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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삼고(錦城三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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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삼고(錦城三稿) / 금호유사 / 저술(著述)
사실기
공의 성은 나 씨(羅氏)이고, 휘는 사침(士忱)이며, 자는 중부(仲孚)이고, 자호(自號)는 금호(錦湖)이다. 본관은 나주이며, 주성(州城)에 거주하였다. 시조는 나부(羅富)로서 고려 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이었다. 그의 후손 중 계첩(系牒)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나득규(羅得虬),나중윤(羅中允),나송기(羅松奇)로 3대가 모두 영동정(令同正)이었다. 나수영(羅守永)은 진사를 합격하였고, 나원(羅源)은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 동정(同正)을 지냈고, 나진(羅璡)은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홍무(洪武) 23년(1391) 이전에 판사(判事)로서 영산(榮山)에 조창(漕倉)과 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였다. 이 일은 양촌(陽村) 권근(權近)주 40)의 기록에 있다. 나공언(羅公彦)은 전농시(典農寺) 정(正)을 지냈다. 홍무(洪武) 14년(1381) 이전에 소윤(少尹)으로서 도순문사(都巡問使) 이을진(李己珍)을 따라 왜적을 물리친 공이 있었다. 이 일은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나집(羅諿)은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를, 나자강(羅自康)은 무안 현감(務安縣監)을, 나계조(羅繼祖)는 장사랑(將仕郞)을,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냈다. 나일손은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일찍이 같은 고을의 훌륭한 사람들 11명과 함께 난정(蘭亭)의 고사주 41)를 모방하여 금강계(錦江稧)를 만들어 풍류와 고상한 운치를 즐기니, 이 일이 전해져 호남의 미담이 되었다.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으니, 공의 부친이다. 모친은 탐진 최씨(耽津崔氏)로,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를 지냈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된 분의 따님이다. 금남(錦南) 선생은 "최부(崔溥)가 외할아버지인데 문학과 절개로 세상에 이름이 났지만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당하였다."라고 하셨다.
가정(嘉靖) 을유(1525) 2월 28일에 공이 태어났다. 타고난 기질이 보통의 아이들과 달랐고 효도와 우애가 하늘로부터 타고났다. 나이 겨우 16세에 어머니 최 부인의 병이 위독해지자 손가락의 피를 약에 타서 드렸더니 곧장 나았다. 이 일은 중종 임금께 알려져 정려로 표창되었고 부역과 세금을 면제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장성해서는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 선생을 종유하고, 남봉(南峰) 정지연(鄭芝衍),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등의 동학들과 교유하며 서로 미루어 인정해 주었다. 명종(明宗) 때 을묘방(乙卯榜)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였다.
선조 원년 무진년(1568)에 서교(西郊) 송상 찬(宋相贊)이 호남을 순찰하다가 전라도의 훌륭한 선비 다섯 사람을 천거하였는데, 공을 으뜸으로 여겨 학문과 훌륭한 행동이 모두 갖추어졌다고 칭찬하였다. 다른 네 사람은 김응기(金應期), 김천일(金千鎰), 유호인(劉好仁), 김윤(金胤)이다. 임금께서 교서를 내려 "나사침 등은 행실이 매우 가상하니 해당 부서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하여 포장하시오."라고 하시니, 이조에서 드디어 대신들과 의논했는데 혹은 정려로 표창하고 세금과 부역을 면하도록 하자고 하였고 혹은 식물(食物)을 공급하여 학업을 마치도록 힘쓰게 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의 정려의 표창과 부역과 세금 면제는 이미 선조 때에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발탁하여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의 벼슬을 내리게 하였다. 이듬해 맏형 나사선(羅士愃) 시정공(寺正公)이 서울에서 돌아가시자, 공이 정신없이 달려가 곡을 하고서 관을 들고 남쪽으로 돌아와 안치하였다. 이 일로 고과에 관한 평가가 이루어졌는데 이종형 부제학(副提學) 미암(眉庵) 유희춘(柳希春)은 감탄하며 "나중부는 멀리에서 와서 형의 상을 치르고 돌아갔으니 그의 체직(遞職)은 실로 훌륭한 일이다."라고 하였고, 상서(尙書) 홍담(洪曇) 또한 자주 공을 칭찬하였다.
