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역/표점
- 국역
- 금성삼고(錦城三稿)
- 소포유고부록
- 조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 선교랑 보은현감 금암 나공 사실기(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宣敎郞報恩縣監錦巖羅公事實記)
금성삼고(錦城三稿) / 소포유고부록
조선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 행 선교랑 보은현감 금암 나공 사실기
공의 휘는 덕준(德峻)이고, 자는 대지(大之)이며, 성은 나 씨(羅氏)이고, 호는 금암(錦巖)이다. 조상은 고려 시대 감문위(監門衛) 상장군(上將軍) 나부(羅富)로부터 시작하여 이후 대대로 나주(羅州)를 본관으로 삼았고, 자손들은 고향을 벗어나지 않아 호남의 명망 있는 성씨가 되었다. 그 계통의 구체적인 것은 찬성공(贊成公)에 추증된 선고(先考)의 〈사실기(事實記)〉에 실려 있다. 선고는 나사침(羅士沈)으로, 중종 때 효자로 정려를 표창 받았다. 일찍이 이소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를 스승으로 모셔 학행(學行)으로 명성이 있었다. 벼슬은 이산 현감(尼山縣監)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여러 아들은 종훈(從勳)으로 여러 번 추은(推恩)되었다.
두 아내를 두었는데,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부사(府使) 윤언적(尹彦啇)의 따님이고, 광주 정씨(光州鄭氏)는 첨사(僉使) 정호(鄭虎)의 따님으로,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두 부인은 각자 아들 셋을 두어 육룡(六龍)이라고 일컬어졌으니 공은 그 둘째 아들이다.
공이 6살이 되었을 때 윤 부인이 세상을 뜨자, 후비 정 부인은 마치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길러 주었다. 공은 천성이 순수하고 아름다웠는데, 찬성공 또한 몸소 인륜에 독실하여 귀에 익고 눈에 젖었으니 가정에서 보고 감복한 것이 다만 글의 가르침뿐만이 아니었다. 나이 17~8세에 이미 고인의 학문에 뜻을 두어 세속에 휩쓸리거나 과거공부에 개의치 않았다. 아우 나덕윤(羅德潤) 금봉공(錦峰公)과 함께 날마다 서로 학업을 갈고 닦으며 형제를 지기(知己)로 삼았다. 미암(眉庵) 유 문절공(柳文節公)주 29)은 찬성공에게 이종형(姨從兄)이므로 그 문하에서 배우기를 청하여 선유들의 실마리를 얻어 들었다. 경저(京邸)주 30)에서 찬성공을 따르며 이름난 사람들 사이에서 두루 교유하였는데, 범애(汎愛) 유조인(柳祖訒), 정산(鼎山) 박동(朴洞), 사문(斯文) 신의경(申義慶)과 더불어 《예경(禮經)》을 강론하였고, 사암(思庵) 박순(朴淳)주 31), 율곡(栗谷) 이이(李珥)주 32)가 모두 인정하여 남쪽으로 돌아가는 공을 전송하며 "들으니 남쪽에 정개청(鄭介淸)주 33)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학행이 독실하여 남의 스승이 될 만하다고 하니 마땅히 종유하여 학업을 마치시오."라고 하였다. 율곡은 내사한 《주자어류(朱子語類)》주 34) 한 질을 전별품으로 주었다. 정개청은 호가 곤재(困齋)이다. 공이 고향으로 돌아와 주성 북쪽 대안동(大安洞)에 서재를 짓고 예를 갖춰 곤재에게 스승이 되어주기를 청하였다. 뜻을 같이하는 학자들과 함께 강의계(講義契)를 맺고, 절목은 향약을 더하거나 빼어 법으로 삼고 학령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규정주 35)을 준칙으로 삼았으니, 요컨대 학문을 닦고 힘써 행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곤재 선생이 늘 공을 애지중지하여 그를 추천하고 장려했던 말이 편지글에서 문답한 글에 나타나 있으니, "타고난 본성이 강하면서도 밝아 소견이 날로 발전하고 두렵고 위로됨이 모두 지극하다."라고 한 것, 또 "뜻이 성현의 공부에 돈독하여 전적으로 수양공부에 나아가 성명(性命)의 온전함을 구하니, 이것이 이른바 군자의 위기지학(爲己之學)이다."라고 한 것, 또 "그대처럼 고상하고 밝고 두려워할만한 이에게 감히 스스로를 크고 망령되이 높다고 하여 후생이 예의를 지켜 대우하는 것을 기대하겠는가. 그와 함께 의심스런 예의 문제에 대해 토론해보면 탄복하게 된다."라고 한 것들이다.
공은 돈후하고 정밀하며 자세하여 몸소 은혜롭고 자애로운 행동을 살펴 남들에게 추앙받았지만 그 스스로는 실례를 뉘우치는 뜻을 보였다. 이와 같은 사례가 매우 많으니, 모두 정 씨의 《우득록(愚得錄)》주 36)에 기록되어 있다. 집안에 간사한 부인이 유복자라 사칭하여 양자를 기르고자 도모한 일이 있었는데, 당시 찬성공이 막 호읍(湖邑)에 부임하여 공의 형제들이 그 일을 가지고 윤리와 기강을 근거로 소장을 올렸으나 오랫동안 지체되어 판결이 나지 않았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주 37)이 고을에 부임하여 거짓을 밝혀내 결단하며 "세상의 쟁송은 이익으로써 하는데, 그대들은 하늘의 이치로써 하니, 그대들은 진정 의로운 선비이다."라고 하고 마침내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이고 더불어 교유하였다. 성의 서쪽 대곡동(大谷洞)에 서원을 세우고 한훤(寒暄)주 38), 일두(一蠹)주 39), 정암(靜菴)주 40), 회재(晦齋)주 41), 퇴계(退溪)주 42) 등 다섯 분의 선생께 제사를 올려 사림(士林)으로 하여금 본보기로 삼게 했는데 실제 공의 형제가 의논하고 학봉이 지은 것이다.
