다. 예컨대 나덕현이 부모를 잘 봉양한 일, 나득소가 삼년상에 몸을 상하여 죽게 된 일들은 효(孝)이다. 예컨대 윤항에게 시집간 공의 큰딸, 나덕현의 아내 정씨, 김잡에게 시집간 덕준의 큰딸, 수소의 아내 김씨 등이 모두 순절하여 정려를 표창 받은 것은 열(烈)이다. 한 집안에 삼강(三網)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아! 세상에 어찌 흔한 일이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효로 부모를 섬기고 孝於事親
청렴으로 몸을 단속하며 廉以律身
의로 궁핍한 자들에게 베푸니 義施于窮乏
가르침이 자손들에게 행해졌도다 敎行于子孫

아! 공은 독실한 행동이 있는 분이라 할 것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 겸(兼)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이서우(李端雨)가 쓰다.
주석 52)영(郢) 땅
전국(戰國)시대 초(楚)나라 수도였다.
주석 53)낮은 …… 받았다
원문 '거전(居殿)'은 성적 고사에서 하등을 차지함을 말한다.
墓碣銘 【竝序】
不侫瑞雨自少從薦紳先生, 聞湖南之羅氏彬彬有世德. 老遌羅生斗夏, 托以其先考及亡伯之顯刻, 思有以效吾慕用者, 不以匪其任爲解, 而勉焉卒事. 今又以其高曾二世之墓文見屬, 顧瑞雨益老且病, 實無以自力重副生之所須, 遲回久之. 然南面而行者, 不至郢而却返曰 : "吾已盡楚之觀" 不可也. 遂強起噓枯而爲之叙曰; 羅生之高王考, 贈贊成公諱士忱, 字仲孚. 其始祖曰高麗 監門衛上將軍諱富. 其後, 工曹典書諱璡, 典農寺正諱公彦, 最顯. 有諱自康務安縣監, 縣監生將仕郞諱繼祖, 將仕生典涓司直長 贈左承旨諱逸孫. 承旨生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諱晊, 是爲贊成公之四世. 妣崔氏司諫院司諫 贈禮曹參判錦南先生諱溥之女. 錦南以博學壯節爲成宗名臣. 贊成公生於嘉靖乙酉二月二十八日. 自幼性至孝, 十六, 崔夫人病篤, 斷指和藥, 以進卽愈, 中宗命旌閭復戶. 長游履素齋李仲虎之門, 同門如鄭南峯芝衍 柳汎愛祖訒, 皆相推許. 明宗乙卯補國子生, 宣祖元年戊辰, 道臣宋贊以公行誼聞于上, 上嘉之, 夏除慶基殿參奉, 遭伯氏喪棄歸, 後除宣陵參奉, 再除金吾郞, 由宗廟署直長, 陞司憲府監察. 甲申, 拜尼山縣監, 爲治抑豪強恤小民, 忤方伯居殿, 邑民追思立石, 有"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之題. 己丑冬, 逆臣鄭汝立之獄起, 委官鄭澈, 乘機羅織, 湖人丁巖壽等, 承徹旨, 將投䟽嫁禍於一時名流, 如李相山海 鄭相彦信 柳相成龍 鄭困齋介淸, 凡三十餘人, 皆入一網, 而又擧公父子之名, 曰 : "某之子某, 與汝立交至密, 某恐其株累譸張救解, 皆宜罪." 公之子德顯 德憲等, 不勝憂憤, 詣巖壽䟽會, 大言辨斥. 及巖壽疏上, 上震怒曰 : "乘逆變陳邪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欲空國而後已, 此必有奸人嗾者." 命禁府拿鞫巖壽等十人, 澈恐, 囑臺啓太學疏救之, 寢其命. 然天鑑孔昭, 恃而無虞. 又有務安儒生裵蓂等疏, 訟困齋及公寃狀甚晢. 然竟以前沮巖壽等疏爲罪. 庚寅, 公與五子, 俱就繫. 上敎若曰 : "孝子原之, 誣引者審之." 公卽幸宥, 而五子不免投北, 吁其危矣. 萬曆丙申十二月二十三日, 以疾卒, 壽七十二. 葬于務安住龍渡向巽之原, 從治命也. 以三子俱有原從功累贈至左贊成. 前配坡平尹氏府使彦商之女. 擧四子, 墓在羅州長興洞. 繼配光州鄭氏蛇渡僉使虎之女, 擧三子, 葬祔公, 皆贈貞敬夫人子. 德明己卯進士, 義禁府都事. 德峻報恩縣監. 德進早夭. 德潤戊子進士, 司憲府監察. 德顯以孝聞, 贈司饔院參奉. 德愼武科, 靈巖郡守. 德憲武科京畿水使. 女長適尹沆, 次適魏弘宙. 德明四子, 以素 因素 成素武科宣傳官, 就素. 德峻五子二女, 纘素宣務郞, 繼素武科价川郡守, 緯素文科同知中樞, 緻素 經素. 主簿金磼 崔光憲, 其婿也. 德潤三子, 繪素武科咸安郡守, 由素 宜素文科禮曹正郞. 德顯六子一女, 益素宣務郞, 後素 得素有至行. 居憂啜粥, 血泣而圽, 尙素 純素 重素. 鄭渙, 其婿也. 德愼二女, 閔喜一 柳遷, 其婿也. 德憲三子二女, 守素宣務郞, 泰素從仕郞, 貞素. 金用健進士 李㒞臣, 其婿也. 尹沆一子, 佑湯. 魏弘宙三子二女, 山寶武科縣令, 廷寶武科縣監, 國寶. 主簿鄭敬一 崔渙, 其婿也. 內外雲仍多, 不能盡記. 公禀性眞醇, 孝友天至, 父母昆弟之間, 人無間言. 居喪盡禮, 前後廬墓, 一不到家, 祀享虔謹, 賙恤惻怛. 有子皆賢, 人穪六龍, 庭訓所及, 世濟懿行. 如德愼, 從統制李舜臣殲賊于露梁, 德憲從諸將蹙适于鞍峴, 奉使虜庭, 抗節不屈, 忠矣. 如德顯之善養, 得素之毁死, 孝矣. 如公之女適尹沆者, 德顯妻鄭氏, 德峻女適金磼者, 守素妻金氏, 竝殉節旌閭, 烈矣. 一門而三綱備, 嗚呼! 世豈多有也哉. 銘曰 : "孝於事親, 廉以律身, 義施于窮乏, 敎行于子孫." 於虖! 公可謂篤行人也. 嘉善大夫 工曹參判 兼藝文館提學 李瑞雨 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