신미년(1571)에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고 5년 뒤(1576)에 경기전 참봉으로 관직이 바뀌었다가 다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와 종묘 직장(宗廟直長)으로 옮기고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로 승진하였다. 갑신년(1584)에 외지로 나가 이산 현감(尼山縣監)이 되어 정치를 청렴하고 간소하게 하였으며 고을의 세도가와 농사꾼 간에 송사가 있으면 공이 한 마디 말로 판결하였다. 방백의 뜻을 거슬러 고과의 점수는 낮았지만 그 고을 백성들은 비석을 세우고 시를 새겨 공을 추모하였으니 다음과 같다.
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
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 있구나 行李蕭然古人風
기축년(1589)에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으로 옥사를 일으키자 위관(委官) 정철(鄭澈)이 기미를 틈타 무고한 사람들에게 죄를 씌워 재앙이 넘쳤는데 그 여파는 평소 함께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까지 미쳐 그들을 몰아 일망타진 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동복(同福)사람 정암수(丁巖壽) 등이 정철의 뜻을 이어 여러 유명 인사 10여 명을 함정에 빠뜨려 무고하여 상소했는데 이를테면 재상 이산해(李山海), 재상 정언신(鄭彦信)주 42), 재상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징군(徵君)주 43)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등 모두 그 안에 포함되었다. 또 공의 부자를 거론하며 "나 모씨는 그의 아들과 정여립이 평소 교분이 두터웠으나,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는 터무니없는 말을 꾸며 죄를 용서받고자 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 그밖에 위험한 말들은 끝이 없었다. 공의 자식 중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 상소를 올린 사람들의 모임에 들어가 큰 소리로 준엄하게 배척하였다. 정암수 등의 상소가 어느새 임금에게 들어가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의 변란을 틈타 감히 함정에 빠뜨리는 계책을 내고 형체도 없는 말을 날조하고 거짓된 상소를 몰래 올려 어진 재상과 이름난 경들조차 배척하고 지목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반드시 나라가 텅 비게 한 이후에야 그만둘 것이다. 흉악하고 참혹한 상황이 매우 놀랄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반드시 간악한 자들의 부추기는 말을 들었음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하고는 의금부에 명하여 정암수 이하 10명을 잡아 국문하도록 하셨다. 정철은 매우 두려운 마음이 들어 대각의 신하들을 부추겨 간쟁하게 하고 태학생들을 부추겨 어리석은 상소를 올리도록 하자 이미 내렸던 명이 그만두게 되었고 그 상소 안의 일 또한 묻지 않게 되었다. 이때 무안 유생 배명(裵蓂) 등이 역시 곤재와 공의 무고함에 대하여 자세하게 상소를 올렸는데, 옥사를 주관했던 자가 또 홍천경(洪千璟) 등으로 인하여 죄를 만들어 모해하였다. 그러다 결국 정암수의 상소를 막았다는 이유로 죄목을 날조하는 바람에 공과 다섯 아들 모두 체포되었다. 임금께서 교서를 내려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고 했으니, 효자로 든 자들은 용서하고 무고히 죄를 씌운 자들은 파직하라."라고 하셨다. 공은 곧바로 풀려났지만, 다섯 아들은 모두 유배되었다. 나덕명은 경성(鏡城)으로, 나덕준(羅德峻)은 부령(富寧)으로, 나덕윤(羅德潤)은 회령(會寧)으로, 나덕현과 나덕헌은 철원(鐵原)으로 도배를 당하였다가 계사년(1593)에 풀려났다. 공이 병신년(1596) 12월 23일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72세였다.