기축년(1589) 겨울에 정여립(鄭汝立)의 옥사가 있었다. 정여립은 일찍이 거짓된 마음과 가식적인 행동으로 당세를 두루 속였다. 처음에는 율곡과 우계(牛溪) 성혼(成渾)주 43)에게 발을 들여 칭찬을 받고 인재로 뽑혀 자못 힘을 얻었으나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정여립은 비로소 마음과 얼굴을 바꾸어 도리어 율곡을 배척하고 비판하였다. 선조(宣祖)가 교서에서 "정여립은 오늘날의 형서와 같은 자이다.주 44)"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대개 조정의 의론이 어그러진 이래로 동서가 서로 배척함이 갈수록 격해지자 정철은 속이 좁고 괴팍하여 불평이 많았다. 또 곤재가 일찍이 정철이 주색에 빠지고 예법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여주 45) 세상의 도가 유폐될 것을 걱정했는데 이 때문에 정철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홍천경(洪千璟)과 양천경(梁千頃)은 향리에 살면서 행실이 경박하고 하지 못하는 일이 없어 사류의 축에도 끼지 못했던 자들이었는데 오직 정철만을 우러러보면서 곤재를 업신여김이 특별히 심하였다. 공의 형제가 곤재를 따라 공부를 하는 사람 중 가장 이름이 났기 때문에 질투를 받는 것 또한 심하였다. 정여립이 옥사를 일으키기에 이르자, 정철이 위관을 맡아 때를 틈타 없는 죄를 꾸미고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여러 사람을 함정에 빠뜨리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 정암수(丁巖壽), 홍천경, 양천경 등이 정철의 생각을 받들어 모함하는 상소를 지어 조야의 유명 인사 30여 명을 무고했는데 곤재도 그 속에 들어 있었다. 또 공의 부자의 이름을 들어 말하기를, "아무개의 아들 아무개는 정여립과 엄밀히 교유를 맺고 있다가, 화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알고는 죄 없는 사람들을 신원해 주는 글을 꾸몄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공의 형제들의 말을 날조하여 "쇠퇴한 세상에는 과거에 응시할 필요가 없다. 수년이 지나면 반드시 태평한 세상이 올 것이니 기다려라."라고 했으니 그 밖의 다른 말들도 흉악하고 참람하기 그지없었다. 공의 아우 나덕현(羅德顯)과 나덕헌(羅德憲)이 분통함이 심하여 정암수 등이 모인 장소에 가서 면전에서 그를 준엄하게 배척하였다. 상소가 들어가기에 이르자, 임금께서 진노하며 "역적들의 변란을 틈타 형체도 없는 말을 날조하여 몰래 사악한 상소를 올려 어진 재상과 이름난 벼슬아치들을 배척하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나라를 텅 비게 한 뒤에 그만둘 것이다. 이들은 반드시 간교한 사람들의 사주를 따른 것이다."라고 하고 정암수 등 10인을 잡아와 국문하도록 명하셨다. 정철은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더욱 속이고 진실을 가리는 계획을 세워 양사(兩司)와 태학생들을 부추겨 교장(交章)으로 구제하기를 힘써 '상소한 선비는 국문할 수 없다.'라고 말하게 하니 마침내 그 명령이 그치게 되었다. 옥사에 연루된 자들이 더욱 많아 향읍으로 하여금 죄인 무리, 홍천경, 품관 중 불량한 자들을 수소문하게 하였는데 유발(柳潑) 등의 무리가 그 사이에서 모함하기도 하였다.
