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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 금봉 나공 사실기(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錦峰羅公事實記)

금성삼고(錦城三稿) / 소포유고부록

자료ID HIKS_OB_F9008-01-240502.0005.TXT.0003
조선 통훈대부 행 사헌부 감찰 금봉 나공 사실기
나 씨(羅氏)는 대대로 나주(羅州)에 살면서 덕이 두텁고 경사스러움이 쌓여 벼슬이 끊어진 적이 없었으니, 세상 사람들이 호남의 명문가를 꼽으라면 반드시 나 씨를 말한다. 고려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 나부(羅富)가 실로 시조이며, 후대의 나진(羅璡)에 이르러 공조전서(工曹典書)가 되어 공양왕 2년(1390) 영산(榮山)에서 조창과 축성을 감독했으니, 이 일은 《여지지(輿地志)》주 54)에 실려 있다.
아들 나공언(羅公彦)은 전농시(典農寺) 정(正)을 지냈다. 우왕 7년(1381)에 도순문사(都巡問使) 이을진(李乙珍)을 따라 왜적을 물리친 공이 있었는데, 이 일은 《고려사》에 실려 있다. 아들 나집(羅諿)은 식목도감녹사(式目都監錄事)를 지냈고, 아들 자강(自康)은 무안현감(務安縣監)을 지냈으며, 아들 나계조(羅繼祖)는 장사랑(將仕郎)을 지냈으니, 이 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나일손(羅逸孫)은 전연사 직장(典涓司直長)을 지냈고,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다. 조부 나질(羅晊)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지내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부친 나사침(羅士沈)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행이 있어, 중종께서 정려로 표창 하셨다.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동문들이 모두 추대하고 중히 여겼다. 선조 초에 관찰사(觀察使) 서교(西郊) 송찬(宋贊)이 그를 학행으로써 천거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이산 현감(尼山縣監)에 이르렀는데, 그의 거사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한 송이 시든 꽃 외로운 한 마리 학 倭花一朶鶴一隻
쓸쓸한 행리에 고인의 풍모가 있네 行李蕭然古人風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첫째 부인은 파평 윤씨(坡平尹氏)로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고, 둘째 부인은 광주 정씨(光州鄭氏)로 사도 첨사(蛇渡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이다. 두 분은 각기 세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도사(都事)를 지낸 나덕명(羅德明)으로, 영특하고 호걸스러워 명예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둘째는 현감을 지낸 나덕준(羅德峻)으로 곧 나의 증조부이다. 효도와 우애와 품행과 도의로 이름이 났었다. 공은 바로 셋째이다. 그 다음 넷째는 처사 나덕현(羅德顯)으로, 효행이 있어 추증되었다. 또 그 다음 다섯째는 군수(郡守)를 지낸 나덕신(羅德愼)이며, 막내는 수사(水使)를 지낸 나덕헌(羅德憲)인데, 두 분 모두 무과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가 왜적을 섬멸하여 공을 세웠고, 오랑캐의 조정에서 항거하여 절개를 지키기도 하였다. 형제 여섯 명이 모두 당세에 이름이 나서, 어떤 이는 찬성공의 만사에

사 씨 집안의 쌍벽주 55)을 하찮게 여기고 謝家雙璧賤
순호의 팔룡주 56)도 가볍게 여겼지 荀戶八龍輕

라고 했으니, 공의 형제들을 칭송한 것이다.
공의 휘는 덕윤(德潤)이다. 처음엔 자를 유지(有之)라고 했다가 훗날 성지(誠之)로 고쳤다. 금봉(錦峰)은 그의 호이다. 가정(嘉靖) 36년인 정사년(1557) 3월 1일에 태어났다. 이듬해 9월에 어머니 윤 부인(尹夫人)이 세상을 뜨자 공은 울면서 젖을 먹지 못하여 늙은 여종에게 길러졌다. 나이 열다섯주 57)이 되자 비로소 학문에 나아갔다.
임신년(1572)에 찬성공이 서울에서 벼슬을 하게 되어 공이 따랐는데 나이가 겨우 열여섯 살 밖에 되지 않았어도 문사는 이미 통달하였다. 당시 같은 고을 사람 함양(咸陽) 이언양(李彦讓)은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주 58)의 문인으로 선비들 사이에서 명성이 난 인물이었는데 찬성공과 함께 경저(京邸)에서 생활하면서 수 년 동안 공을 가르쳐 선비의 정식으로 《소학(小學)》, 사서(四書),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전수하니 공의 실력이 일취월장하였다. 이공은 그의 재주를 매우 아껴 자신의 딸을 시집보냈다. 장성하여 과거 공부를 달갑게 여기지 않고 둘째 형과 뜻을 같이 하여 학문에 힘써 늘 미암(眉岩) 유희춘(柳希春)에게 의심나는 것을 물었으니, 미암은 곧 찬성공의 이종형으로 학문이 넓고 들은 것이 많아 경연의 이름난 선비였다. 매번 공을 장려하여 힘쓰도록 하였고 기량이 크고 중하다고 여겼다. 또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정산(鼎山) 박동(朴洞), 사문(斯文) 신의경(申義慶)을 종유하며 《예경(禮經)》을 강론하였는데 이로부터 벗들에게 크게 인정받았고 사암(思庵) 박순(朴淳)주 59), 율곡(栗谷) 이이(李珥)주 60) 같은 이들도 더욱 가상하게 여겨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주 61)의 어짊을 칭찬하며 공의 형제들이 종유하여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권장하였다. 마침내 남쪽 고향으로 돌아와 고을 성의 북쪽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짓고 곤재를 스승으로 받들어 모시고 동지들과 강의계를 결성하고 경전을 토론했는데 특히 주자서(朱子書)에 더욱 힘썼다.