공의 성품은 진실하고 덕행이 순수하고 돈독하였으며 효도와 공경이 지극하였으니 신명에 통하였다고 하겠다. 상을 치를 적에도 한결같이 법도를 따랐으며 시묘살이를 하는 전후로는 집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고 제사를 지낼 때에도 반드시 경건히 조상에게 보답하는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심지어 외증조 진사 최택(崔澤)의 묘소가 무안에 있는데 이미 대가 끊겨 대를 지키고 보호할 사람이 없자 공은 그것을 위해 묘를 정하고 성묘를 하며 곧장 나무하고 소먹이는 일을 금지시켰으니 이 소식을 들은 자들이 감동하였다. 일찍이 형제들과 함께 살고자 하는 뜻은 있었지만 이루지는 못했으니 형제들 모두 공과 같은 거처에 살고자 하는 마음을 통한으로 여겼다. 여러 아들이 그 뜻을 잘 이어 당(堂)은 같되 실(室)은 다르게 하려는 제도를 모두 실천하고자 하는 것을 보고는 매우 가상히 여기고 힘쓰게 하여 태어난 집안의 가르침에 먹칠을 하지 않도록 하였다. 집안에 윤리와 기강을 잇는 큰 송사가 있었으나 오래도록 판결이 나지 않았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고을의 목사가 되어 곧바로 송사를 판결하고는 공과 여러 아들 중 송사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세상 쟁송은 대다수가 이익으로써 하는데, 이들의 쟁송은 곧 천리로써 한다."라고 하였고 또 공을 학문으로써 업을 삼는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 명종의 제사 때마다 공은 소식(素食)을 했는데 60여 세에 이르기까지 병을 핑계대어 혹 게을리 하는 경우가 없었으니 명종 때 인재를 두텁게 대하는 교화로써 국자(國子)에 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은 비록 늙어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임금을 연모하는 마음을 잊은 적이 없었다. 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주 44)이 공에게
유유히 베개 높이 벤 곳에 悠然高枕處
대궐의 꿈 아득하네 雲闕夢蒼茫
라는 시구를 글을 주었으니 이는 바로 공의 심경을 잘 드러낸 것이었다.
평소 고을에 거처하며 신의를 죽을 때까지 지녀 궁핍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곤궁한 사람들에게 힘썼으며 측은히 여기는 마음 또한 미물에까지 이르렀다. 한번은 주방에서 작은 물고기가 뱃속에 알이 가득 찬 것을 보고는 그릇에 놓아 물고기를 살리도록 명하였다. 음식을 대함에 비록 작은 예절이었지만 그의 어진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산 현감으로 있을 때 도둑질하는 아이 하나를 잡아 의리로 가르치고 놓아주니 그가 드디어 감동하여 잘못을 고쳤다. 고을 앞에 여관을 설치하고 길을 가는 사람을 대접하여 그가 자신을 부지런히 하여 스스로 새로워지는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덕화가 남에게 미친 것이 또한 이와 같았다. 공의 지극한 행동은 서경(西坰) 유근(柳根)의 《신편 속 삼강행실(新編續三網行實)》에 실려 있는데, 광해군(光海君) 때 이이첨(李爾瞻)주 45)의 성명 또한 효자의 반열에 섞여 있던 까닭에 그 책이 전하지 않아 이야기하는 사람들 중 몇몇은 이 일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였다. 공은 무안의 주룡 나루 건좌(乾坐)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니 유언을 따른 것이었다. 아들 나덕윤, 나덕신, 나덕헌이 모두 종훈(從勳)이 있었으므로 처음에는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고, 여러 차례 벼슬이 더해져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이르렀다.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다. 네 아들을 낳았고, 별도로 본주의 장흥동(長興洞)에 장사지냈다.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첨사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아들 셋과 딸 둘을 낳았고 공과 함께 합장하였다. 두 분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아들 나덕명은 기묘년(1579) 진사에 합격하여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나덕준은 재주와 행실로 천거되어 보은 현감(報恩縣監)을 지냈다. 나덕진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나덕윤은 무자년(1588) 진사를 합격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나덕현은 효행으로 사옹원 참봉(司饔院參奉)에 추증되었다. 부인 정씨(鄭氏)는 절개 있는 행동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다. 나덕신은 신묘년(1591) 무과에 급제하여 영암 군수(靈巖郡守)를 지냈다. 나덕헌은 계묘년(1603) 무과에 급제하여 경기 수사(京畿水使)를 지내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큰딸은 충의위(忠義衛) 윤항(尹抗)에게 시집갔고, 절개 있는 행동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다. 둘째 딸은 참의(參議)에 추증된 위홍주(魏弘宙)에게 시집갔다. 