경인년(1590) 여름에 곤재가 체포당하고 공의 부자 여섯 사람도 모두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정암수의 상소를 저지했다는 것을 도모했다는 것이 죄의 사안이었다. 임금께서 교서를 특별히 내려 "이름이 효자에 든 자는 용서하고, 증오를 쌓아 무고하게 끌어들인 자들은 모두 파직하라."라고 하셨다. 찬성공은 마침내 곧바로 용서받았지만, 공은 차율에 따라 부령으로 귀양 갔다. 여러 형제 중 어떤 사람은 변방 고을로 옮기고, 혹은 중도에 유배 갔다. 이때 죽음과 감옥에서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진실로 찬성공의 지극한 행동에 묵묵히 임금께서 마음속으로 감동함이 있어서였다. 곤재 또한 경원(慶源)으로 장배(杖配)되어 가는 길에 공의 처소에 들러 마주했는데 근심하는 낯빛이 없이 다만 《주역》을 강의할 것을 약속하였다. 얼마 후 곤재가 유배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유배지에서 위패를 만들어 곡하였다. 이듬해 임금께서 후회하고 국시(國是)가 안정 되자, 옥사를 주관한 정철이 강계(江界)에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또 이듬해 왜란이 일어나자 크고 작은 죄를 지어 귀양 간 사람들을 석방하라는 명을 내리셨는데 이에 공도 계사년(1593)에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갑오년(1594)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주 46)이 영의정이 되어 자격에 구애받지 않고 10가지 조목에 따라 선비를 취하여 발생한 난리에 방비를 해야 할 것이라는 건의를 청하고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주 47) 등 3인을 뽑았는데, 공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니 재상 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주 48)이 천거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망운(望雲)주 49) 감목관(監牧官) 겸(兼) 장모속사(掌募粟事)의 관직을 내렸다. 예전에는 임금께서 목관의 다스림이 허술할까 걱정하여 일찍이 대관(臺官)을 거친 자들을 등용하여 감목(監牧)으로 삼아 수령(守令)들을 규찰하고 왕래하면서 조사하도록 하였다. 또 당시에는 마음대로 둔전을 만들어 군대의 양식에 보충할 계획을 세웠으니 아예 사람을 뽑아 그 일을 주관하게 한 것이다. 전임 수령과 낭서(郎署)에 임명된 자들을 대부분 임명했으나 공은 초야에서 뽑아 임명했으니 어쩌면 공의 재주를 시험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듬해 서애 재상이 나라를 막는 대책을 세우는 일에 대하여 논계(論啟)를 올리라며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주 50)의 종사관으로 공을 취하도록 청하여 전년에 모은 곡식을 품자하여 연변의 여러 둔전에 파종 허가를 청하였는데, 이 일은 《서애유고》에 실려 있다. 이윽고 사포서(司圃署) 별좌(別坐)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찬성공의 나이가 70이 넘었기에 부모를 섬길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겨 사양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병신년(1596) 12월에 찬성공이 돌아가시자 상례를 치름에 예를 어김이 없었고 장례를 치를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들의 배가 갑자기 앞에 있는 강에 이르자 비록 매우 위급한 때를 당하나 슬픔을 느슨하게 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더욱 칭찬하였다. 기해년(1599) 봄에 상복을 벗었다. 그해 가을에 곤재의 원통함을 상소했지만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이윽고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발탁되었으나 관직에 나가기도 전에 그를 좋아하지 않은 자들에게 모함을 받았다. 공의 형제들은 스승의 죽음에 대해 슬퍼하기를 매우 원통해 하며 비록 난리 속 정신없는 가운데에서도 의리상 차마 잊을 수 없어 지하에 계신 분을 위해 한번 씻어주기를 바랬다.
그보다 앞서 을미년(1595)에 공의 아우 금봉공(錦峰公)이 처음 상소를 올려 바로잡으려 하였다. 비답에 "너희들의 의론이 지극하다. 마땅히 의논하여 처리하라."라고 하며 비변사에 명을 내리셨다. 재상 서애 유성룡이 회계(回啓)하고 애통해 하면서 애당초 옥사가 너무 지나친 이유를 아뢰고 또 정개청(鄭介淸)이 학술과 검박한 행동으로 자임하다가 우연히 한 편 지은 글로 인하여 몸을 망치기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이러한 원통함을 하소연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임금께서는 훗날 얼굴을 마주하고 의논하자고 답하는 데 그치셨다. 이듬해 큰형 나덕명(羅德明) 소포공(嘯浦公)이 하늘의 뜻을 감동시키고 인간의 마음을 맺는 도를 상소하여 기축년(1589)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의 신원을 청하였고 이에 이르러 또한 공의 상소가 있었다. 대개 큰 옥사가 있은 뒤에는 사람의 마음이 두려워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공의 형제는 위기를 피하지 않고서 소리를 내어 진심을 드러내 앞뒤로 서로 이어 거의 임금께서 생각을 되돌리기를 바랐지만 임금께서는 속으로 어렵게 여기셔서 여전히 사림(士林)들의 섭섭함을 풀어주지 않으셨다. 사람들 중에 정철을 보호하려는 사람이 또 공의 집안을 원망하여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지만 공은 어려움을 겪고서도 일찍이 근심과 수모 때문에 뜻을 꺾지 않은 채 평탄하게 일을 처리함이 이와 같았다.
공은 가정 계축년(1553) 2월 3일에 태어나 52년을 살았다. 만력 갑진년(1604) 8월 28일에 세상을 떠나 남영산(南榮山) 간좌(艮坐) 곤향(坤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인조 때 아들 나위소(羅緯素)가 원종(原從)에 참여하여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추증되었고, 현종(顯宗) 때 동추(同樞)에 오르자 다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진실하고 순박하며 덕을 갖추었고 순수함이 넘쳐 두루두루 교제를 하면서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고 정도를 따르면서도 작은 신의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화한 기운과 온후한 기풍이 있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바라보게 했음을 가히 알 수가 있다. 공의 뜻은 자공(子貢)이 풍부함과 절약 사이에 마음을 두었기에 안자(顔子)와 증자(曾子)에 미치지는 못했다고 생각하여 어렸을 때부터 집안 식구들의 생산 작업을 일삼지는 않았다. 그는 학문을 통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고 의를 강마하여 밝힐 수 있다고 여겼다.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로부터 사서(四書)를 경유하여 육경(六經)에 통달했고 또 여러 책에 두루 통하였는데 스승과 벗들을 섬기며 종유하여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을 수양하였다. 여러 아들에게 글을 남김으로써 가르쳤으니 마음을 보존하고 체득하며 몸을 이기고 형체를 실천하는 노력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여 그것에 힘쓰라고 했으며 분수에서 벗어나고 몸을 영화롭게 하거나 집에 편안히 거처하면서 스스로 편하게 살려는 부끄러움에 대해서는 신신당부하면서 경계하고 조심하도록 하였다. 종신토록 효친의 뜻에 성의를 다하며 "효도란 천경(天經), 지의(地義), 강상(綱常), 윤기(倫紀)의 중한 것과 큰 것이요 모든 행동의 근원이며 사람 도리의 늘 해야 하는 것이니, 학자들은 이를 배울 따름이고 행하는 사람은 이것을 행할 뿐이다. 효자의 집에서 충신을 구한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은 일찍이 어머니를 잃어 평생의 한으로 여겨 영리에는 생각을 끊고 오로지 부모님을 모시는 데 뜻을 두었다. 타인을 만날 때도 집안에서 사적으로 만나지 않았으며 집안에서 부모님께 음식을 올릴 때에도 그것을 나누어 드려야 되는지를 여쭈어 부모님의 뜻을 받들었다. 찬성공이 돌아가시자, 정 부인(鄭夫人)은 공의 집에 거처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번은 별좌(別坐)의 집에서 거처하는 것이 편안하다고 늘 말하였다.