정축년(1577) 무렵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막 좌막(佐幕)주 62)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의 스승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상을 당하자 달려가 곡을 하고 난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와 비단 방석에 앉아 관직의 일을 임하였다. 대개 김천일은 일찍이 고아가 되어 일재에게 학업을 받아 실로 가르침을 받아 추천에 힘입어 세상에 중임을 맡게 되었으나, 스승이 돌아가셨는데도 상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공은 마음속으로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여 곤재에게 편지를 올려 스승의 상복제도에 대하여 강론한 것이다. 김천일의 문인들 가운데 질책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공은 개의치 않았으니 당시 공의 나이 21세였다. 이 일은 《우득록(愚得錄)》주 63)에 실려 있다. 이보다 앞서 공의 큰아버지 목사공(牧使公)의 후처 서 씨(徐氏)가 성격이 사납고 사람들을 잘 속이며 질투가 심하여 전처의 자손들이 이미 쫓겨나게 되었다. 아들 나덕순(羅德純)이 일찍 죽은 뒤 서 씨는 그의 부인 임 씨와 함께 몰래 남의 자식을 데려다 유복자라고 속였다. 공의 형제들은 그의 패륜적인 행동에 분개하여 찬성공에게 자문하고 미암에게 의논하여 관에 소장을 올려 일을 밝혀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주 64)가 이른바 "나 씨 가문에서 그의 거짓됨을 변별하고 집안을 어지럽힌 것을 쟁송하였다."라고 한 것은 대개 이 일을 가리킨다. 여러 번 추핵(推覈)을 거치고 몇 년 동안 결판이 나지 않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목사로 부임함에 이르러 그 거짓이 밝혀지고 곧장 판결을 하였다. 학봉이 공의 형제들에게 말하기를 "세상의 쟁송들은 이익으로써 하는데 그대들이 쟁송은 천리로써 하니 진정 의로운 선비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진심으로 교유를 맺었다. 이에 공의 형제들이 학봉에게 의논을 드려 성의 서쪽 대곡동(大谷洞)에 서원을 세워 한훤(寒暄), 일두(一蠹), 정암(靜庵), 회재(晦齋), 퇴계(退溪) 등 오현(五賢)을 함께 제사를 올려 사림(士林)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했는데 일을 미처 마치지도 못한 채 학봉이 물러나게 되자, 임윤신(任允臣)주 65)이 와서 그 일을 대신하여 이루었다.
정해년(1580) 겨울에 비로소 봉안의 예를 행했는데, 그 제문이 바로 공이 지은 것이다. 공이 스승을 따른 지 십 수 년이 되었지만 틀에 박힌 공부를 일삼지 않았으나 어버이의 뜻에 따라 억지로 향시를 보아 양장(兩場)에 모두 합격하였다. 총산(葱山) 정언응(鄭彥𧦱)은 함께 같은 시험장에 들어가 공이 지은 것을 보고 글이 근원이 있고 넓어 저절로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이 통하게 한다고 칭찬하였다.
이듬해 무자년(1581) 봄, 진사에 급제했으니 바로 선조 21년이었다. 당시 조정의 의논이 나누어지고 더욱 더 격렬해지자 정철(鄭澈)은 늘 뜻을 잃고 원망하고 있었기에 나주 사람 홍천경(洪千璟)과 창평 사람 양천경(梁千頃) 등이 그의 부하주 66)가 되어 당을 만들고 무리를 결성하여 뜻을 마음대로 하고 바른 것을 날조하여 곤재가 더욱 천경의 무리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공의 형제가 곤재의 문하생으로 모두 훌륭한 명성이 있었는데, 간악한 사람들이 그들을 미워하여 이를 갈고 틈을 노린 것이 대개 수년이나 지속되었다.