도사(都事)는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이소(羅以素), 나인소(羅因素), 나성소(羅成素)는 무과에 급제를 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또 나취소(羅就素)가 있다. 현감(懸監)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나찬소(羅纘素)는 선무랑(宣務郞)을, 나계소(羅繼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첨중추(僉中樞)를, 나위소(羅緯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동중추(同中樞)를 지내고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으며, 나치소(羅緻素)와 나경소(羅經素)가 있다. 딸 둘을 두었는데, 장녀는 주부(主簿) 김잡(金磼)에게 시집갔고 절개 있는 행동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으며, 둘째 딸은 선교랑 최광헌(崔光憲)에게 시집갔다. 감찰(監察)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회소(羅繪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이천 부사(伊川府使)가 되었고, 나유소(羅由素)는 선교랑(宣敎郎)을, 나의소(羅宣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지냈다. 사위 윤항(尹抗)은 아들 우탕(禹湯)을 두었다. 참봉(參奉)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나익소(羅益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나후소(羅後素)와 나득소(羅得素)는 효행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으며, 나상소(羅尙素), 나순소(羅純素), 나중소(羅重素) 등이 있다. 첫째 딸은 군수를 지낸 정환(鄭渙)에게, 둘째 딸은 민희일(閔喜一)에게, 셋째 딸은 유천(柳還)에게 시집갔다. 사위 위홍주는 아들 셋을 두었는데, 위산보(魏山寶)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을 지냈고, 위정보(魏廷寶)는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鄒監)을 지냈고, 또 위국보(魏國寶)가 있다. 두 딸은 주부(主簿) 정경일(鄭敬一)과 장사랑(將仕郞) 최환(崔渙)에게 각각 시집갔다. 수사(水使)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나수소(羅守素)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냈고, 부인 김씨(金氏)는 절개 있는 행동으로 정려를 표창 받았다. 나태소(羅泰素)는 종사랑(從仕郞)을 지냈으며, 또 나정소(羅貞素)가 있다. 두 딸 중 첫째는 김용건(金用健)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진사 이준신(李儁臣)에게 시집갔다. 나머지 안팎의 자손이 수백 수천에 이르러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아! 《예기》에 "산 사람 섬기는 것을 사랑과 공경으로 하고 죽은 사람 섬기는 것을 애도와 슬픈 마음으로써 한다면, 생민의 근본을 다한 것이요 효자가 부모를 섬기는 일이 끝난다."주 46)라고 하였다. 또 "사람의 자식 된 자는 장차 착한 일을 할 적에 부모의 아름다운 이름을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해야 하며, 불선한 일을 할 때에는 부모에게 치욕이 끼칠 것을 생각하여 반드시 과감하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주 47)라고 하였다. 자하께서 "부모 섬기기를 능히 자신의 힘을 다하고, 임금 섬길 때는 능히 그 몸을 다하며, 친구와 더불어 사귈 때는 말에 믿음이 있으면, 비록 그가 배우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할 것이다"주 48)라고 하였다. 가만히 살펴보건대 공은 학문을 함에 일상생활의 떳떳한 법도를 벗어나지 않았으니, 그로써 선한 행동을 닦고 선한 이름을 세웠고 저 서교께서 공을 학행으로 천거하였고 학봉께서 학문을 들어 칭찬하신 데에는 진실로 이유가 있다. 여러 자식들도 훌륭한 사람의 행적을 이어 육룡(六龍)이라고 칭송받았으니, 예컨대 나덕명은 귀양 갔을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북평사 정문부(鄭文孚)와 의병 일으킬 것을 도모하고 바닷가 백성들 중 왜적을 이끌어 난을 선동한 자들을 붙잡아 목을 베었고, 나덕신은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노량에서 왜적을 섬멸하였고, 나덕헌은 안현(鞍峴) 전투에서 이괄(李适)주 49)의 무리를 물리쳤고 또 사신의 명을 받들어 심양(潘陽)에 가서 절개로 항거하며 굴복하지 않았다. 나덕준과 나덕윤은 모두 의를 행하여 이름을 알렸다. 나덕현은 난리 중에 위급함을 만나 어머니를 안고 울부짖어 왜적을 감동시키고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나득소는 상을 당하여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다 세상을 떠났으며 딸, 손녀, 며느리, 손부도 순절하였다. 또 네 아들과 손자들이 이 대에 걸쳐 충신과 효자와 열녀로 나란히 나와 세상에서 영예롭게 여겼으니, 공이 가정에서 가르침을 완성하고 그 효과가 나타난 것 아님이 없다. 《시경》에 "효자가 다하지 아니하니 길이 너에게 복을 주리라."주 50)라는 것은 이를 말한 것이다. 지위가 덕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삶의 중간에 횡역을 만난 것은 운명이고 시운이지만 공의 덕에게 무슨 손상됨이 있겠는가.