공이 보은 현감(報恩縣監)에 임명되었을 때 아우 나덕신이 막 무장 현감(茂長縣監)이 되었으니 영화로움과 부모 모양이 지극하다고 소문이 났으며 공은 능히 즐거운 마음을 갖고 왕래하고자 하였다. 고을 사람들 중 자손을 가르치고 두 번째 어머니를 모시는 사람들은 반드시 "나보은(羅報恩)을 모범으로 삼아라."라고 말하였다. 선조의 제사가 있을 때면 반드시 3일 전부터 소복을 입고 조용히 거처하면서 사람을 만나지 않고 제사를 지냈다. 일찍이 옛사람을 사모하여 형제들과 함께 살며 당(堂)은 같지만 실(室)은 달리하려는 제도를 계획하여 장차 의전(義田)주 51)을 만들고자 했으나 생각지 못한 화를 당한데다가 다시 나라의 난리까지 더해져 모든 뜻을 성취하지는 못했지만 종족을 극진히 사랑하고 정다운 마음이 망운에 있었다.주 52) 심한 흉년을 만나 백성이 매우 곤궁해지자 공은 장랑(長廊)을 짓고 일가의 자제들을 모두 모아 기근에서 구제하였으며 또 그들을 위해서 학문을 권장하니, 전하는 자들이 미담으로 삼아 칭찬하였다. 그의 실제 행동이 집안에서 드러난 것이 대략 이와 같았다. 처음에는 장수 황씨(長水黃氏) 어모장군(禦侮將軍) 황호(黃顥)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니 영의정(領議政)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의 6세손으로, 신해년(1551) 8월 9일에 태어나 45년을 누리고 을미년(1595)에 세상을 떠났다. 다시 문화 유씨(文化柳氏) 유렴(柳濂)의 따님에게 장가를 들었으니 우의정(右議政) 문간공(文簡公) 유관(柳寬)의 8세손으로 정축년(1577) 7월 22일에 태어나 30년을 누리고 병오년(1606)에 세상을 떠났다. 기일은 같은 정월 10일이다. 모두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고 모두 공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다섯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나찬소(羅纘素)는 선무랑(宣務郞)를 지냈고, 나계소(羅纘素)는 무과에 급제하여 첨중추(僉中樞)를 지냈고, 나위소(羅緯素)는 문과에 급제했지만 원한을 품은 사람들의 시기를 받아 고을에서 고생을 하다가 만년53)53) 만년 : 원문 '질대년(秩大年)'은 대년질(大年秩)과 같은 장수하여 맡은 직책을 말한다. 곧 매년 정월에 80세 이상인 관원과 90세 이상인 서민(庶民)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인데, 여기에서는 만년에 벼슬함을 표현한 것이다.
에 동중추(同中樞)를 지내고 좌참찬(左參贊)에 추증되었다. 공의 첫째 딸은 주부(主簿) 김잡(金磼)에게 시집가서 절의를 지키다 죽어 정려로써 표창 받았고, 둘째는 선교랑(宣敎郎) 최광헌(崔光憲)에게 시집갔다. 이들은 황 씨가 낳았고, 나치소와 나경소는 유 씨가 낳았다. 또 양자로는 나함소(羅緘素)가 있다.
