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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력 경인년(1590)에 심문할 때의 전교(萬曆庚寅就理時 【傳敎】)

금성삼고(錦城三稿) / 금호유사 / 저술(著述)

자료ID HIKS_OB_F9008-01-240502.0008.0001.TXT.0013
만력 경인년(1590)에 심문할 때의 전교
전교(傳敎)는 다음과 같다.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주 39)라고 했으니, 이름이 효자에 든 자들은 용서해 주고, 무고한 혐의를 씌운 자들은 파직하라." 【지난해 기축년(1589)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으로써 옥사를 일으키자, 좌찬성(左贊成) 정철(鄭激)이 위관(委官)이 되어 옥사를 주관하고선 기회를 틈타 무고한 이들을 잡아들였다. 동복(同福) 사람 진사 정암수(丁巖壽) 등은 은밀한 뜻을 이어 여러 명사들을 무고하는 상소를 올려 함정에 빠뜨렸는데 공의 부자 이름 또한 그 안에 실려 있었다. 정암수의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정암수 등을 잡아들이라 명하셨다. 정철이 대간(臺諫)과 태학생(大學生)들을 부추겨 그만 둘 것을 청했더니 결국 윤허를 받아냈다. 이듬해 경인년에 공과 다섯 아들 모두 끝내 체포당했으나 이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라는 전교가 있었기에 죄를 용서받게 된 것이다.
또 이듬해 신묘 윤 3월에 양사(兩司)에서 정철이 조정의 기강을 제제하여 마음대로 한다는 논의로 합계(合啓)를 올려 일시에 파직을 청하였더니 임금께서 그대로 윤허하였으며, 조정의 당(堂)에 그의 죄목을 방문으로써 보이도록 명하였다. 6월에 대사헌(大司憲) 이원익(李元翼) 등과 대사간(大司諫) 홍여순(洪汝薛) 등이 정철은 조정을 어지럽히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함정에 빠뜨리려고 하며 호남의 유생들을 유도하여 명경과 사류들을 상소함으로써 역모의 무리로 몰아 모조리 없애려고 한다는 논의로 합계를 올려 멀리 쫓아내기를 청했는데, 임금께서 그대로 윤허하였으며 특별히 강가로 유배를 보내도록 명하셨다. 7월에 양사에서는 일찍이 이전의 대간들은 권세가 있는 간신들의 사주를 받아 정암수 등을 구하라는 논의를 하여 잡아들이라는 명을 그치게 했으니 모두 파직해 주시기를 청하는 합계를 올렸는데, 임금께서 그대로 윤허하였으며 전교에 "정철은 타고난 성품이 교활하고 간악하여 이미 유배를 받았고, 그와 교제하는 여러 사람들조차도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죄상이 엄중하므로 위리안치 시켜라."라고 하셨다. 2년 뒤 계사년(1593) 12월에 정철은 죽었다. 이듬해 갑오 11월에 양사와 대사헌 김우옹(金字願) 등과 대사간(大司諫) 이기(李墍) 등은 정철이 옥사를 주관하고 죄를 뒤집어씌운 죄를 논하여 관작을 추가로 삭탈함을 청하자 임금께서 그대로 윤허하였다.】
주석 39)충신은 …… 구한다
《후한서(後漢書)》 권56 〈위표열전(韋彪列傳)〉에 "국가는 현자를 선발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하며, 현자인지 아닌지는 효행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어버이에게 효성스러운 사람은 이 효성을 임금에게 옮겨 충성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찾아야 합니다.〔夫國以簡賢爲務 賢以孝行爲首 孔子曰 事親孝故忠可移於君 是以求忠臣必於孝子之門〕"라고 위표가 황제에게 건의한 내용이 보인다.
萬曆庚寅就理時 【傳敎】
敎曰 : "求忠臣, 於孝子之門. 名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前年己丑十月, 鄭汝立逆獄起, 左議政鄭澈以委官主獄事, 乘機羅織. 同福進士丁巖壽等, 承其風旨, 投誣疏陷諸名流, 公父子之名, 亦載其中. 及巖壽疏入, 上震怒, 命拿鞫巖壽等. 澈嗾臺諫及太學生, 請寢之, 蒙允. 明年庚寅, 公竝五子, 竟被逮, 有此求忠孝門之敎, 而蒙宥焉. 又明年辛卯閏三月, 兩司合啓論鄭澈擅弄朝綱裁制, 一時請罷職, 依允, 命搒示其罪目于朝堂. 六月, 大司憲李元翼等 大司諫洪汝諄等, 合啓論鄭澈濁亂朝廷, 欲陷異己之人, 敎誘湖南儒生, 上疏名卿士類, 驅入逆流, 欲盡殲滅, 請遠竄, 依允, 特命配江界. 七月, 兩司合啓曾前臺諫承權奸指嗾, 論救丁巖壽等, 仍寢拿命, 請竝罷職, 依允, 傳曰 : "鄭澈賦性, 狡猾奸毒, 旣到配所, 交通雜人, 未知作何等, 罪狀嚴加圍籬." 後二年癸巳十二月, 鄭澈卒. 明年甲午十一月, 兩司大司憲金宇顒等 大司諫李墍等, 論鄭澈主獄羅織之罪, 請追削官爵, 依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