공께서 돌아가신 지 127년이 지나자 현손(玄孫) 나두동(羅斗冬)이 세대가 더욱 멀어져 선대의 사적이 없어 징험할 것이 없을까 걱정하여 집안의 유사(遺事), 족첩(族牒), 묘문(墓文) 등을 수습하고 보고 들은 것을 미루어 한 권의 책으로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나는 외손의 반열에 있어 이를 산정하라는 부탁을 받고 감히 그 초고에 바탕하고 개괄적인 내용을 간략히 하여 공의 처음과 끝을 이상과 같이 적었지만 진실로 공의 아름다운 덕을 드날리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선철왕(先哲王) 두 조정에서 세 번이나 포장하신 뜻을 우러러 보건대 공의 행실과 의리가 몇 백 년 뒤에도 남아있으리라는 사실을 징험할 수 있으니 또한 마땅히 효도의 교화와 떳떳함의 천성에 감발함이 있을 것이다. 옛날 도연명(陶洞明)이 외할아버지 맹장사(孟長史)를 위하여 전을 지어주 51) "내가 행적을 살펴보다가 혹 잘못을 범하여 훌륭하신 군자의 덕이 훼손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 나 또한 이와 같은 두려움이 없을 수 없기에 감히 한 마디 말도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질박하게 적을 뿐이다.
숭정(崇禎) 정축(丁丑) 후 85년 임인년(1722) 늦봄 상현(上弦)에 외현손 통덕랑(通德郎) 전 행광릉참봉(行光陵參奉)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은 삼가 쓰다.
- 주석 40)양촌(陽村) 권근(權近)
- 1352~1409. 자는 가원(可遠) 또는 사숙(思叔)이고, 호가 양촌(陽村)이다. 문장에 뛰어났고, 경학에 밝아 사서오경의 구결을 정하였다. 저서에는 《입학도설》, 《양촌집》, 《사서오경구결》, 《동현사략(東賢事略)》이 있다.
- 주석 41)난정(蘭亭)의 고사
- 중국 회계 산음(山陰)에 있던 난정(蘭亭)에서 동진(東晉) 때 회계 내사(會稽內史)로 있던 왕희지(王羲之)를 비롯하여 손작(孫綽)ㆍ사안(謝安) 등 당시의 명사 42인이 그곳에 모여 계제사(禊祭祀)를 행한 뒤에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며 놀았던 고사가 있다. 《蘭亭考 卷1》
- 주석 42)정언신(鄭彦信)
- 1527~1591. 자는 입부(立夫)이고, 호는 나암(懶庵)이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고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서인 정철(鄭澈)의 사주를 받은 대간으로부터 정여립의 구촌친(九寸親)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위관을 사퇴하고 이어서 우의정도 사퇴했으며, 정철이 위관을 대신하였다.
- 주석 43)징군(徵君)
- 징사(徵士)와 같은 말로 학문과 덕행이 있어 나라의 초빙을 받았으나 출사하지 않은 선비를 높여 이르는 말이다.