나찬소는 아들 하나와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 나겁(羅衱)은 선교랑(宣敎郎)을 지냈고, 딸은 김훈(金壎)에게 시집갔다. 나계소는 아들이 없어 동추(同樞)의 셋째 아들 나진(羅袗)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위소는 아들 셋과 딸 셋을 두었는데, 세 아들 중 나염(羅袡)은 호조정랑(戶曹正郎)을 지냈고, 나금(羅襻)은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냈고, 나진(羅袗)은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냈다. 첫째 딸은 생원 김만수(金晩壽)에게, 둘째 딸은 이만종(李萬鍾)에게, 셋째 딸은 서령(署令) 정기수(鄭岐壽)에게 시집갔다. 김잡은 후손이 없고, 최광헌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 최명해(崔鳴海)와 최익해(崔翼海)가 있는데, 최익해는 생원시에 합격했고, 딸은 조종경(趙宗慶)에게 시집갔다. 나치소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는데, 장남 나기(羅褀)는 통덕랑(通德郎)을, 나겸(羅衤兼 )은 선교랑(宣敎郎)을, 나균(羅袀)은 수작(壽爵)으로서 부호군(副護軍)을, 나형(羅衤瑩 )은 통덕랑을 지냈다. 두 딸은 강석종(姜碩宗), 정두형(鄭斗亨)에게 각각 시집갔다. 나경소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나적(羅襀)은 통덕랑을 지냈고, 나단(羅襢)과 나선(羅䙋)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딸은 이진교(李震嶠)에게 시집갔다. 나함소는 딸을 하나 두었는데 양변(梁忭)에게 시집갔다. 나겁은 나두천(羅斗天)을 낳았는데,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으며, 둘째는 나두우(羅斗宇)이다. 나염은 나두삼(羅斗三)을 낳았는데 현감을 지냈으며, 둘째 나두장(羅斗章)은 교관을 지냈다. 나반은 아들이 없어 나두장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진의 첫째 나두춘(羅斗春)은 좌랑을 지냈고, 나두하(羅斗夏)와 나두추(羅斗秋)는 모두 통덕랑을 지냈으며, 나두동(羅斗冬)은 생원에 합격했다. 나기는 나두규(羅斗奎), 나두서(羅斗緖), 나두집(羅斗集), 나두홍(羅斗弘)을 낳았다. 나겸은 두회(羅斗會)를 낳았다. 나균은 자식이 없어 나두선(羅斗璇)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형은 나두선, 나두종(羅斗琮)을 낳았다. 나적은 나두남(羅斗南)을 낳았는데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차남 나두창(羅斗昌), 나두형(羅斗亨)은 모두 통덕랑을 지냈다. 나단은 아들이 없어 나두형을 데려다 후사로 삼았다. 나선(羅䙋)은 첫째 나두원(羅斗元), 둘째 나두문(羅斗文)을 낳았는데 모두 통덕랑을 지냈고, 셋째 나두도(羅斗度)를 낳았다. 나두천은 나만형(羅晩亨)을 낳고, 나두우는 나만성(羅晩成)을 낳았는데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을 지냈다. 나머지 내외의 자손들 모두 거론할 수 없다,
아! 공의 재주와 학업과 품행과 도의로써도 불행한 때를 만나 세상에 펼쳐보지도 못하셨으며, 돌아가신 지 또 백여 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장차 이름이 묻혀 전하여지지 않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나의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동추(同樞)의 따님이다. 내가 일찍이 작은 외삼촌을 섬기고 또 여러 내종형제를 종유하여 매번 선조의 옛일에 대해 들었는데 그 말들이 마치 어제 들은 것과 같다. 내외증손들 중 뒤에 죽은 자들로 하여금 다만 몇 명 있지만 남은 사람들 또한 많이 늙었다. 이에 나두동 씨가 세월이 장차 멀어질수록 더욱 증거가 남아 있지 않을 것을 개탄하여 사적들 가운데 여러 문적에서 뒤섞여 나오는 것을 모으고 또 집안에서 오랫동안 들어왔던 이야기를 가지고 증거로 삼아 후세에 볼 수 있게 도모하고자 고개 넘어 천리에 부쳐 나로 하여금 다듬고 수정하여 책으로 만들게 하였다. 삼가 이 뜻에 감격하여 감히 보잘 것 없는 말로 거절할 수가 없기에 일의 본말을 차례대로 서술하여 〈사실기〉로 삼는다.
숭정(崇禎) 정축(丁丑) 후(後) 85년인 임인년(1722) 3월 16일에 외증손 전 참봉(參奉) 팔계(八溪) 정중원(鄭重元)은 삼가 쓰다.
- 주석 29)미암(眉庵) 유 문절공(柳文節公)
-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을 말한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인중(仁仲)이고, 호가 미암(眉巖)이며, 해남 출신이다.
- 주석 30)경저(京邸)
- 조선 시대에 각 지방 관아에서 그 지방의 공물(貢物), 입역(立役) 등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서울에 둔 사무소를 말한다.
- 주석 31)사암(思庵) 박순(朴淳)
- 1523~1589. 자는 화숙(和叔)이고, 호는 청하자(靑霞子), 사암(思菴)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박순은 53세에 이이가 40세였고, 1575년 12월에 3회의 왕복 서신을 통해 성리학적 논쟁을 한 바 있다.
- 주석 32)율곡(栗谷) 이이(李珥)
- 1536~1584. 자는 숙헌(叔獻)이고, 호는 율곡(栗谷)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저술로는 《성학집요(聖學輯要)》, 《동호문답(東湖問答)》, 《격몽요결(擊蒙要訣)》, 《율곡문집(栗谷文集)》 등이 있다.
- 주석 33)정개청(鄭介淸)
- 1529~1590. 자는 의백(義伯)이고, 호는 곤재(困齋)이며, 나주(羅州) 출신이다. 저서로 《우득록(愚得錄)》이 있다.
- 주석 34)주자어류(朱子語類)
- 송대 유학의 집대성자인 주희가 강학하면서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어록 모음집이다. 모두 140권이다.
- 주석 35)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 규정
- 주희(朱熹)가 만든 백록동서원의 규약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부자유친 등 오륜의 조목, 둘째는 널리 배운다는 '박학지(博學之)' 등 학문하는 순서, 셋째는 말을 충직하고 진실되게 하라는 '언충신(言忠信)' 등 수신(修身)의 요결, 넷째는 의리를 지키고 이익을 꾀하지 말라는 '정기의 불모기리(正其義 不謀其利)' 등 사무 처리의 요결, 다섯째는 자신이 원치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朱子大全 卷74 雜著 白鹿洞書院揭示》
- 주석 36)우득록(愚得錄)
- 정개청(鄭介淸)의 시문집으로 5권 4책이다.
- 주석 37)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 1538~1593.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가 학봉(鶴峯)이다. 안동 임하(臨河) 출생이며 퇴계 이황의 문인이다.
- 주석 38)한훤(寒暄)
-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을 말한다. 자는 대유(大猷)이고, 호가 훤당이다.