기축년(1589) 겨울에 정여립의 반역의 옥사가 일어나자, 정철이 위관(委官)이 되어 기미를 틈타 없는 죄를 꾸몄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주 67)이 훗날 등대(登對)주 68)하였을 때, 기축년의 옥사가 사람으로서는 차마 하지 못할 짓이라고 진설하였다. 동복(同福) 사람 정암수(丁巖壽), 홍천경, 양천경 등이 정철의 뜻을 이어 상소를 하여 여러 이름난 사람들을 무고하니 영상(領相) 이산해(李山海)주 69)와 예판(禮判) 유성룡(柳成龍)주 70)은 모두 임금께서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인데 상소에 들어 있었고 심지어 공의 부자 이름 또한 들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정여립과 교유를 긴밀하게 하다가 일이 드러나자 거기에서 자신을 구하려 한다."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그들이 쇠퇴한 세상에는 과거에 응시할 필요가 없으니, 장차 태평시대를 기다려라."고 했으니 어의(語義)의 흉악함이 극심하다. 공의 동생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 등은 무고를 받은 것을 분하게 여겨 상소한 자들이 모인 곳에 가서 지극한 말로 준엄하게 배척하였다. 정암수의 상소가 들어가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의 변란을 틈타 드러나지 않은 말을 거짓으로 꾸미고 사악하고 속이는 상소를 몰래 올려 어진 재상이나 이름 난 경(卿)들까지 지목하여 배척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반드시 나라를 텅 비게 한 뒤에야 그만 둘 것이다. 이는 반드시 간신배들의 부추김을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는 정암수 등 10명을 잡아들여 국문하여 죄를 밝히도록 명하셨다. 정철은 그 사실이 발각될까 걱정하여 대간(臺諫)과 태학생(太學生)들을 시켜 힘써 구제하게 하자 이미 낸 명령이 그만두게 되었다. 하지만 옥사가 오랫동안 끝나지 않자 옥사는 더욱 심해졌다.
경인년 여름에 또 군읍의 사람들로 하여금 죄인들과 홍천경, 품관(品官) 유발(柳潑), 정여릉(鄭如陵) 등을 염탐하게 하여 묵은 감정을 드러내 이에 따라 죄목에 묶으려 하였다. 이에 곤재가 체포되었고 공의 여섯 부자 또한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전 정암수의 상소를 저지했다는 이유로 죄목을 엮은 것이었다. 심문의 답변이 이르자 임금께서 특별히 전교를 내려 "효자의 가문에서 충신을 구한다고 했으니, 이름이 효자에 든 사람은 용서하고, 무고하여 미움을 받은 자들은 모두 파직하라."라고 하셨다. 찬성공은 다행히 곧바로 사면되었지만 공의 형제 다섯은 모두 풀려나지 못하였다. 공은 회령으로 유배 갔고, 나머지 형제 중 어떤 이는 바닷가로, 어떤 이는 도형(徒刑)을 받고 유배되었다. 이때 재앙을 예측할 수가 없어,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하면서 감히 안부를 묻는 사람이 없었는데 학봉(鶴峯)주 71)만은 홀로 편지를 써서 위로하며 "한 집안 사람들이 온전히 살아있는 이유는 진실로 효도에 감동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주 72)이 회령에 먼저 유배 갔었는데 공이 유배지에 이르자 마침내 서로 종유하며 마음으로 인정하고 글을 써서 회포를 풀어 시름을 보냈다. 곤재 또한 장형을 받고 유배가게 되어 북쪽으로 가다가 공의 유배지에 들렀는데 조금도 원망하는 말없이 다만 《주역》을 강의할 것을 약속하였다. 얼마 후 곤재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서 달려가 간호했으며 초상이 나자 공서(公西)의 일주 73)을 행하였다. 이듬해 임금께서 비로소 정철에게 속았다는 것을 아시고는 간악하고 악독한 정철에 관한 교서를 특별히 내리시고 방을 붙여 조정에 알렸다. 헌장(憲章) 이원익(李元翼) 등이 마침내 달아난 정철을 잡아야 된다는 장계를 올리고 형벌의 법률을 추가하였는데 공론이 대개 이렇게 정해졌다.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나자 동강이 은혜를 입어 먼저 사면되어 시를 지어 공에게 회포를 보냈는데, 공도 그 운에 따라 답시를 보냈으니 다음과 같다.

온갖 흉악한 자들 눈앞에 모였으니 百兇叢目下
슬프다! 우리가 뒤에 태어남이여 哀哉我生後
적들이 무리지어 이미 안에서 시끄러운데 賊莽旣內訌
추악한 오랑캐들마저 밖에서 짓밟고 있네 醜虜又外蹂

계사년(1593)에 공이 마침내 풀려나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혼란한 상황을 당해서도 돌아가신 스승에 대한 지극한 원통함을 의리상 잊을 수가 없었다. 을미년(1595) 봄에 둘째 형님과 함께 임금께 글을 올려 몇 차례나 스승에 관한 일을 자세히 아뢰었다. 사건이 비변사에 내려지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애당초 옥사를 다스림이 지나쳤던 이유를 모두 진설했으며 또 정개청(鄭介淸)은 호남 사람 가운데서도 더욱 이름이 난 사람으로 평소 학술과 행실의 검박함으로 자임한 자인데 우연히 한 편의 글을 지었다가 자신을 죽게 하는 경우에까지 이르게 되었으니 마땅히 나덕윤과 무리들이 천리를 멀다 여기지 않고 발을 싸고 대궐의 문을 두드리며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아뢰었지만, 임금께서는 처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셨다. 비록 은혜가 베풀어지지 않았지만 화를 당한 나머지 사람들 모두 기운을 잃고 감히 입을 열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먼저 피눈물을 토하며 마음을 드러내어 사림(士林)들로 하여금 흥기하도록 하여 점차 회복될 희망을 가지게 만들었으니 이는 모두 공의 힘이었다. 병신년(1596) 12월에 찬성공(贊成公)이 돌아가시자 무안(務安)의 주룡(住龍) 나루에 장사를 지내고 곧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들이 다시 쳐들어오자 비록 난리를 피해 정신이 없는 가운데서도 상례를 한결같이 예를 지켜 마쳤다.