- 주석 44)옥봉(玉峰) 백광훈(白光勳)
- 자는 창경(彰卿)이고, 호는 옥봉(玉峰)이며, 관향은 수원이다. 해남에서 살았다. 시조와 글씨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일직이 원접사(遠接使), 백의(白衣) 종사관(從事官)이 되었고, 벼슬은 참봉(參奉)에 이르렀다.
- 주석 45)이이첨(李爾瞻)
- 1560~1623. 자는 득여(得輿)이고,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이다. 선조 때 대북의 영수로서 광해군이 적합함을 주장하였다. 광해군 즉위 후 조정에서 소북파를 숙청하였다. 영창대군을 죽게 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다. 폐모론을 주장, 인목대비를 유폐시켰다. 인조반정 뒤 참형되었다.
- 주석 46)산 사람 …… 끝난다
- 《예기》에는 "生事愛敬, 死事哀慽, 生民之本盡矣, 死生之義備矣, 孝子之事親終矣."라고 하여 몇 글자가 더 있다.
- 주석 47)사람의 …… 안 된다
- 《예기》 〈내칙(內則)〉에 보인다.
- 주석 48)부모 …… 것이다
- 《논어》 〈학이(學而)〉에 보인다.
- 주석 49)이괄(李适)
- 1587~1624. 본관은 고성(固城)이고, 자는 백규(白圭)이다.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으나, 1624년 정월에 외아들 이전(李栴), 한명련(韓明璉), 정충신(鄭忠信), 기자헌(奇自獻), 현집(玄楫). 이시언(李時言)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서울에서 군대가 오자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관군에 대패하고 피신하던 중 부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 주석 50)효자가 …… 주리라
- 《시경》 〈기취(旣醉)〉에 보인다.
- 주석 51)맹장사를 …… 지어
- 맹장사전(孟長史傳)〉은 도잠(陶潛)의 외조부인 맹가(孟嘉)의 전(傳)인데, 도잠은 401년에 모친 맹씨(孟氏)의 상중에 이를 지었다. 《도연명전집(陶淵明全集)》 권6에 〈진고정서대장군장사맹부군전(晉故征西大將軍長史孟府君傳)〉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
事實記
公姓羅氏, 諱士忱, 字仲孚, 自號錦湖, 世爲羅州人, 家州城. 始祖曰富 高麗監門衛上將軍. 其後系牒所載曰得虬, 曰仲允, 曰松奇, 三世俱令同正. 曰守永 進士, 曰源 司醞署直長同正, 曰璡 工曹典書. 洪武二十三年以前, 判事監榮山漕倉築城, 事有陽村權近所記. 曰公彦, 典農寺正. 洪武十四年以前, 少尹從都巡問使李乙珍, 有克倭功, 事在麗史. 曰諿 式目都監錄事, 曰自康 務安縣監, 曰繼祖 將仕郞, 曰逸孫 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嘗與一州賢豪十一人, 倣蘭亭故事, 修錦江稧, 風流雅致, 傳爲湖中美談. 曰晊 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爲公皇考. 