- 주석 39)일두(一蠹)
- 정여창(鄭汝昌, 1450~1504)을 말한다. 자는 백욱(伯勗)이고, 호가 일두이다.
- 주석 40)정암(靜菴)
- 조광조(趙光祖, 1482~1519)를 말한다. 자는 효직(孝直)이고, 호가 정암이다.
- 주석 41)회재(晦齋)
- 이언적(李彦迪, 1491~1531)을 말한다. 자는 복고(復古)이고, 호가 회재이다.
- 주석 42)퇴계(退溪)
- 이황(李滉, 1501~1570)을 말한다. 자는 경호(景浩)이고, 호가 퇴계이다.
- 주석 43)우계(牛溪) 성혼(成渾)
- 1535~1598. 자는 호원(浩源), 호는 묵암(黙庵), 우계(牛溪)이다.
- 주석 44)오늘날의 …… 자이다
- 스승을 저버리고 배반한 제자를 가리킬 때 흔히 거론하는 인물이 형서(邢恕)이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형서의 자는 화숙(和叔)으로, 《근사록(近思錄)》 권9 치법류(治法類)에 자기의 스승인 정명도(程明道)를 통유(通儒)요, 전재(全才)라고 극찬한 말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보주(補註)에 "형서가 명도에 대해서는 이처럼 추앙하며 심복하였지만, 명도의 아우인 이천에 대해서는 아마도 불만스러운 생각이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함께 배운 벗들이 그가 스승을 배반하였다고 많이 꾸짖게 되었던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 주석 45)자기 …… 해석하여
- 원문 '거제(蘧蒢)'는 악한 병의 이름이다. 원래는 죽석(竹席)의 이름이었는데, 그것으로 둥근 곳집〔囷〕을 만들면, 마치 종기가 나서 구부릴 수 없는 사람과 같이 추한 사람이 된다고 하여 나쁘게 만듦을 이르는 말로 쓰였다.
- 주석 46)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 1542~1607. 자는 이현(而見)이고, 호는 서애(西厓)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였다.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여 국난을 극복하는데 기여했다.
- 주석 47)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
- 1552~1615. 자는 명길(鳴吉), 호는 구암(久菴)이다.
- 주석 48)두암(斗巖) 김응남(金應南)
- 1546∼1598. 자는 중숙(重叔)이고, 호는 두암(斗巖)이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임금이 피난길에 오르자 유성룡의 천거로 병조판서 겸 부체찰사(兵曹判書兼副體察使)가 되었다. 이듬해 1593년 이조판서로서 임금을 따라 환도, 1594년 우의정, 1595년 좌의정이 되어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임진왜란 후의 혼란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 주석 49)망운(望雲)
- 전라남도 영광의 망운면을 말한다.
- 주석 50)이순신(李舜臣)
- 1545년~1598. 자는 여해(汝諧)이고,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이다. 옥포 대첩, 사천포 해전, 당포 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하였다.
- 주석 51)의전(義田)
- 문중의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 마련하는 전지(田地)이다.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처음 명명한 것으로, 범중엄은 한창 현달했을 때에 부곽(負郭)의 좋은 토지 천묘(千畝)를 마련하고 이를 의전이라 호칭하여, 여기에서 수확한 재물로 가난한 종족들을 구제하였다. 《宋史 卷310 范仲淹列傳》
- 주석 52)정다운 …… 있었다