기해년(1599)에 또 둘째 형님과 함께 곤재의 원통함을 거의 앞뒤로 대궐에 하소연하여 두 번 세 번 지속하자 마침내 유음이 내려졌다. 공은 처음에 현릉 참봉(顯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사은하고 곧장 그만두었다. 또 금부 도사(禁府都事)에 임명되었으나 곧이어 그만두었다.
광해군 초 무신년(1608)에 왕자의 사부에 으뜸으로 의망(擬望)되었다가, 3월에 다시 금부도사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있다가 그만두고 12월에 청암도 찰방(靑巖道察訪)이 되었으며, 신해년(1611)에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계축년(1613) 5월에 또 금부 도사가 되었다가 다시 경력(經歷)이 되었으며 갑인년(1614)에 사재감 주부(司宰監注簿)로 승진했다가 7월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다. 8월에 후처 정 부인(鄭夫人)이 세상을 떠났다. 공은 나이 60이 다 되었지만 상례를 게을리 않았고 상을 치른 뒤에는 또 여막을 짓고 삼년상을 마쳤다. 공이 만년에 벼슬에 나간 것은 단지 어버이를 위하여 뜻을 굽힌 것이었다. 얼마 후 어버이께서 돌아가시자 애통해 하면서 종신토록 다시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한가하게 살며 스스로 편안히 지내기로 마음먹은 지 5~6년 지나 신유년(1621) 윤달 2월 28일에 생을 마치니 향년 65세였다. 찰방(察訪) 이극부(李克扶)는 공의 막역한 친구로서 시를 지어 그를 애도하였다.

중년에 기러기를 놀라게 할 활을 함께 만들고 中年共作弓驚鴈
만년엔 눈 덮힌 소나무를 함께 보자 했었지 晩歲同爲雪後松

대개 공이 험난한 일을 겪고도 지키는 바의 확고한 바를 탄식한 것이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훌륭하고 뛰어났으며 기량이 출중했고 예를 잘 지키는 집안에서 성장하여 효우의 가르침을 받들어 어버이 모시기를 진실한 마음으로 하고 몸을 바로잡기를 예로 하였다. 또 스승의 문하에 올라 학문을 좋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의리의 심오함을 강구하니 스승 곤재가 그를 칭찬하여 세상에 드문 인물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공이 포대기에 싸여 어머니를 잃었을 때 유모의 남편이 극진하게 양육의 도리를 다 하였다. 그래서 그가 죽자 함께 밥을 먹은 식구가 죽은 듯 시복(緦服)의 의리로 백건(白巾)을 쓰고 곡을 하며 관을 마련하고 염을 하여 장례를 치렀다. 이는 공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작은 절개이지만 작은 것도 잊지 않는 은혜로운 마음이 또한 높이 칭송할 만하다. 형제들과 함께 화락하고 허물없이 지냈으며 함께 같은 집에서 살고자 당(堂)을 같이 하면서 실(室)만 다르게 살 계획을 세우자 찬성공이 매우 가상하게 여기고 격려하였다. '너의 부모를 더럽히지 말라.'주 74)는 가르침을 두고 실천하려 했지만 재앙과 변란을 만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집에 있으면서 아랫사람을 대할 때에 반드시 정명과 분수를 우선으로 삼았다. 집안이 엄숙하여 질서가 있으니 사람들 가운데 출입하는 자들은 모두 경외하면서 감히 분수를 넘는 사람이 없었다.
약관의 나이로부터 이미 선생과 어른들에게 인정을 받아 훌륭한 스승을 얻어 귀의하였다. 처음에는 사암과 율곡에게 가르침을 받다가 중년 이후 명성이 날로 드러나 학봉이나 동강 같은 일대의 유현들이 공을 인정하여 그냥 두지 않았다. 심지어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주 75)은 공을 국사(國士)로서 대우하였고,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주 76)는 방백(方伯)으로 있을 때 공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알아주고 대우해준 것에 사례하였다. 유학(儒學)의 연원, 전후, 법도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자들은 공과 함께 공사를 의논하여 순안(巡按)하던 날이면 그때마다 공을 머물게 하여 대접하려는 뜻을 미리 관문(官文)으로 알렸으니 고을사람들은 전하여 미담으로 삼았다. 매번 스승과 벗들이 원통하게 죽은 아픔을 생각하며 그들의 원통함을 씻어내길 바랐으나 임금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 밤낮으로 마음아파 하며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주 77),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주 78), 남이공(南以恭), 정협(鄭協)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신변(申抃)하는 말을 하였다. 또 스승을 우러르고 사모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곤재의 사우를 지어 제사를 올려 덕을 숭상하는 정성을 드러내는 일을 의논하였으니 그 섬기는 바를 한결같이 하는 것이 또한 지극하였다.