妣眈津崔氏, 弘文館副應敎 贈禮曺參判. 錦南先生曰 : "溥爲外翁, 以文學氣節名世, 被燕山戊午史禍." 嘉靖乙酉二月二十八日, 公生. 稟質異凡兒, 孝愛出天. 年甫十六, 崔夫人病篤, 血指和藥卽愈, 事聞中廟, 命旌閭復戶. 長而從履素齋李仲虎, 遊與鄭南峰芝行 柳汎愛祖訒同學, 相推許. 明廟朝, 擧乙卯榜生員試. 宣廟元年戊辰, 西郊宋相贊按湖南, 薦一道遺逸之士五人, 以公爲首, 稱學行俱備, 其四人, 金應期 金千鎰 劉好仁 金胤也. 上敎有曰 : "羅士忱等, 行實甚嘉, 令該曺議大臣, 襃獎之." 天官遂與大臣議, 或旌閭復戶, 或給食物, 俾勉卒學業, 以公㫌復已在先朝, 故特擢除慶基殿參奉. 其明年, 伯氏士愃寺正公, 卒于京, 公蒼黃奔哭, 扶櫬南歸坐. 是課殿, 姨兄眉巖柳副學希春歎曰 : "羅仲孚遠來, 護兄喪以歸其遞職, 實有光." 洪尙書曇, 亦亟稱之. 辛未, 除宣陵參奉, 後五年, 復換慶基殿, 轉義禁府都事, 宗廟署直長, 陞司憲府監察. 甲申, 出爲尼山縣監, 治尙淸簡, 邑有勢家田民訟, 公片言折之. 忤方伯考下, 其民樹石刻詩, 以追思之, 其詩曰 : "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 云. 己丑, 鄭汝立逆獄起, 委官鄭澈乘機, 羅織禍多, 波及凡平日所不與者, 無不驅之一網. 同福人丁巖壽等, 承其風旨, 投誣疏搆陷諸名流三十餘人, 如李相山海 鄭相彦信 西厓柳相成龍 困齋鄭徵君介淸, 皆入其中. 且擧公父子爲言曰 : "羅某以其子等交汝立素密, 知禍及己, 譸張其說, 欲爲伸救." 其他做語危險, 罔有紀極. 公之子德顯 德憲等, 不勝憤惋, 入其會中, 大言峻斥之. 巖壽等疏旣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敢肆搆陷之計, 捏造無形之語, 陰陳詐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凶慘之狀, 極爲駭愕. 此必聽奸人指嗾的然無疑." 命禁府, 拿鞫巖壽以下十人. 澈懼甚, 嗾臺閣爭之, 太學生迭爲之投童, 乃還寢成命. 其疏中事, 亦不問也. 時務安儒生裵蓂等, 亦上疏訟困齋及公寃狀甚悉, 而主獄者又因洪千璟等媒孽, 竟以謀沮巖壽疏捏爲罪目, 公及五子竝被逮. 上有敎曰 : "求忠臣於孝子之門名. 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公卽宥, 出五子, 俱流竄. 德明鏡城, 德峻富寧, 德潤會寧, 德顯 德憲徒配鐵原, 癸巳赦之. 丙申十二月二十三日卒, 壽七十二. 公性度眞醇, 德行純篤, 孝悌至誠, 可通神明. 居喪, 一遵禮制, 前後廬墓, 足不到家. 祀享, 必致虔慤, 追遠報本, 靡不盡心. 至於外曾祖進士崔公諱澤墓在務安, 旣血孫絶, 世守護無人, 公爲之拜掃定墓, 直禁樵牧, 聞者感之. 嘗欲與兄弟同居有志, 未就, 兄弟皆盡公居常爲恨, 及見諸子能繼志, 盡進同堂異室之制, 深加嘉勉, 申以無忝爾所生之敎. 門有係倫紀大訟, 久未決, 及金鶴峯誠一爲州牧, 卽斷之, 謂公諸子就訟者曰 : "世之爭訟, 多以利, 而此所爭, 乃天理也." 且稱公以學問爲業者云. 公値明廟諱辰, 輒爲素食, 至六十餘, 不以衰病或怠, 蓋當明廟朝, 厚沐菁莪之化, 陞國子故也. 公雖老伏田園, 未嘗忘戀闕之心, 玉峰白光勳贈公以 "悠然高枕處, 雲闕夢蒼茫"之句, 此正寫出公心境也. 