- 원문의 '망운(望雲)'은 타향에서 멀리 떨어진 부모나 형제, 친지를 그리워할 때 쓰는 표현이다.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태항산(太行山)에 올라 멀리 남쪽으로 흰 구름 하나가 떠가는 것을 보고는, 저 구름 아래에 부모님이 계실 것이라면서 한참 동안 슬퍼하다가 구름이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떠났다는 고사가 있다. 《新唐書 卷115 狄仁傑列傳》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宣敎郞報恩縣監錦巖羅公事實記
公諱德峻, 字大之, 姓羅氏, 號錦巖. 自上祖麗朝監門衛上將軍富以來, 世貫羅州, 子孫不出鄕, 爲湖南望姓. 其系具在先考贈贊成事實記. 先考諱士忱, 中廟世, 旌孝子之閭. 嘗師履素齋李氏仲虎, 以學行聞, 官尼山縣監, 追爵左贊成, 用諸子從勳, 累推恩也. 兩妣坡平尹氏府使彦啇之女若光州鄭氏僉使虎之女, 俱贈貞敬夫人. 兩夫人各有丈夫子三人, 有六龍之稱, 公其第二也. 生六歲, 尹夫人歿仰, 後妣鄭夫人, 撫育如所生. 公天資純美, 贊成公又躬篤人倫, 濡染耳目, 有得於觀感家庭者, 非特文字之敎而已. 十七八歲, 已有志古人之學, 不以流俗擧子事屑意. 與其弟德潤錦峰公, 日相砥礪爲業, 兄弟爲知己. 眉巖柳文節公於贊成公姨兄也, 請學其門, 得聞儒先緖論. 從贊成公于京邸, 遍遊名流間, 與柳汎愛祖訒 朴鼎山洞 申斯文義慶, 講論禮經. 朴思庵淳 李栗谷珥, 皆許可之, 送公南歸謂曰 : "聞南中有鄭介淸者, 學行篤實, 可爲人師表, 宜從遊卒業也." 栗谷以內賜朱子語類一帙爲之贐. 鄭介淸乃號爲困齋者也. 公旣還鄕, 築書齋于州城北大安洞, 以禮請困齋爲師. 與同志學子, 結講義契, 節目以增損鄕約爲法, 學令以白鹿洞規爲準, 要以講磨力行, 困齋常敬重之. 其推獎之言, 發於簡牘答問者有曰 : "資稟剛明, 所見日進, 畏慰俱極." 又曰 : "志篤聖賢, 功專進修, 以求必得夫性命之全, 是所謂君子爲己之學." 又曰 : "如賢高明可畏, 其敢自大而妄尊, 待以待後生之禮乎. 至於與之論疑禮則歎服." 公敦厚精詳, 躬督恩愛之行, 能善推於人, 而示其自悔失禮之意, 凡若此類, 甚多, 俱在鄭氏愚得錄. 門有陰譎婦人, 詐稱遺孕, 謀育假兒, 時贊成公方任湖邑, 公兄弟以其事, 稟據倫紀, 申狀卞之事, 久滯未決, 金鶴峰誠一莅州, 燭其僞斷之曰 : "世之爭訟以利, 而君等所爭爲天理, 君等眞義士也." 遂心許之, 與爲交. 城西大谷洞創書院, 俎豆寒暄 一蠹 靜菴 晦齋 退溪五先生, 令士林有所肯式, 實公兄弟奉議, 鶴峰所經紀也. 己丑冬, 有鄭汝立獄事. 汝立者嘗僞情飾行, 以博洽欺當世, 初托迹於栗谷及成牛溪渾, 吹獎汲引, 頗得其力. 栗谷旣歿, 汝立又始改頭換面, 反攻斥栗谷. 宣廟之敎所云, 汝立今之邢恕者, 此也. 蓋自朝議睽乖以來, 東西互相排擯, 轉加層激, 鄭澈褊愎積不平. 又困齋嘗以澈眈荒酒色, 蘧蒢禮法, 惧流弊世道, 爲澈所銜. 洪千璟 梁千頃等, 居鄕里, 輕佻無行, 不齒士類. 惟澈俯仰, 嘲侮困齋特甚. 公兄弟從困齋遊, 最有名稱, 故被媢嫉亦甚. 及汝立獄起, 澈爲委官, 乘時羅織, 凡異諸己者, 靡不待以機穽. 丁巖壽 洪千璟 梁千頃等, 承望投疏誣陷朝野名流三十餘人, 困齋亦入其中. 且擧公父子之名曰 : "某之子某等, 爲汝立密交, 知禍及己, 譸張伸救." 又捏公兄弟曰 ; "不必應擧衰世, 過數年, 須待太平. 其他說話, 凶慘罔極." 公之弟德顯 德憲等, 忿忿甚, 往巖壽等會所, 面折之甚峻. 及其疏入, 上震怒曰 : "爲乘逆賊之變, 捏造無形之語, 陰陳邪譎之疏, 賢相名卿, 無不指斥, 必欲空國而後已, 此必聽奸人指嗾." 命拿岩壽等十人鞫之. 澈恐事覺, 益爲欺蔽計, 囑兩司及太學生等, 交章力救, 謂之疏儒不可鞫問, 遂得還寢其命. 獄又益多株累, 令鄕邑搜問罪人黨與千璟與品官不逞者, 柳潑輩媒蘖其間. 庚寅夏, 困齋被逮, 公父子六人, 亦幷就理, 以謀沮岩壽疏爲罪案, 上敎特曰: "名參孝子者, 原之, 積嫌誣引者, 革之." 贊成公遂卽蒙宥, 公用次律, 竄富寧, 諸兄弟或徙邊邑, 或配中道. 當是時, 得免就殞桁楊, 實賴贊成公至行, 有所默感上衷也. 困齋亦杖配慶源路, 過公所相對, 無慽慽色, 只以講易爲約. 俄聞困齋歿于配所, 爲位哭之. 明年, 上心追悔, 國是乃定, 主獄者澈, 栫棘江界. 又明年, 當倭亂, 命釋大小竄謫人, 公乃於癸巳赦還. 甲午, 柳西厓成龍爲首相, 建請勿拘資格, 以十條取士, 以備撥亂之用, 選韓久菴百謙等三人, 而公居其一, 斗巖金相應南薦也. 初授望雲監牧官兼掌募粟事. 