공은 처음 고을의 금성산(錦城山) 북쪽 기슭에 장사를 지냈는데, 그 뒤에 점을 보는 사람들이 모두 집에 이롭지 않다고 하여 병신년(1656) 3월에 현손(玄孫) 만석(晩錫) 등이 대안(大安) 동쪽의 자라바위 위 건좌(乾坐) 손향(巽向)주 79)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공이 돌아가신 지 96년이 되는 해였다. 아내인 의인(宜人)주 80) 이 씨는 본관이 양성(陽城)주 81)으로, 정사년(1557) 5월 17일에 태어나 경신년(1620) 12월 20일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에 합장하였다. 세 아들을 두었는데, 나회소(羅繪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와 이천 부사(伊川府使)를 지냈고, 나유소(羅由素)는 선교랑을 지냈고, 나의소(羅宜素)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정랑(禮曹正郎)을 지냈는데, 성품이 대범하고 우뚝하여 세상과 더불어 뜻이 뭉개져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였기에 사람들이 모두 안타까워하였다. 부사(府使)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나성(羅衤成 ) 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지냈고, 나첨(羅襜)은 통덕랑을 지냈고, 사위 이명구(李鳴衢)는 진사에 합격하였다. 선교(宣敎)는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두었는데, 아들은 나일(羅衵)이고, 사위는 윤적망(尹啇望), 임고(任暠), 조정오(曺挺五), 진사에 합격한 정헌(鄭櫶)이다. 정랑(正郎)은 후사가 없어 나첨을 후사로 삼았다. 선전(宣傳)은 아들 나두정(斗正)과 서출 아들 둘을 두었으니 나두점(羅斗占), 문과에 급제한 나두평(羅斗平)이다. 나일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나두흥(羅斗興), 나두진(羅斗鎭), 나두응(羅斗應)이다. 나첨은 서출 아들 넷을 두었는데, 나두원(羅斗遠), 무과에 급제한 나두승(羅斗承), 나두주(羅斗冑), 나두영(羅斗盈)이다. 나두정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나만석(羅晩錫), 나만우(羅晩遇)이다. 나두흥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나만현(羅晩賢)이다.
아! 내가 언젠가 공의 제문을 본 적이 있었다. 우리 증조의 제문이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함께 부모님의 가르침을 받아 시와 예를 공부하고주 82), 같은 스승을 섬겨 학문을 강습했으니,주 83) 마음과 덕을 함께했던 즐거움이 어찌 다만 형을 형으로 섬기고 동생을 동생으로 여기는 대의일 뿐이겠는가! 그렇다면 형제간이요 지기라고 할 만하다." 이 글을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엄숙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흐른다. 지금 나만석이 공의 소장, 문적, 역관(歷官), 편지 등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주며 차례로 글을 엮어 후손에게 전해지도록 요청하니 더욱 마음에 감동되는 바가 있어 감히 글솜씨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일의 전말을 써서 보낸다.
숭정(崇禎) 병자(丙子) 후(後) 80년 병신(1716) 윤3월 모일에 종증손(從曾孫) 생원(生員) 나두동(羅斗冬)이 삼가 쓰다.
주석 54)여지지(輿地志)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펴낸 지리서이다.
주석 55)사 씨 …… 쌍벽
원문 '사가(謝家)'는 진(晉)나라 때 태부(太傅)를 지낸 사안(謝安)의 집안을 말한다. 또 '쌍벽(雙璧)'은 본래 한 쌍의 옥벽(玉璧)을 말하는데, 전하여 형제 또는 두 사람이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뛰어남을 말한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귀한 집안이나 벼슬을 한 훌륭한 자식 등을 일컫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주석 56)순호의 팔룡
후한(後漢) 때, 순숙(荀淑)의 여덟 아들을 가리킨다. 모두 뛰어난 재능이 있었으므로 '순씨팔룡'이라고 불렸으며, 후세에 남의 자제들이 훌륭하다고 칭찬할 때 흔히 사용한다.
주석 57)열다섯
원문 성동(成童)은 15세를 말한다.
주석 58)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1543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를 역임하여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인종이 즉위하여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주석 59)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청하자(靑霞子), 사암(思菴)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순은 53세에 이이가 40세였고, 1575년 12월에 3회의 왕복 서신을 통해 성리학적 논쟁을 한 바 있다.
주석 60)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격몽요결(擊蒙要訣)》, 《율곡문집(栗谷文集)》과 등이 있다.
주석 61)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
1529~1590. 자는 의백(義伯)이고, 호는 곤재(困齋)이며, 나주(羅州) 출신이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주석 62)좌막(佐幕)
조선 시대 감사(監司), 유수(留守), 병사(兵使), 수사(水使), 견외(遣外) 사신을 따라다니며 일을 돕던 무관이다.
주석 63)우득록(愚得錄)
정개청(鄭介淸)의 시문집으로 5권 4책이다.
주석 64)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자는 도가(道可)이고, 호는 한강(寒岡)이다. 6대조 정총(鄭摠)과 그 아우인 정탁(鄭擢)이 개국공신에 책봉되는 등 본래 공신가문으로 살았다.
주석 65)임윤신(任允臣)
1529~1588. 자는 경룡(景龍)이다.