平居鄕里, 信義有終, 賙窮恤乏, 務極悃款, 惻隱之心, 亦及微物. 嘗見廚饌, 小魚卵滿腹, 命放盆中活魚, 將待食者, 雖一瑣節, 其仁愛所推可知也. 在尼山, 捕一偸兒, 諭以義理而釋之, 其人遂感動懲創. 設縣前旅店, 應接行路, 以效其勤身自新, 德化及人, 又如此. 公之至行, 在柳西坰根新編續三綱行實以事, 在光海世, 爾瞻姓名, 亦嘗混孝子中, 故其書不傳, 譚者或以爲憾. 公葬務安住龍渡乾坐巽向之原, 從治命也. 以子德潤 德愼 德憲, 俱參從勳, 故初贈吏曹參判, 累加至議政府左贊成. 配坡平尹氏, 府使彦商女. 生四子, 別葬本州長興洞. 繼配光州鄭氏, 僉使虎女, 生三男二女, 葬祔公. 竝追封貞敬夫人. 子德明己卯進士, 義禁府都事. 德峻薦才行, 報恩縣監. 德進早夭. 德潤戊子進士, 司憲府監察. 德顯以孝, 贈司饔院參奉, 妻鄭氏節行旌閭. 德愼辛卯武科, 靈巖郡守. 德憲癸卯武科, 京畿水使 贈兵曺參判. 女長適忠義衛尹沆, 節行旌閭. 次適贈參議魏弘宙. 都事四子, 以素 因素 成素武科宣傳官. 就素. 縣監五子, 纘素宣務郞, 繼素武科僉中樞. 緯素文科同中樞 贈左參贊. 緻素 經素. 二女長適主簿金磼, 節行旌閭. 次適宣敎郞崔光憲. 監察三子, 繪素武科伊川府使. 由素宣敎郞, 宜素文科禮朝正郞. 沆子曰禹湯. 參奉六子, 益素宣務郞. 後素 得素, 以孝旌閭. 尙素 純素 重素. 一女適鄭渙郡守, 二女適閔喜一 柳遷. 魏弘宙三子, 山寶武科縣令. 廷寶武科縣監, 國寶. 二女, 適主簿鄭敬一 將仕郞崔渙. 水使三子, 守素宣務郞. 妻金氏節行旌閭. 泰素從仕郞. 貞素. 二女, 長適金用健, 次進士李儁臣. 自餘內外雲仍多至千百, 不可勝錄. 嗚呼! 禮曰 : "生事愛敬, 死事哀慽, 生民之本, 盡矣. 孝子之事親, 終矣." , 又曰 : "爲人子者, 將爲善, 思貽父母令名, 必果, 將爲不善, 思貽父母羞辱, 必不果." 子夏曰 : "事親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與朋友交言而有信, 雖曰未學, 吾必謂之學矣." 竊觀公之於學, 不外日用彛倫之則, 以之修善行立善名. 若西郊之薦以學行, 鶴峰之稱以學問, 信有以也. 諸子趾美人稱六龍, 如德明謫中, 當壬辰亂與北評事鄭文孚, 謀起義兵捕斬邊民, 導倭煽亂者, 德愼從統制李舜臣, 殲賊露梁. 德憲從戰鞍峴, 蹙适賊, 又奉使瀋庭, 抗節不屈. 德峻 德潤, 俱行義知名. 德顯亂離中, 臨危急抱母悲號, 感倭賊, 獲免. 得素居喪, 致毁歿, 女若孫女, 婦若孫婦, 殉節. 又四人子孫, 兩世忠孝烈騈出, 爲世所榮, 莫非公成敎於家而有以致之也. 詩云; "孝思不匱, 永錫爾類." 此之謂矣. 位不滿德, 中遭橫逆, 命也時也, 於公, 何損焉. 顧公之歿, 今爲一百二十有七年, 有玄孫斗冬, 懼世代益遠, 先蹟浸至無徵, 收拾家中遺事 族牒 墓文, 凡見聞所追, 及欲具成一通文字以傳後, 以重元在外裔之列, 屬以刪定玆, 敢因其草本, 略施檃括槪, 公始終事實, 如右固知不足以揄揚德美. 然仰覵先哲王兩朝三褒之旨, 可證公行義不遠在玆百世之下, 宜亦有所感發於孝理之化秉彛之天矣. 昔陶淵明爲外王父孟長史傳, 有曰 : "按採行事, 懼或垂謬, 有虧大雅君子之德." 重元亦不能無懼於斯也, 不敢侈一辭書之以質而已. 崇禎丁丑後八十五載壬寅季春上弦, 外玄孫通德郞 前行光陵參奉 八溪 鄭重元 謹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