前時, 上慮牧政虛疏, 嘗命用曾經臺官者, 爲監通糾守令, 往來撿察, 又時當搶攘設屯田, 爲補軍食計, 擇人幹其事, 前任守令郞署者, 率多見差, 公自草野被掄爲任, 蓋欲試公才也. 明年, 西厓相論啓防守措置事, 請令統制李舜臣從事官取公. 前年所聚穀, 以資沿邊諸屯播種, 語在西厓遺稿. 尋除司圃署別坐, 時贊成公年逾七旬, 以事親日短, 辭不就. 丙申十二月, 丁贊成公憂, 執喪, 無違禮, 旣葬, 廬墓下. 丁酉, 倭舡猝到前江, 雖當顚沛, 不弛哀慽, 人益稱之. 己亥春, 服闋. 是秋上困齋訟寃疏, 不得命. 已而, 擢拜報恩縣監, 未之官, 爲不悅者所嗛. 公兄弟嘗痛師至寃, 雖在亂離遑遑之中, 義不忍忘, 願爲泉壤一洒之. 先是乙未年間, 公之弟錦峰公, 始陳疏卞之, 批曰 : "爾等之論, 至矣. 當議處." 下備邊司. 西厓相回啓痛陳當初獄事, 多濫之由, 且言鄭介淸以學術行檢自任, 而因偶然一篇之箸論, 以至滅身, 宜此訴冤云云. 答以後當面議而止. 其明年, 伯氏德明嘯浦公, 上疏言感天意結人心之道, 而請伸己丑寃死, 至是又有公疏. 蓋大獄之後, 人心惴惴未息. 公之兄弟, 不避危機, 倡聲瀝血, 前後相繼, 庶幾有回天之望, 而上意持難, 未見施士林憾之. 人之護澈者, 又怨公家不置, 而公經歷險難, 未嘗以患辱挫其意, 處之夷如也. 公生以嘉靖癸丑二月三日, 得年五十二, 萬曆甲辰八月二十八日歿, 葬州南榮山艮坐坤向之原. 仁廟世, 以子緯素參原從追, 贈承政院左承旨, 至顯廟世, 又以躋同樞, 故加贈戶曹參判. 公稟性眞醇, 德宇粹盎, 通而不汙, 貞而不諒, 和順之氣, 溫厚之風, 令人望之, 可知也. 其志嘗以爲子貢留心於豊約之間, 故不及於顔曾也, 自少時, 不以家人生産作業爲事. 其學以爲氣質可以變化, 義理可以講明. 自小學家禮, 由四書達六經, 又以博通群書, 從事師友, 以修其可願也. 有訓諸子遺文, 以存心 體認 克己 踐形之功, 眷眷焉勸勉之, 以分外 榮身 居室 自便之恥, 申申焉, 警飭之. 終致意於孝親之意曰 : "天經 地義 綱常 倫紀之重且大者, 而百行之源, 人道之常, 所以學之者, 學此而已, 行之者, 行此而已, 求忠臣於孝子之門者, 此也." 公以早違慈顔, 爲平生恨, 絶念榮利, 專意奉養. 凡遇物, 不私於家, 獻于親庭, 聽其分與, 以承志意. 贊成公旣卒, 鄭夫人處公家爲多, 嘗言處別坐家, 得心身俱安. 公之除報恩也, 弟德愼方爲茂長, 致榮養而聞, 公得縣決意欲從往. 鄕人有訓子孫奉繼母者, 必曰以羅報恩爲法也. 遇先忌, 必前期三日素服, 靜處不接人, 以行祀事. 嘗慕古人, 兄弟同居畫同堂異室之制, 且營義田, 中罹奇禍, 加以亂離, 齋志未就, 愛宗族克盡, 情款在望雲. 値歲歉甚, 人民顚連, 公作長廊, 多聚一家子弟, 以濟其飢, 且爲之勸學, 傳者稱爲美談. 其實行之著于家, 大略如此. 初聘長水黃氏禦侮將軍諱顥之女, 領議政翼成公喜之六世孫也. 辛亥八月九日生, 四十五而歿于乙未. 繼娶文化柳氏諱濂之女, 右議政文簡公寬之八世孫也. 丁丑七月二十二日生, 三十而歿于丙午. 忌日同正月十日. 幷贈貞夫人, 葬皆祔公壟. 有五男二女, 曰纘素宣務郞, 繼素武科僉中樞, 緯素文科, 爲怨家所中落拓州郡, 秩大年同中樞, 贈左參贊. 女長適主簿金磼, 節死旌閭, 次適宣敎郞崔光憲, 黃氏出也, 曰緻素 經素, 柳氏出也. 又有側子緘素. 贊素一男, 衱宣敎郞, 一女適金壎. 繼素無子, 取同樞第三子袗爲嗣. 緯素三男, 袡戶曺正郞, 襻成川府使, 袗禁府都事. 三女長適生員金晩壽, 次適李萬鍾, 次適暑令鄭岐壽. 金磼無后. 崔光憲二男, 鳴海 翼海生員, 一女適趙宗慶. 緻素四男, 褀通德郞, 衤兼 宣敎郞, 袀壽爵副護軍, 衤瑩 通德郞. 二女適姜碩宗 鄭斗亨. 經素三男, 襀通德郞, 襢 䙋文科掌令, 一女適李震嶠. 緘素一女, 適梁忭. 衱生斗天武科縣監, 斗宇. 袡生斗三縣監, 斗章敎官. 襻無子, 取斗章爲嗣. 袗生斗春佐郞, 斗夏 斗秋 皆通德郞, 斗冬生員. 褀生斗奎 斗緖 斗集 斗弘. 衤兼 生斗會. 袀無子, 取斗璇爲嗣. 衤瑩 生斗璇 斗琮. 襀生斗南武科宣傳官, 斗昌 斗亨, 皆通德郞. 襢無子, 取斗亨爲嗣. 䙋生斗元 斗文, 皆通德郞, 斗度. 斗天生晩亨, 斗宇生晩成, 文科持平. 自餘內外玄雲, 不可悉擧. 嗟乎! 以公之才學行誼, 遭時不幸, 未能有施于世, 歿且百有餘歲, 將名凐滅而無傳, 豈不悲哉! 重元先母, 同樞女也. 重元嘗逮事仲舅, 且從諸內兄, 每聞稱說先世故事, 其言若前日聞, 令內外曾孫之後死者, 只有若而人亦旣老矣. 迺者斗冬氏有慨於世將愈遠而愈無徵也, 裒聚事蹟之雜出諸文籍者, 證以家中舊聞, 啚所以垂示後世, 寄來嶺外千里, 使重元磨正成編. 竊感是意, 不敢以鹵莽辭, 敍次本末爲事實記. 崇禎丁丑, 後八十五載壬寅季春旣望, 外曾孫 前參奉 八溪鄭重元, 謹述.