주석 66)부하
원문 '조아(爪牙)'는 여기에서 '앞잡이', '부하' 정도의 뜻으로 쓰였다.
주석 67)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자는 공려(公勵)이고, 호가 오리(梧里)이다.
주석 68)등대(登對)
임금의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조정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주석 69)영상(領相) 이산해(李山海)
1539~1609.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 종남수옹(終南睡翁)이다.
주석 70)예판(禮判) 유성룡(柳成龍)
1542~1607.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이다.
주석 71)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을 말한다.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가 학봉(鶴峯)이다. 안동 임하(臨河) 출생이며,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주석 72)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 직봉포의(直峰布衣)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주석 73)공서(公西)의 일
공서(公西)는 공자의 문인으로, 공서(公西)가 씨(氏)이고 적(赤)이 이름이며, 자는 자화(子華)이다. 공자 앞에서 공자의 여러 제자들이 자신의 소원을 각자 말했는데, 공서화는 '예복(禮服)과 예관(禮冠) 차림으로 종묘의 제사를 돕는 일이 소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논어》 〈선진(先進)〉
주석 74)너의 …… 말라
《시경》 〈소아(小雅) 소완(小宛)〉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며 노력하여 너를 낳아 준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夙興祖寐, 毋忝爾所生.]"에서 나온 말이다.
주석 75)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1546∼1598. 자는 중숙(重叔)이고, 호는 두암(斗巖)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자 유성룡의 천거로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兵曹判書兼副體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1593년 이조판서로서 임금을 따라 환도, 1594년 우의정, 1595년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임진왜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주석 76)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자는 경임(景任)이고, 호가 우복(愚伏)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이다.
주석 77)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1561~1613. 자는 명보(明甫)이고, 호가 한음이다.
주석 78)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
1552~1615.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주석 79)건좌(乾坐) 손향(巽向)
풍수지리에서, 묏자리 또는 집터 따위가 북서쪽을 등지고 남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을 말한다.
주석 80)의인(宜人)
조선 시대, 정육품과 종육품 문무관의 아내에게 주어지던 품계이다.
주석 81)양성(陽城)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일대이다.
주석 82)함께 …… 공부하고
