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역/표점
- 국역
- 금성삼고(錦城三稿)
- 부록(사문간찰초)
- 금성삼고 발문(錦城三稿跋 【原無題】)
금성삼고(錦城三稿) / 부록(사문간찰초)
금성삼고 발문주 7)
우리 증조부의 형제 6인에게 육룡(六龍)이라는 호칭이 있었다. 첫째는 소포공(嘯浦公)이고, 둘째는 금암공(錦巖公)이며, 금봉공(錦峰公)이 그 다음이다. 모두 성대하게 한 시대에 명성이 있어 담론하는 자들이 영특하고 호걸하며 얽매임이 없는 것으로는 소포공을 추대하고, 독실한 학문과 훌륭한 행실로는 금암공과 금봉공을 추대하니, 아! 성대하였도다.
소포공은 일찍이 저술한 것이 있으나 전사(傳寫)한 것에 섞인 글이 많아 나는 이전부터 이것을 근심으로 여겼고 또한 원고가 산실되어 잃어버려 전해지지 않을까 염려하여 편차하고 베껴 적으니 시와 부와 약간의 편지글과 상소문 총 60여 편이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금암과 금봉 두 분도 모두 약간의 글이 있어 또한 차마 사라지게 할 수가 없으므로 소포공의 글 끝에 모두 부치고 또 〈세계(世系)〉, 〈장(狀)〉, 〈녹(錄)〉 등을 실어 하나의 책으로 합쳤다. 마침내 소포공의 현손 나만운(羅晩運)과 금봉공의 증손 나두흥(羅斗興)과 함께 어떻게 출판할 것인지 협의하고 판각하는 사람에게 부쳐서 없어지지 않기를 도모하였다. 다만 정곤재의 《우득록》을 보면 금암공에게 준 편지가 많아 40여 수에 이르고 그 학문과 예에 대해 논하며 추장한 말들이 공을 예우하여 권면하는 글뿐만이 아니었으니 필시 원고가 사라져 용사(龍蛇)의 병화에서 일실되어 지금 남아있는 것이라곤 이처럼 원고가 소략하니 참으로 애석하다.
아! 옛날을 회상하니 어느덧 1백여 년이 지났으나 오직 이 유문(遺文)은 사라지지 않았거늘 이제야 이 일을 실행하여 몇이라도 보존된 것이 있는 듯하니 또한 자손들에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공역(工役)이 이미 완성되어 전말을 위와 같이 대략 쓴다.
숭정(崇禎) 후(後) 두 번째 신축(1721) 1월 신미에 금암공의 증손인 생원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쓰다.
- 주석 7)금성삼고 발문
- 제목은 없다. 내용상 삼고(三稿)의 발문에 해당되기 때문에 역자가 임의로 정한 것이다.
錦城三稿跋 【原無題】
惟我曾王父兄弟六人, 有六龍之稱. 其伯曰嘯浦公也, 其仲曰錦巖公, 而錦峰公又其次也. 皆蔚有聲名一時. 談論者以英傑不羈推伯氏, 以篤學修行, 推仲叔, 吁其盛矣. 嘯浦公嘗有所著而傳寫多 魚魯, 斗冬旣以是病之, 又恐其散失無傳, 爲之編次繕寫摠詩賦若書疏六十餘首也. 仍伏念錦巖 錦峰二公, 俱有若干文字, 亦不忍其湮沒, 幷附諸其下, 且載以世系狀錄合成一冊子. 遂與嘯浦公之玄孫晩運, 錦峰公之曾孫斗興, 協議經紀, 付諸剞劂氏, 以啚不朽, 而第見鄭困齋愚得錄, 則與錦巖公書多, 至四十餘首, 而其所論學論禮, 推獎之語, 不啻勤摯. 公必有所覆而逸於龍蛇病禍, 今其存者, 如是草略, 可勝惜哉. 嗚呼! 感念今昔, 焂已百有餘年, 而惟此遺文不泯, 始擧斯役, 似若有數存焉, 而亦可謂子孫幸也. 工旣訖功, 略敍顚末如右云爾. 崇禎後再辛丑正月辛未, 錦巖公之曾孫生員冬,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