원문 '이정(鯉庭)'은 부모님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鯉)는 공자(孔子)의 아들 이름으로 자(字)가 백어(伯魚)인데, 뜰에 계신 공자의 앞을 지나다가 시(詩)와 예(禮)에 관한 가르침을 받은 고사가 있으므로, 자신이 이(鯉)처럼 뜰을 지나면서 부모의 훈계하시는 말씀을 들었음을 말한 것이다.
주석 83)학문을 강습했으니
원문 '이택(麗澤)'은 벗끼리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쓰는 것이다. 《주역》 〈태괘(兌卦)〉에 "두 개의 연못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태괘이니, 군자가 이 괘를 써서 붕우 간에 학문을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 朋友講習.〕"라고 하였다.
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司憲府監察錦峰羅公事實記
羅氏世居羅州, 德厚慶積, 簪紳不絶, 世之人數湖中望閥, 必稱羅氏, 在麗朝, 有監門衛上將軍諱富, 實爲始祖, 後至諱璡工曺典書, 恭讓二年, 監榮山漕倉築城, 事載在輿地誌. 子諱公彦典農寺正. 禑之七年, 從都巡問使李乙珍, 克倭有功, 事載麗史. 子諱諿式目都監錄事, 子諱自康務安縣監. 子諱繼祖將仕郞, 是公高祖. 曾祖諱逸孫典涓司直長 贈承政院左承旨. 祖諱晊司憲府監察 贈戶曹參判. 考諱士忱, 童而有至行, 中宗命旌閭, 游履素齋李仲虎之門, 同門人皆推重. 宣祖初, 道臣宋西郊贊薦學行, 累官至尼山縣監, 其去思碑, 有'倭花一朶鶴一隻, 行李蕭然古人風'之句. 贈議政府左贊成. 前聘坡平尹氏府使諱彦啇之女, 後配光州鄭氏蛇渡僉使諱虎之女, 各擧三男. 長都事公諱德明, 以英傑不覇名. 仲縣監公諱德峻卽我曾王父, 以孝友行誼名, 公卽序居第三. 其次處士公諱德顯, 以孝贈職. 又其次郡守公諱德慎, 季水使公諱德憲, 俱以武擧進, 或殲倭立功, 或抗節胡庭. 兄弟六人, 俱有聞當世. 有人挽贊成公詞曰, "謝家雙璧賤, 荀戶八龍輕."者, 蓋贊公兄弟也. 公諱德潤, 初字有之, 後改誠之, 錦峰, 其號也. 嘉靖三十六年丁巳三月初一日生, 明年九月尹夫人歿, 公呱呱失乳, 養于老婢, 甫成童, 始就學歲. 壬申, 贊成公供仕京中, 公從之, 年纔十六, 文詞已達. 時同鄕有李咸陽公彦讓, 以金河西麟厚門人, 知名士類間者也. 與贊成公同舍京邸, 數歲敎公, 以士子程式, 仍授小學四書及心經近思錄, 所造日就, 李公愛其才, 以女妻之. 年旣長, 不屑擧子業, 與仲氏同志力學, 常質疑於柳眉岩希春, 眉岩卽贊成公姨兄, 而博學多聞, 爲經幄名儒者也. 每於公獎勗而器重之. 又從柳汎愛祖訒 朴鼎山洞 申斯文義慶, 講論禮經, 自此大爲朋輩所偢倈, 如朴思菴淳 李栗谷珥 尤嘉尙焉. 仍稱鄭困齋介淸之賢, 而勸公兄弟從游以卒業. 遂南歸, 築書齋于州城北大安洞, 奉困齋師事之, 結同志爲講義禊, 討論經傳, 尤致力於朱子書. 丁丑間, 金倡義使千鎰, 方任佐幕, 而遭其師李一齋恒之喪, 奔哭之後, 卽返于家坐花茵, 奉官供, 蓋金早孤, 受業一齋, 實賴敎誨推薦之力, 取重於世, 及師死不爲之服, 故公心非之, 以書上困齋, 講論師喪服制. 金之門人, 多有詆責者, 而公略不介意, 時公年二十一矣. 事載愚得錄. 先是, 公之伯父牧使公之繼配徐氏, 性鷙悍多譎憎嫉, 前室子孫當已出. 子德純夭折之後, 與其婦林氏, 潛謀取他人子, 詐爲遺孕, 公兄弟憤其悖倫, 稟贊成公且議眉岩, 狀于官斥之. 鄭寒岡逑, 所謂 '羅門請辨其僞, 而訟其亂宗'者, 蓋指此也. 累經推覈, 積年不決, 及金鶴峯誠一牧州, 明其爲僞卽斷之. 鶴峯謂公兄弟曰 : "世之爭訟者以利, 而君輩所爭則天理, 眞義士也." 遂結爲心交. 於是, 公兄弟奉議鶴峯, 營建書院於城西大谷洞, 以寒暄 一蠹 靜菴 晦齋 退溪 五賢, 竝享之, 欲爲士林模範之, 所功未及, 訖鶴峯遞歸, 任公允臣來, 代之踵成其事. 以丁亥冬, 始行奉安之禮, 其祭文, 公所製也. 公從師十數年, 不事科臼之工, 而爲順親旨, 强赴鄕解, 俱占兩場. 鄭葱山彥𧦱同入試圍, 見公作, 稱詞源浩汗, 自令人意思通暢云. 明年戊子春, 成進士, 卽宣祖二十一年也. 時朝議, 已岐轉加層激, 鄭澈常失志怏怏. 羅州人洪千璟 昌平人梁千頃等, 爲其爪牙, 連黨結侶, 恣意醜正, 而困齋尤被千璟輩所誚詆. 公兄弟以困齋門生, 俱有令名, 奸人惡之, 磨牙俟隙, 蓋有年矣. 己丑冬, 鄭汝立逆獄起, 澈爲委官, 乘機羅織, 李梧里元翼, 後日登對時, 所陳己丑治獄, 人所不忍者也. 同福人丁岩壽與洪千璟 梁千頃等, 承澈旨, 投疏誣陷諸名流, 領相李山海 禮判柳成龍, 皆上之所倚毘者, 而入於疏中, 至於公父子之名, 亦與焉. 有曰 : "與汝立交密, 顯爲伸救." 或曰 : "不必應擧衰世, 且待太平." 語意極其凶慘. 公之弟德顯 德憲等, 憤受誣, 往疏會, 極言峻斥. 巖壽疏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捏造無形之語, 陰陳邪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此必聽奸人指嗾." 命拿來岩壽等十人, 推鞫定罪. 澈恐其情跡之敗露, 使臺諫及太學生, 力救之, 還寢成命. 獄久不竟, 鍛鍊愈酷. 庚寅夏, 又令郡邑廉問罪人黨 與洪千璟與品官柳潑 鄭如陵等, 逞宿憾, 隨而媒孽. 於是, 困齋被逮, 公之六父子, 亦就理, 蓋以前沮岩壽疏, 構成罪目也. 及置對, 上特敎曰 : "求忠臣於孝子之門, 名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贊成公幸卽蒙宥, 而公兄弟五人, 俱未得脫. 公謫會寧, 餘或徙邊, 或徒配. 當是時, 禍網叵測, 人皆畏怵無敢問者, 而鶴峯獨致書慰問, 有曰 : "一家全活, 寔賴孝感"云. 金東岡宇顒先配于會, 及公到配, 遂與從遊許以心期, 論文敍懷以自遣. 困齋亦杖流, 朔北過公所, 少無嗟怨聲, 只以講易爲約. 俄聞困齋病篤, 馳往救護, 旣喪, 仍行公西之事. 明年, 上始覺爲澈所誤, 特下奸澈毒澈之敎, 榜示朝堂. 憲長李原翼等, 遂發竄澈之啓, 仍加栫棘之律, 公論蓋於是定矣. 壬辰倭亂, 東岡先被恩赦, 以詩詠懷贈公, 公步其韻以謝有; "百兇叢目下, 哀哉我生後. 賊莽旣內訌, 醜虜又外蹂."之句. 癸巳, 公始得宥. 還時, 當搶攘而亡師至寃, 義不忍忘. 乙未春, 與仲氏上章伸卞, 縷縷甚悉. 事下備局, 柳西厓成龍, 洞陳當初治獄濫及之由, 且曰鄭介淸於湖南人中, 尤有名稱. 平生以學術行檢自任, 因偶然一篇之著論, 以至滅身, 宜羅德潤輩千里裹足, 叩閽訴寃也." 云云. 上意持難事. 雖不見施, 然禍網之餘, 人皆喪氣, 無敢容喙, 而公能先傖瀝血致, 令士林興起, 稍有陽復之望, 皆公之力也. 丙申十二月, 丁贊成公憂, 奉襄務安住龍渡, 仍守墓下. 丁酉, 倭寇再肆, 雖在奔避顚沛中, 持喪一以禮. 己亥, 又與仲氏爲困齋訟寃, 凡前後叫閽, 至再至三, 而兪音竟閟. 公初授顯陵參奉, 謝恩卽已. 又除禁府都事, 尋罷. 光海初戊申, 首擬王子師傅, 三月再除禁府都事, 旋遞, 十二月爲靑嚴都察訪. 辛亥, 中人嗛罷. 癸丑五月, 又爲禁府都事, 轉經歷. 甲寅, 遷司宰監主簿, 七月爲司憲府監察. 八月丁繼妣鄭夫人憂, 公年迫六十, 喪禮不懈. 旣葬又廬墓, 以終三年. 公晩年從仕, 只是爲親屈也. 旣親不待養痛恨, 終身不復以世事, 爲意閑居自頤者五六年, 以天啓辛酉閏二月二十八日卒, 得年六十五. 李察訪克扶, 公之莫逆友也. 詩以哀之曰 '中年共作弓驚鴈, 晩歲同爲雪後松.' 蓋歎公經歷險巇, 所守確如也. 公禀賦英邁, 器局凝重, 生長禮法之家, 奉承孝友之訓, 事親以誠, 律身以禮. 又登師門, 好學不倦, 講究義理之奧, 困齋稱之, 以間世人物. 嘗在襁褓失恃之日, 乳母之夫, 極盡育養之道, 故及其死也, 用同爨緦服之義, 白巾以哭之, 具棺歛以葬之, 此在公爲一瑣節, 而其不忘之恩, 亦可尙矣. 與兄弟湛樂無間, 欲同居一室, 畵同堂異室之制, 贊成公深加嘉勉. 至有毋忝爾所生之敎, 而遭禍亂未就. 居家接下, 必以正名分爲先. 門庭肅然有序, 人之出入者, 擧皆敬畏, 無敢犯分者. 自弱冠時, 已見重於先生長者, 其得賢師爲依歸. 初以思菴 栗谷所指敎者, 而中歲以後聲名日益著, 如鶴峯 東岡, 皆一代儒賢推許公不置. 至於金斗岩應南則待之以國士, 鄭愚伏經世爲方伯, 公有書謝知遇, 論儒學淵源前後處臬者, 欲與公議公事. 當其巡按之日, 輒以公留待之意, 預示于官文, 鄕人傳之, 以爲美談. 每念師友寃死之痛, 期以一洒不得回天, 日夜疚心. 與李漢陰德馨 韓久庵百謙, 及南公以恭 鄭公協, 有往復書牘備, 及伸卞之語. 又與景慕者, 議建困齋祠宇, 以俎豆之庸, 表尙德之誠, 其所以事之如一者, 吁亦至矣. 公初葬于州之錦城山北麓, 其後卜人皆謂兆宅不利. 歲丙申三月, 玄孫晩錫等, 移窆于大安東鱉岩上乾坐巽向之原. 距公歿爲九十六年. 配宜人李氏, 籍陽城, 生于丁巳五月十七日, 歿于庚申十二月二十日, 合祔公墓. 生三男曰 繪素武科通政伊川府使, 由素宣敎郞, 宜素文科禮曺正郞. 性簡伉與世抹摋, 而官未達, 人皆惜之. 府使生二男, 衤成 武科宣傳官, 襜通德郞, 一女李鳴衢進士. 宣敎生一男衵, 四女尹啇望 任暠 曺挺五 鄭櫶進士. 正郞乏嗣, 以襜後. 宣傳生一男斗正, 又有庶出子二人, 斗占斗平武科. 衵生三男, 斗興 斗鎭 斗應. 襜有庶出子四人, 斗遠 斗承武科 斗冑 斗盈. 斗正生二男, 晩錫 晩遇. 斗興生一男晩賢. 嗚呼! 斗冬嘗見公祭, 我曾王父文略曰 : "共趨鯉庭, 幾承詩禮, 同事師門, 麗澤是資, 同心同德之樂, 豈但兄兄弟弟之大義哉!云. 爾則斯可謂兄弟間知己者也." 三復斯言, 不覺潛然出涕. 今者晩錫持公疏章文迹及歷官資牒, 示斗冬, 要令撰次以傳後, 尤有所感於中者, 不敢以不文辭, 謹敍顚末以歸之. 崇禎丙子後八十年丙申閏三月日, 從曾孫生員斗冬謹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